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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95화. 원본명 버튼과 분실물 보드의 소년 일러스트

194-195화. 원본명 버튼과 분실물 보드의 소년

194화. 원본명 버튼

끼이이익—!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틈 사이로 시커먼 금속 끝이 비집고 들어왔다. 기록 대리인들이 휘두르는 검은 우산의 끝촉이었다. 날카로운 강철이 문을 긁어대며 소름 끼치는 금속음을 냈다. 마치 칠판을 손톱으로 긁는 소리가 고막 안쪽까지 파고드는 기분이었다.

“이거 유료 서비스 아니었어? 서비스가 너무 저돌적인데.”

나는 빈정거림을 방어기제 삼아 아이를 내 등 뒤로 바짝 끌어당겼다. 엘리베이터 문은 기록 대리인들의 우산을 짓씹으며 억지로 맞물려 닫혔다. 쾅, 하는 진동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눈앞에는 다섯 개의 황동 버튼이 있었다.

[B4] [0] [반송] [보호자] [원본명]

손가락이 본능적으로 맨 아래, [원본명] 버튼으로 향했다. 저걸 누르면 이 지긋지긋한 미궁의 답이 나올 것 같았다. 거울 속에서 나를 닮은 얼굴로 ‘버리지 마’라고 말하던 아이의 정체, 그리고 내 이름에 얽힌 기괴한 기록들까지.

하지만 손가락 끝이 황동 버튼에 닿기 직전, 귓가를 때리는 문태식의 잔향이 나를 멈춰 세웠다.

—네가 그 이름을 기억해내는 순간, 그 아이는 다시 시스템에 잡힌다. 기억은 곧 소유니까.

“……도윤 씨, 멈춰요.”

옆에서 윤서하가 내 손목을 낚아챘다. 평소보다 힘이 없었지만,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감각은 여전했다. 푸른 헌터 라인에 묶여 벽으로 끌려갈 뻔한 여파인지 그녀의 안색은 창백했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수사관의 그것처럼 예리하게 빛났다.

“버튼 주위의 마력 흐름이 비정상적이에요. 특히 그 [원본명] 버튼…… 누르는 순간, 우리가 가진 데이터의 출력값이 강제로 고정될 겁니다. 확정된 데이터는 수정할 수 없어요. 지금은 때가 아니에요.”

“서하 씨 말이 맞아요. 아, 코 따가워. 냄새가 너무 지독해.”

반가온이 코를 킁킁거리며 [반송] 버튼 쪽을 가리켰다. 그의 미간이 한껏 찌푸려져 있었다.

“그 버튼, 낡은 비닐우산이 썩어가는 냄새가 나요. 왜 장례식장 구석에 버려진 아이들 물건에서 나는 그런 쾨쾨한 냄새 있잖아요. ‘폐기’라고 적힌 붉은 라벨지가 타는 냄새도 섞여 있고…… 저건 절대로 누르면 안 될 것 같아요. 기분이 너무 나빠.”

반가온의 후각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 [반송]은 아이를 다시 그 기괴한 시스템의 부품으로 돌려보내는 선택지임이 분명했다.

나는 뒤에서 내 옷자락을 꽉 쥐고 있는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아이는 고개를 숙인 채 몸을 떨고 있었다. 거울 속에서는 내 어린 시절 모습이었지만, 지금 내 손에 닿는 감촉은 그저 겁에 질린 조그만 생명체일 뿐이었다.

“이름…… 묻지 마세요. 알려고 하지 마세요.”

아이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름을 부르면, 아저씨가 나를 가져가는 거잖아요. 그럼 난 다시 그 창고로 가야 해요.”

심장이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이름이 곧 소유이고, 소유가 곧 관리 대상이 되는 이곳의 규칙. 문태식이 왜 그렇게 내 원본명을 숨기려 했는지, 왜 아이를 등록하지 말라고 했는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녀석의 머리칼 위에 투박하게 손을 올렸다.

“알았어. 안 물어봐. 이름 같은 거 몰라도 돼.”

나는 [원본명] 버튼에서 손을 뗐다. 대신 녀석이 쥐고 있는 내 옷자락의 팽팽한 긴장감, 녀석의 밭은 숨소리, 그리고 내 손바닥에 전해지는 희미한 체온을 머릿속에 각인시켰다.

데이터상의 이름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내 옆에 실재하는 감각. 만약 시스템이 ‘기억’을 비용으로 요구한다면, 나는 이 살아있는 감촉을 기억하기로 했다. 그것이 이 불합리한 게임에서 내가 지불할 감정적 비용이었다.

그때, 엘리베이터 안의 공기가 일렁였다.

지지직, 거리는 노이즈와 함께 엘리베이터 거울과 황동 버튼, 그리고 녹슨 바닥판에서 겹겹이 쌓인 과거의 소리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나의 고유 스킬, ‘잔향청취’가 의지와 상관없이 폭주하듯 정보를 쏟아냈다.

—태식아, 너 미쳤어? 이런 애를 어떻게 보호자도 없이 등록해!

—조용히 해. 이건 내가 책임져. 이 아이의 ‘원본명’만 안 눌리면 시스템도 못 건드려.

—하지만 이미 기록 대리인들이 냄새를 맡았어. 네가 이 아이를 데려온 게 처음이 아니라는 걸 알면……!

젊은 시절의 문태식,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여자의 다급한 목소리. 여자의 목소리는 묘하게 낯익으면서도 서글픈 울림을 담고 있었다.

—도윤아, 여길 봐. 버튼을 누르지 마. 이름은 버리는 거야. 그래야 네가 살 수 있어.

어린 시절의 내가 여기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필사적으로 내 이름을 지우려 했다. 과거의 파편들이 거울 속에서 번쩍이다 사라졌다.

[보호자] 버튼과 [0] 버튼이 번갈아 가며 깜빡였다. [보호자]를 누르면 나나 윤서하 중 누군가가 이 아이의 관리 책임을 지고 묶이게 될 것이고, [0]을 누르면 다시 그 기괴한 행정 절차의 굴레로 돌아가게 될 터였다.

어느 쪽도 정답이 아니었다. 시스템이 내민 선택지는 전부 함정이었다.

“정상적인 경로로는 답이 없단 소리군.”

나는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내 인생에 정공법이 어울린 적은 거의 없었다.

나는 손가락 끝을 세워 아까 기록 대리인들의 우산 끝에 긁혀 피가 맺힌 상처를 짓눌렀다. 핏방울이 울컥 솟아올랐다. 나는 그 피 묻은 손가락을 버튼이 아닌, [보호자]와 [0] 버튼 사이의 좁은 금속 경계선에 가져다 댔다.

“도윤 씨? 거긴 버튼이 아니에요!”

윤서하가 경악하며 소리쳤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규정대로만 움직이면 평생 문태식 손바닥 안이야. 가끔은 선을 넘어야 길이 보이지.”

피가 금속 틈새로 스며들었다. 버튼과 버튼 사이, 논리와 논리 사이의 빈틈. 시스템이 상정하지 않은 ‘규정 밖의 선택’을 강제로 밀어 넣었다. 임시 접수증을 끊을 때 썼던 내 피와 ‘강도윤’이라는 현재의 명의가 매개체가 되어 엘리베이터의 회로를 뒤흔들었다.

콰앙—!

엘리베이터가 비명을 지르며 멈춰 섰다. 층수를 표시하는 인디케이터가 미친 듯이 회전하더니, 존재하지 않는 기호들을 내뱉었다.

[ERR] [B4/0] [MAINTENANCE]

엘리베이터가 추락하듯 급하강하다가 덜컥, 하고 멈췄다. 0층과 지하 4층 사이,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점검층’이었다.

스르륵, 문이 열렸다.

서늘한 한기가 밀려왔다. 코끝을 찌르는 건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와 매점의 컵라면 냄새, 그리고…… 오래된 종이 냄새였다.

“여긴…….”

반가온이 멍하니 밖을 내다봤다.

그곳은 기괴한 공간이었다. 한쪽 벽면은 병원 매점의 창고처럼 박스들이 쌓여 있었지만, 반대쪽은 어린아이들의 영정 사진이 놓이는 어린이 장례식 대기실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두 공간이 물리적으로 겹쳐진 채 일그러져 있었다.

그리고 정면 벽에 커다란 ‘분실물 보드’가 있었다.

우리는 홀린 듯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그 앞으로 다가갔다. 보드에는 수십 장의 카드들이 핀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보는 순간 숨을 들이켰다.

전부 ‘헌터 등록증’이었다.

그런데 이름이 이상했다.

[강도윤 - 2023년 발행]

[강도윤 - 2018년 발행]

[강도윤 - 2012년 발행]

각기 다른 연도, 조금씩 다른 사진들. 하지만 이름은 전부 ‘강도윤’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주기적으로 이름을 갈아치우며 갱신해온 것처럼.

나는 떨리는 손으로 가장 안쪽, 먼지가 두껍게 쌓인 가장 오래된 등록증을 향해 손을 뻗었다. 색이 바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사진 속에는, 현재의 내가 아닌 전혀 낯선 소년이 서 있었다.

소년은 무표정한 얼굴로 문태식의 옆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사진 아래, 단 한 번도 채워진 적 없다고 생각했던 ‘원본명’의 칸이 비어 있지 않았다.

그곳에는 잉크가 번진 채, 하지만 분명하게 읽을 수 있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나조차 잊고 있었던, 아니, 어쩌면 이 시스템 전체가 숨기려 했던 나의 진짜 이름이.

“……말도 안 돼.”

내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등록증 속 소년의 가슴에 달린 이름표에는, 내가 지금껏 내 것이라 믿어왔던 성씨와는 전혀 다른 글자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등 뒤에서 닫혔던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열리며 검은 우산을 접는 소리가 들려왔다.

탁.

바닥을 치는 차가운 금속음과 함께, 누군가의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드디어 자기 물건을 찾으러 오셨군요. 강도윤 씨. 아니, 뭐라고 불러드려야 할까요?”

195화. 분실물 보드의 소년

검은 우산 끝이 바닥을 끄는 소리가 났다. 끼익, 소름 끼치는 금속음이 엘리베이터 문틈을 타고 들어왔다.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지나치게 매끄러웠다. 기계적인 안내음도, 죽은 자의 헐떡임도 아니었다. 아주 예의 바르고, 그래서 더 이질적인 중년 사내의 음성.

“드디어 자기 물건을 찾으러 오셨군요. 강도윤 씨. 아니, 뭐라고 불러드려야 할까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엘리베이터 문 뒤, 반쯤 열린 틈새로 검은 코트를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얼굴은 우산의 깊은 그림자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꽉 쥔 우산 손잡이 위로 불거진 손등의 핏줄이 그가 ‘기록 대리인’ 중 하나임을 짐작게 했다. 다만, 지금까지 만났던 다른 대리인들보다 훨씬 더 ‘인간’의 형태에 가까웠다.

그는 우산 끝으로 벽면에 걸린 커다란 분실물 보드를 가리켰다.

“주인을 잃은 이름들이 너무 오래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저 가장 오래된 것 말입니다.”

보드에는 수십 장의 헌터 등록증이 핀으로 박혀 있었다. 발행 연도별로 정리된 그것들은 전부 ‘강도윤’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다. 2023년, 2018년, 2012년……. 아래로 내려갈수록 사진 속의 나는 점점 젊어지다 못해 어려졌다.

그리고 맨 아래, 가장 낡아서 종이가 바스러지기 일보 직전인 등록증 하나.

그곳엔 지금의 내가 아니라, 앳된 소년의 얼굴이 있었다. 문태식의 젊은 시절 사진 옆에서 어색하게 웃고 있는 아이. 나는 홀린 듯 그 아래의 이름표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잉크가 번진 듯하면서도 분명한 글자가 적혀 있었다.

내 원본명. 시스템이 그토록 감추려 했던, 내가 잃어버린 진짜—.

“안 돼! 보지 마!”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시야가 차단되었다. 내 품에 매달려 있던 아이가 어느새 내 어깨 위로 올라와 두 손으로 내 눈을 꽉 가로막은 것이다. 아이의 작은 손바닥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이름을…… 이름을 부르면 안 돼. 아저씨가 그걸 읽는 순간, 다시 잡혀가. 나도, 아저씨도, 전부 다!”

아이가 내 귓가에 대고 울먹였다. 단순한 공포가 아니었다. 아이의 손바닥이 내 눈꺼풀에 닿는 순간, 뇌를 찌르는 것 같은 강렬한 시스템 경고음이 들려왔다.

[경고: 데이터 강제 고정(Hard-Coding) 시도가 감지되었습니다.]

[확정된 관측은 되돌릴 수 없는 ‘상태’를 발생시킵니다.]

그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이 아이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의 부품으로 박제해 버리게 된다는 직감이 뒷덜미를 스쳤다.

“도윤 씨, 움직이지 마요.”

윤서하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눈은 이미 푸른 빛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내가 아니라, 내 몸과 보드 사이를 잇는 보이지 않는 선들을 쫓고 있었다.

“제 몸을 구속하던 푸른 라인들이 보드와 연결되어 있어요. 저 보드는 단순한 기록물이 아니라, ‘증인’의 목판이에요. 제가 왜 지금까지 ‘증인 미완료’ 상태였는지 이제 알겠어요.”

윤서하가 보드 한가운데, 핀이 빠져 덜렁거리는 빈자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보드에 없는 ‘현재의 증언’이 필요하기 때문이야. 과거의 기록만으로는 완성되지 않는 증명.”

“증언? 내가 저기다가 이름이라도 써넣어야 한다는 거야?”

“아니요. 이름을 말하는 건 시스템이 파놓은 함정이에요. 기록 대리인이 원하는 건 우리가 시스템의 규칙 안에서 답을 내리는 거니까.”

그때, 옆에서 킁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반가온이었다. 녀석은 겁도 없이 보드 앞까지 다가가 코를 들이밀고 있었다.

“아저씨, 이거 냄새가 다 달라요.”

“뭐가?”

“2023년 거랑 2018년 거는 그냥 흔한 헌터 협회 종이 냄새랑 아저씨 땀 냄새거든요? 근데 저 밑에 소년 등록증은…….”

가온이가 미간을 찌푸리며 공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문태식 아저씨의 낡은 가죽 장갑 냄새가 나요. 그리고 아주 독한 소독약 냄새. 어린이 병동에서나 나는 그런 거요. 아, 그리고 이건…….”

가온이가 멈칫하더니 내 쪽을 돌아보았다.

“검은 우산의 눅눅한 천 냄새랑, 어떤 여자용 라이터에서 나는 탄 냄새가 섞여 있어요. 아주 오래전부터 여기서 타오르고 있었던 것처럼.”

여성용 라이터. 잔향청취로 들었던 그 서늘한 목소리의 주인일까. 정체를 알 수 없는 퍼즐 조각들이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흩어졌다.

그때, 대리인이 우산을 접으며 한 걸음 다가왔다. 우산 끝이 바닥을 찍을 때마다 바닥의 타일이 검게 물들었다.

“자, 선택의 시간입니다. 강도윤 씨. 당신의 진짜 이름을 회수하시겠습니까? 원본명을 되찾는다면, 이 아이는 더 이상 ‘분실물’이 아니게 됩니다. 반송 절차도 중단되죠. 대신, 당신이 지금까지 쌓아온 ‘강도윤’이라는 사용명과 연대기는 폐기됩니다. 당신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의 목소리에 비릿한 웃음기가 섞였다.

“아니면, 현재의 당신을 유지하시겠습니까? 그러면 강도윤으로서의 삶은 계속되겠지만, 이 아이는 원래 있어야 할 곳…… 즉, 소각로와 다름없는 반송 보관소로 돌아가게 될 겁니다.”

“둘 다 거지 같은 선택지네. 하나는 자아 삭제고, 하나는 아동 유기냐?”

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시스템이 제안하는 선택지는 항상 이 모양이다. 효율과 규칙이라는 명목하에 인간의 목줄을 죈다.

하지만 윤서하의 분석이 내 머릿속에 이정표를 세웠다. ‘보드에 없는 현재의 증언’.

이름을 되찾으면 소유권을 주장하는 꼴이 된다. 이름을 포기하면 방치가 된다. 시스템은 그 두 갈래로 나를 몰고 있었다.

“야, 기록 대리인. 너희는 물건을 잃어버리면 꼭 이름을 써서 붙여놔야 안심이지?”

“그것이 올바른 관리 절차니까요.”

“난 좀 다르거든. 내 물건이면 이름을 쓰겠는데, 애초에 사람이 물건이 아니면 어떡할 건데?”

나는 아이의 손을 조심스럽게 내 눈에서 떼어냈다. 아이는 겁에 질린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녀석의 머리를 거칠게 한 번 쓰다듬어 주고는 보드 아래쪽을 훑었다.

거기엔 누군가 매점에서 물건을 사고 버린 듯한 낡은 영수증 한 장이 압정으로 박혀 있었다.

나는 내 손가락의 핏자국을 영수증 뒷면에 문질렀다. 그리고 주머니에 있던 접수증 조각을 덧대어 짧은 문장을 적어 내려갔다.

평소라면 ‘이 아이는 내 빵셔틀이다’ 같은 농담이라도 던져서 분위기를 띄웠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목구멍이 뜨거웠다. 시스템의 압력이 심장을 짓누르는 감각 속에서, 나는 내 안의 가장 진실한 기록을 쥐어짜 냈다.

[이 아이는 분실물이 아니다.]

글자를 적는 순간, 손가락 끝이 타 들어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또한, 누구의 소유도 아니다. 현재 이 장소에서 나의 보호 아래 있을 뿐이다.]

이건 원본명을 회수하는 것도, 사용명을 포기하는 것도 아니었다. 시스템의 ‘분실물 관리’라는 칸 자체를 부정하는 목격 기록이었다.

찰칵!

보드에 박혀 있던 핀 몇 개가 동시에 튕겨 나갔다. 윤서하의 몸을 감싸고 있던 푸른 라인들이 일순간 하얗게 점멸하더니 그녀의 가슴 안쪽으로 흡수되었다.

[알림: 증인 ‘윤서하’의 상태가 일부 갱신되었습니다.]

[목격 기록 ‘보호’가 시스템에 접수되었습니다. 일시적인 데이터 유예가 발생합니다.]

“성공…… 한 건가요?”

가온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대가는 즉각적이었다.

머릿속이 갑자기 텅 빈 것처럼 서늘해졌다. 보드 상단에 있던 ‘강도윤 - 2023년 발행’ 등록증의 사진이 마치 물에 젖은 인화지처럼 뿌옇게 흐려지기 시작했다.

“어……?”

기억 하나가 비눗방울처럼 터져 나갔다.

그건 아주 사소한 기억이었다. 헌터 사무실 앞 카페에서 윤서하와 커피 취향으로 한 시간 동안 말싸움을 했던 오후. 그녀는 에스프레소에 설탕을 넣지 않는 건 미개한 짓이라고 했고, 나는 인생이 충분히 쓴데 커피까지 쓸 필요가 있느냐고 응수했었다. 별 의미 없는 농담, 별것 아닌 짜증, 그리고 그 끝에 아주 잠깐 스쳤던 미소.

그 기억이 사라졌다. 내가 ‘강도윤’으로서 누렸던 최근 1년의 편린 하나가 시스템의 제물로 바쳐진 것이다. 가슴 한구석이 뻥 뚫린 것 같은 허탈함이 몰려왔다.

“도윤 씨? 왜 그래요? 얼굴색이…….”

윤서하가 걱정스러운 듯 내 어깨를 잡았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았지만, 왜 우리가 이토록 친밀하게 서 있는지, 예전에 그녀와 어떤 실없는 대화를 나눴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내민 손이 따뜻하다는 사실만이 지독한 현실감을 더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점심에 뭐 먹었는지 까먹은 정도니까.”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하지 않았다.

보드에서 핀이 빠진 자리에 숨겨져 있던 작은 봉투 하나가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는 비틀거리며 다가가 그 봉투를 집어 들었다. 봉투 겉면에는 익숙한, 하지만 지금보다 훨씬 정갈한 필체로 문구 하나가 적혀 있었다.

[두 번째 보호자는 믿지 마라. - 문태식]

등 뒤에서 소름이 돋았다. 문태식의 경고? 두 번째 보호자가 누구를 말하는 거지?

그때였다. 내 눈앞에 반투명한 시스템 메시지가 다시 떠올랐다.

[보호 설정 완료.]

[대상: 이름 미상(분실물 번호 404)]

[제1 보호자: 강도윤]

[제2 보호자: 윤서하]

봉투를 집어 든 내 손목 위에, 윤서하의 가슴으로 사라졌던 푸른 라인이 다시 나타났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녀를 구속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푸른 선은 마치 신경계처럼 그녀의 팔을 타고 내려와 내 손등과 단단히 엉겨 붙어 있었다.

윤서하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아까보다 훨씬 더 짙은, 시린 푸른 빛이 일렁였다.

“도윤 씨, 그 봉투…… 제가 보관할까요?”

그녀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더 낮게, 그리고 낯설게 들렸다. 나는 나도 모르게 봉투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기억을 잃은 대가로 얻은 진실이, 내 바로 옆에서 나를 향해 칼날 같은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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