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Top Banner Ad(reader-top)
198-199화. 세 번째 이니셜과 B4 보호자 대기실 일러스트

198-199화. 세 번째 이니셜과 B4 보호자 대기실

198화. 세 번째 이니셜

금속 밑바닥에 조잡하게 긁힌 흔적. 그것은 단순한 낙서라기엔 지나치게 선명했고, 누군가의 이름을 증명하기엔 너무나 파괴적이었다.

윤서하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의 시선은 ‘Y.S.’ 다음에 붙은, 반쯤 뭉개진 세 번째 글자에 고정되어 있었다.

“……Y.S.H.처럼 보여요.”

윤서하가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평소답지 않은 호흡이 좁은 매점 안의 공기를 미세하게 흔들었다.

“하지만 아니에요. 마지막 획이 일부러 지워져 있어요. 만약 이게 제 이름의 마지막 이니셜인 ‘H’라면, 세로획의 각도가 이렇게 꺾일 리가 없거든요. 이건…… 다른 글자의 세로획을 억지로 짓눌러서 지우려 한 자국이에요.”

그녀는 수사관이었다. 감정이 요동치는 와중에도 증거물의 기하학적 불일치를 잡아내는 집요함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이미 깊은 늪에 빠진 것처럼 흐릿했다.

나는 입안이 썼다. 라이터 불꽃이 내 기억의 한 조각을 삼켜버린 탓이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윤서하와 커피 취향을 두고 유치하게 말싸움을 했던 기억이 있었다. 내가 어떤 농담을 던졌고, 그녀가 어떤 표정으로 대꾸했는지, 그 사소하고도 확실했던 일상의 파편이 통째로 소각되었다.

남은 건 단 하나. 그녀가 나를 보며 작게 웃었다는 그 ‘감각’뿐이었다.

이유도 모른 채 누군가를 걱정해야 한다는 건 꽤나 엿 같은 기분이다. 마치 결말만 알고 중간 과정을 잃어버린 추리 소설을 읽는 것 같달까. 나는 이 찝찝함을 덮기 위해 억지로 입술을 끌어올렸다.

“뭐, 서하 씨 글씨체가 워낙 악필이라 시스템이 해독에 실패한 거 아닐까요? 헌터협회 보고서 쓸 때도 가끔 판독 불능 뜨잖아요. 그거랑 비슷한 거겠지.”

농담이라고 던졌지만, 내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스스로도 별로 웃기지 않다는 걸 알았다. 윤서하는 대답 대신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때, 옆에서 킁킁거리며 라이터 주변을 맴돌던 반가온이 고개를 바짝 들이밀었다. 녀석의 코끝이 예민하게 실룩거렸다.

“형, 이거 냄새가 이상해. 그냥 긁힌 게 아니야.”

반가온이 이니셜 부분을 가리켰다.

“오래된 서류철 냄새가 나. 먼지 쌓인 종이 냄새랑, 눅눅한 병원 소독약…… 그리고 비에 젖은 검은 우산 천 냄새도 섞여 있어. 근데 제일 고약한 건 이 세 번째 이니셜을 지운 도구야.”

가온이가 코를 찡그리며 말을 이었다.

“이거 병원 매점에서 구할 수 있는 걸로 긁은 게 아니야. 헌터협회 기록실에서 기밀 서류에 부착하는 ‘금속 태그’ 있지? 그 얇고 날카로운 모서리로 짓이긴 냄새가 나.”

헌터협회 기록실.

그 단어가 나오자마자,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아이가 발작하듯 귀를 막고 비명을 질렀다.

“안 돼! 그거 부르면 안 돼!”

아이가 바들바들 떨며 허공을 가리켰다. 아이의 초점 없는 눈동자에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무언가가 맺혀 있는 듯했다.

“그 글자를 부르면…… 계단이 열려요. 시커멓고 축축한 계단. 파란 비상등만 켜져 있는 곳으로 내려가야 한단 말이에요. 아줌마가 거기서 기다리고 있어. 빨리 이름을 지워야 해!”

아이는 정확한 이름을 뱉지 못했다. 하지만 아이가 떠올리는 이미지는 내 머릿속으로 전이되어 왔다. 눅눅한 지하실의 한기, 벽면을 타고 흐르는 정체 모를 액체,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지하 계단참의 환영.

[시스템 메시지: ‘대체 증인(여성용 라이터)’의 효력이 유지되고 있습니다.]

[시스템 메시지: 정식 증인 확정을 위해 다음 중 하나를 이행하십시오.]

[1. 증인의 원 소유 기록 확인]

[2. 최초 점화 장소 확인]

[잔여 유예 시간: 56분 14초]

시간이 깎여나가고 있었다. 윤서하는 자신의 손글씨라는 사실에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지만, 그녀는 프로였다. 그녀는 떨리는 손을 제복 바지에 문질러 닦으며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나를 보았다.

“강도윤 씨. 제 개인적인 감정은 배제하세요. 이 라이터가 제 것일 리 없어요. 필체가 닮았을 뿐이지, 전 이런 라이터를 소유한 적이 없습니다. 현장검증이 우선이에요.”

말끝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그녀는 스스로를 증거물에서 강제로 분리해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오히려 더 위태로워 보여서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요. 서하 씨가 애연가도 아니고, 이런 촌스러운 분꽃 냄새 화장품을 쓸 리도 없지. 그럼 우회로를 찾읍시다.”

나는 다시 라이터로 손을 뻗으려 했다. ‘잔향청취’를 한 번 더 시도해볼 생각이었다.

그때, 허공에서 기록 대리인의 비릿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흐흐, 또 그 조잡한 인출기를 쓰시려고? 이번엔 뇌세포 몇 개를 태울 작정인가, 기록자? 커피 기억 따위랑은 비교도 안 될 중요한 기억이 타버릴 텐데. 예를 들면…… 네놈이 왜 그렇게 그 여자 수사관을 지키려 하는지 같은 근원적인 이유 말이야.”

기록 대리인의 압박은 사실이었다. 라이터를 직접 건드리는 건 위험했다. 놈은 내 ‘원본’에 대한 단서를 담보로 나를 조롱하고 있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나는 시선을 돌려 라이터가 놓여 있던 매점 유리 진열대를 보았다. 라이터가 타오르던 순간, 그 불꽃은 라이터 자체보다 유리창에 더 선명하게 반사되었을 것이다.

“누가 직접 만진대? 난 원래 간접적인 걸 좋아하거든.”

나는 주머니에서 낡은 영수증 조각을 꺼내 유리 진열대 표면에 붙였다. 그리고 라이터가 아닌, 라이터의 ‘그림자’와 ‘반사광’이 머물렀던 유리의 잔향에 집중했다. 직접 증인을 건드리지 않고, 거울에 비친 장면을 훔쳐보는 우회 전략이었다.

[스킬: 잔향청취(F)가 변칙 발동합니다.]

[매질: 강화 유리에 남은 빛의 잔상을 추적합니다.]

시야가 일그러졌다. 매점의 풍경이 빗물에 씻겨 내려가는 수채화처럼 번졌다.

쏴아아ㅡ.

귀청을 때리는 거센 빗소리가 들렸다. 비 오는 밤이었다.

누군가 매점 문을 열고 들어왔다. 검은 우산을 든 그림자. 우산에서 떨어진 빗물이 바닥에 웅덩이를 만들었다. 그림자는 익숙한 동작으로 우산을 접어 문 옆에 세우더니, 품 안에 안고 있던 작은 아이를 진열대 밑 어둠 속으로 밀어 넣었다.

여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역광에 가려진 실루엣뿐이었지만, 그녀가 손에 쥔 라이터가 찰칵, 소리를 내며 켜졌다.

여자는 라이터 불꽃을 이용해 차가운 유리창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불꽃의 열기가 유리에 성에를 만들었고, 여자는 그 위에 손가락으로 세 글자를 새겼다.

‘Y. S. ……’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글자. 여자의 손가락이 움직였지만, 잔향 속의 이미지는 의도적으로 노이즈가 낀 것처럼 흐릿하게 뭉개졌다. 누군가 이 기록을 강제로 훼손한 흔적이었다.

그때, 잔향 속에서 낯익지만 훨씬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해. 그 글자까지 기록망에 올리면 서하도 같이 묶인다.”

문태식이었다. 지금보다 훨씬 날이 서 있고, 고집스러워 보이는 젊은 시절의 문태식 국장. 그는 여자의 손목을 거칠게 낚아챘다.

“세 번째 글자만 지워. 이름은 남기지 말고, 필체만 남겨. 그래야 나중에라도 아이가 이 필체를 보고 널 찾아낼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이름이 남으면 시스템이 서하를 추적할 거다.”

“……그게 이 아이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인가요?”

여자의 목소리는 젖어 있었다. 슬픔인지, 빗물인지 알 수 없는 습기가 목소리에 배어 있었다.

“그래. 이름은 지워라. 기억도, 기록도. 불은 이름을 묻지 않으니까.”

문태식이 금속 태그 같은 것을 꺼내 유리에 새겨진 세 번째 글자를 사정없이 긁어냈다. 끼익, 끼이익ㅡ 소름 끼치는 금속음이 귓가를 때렸다.

“윽!”

나는 현실로 튕겨 나오듯 눈을 떴다. 고막이 찢어질 듯한 이명이 남았다.

“형! 괜찮아?”

반가온이 내 어깨를 흔들고 있었다.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매점 유리 진열대 안쪽. 아무것도 없던 그곳에 방금 본 잔향의 영향인지 하얀 성에가 끼기 시작했다. 성에는 기이한 형상을 그리며 굳어갔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 손가락으로 슥 긁어 만든 것 같은, 거대한 화살표 모양이었다.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은 매점 구석의 캐비닛 뒤편, 어둡게 가라앉은 지하 계단 쪽이었다.

[시스템 메시지: ‘최초 점화 장소’에 대한 결정적 단서를 포착했습니다.]

[시스템 메시지: 경로가 갱신됩니다.]

지하 계단 문 위의 낡은 비상등이 깜빡이며 푸른 빛을 내뿜었다. 굳게 닫혀 있던 철문 표면에 시스템의 붉은 글자가 비석처럼 새겨졌다.

[최초 점화 장소: B4 보호자 대기실]

나는 안내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병원 종합 안내판에 적힌 층별 안내에는 지하 3층이 끝이었다. 이 병원에는, 아니 일반적인 건축 법규상으로도 이 건물에 지하 4층이란 존재할 수 없었다.

“지하 4층……?”

윤서하가 창백한 안색으로 중얼거렸다.

“기록상 존재하지 않는 층이에요. 설계도에도, 소방 점검 기록에도 없어요.”

“없으면 만들었겠죠. 우리 국장님 전공이 ‘기록 조작’ 아니었습니까.”

나는 라이터를 챙겨 들었다.

비상등의 푸른 빛이 계단 아래로 길게 뻗어 나갔다. 마치 우리를 집어삼키려는 거대한 짐승의 혀처럼.

50분 남짓 남은 유예 시간. 우리는 이제 기록에서 지워진, 존재하지 않는 층으로 내려가야 했다.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이름 없는 아줌마’와, 지워진 세 번째 이니셜의 진실을 마주하기 위해.

199화. B4 보호자 대기실

지옥으로 가는 급행열차는 원래 소음이 없는 법이다.

매점 유리창에 맺힌 성에가 가리킨 방향, 그 끝에 놓인 지하 계단 문이 그랬다. 겉보기엔 수십 년은 족히 녹슬어 문구멍에 대고 소리를 지르면 쇳가루가 한 바가지 쏟아질 것 같은 철문이었다. 하지만 손잡이에 손을 대기도 전에 문은 제 스스로 양옆으로 갈라졌다. 마치 최고급 호텔의 엘리베이터처럼, 혹은 잘 닦인 수술실의 자동문처럼 매끄럽고 조용한 동작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훅 끼쳐 온 것은 계절을 잊은 냉기였다. 단순히 춥다는 감각과는 달랐다. 코끝을 찌르는 건 지독할 정도로 선명한 소독약 냄새, 그리고 그 사이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눅눅한 습기였다. 오래된 분유의 비릿한 단내와 전선이 타 들어갈 때 나는 플라스틱 탄내가 뒤섞여 폐부 깊숙이 박혔다.

“……환영 인사가 아주 향기롭군. 폐병 걸리기 딱 좋은 냄새야.”

나는 코를 훌쩍이며 한 걸음을 내디뎠다. 신발 밑창에 닿는 감촉이 질척거렸다. 윤서하는 이미 문틀 앞에 쪼그려 앉아 바닥을 훑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기계적인 속도로 현장을 해체하고 재구성했다.

“조심해. 여기, 먼지 위에 자국이 있어.”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에는 아주 얇고 섬뜩할 정도로 선명한 선이 그어져 있었다. 구두 굽의 흔적이다.

“아까 복도에서 들렸던 그 보폭이야. 보폭 60cm 내외, 일정하고 망설임 없는 걸음걸이. 조금 전까지 여기 누군가 서 있었어. 우리를 기다렸거나, 혹은 우리보다 먼저 내려갔거나.”

윤서하의 목소리엔 감정이 배제되어 있었지만, 미세하게 떨리는 눈꺼풀까진 숨기지 못했다. 자기 이름의 이니셜이 새겨진 라이터를 든 채, 자기 것이 아니라고 부정해야 하는 상황. 그리고 그 라이터가 가리키는 지옥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가야 하는 심정이 오죽할까.

옆에 서 있던 반가온이 코를 킁킁거리더니 미간을 팍 찌푸렸다.

“아저씨, 이거 냄새가 이상해. 그냥 지하실 냄새가 아니야.”

“뭐가. 네 취향인 민트초코 냄새라도 나냐?”

“아니. 이건…… ‘지워진 층’ 냄새야.”

반가온이 난간 쪽으로 손을 뻗어 코를 가져다 댔다.

“계단 난간에서 헌터협회 임시 보호자 태그 냄새가 나. 그리고 병원 환자 팔찌 냄새도. 근데 둘 다 아주 오래됐어. 젖은 검은 우산 천 냄새랑 섞여서 썩어가는 냄새 같아. 살아 있는 사람들이 드나드는 층에서 날 수 있는 냄새가 아니라고.”

가온이의 말에 내 등줄기로 소름이 한 줄기 스쳤다. 이름 미확인 아이는 이미 내 바짓가랑이를 양손으로 꽉 움켜쥐고 있었다. 아이의 작은 어깨가 눈에 띄게 덜덜 떨렸다.

“내려가면 안 돼요…….”

“왜? 밑에 무서운 아저씨라도 있대?”

“내려가면…… 이름을 두고 와야 해요. 거기 가면 다들 자기 이름을 잊어버려요. 그래서 여기 이름표가 없는 거예요.”

아이는 계단 아래, 파란 비상등이 깜빡이는 어둠 속을 가리키며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가 너무나도 무거워서 가벼운 농담조차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나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아이의 머리를 툭 쳤다.

“걱정 마. 아저씨는 이미 잃어버릴 신용도 명예도 없어서 이름 하나쯤은 보너스로 얹어줘도 타격 없어. 대신 내 손 놓지 마라. 놓치면 길 잃어버리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 역시 아이의 손을 평소보다 힘주어 잡았다. 이 작은 손을 놓는 순간, 아이가 이 공간의 일부가 되어 영원히 증발해버릴 것 같다는 공포가 엄습했기 때문이다.

[남은 유예 시간: 48분 12초]

[기록 대리인이 하품을 하며 당신을 응시합니다.]

“뭘 그렇게 망설이나? 증인이 되고 싶다며. 최초 점화 장소를 확인하지 못하면 그 라이터는 그냥 고철 덩어리일 뿐이야. 얼른 내려가서 너희가 찾는 그 ‘진실’인지 뭔지 하는 쓰레기를 주워 담으라고.”

기록 대리인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긁어댔다. 나는 대꾸 대신 계단을 밟았다.

B4로 내려가는 길은 물리 법칙에 대한 모독이었다. 분명 열두 계단을 내려왔는데, 눈앞에 나타난 층수 표지판은 다시 ‘B1’이었다. 한 층을 더 내려가니 ‘B2’, 그다음은 다시 ‘B1’. 공간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꼬여 있었다. 비상등의 푸른 불빛은 천장이 아니라 바닥에서 솟아올랐고, 우리의 그림자는 위를 향해 길게 뻗어 기괴한 형상을 만들어냈다.

속이 울렁거렸다. 잔향청취를 쓰지 않으려 애썼지만, 주변의 사물들이 강제로 내 고막을 두드렸다. 벽면에 덕지덕지 붙은 낡은 플라스틱 환자 팔찌들이 일제히 서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쓰지 마…….

적지 마…….

보호자 이름을 쓰지 마…….

수천 명의 속삭임이 겹쳐진 듯한 소름 끼치는 환청. 나는 관자놀이를 짓누르며 신음했다. 윤서하가 내 상태를 눈치채고 팔을 붙잡았다.

“강도윤 씨, 괜찮아요?”

“어, 그냥…… 귀에 물이 들어간 것 같아서 그래. 근데 윤 경위님, 저 팔찌들 보여요? 일련번호가 좀 특이한데.”

윤서하가 벽면을 유심히 관찰하더니 미간을 좁혔다.

“……이건 일반적인 병원 번호가 아니에요. 헌터협회 기록망의 ‘임시 보호자 슬롯’ 번호 체계예요. 사고로 부모를 잃은 각성자 자녀나, 신원이 불분명한 아이들을 수용할 때 쓰는 가상 코드라고요.”

“그게 왜 병원 지하 4층에 있는 건데?”

“설계도에도 없는 층, 기록에서도 지워진 슬롯…….”

그녀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여긴 병원이 아니에요. 협회가 공식적으로 처리하기 곤란한 ‘기록의 부산물’들을 가둬두는 쓰레기통이지.”

마침내 마지막 계단을 밟았을 때, 눈앞에 나타난 공간은 대기실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그런 평범한 병원 대기실이 아니었다.

낮은 플라스틱 의자들은 아이들의 체구에 맞춰져 있었고, 모서리는 전부 둥글게 닳아 있었다. 구석에는 내용물이 비어버린 낡은 우유병들이 뒹굴었고, 전원이 끊긴 장난감 자판기는 기괴한 인형의 머리통만 내밀고 있었다.

벽면 한가운데에는 낡은 표지판이 하나 붙어 있었다.

[보호자 대기실]

그리고 그 옆에는 수십 개의 금속 슬롯이 줄지어 박혀 있었다. 원래라면 이름표가 꽂혀 있어야 할 자리였지만, 모든 슬롯은 비어 있었다. 마치 누군가 강제로 이름들을 전부 뽑아버린 것처럼.

그때였다. 내 주머니 속에 있던 라이터가 아무런 조작도 없이 ‘칙’ 소리를 내며 스스로 불꽃을 피워 올렸다.

푸르스름한 불꽃이 어두운 대기실을 비췄다. 불꽃의 끝이 가리키는 곳은 방 안쪽, 가장 구석에 놓인 의자 위였다. 그곳엔 주인을 잃은 지 오래된 듯한 짙은 색 코트 한 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나는 홀린 듯 코트로 다가갔다. 소매 끝자락에 하얀 종이 조각이 삐져나와 있었다. 손을 뻗어 그것을 집어 들었다. 라이터 불꽃을 가까이 대자, 날카로운 여자 손글씨가 모습을 드러냈다.

서하가 오면 불을 꺼.

문장의 뒷부분은 불에 탄 듯 검게 그을려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앞부분만으로도 충분했다. 윤서하의 어깨가 눈에 띄게 경직되는 것이 느껴졌다.

“……이거, 우리 엄마 글씨예요.”

윤서하의 목소리가 떨림을 넘어선 무언가로 변했다. 그녀가 메모를 받아 읽는 순간, 벽면에 박혀 있던 수십 개의 빈 이름표 슬롯들이 동시에 ‘착, 착, 착!’ 소리를 내며 뒤집히기 시작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거대한 장부를 넘기는 것 같았다.

그리고 우리 바로 앞에 있는 슬롯 하나가 멈춰 섰다.

그곳엔 본래라면 ‘제2 보호자 후보: 윤서하’라고 적혀 있어야 했을 문구가, 전혀 다른 글자로 바뀌어 출력되고 있었다.

[제2 보호자 후보: 윤서하의 대체명]

“대체명……?”

윤서하가 그 단어를 읊조리는 순간, 내 머릿속에서 거대한 해일이 일었다. 아까 커피를 쏟으며 잃어버렸던 그 기억, 지워진 줄 알았던 감각들이 찌릿한 통증과 함께 되살아났다.

아니, 이건 내 기억이 아니다. 누군가 내 머릿속에 강제로 쑤셔 넣고 있는 타인의 파편이다.

손등 위로 차가운 물방울이 떨어지는 감각. 비 오는 날의 비릿한 냄새. 그리고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지만, 세상에서 가장 익숙한 누군가의 이름이 혀끝까지 차올랐다.

강도윤이라는 내 이름 대신, 이 시스템이, 이 병원이, 이 지워진 층이 나를 부르려 하는 진짜 이름.

“……아.”

입술이 벌어졌다. 그 이름을 내뱉으려는 찰나, 지하 4층의 모든 비상등이 동시에 꺼졌다.

지독한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Advertisement
Bottom Banner Ad(reader-bottom)

댓글 (0)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해주세요.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