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187화. 문턱을 밟은 보호자와 형 이름을 부르지 마라
186-187화. 문턱을 밟은 보호자와 형 이름을 부르지 마라
186화. 문턱을 밟은 보호자
발자국이 닿은 문턱에서부터 검은 액체가 번져 나갔다. 빗물이라기엔 너무나도 진하고, 먹물이라기엔 지독한 비린내가 났다. 병실 문틀 혹은 반송 컨테이너의 해치일 그 경계면이 마치 썩어 들어가는 고목처럼 시커멓게 일그러졌다. 그 액체는 바닥을 타고 기어와 윤서하의 투명해진 발목을 적시려 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차가운 손을 더 꽉 쥐었다. 손가락 끝에 걸린 반송 서명권의 찢어진 단면이 날카롭게 살을 파고들었다. 내 손엔 절반, 윤서하의 손에는 나머지 절반. 이 종잇조각이 끊어지는 순간, 혹은 저 발자국이 병실 안으로 완전히 진입하는 순간 모든 게 끝난다는 확신이 들었다.
[보호자 변경 승인 대기 중]
병실 바닥에 흩어져 있던 누런 서류들이 제멋대로 접히기 시작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소름 끼치게 규칙적이었다. 서류들은 서로의 모서리를 맞물리며 거대한 검은 우산 형태로 변해갔다. 그 그림자가 문태식 소장의 침대 위로 드리워졌다.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헐떡이던 소장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현’이라고 적힌 서명란 바로 위였다. 마치 그 보이지 않는 이름의 마지막 획을 완성하려는 듯한 움직임.
“형, 안 돼. 저 아저씨 오면 안 돼.”
내 옷자락을 붙잡은 아이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평소의 장난기 섞인 목소리는 온데간데없었다. 아이의 눈은 문턱 너머, 보이지 않는 존재의 발치에 고정되어 있었다.
“저 사람은 이름을 안 돌려줘. 한 번 가져가면, 절대로 안 돌려준단 말이야.”
아이의 말은 단서라기보다 비명에 가까웠다. 반가온이 내 어깨 너머로 밭은숨을 내뱉었다. 녀석의 코가 실룩거렸다. 공포에 질린 짐승의 표정이었다.
“도윤아, 냄새가…… 이상해. 이건 사람이 아니야. 그렇다고 죽은 것도 아니야. 이건…… 병원 신생아실의 그 플라스틱 팔찌 냄새랑, 잉크도 안 마른 젖은 출생신고서 냄새…… 그리고 비 오는 날 우산 보관함 밑바닥에 고인 썩은 물 냄새가 다 섞여 있어. 반납 처리된 보호자 명단에서나 날 법한 그런 죽은 서류 냄새라고!”
가온의 외침과 동시에 문턱 위의 존재가 한 걸음 더 내디뎠다. 낡은 병원 슬리퍼를 신은 발 모양이 언뜻 보였다. 물에 퉁퉁 불어 터진 발등 위로 낡은 코트 자락이 질질 끌렸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그곳에 얼굴이 있어야 할 공간 자체가 텅 빈 채 빗줄기만 쏟아지는 것 같았다.
그 존재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낮고 웅성거리는 소음 같았지만, 내 고막에는 명확한 문장으로 박혔다.
“변경 전 보호자는 회수 대상이다.”
그의 시선이—시선이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압박감이—윤서하를 향했다. 윤서하의 형체는 이제 배경이 비칠 정도로 희미해져 있었다.
“0번의 보관자는 아직 살아 있다. 기록을 넘겨라.”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내 오른쪽 팔뚝의 KDW 화상이 미친 듯이 타올랐다. 단순히 뜨거운 게 아니라, 누군가 내 살점을 갈고리로 낚아채 끌고 가려는 듯한 극심한 통증이었다. 화상 자국 아래로 낯선 표식이 떠올랐다. ‘H’ 같기도 하고, 한글 받침 ‘ㄴ’ 같기도 한 그 글자가 내 이름 ‘강도윤’의 획 사이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엉켰다.
마치 내 이름 자체가 다른 누군가의 기록에 잘못 끼워진 부품처럼 느껴졌다.
“도윤 씨…….”
윤서하가 겨우 입을 뗐다. 그녀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침착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게 그녀다운 방어기제였다.
“내 이름…… 내 이름 말고. 서명권을 불러요. 관리 번호로…… 접근해야 해요. 저건 사람을 보는 게 아니라, 항목을 보는 거니까.”
서명권을 부르라고? 나는 내 손에 쥐어진 찢어진 라벨을 내려다보았다. 거기엔 식별 불가능한 숫자들과 바코드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보호자란 아이를 지킨 자가 아니라, 기록을 끝까지 보관한 자입니다.]
검은 우산 모양으로 접힌 서류 안쪽에서 기괴한 잔향이 들려왔다. 행정적인 조롱 같은 그 문구가 머릿속을 울렸다. 그래, 여기는 병원이자 동시에 기록의 무덤이다. 실체보다 서류상의 지위가 우선되는 곳. 그렇다면 나도 실무적인 꼼수로 대응해주지.
나는 윤서하의 손을 놓지 않은 채, 주머니에서 문태식 소장의 찢어진 가죽 장갑 조각을 꺼냈다. 소장의 체온과 땀, 그리고 그가 평생 지켜온 ‘보호자’로서의 집념이 배어 있는 물건이다.
나는 내 팔뚝의 화상, 즉 KDW라는 낙인이 찍힌 살점 위로 찢어진 반송 서명권을 겹쳐 눌렀다. 그리고 그 위에 소장의 장갑 조각을 덧댔다. 내 피와 소장의 흔적, 그리고 윤서하의 권한이 담긴 종이 조각을 하나로 짓이겼다.
“승인 대기 중이라고? 아니, 난 이의신청하러 왔는데.”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비릿한 피맛이 입안에 돌았다.
“보호자 변경 승인 거부. 사유는…… ‘원본 대조 불일치’ 및 ‘보호자 지위 부존재 확인 소송 중’이다, 이 새끼야.”
나는 내 화상의 열기를 이용해 서명권의 잉크를 녹여냈다. 붉게 달아오른 살갗 위에 잉크가 번지며 새로운 문자를 만들어냈다. 강도윤이라는 이름 위에 ‘ㄴ’ 표식이 겹치고, 거기에 소장의 지문이 묻은 가죽이 달라붙었다.
그 순간, 병실 안의 공기가 급변했다.
우산 모양의 서류들이 비명을 지르며 찢겨 나갔다. 문턱을 밟고 있던 젖은 발자국이 움찔하며 뒤로 밀려났다. 바닥에 고여 있던 검은 액체가 역류하며 문밖으로 빨려 들어갔다.
[보호자 변경 승인]이라는 문구가 지직거리더니, 불길한 붉은색으로 점멸하며 바뀌었다.
[보호자 이의신청 접수 완료]
[임시 지위 보존 기간 설정 중……]
윤서하의 몸에 다시 색이 돌기 시작했다. 완전히 빠져나온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소멸은 멈췄다. 문태식 소장의 거친 호흡도 아주 잠시 안정을 찾았다. 하지만 이건 완전한 해결이 아니었다. 억지로 시스템에 과부하를 걸어 시간을 번 것뿐이다.
문턱 너머의 존재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그곳에 서서, 얼굴 없는 머리를 까딱거리며 나를 관찰했다. 아니, 내 팔뚝에 새겨진 그 기묘한 표식을 보고 있었다.
허공에 흩어지던 검은 종이 조각들이 다시 모여들어 벽면에 새로운 항목을 써 내려갔다.
[대리 보호자 후보: 강도윤 (신분 확인 필요)]
“형……?”
아이가 내 팔을 잡으며 물었다. 그 눈에는 안도보다 더 큰 의구심이 서려 있었다.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내 팔뚝의 통증이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도윤. 내 이름이 불릴 때마다 느껴지던 그 미세한 이질감이 이제는 거대한 통증이 되어 전신을 훑었다. 마치 내가 강도윤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이름을 대신 쓰고 있는 보호 시설의 아이처럼 느껴졌다. 강도원. 형의 이름이 머릿속에서 징처럼 울렸다. 내가 형의 기록에 물려 있는 건가? 아니면 형이 내 기록을 가로채고 있는 건가?
그때였다.
치익, 하는 소음과 함께 문태식 소장의 산소호흡기 마스크 안쪽으로 뿌연 김이 서렸다. 기계음 섞인 호흡 소리 너머로, 아주 낮고 갈라진 목소리가 잔향처럼 흘러나왔다. 소장의 입술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것은 분명 소장의 의지였다.
“……도윤아.”
나는 소장의 침대 곁으로 몸을 숙였다.
“네 형 이름을…… 부르지 마라.”
마치 마지막 경고처럼, 소장의 손가락이 내 소매를 붙잡았다 놓았다.
“도원이를…… 보호자로 만들지 마라. 절대로.”
산소호흡기의 모니터가 날카로운 경고음을 내뱉었다. 문턱 너머의 젖은 발자국이 기분 나쁜 웃음소리 같은 수조의 물소리를 내며 어둠 속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하지만 그가 남긴 ‘대리 보호자 후보’라는 문구는 벽면에서 피처럼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찢어진 서명권을 손에 쥔 채, 차마 윤서하의 얼굴을 돌아보지 못했다. 내가 방금 한 선택이 그녀를 구한 것인지, 아니면 더 깊은 수렁으로 밀어 넣은 것인지 알 수 없었기에.
187화. 형 이름을 부르지 마라
“도원이를…… 보호자로 만들지 마라. 절대로.”
문태식의 산소호흡기 너머에서 새어 나온 잔향은 기괴할 정도로 선명했다. 그건 부탁이 아니라 경고였고, 유언이라기엔 지나치게 날이 서 있었다.
강도원.
나도 모르게 속으로 그 이름을 떠올리려던 찰나, 가슴팍의 KDW 화상이 미친 듯이 박동했다. 뜨거운 인두로 지지는 듯한 통증이 폐부까지 찔러왔다. 동시에 팔목 위로 돋아난 낯선 ‘H/ㄴ’ 표식이 보라색 불꽃을 튀기며 살을 파고들었다.
“아악……!”
비명이 입 밖으로 터져 나오기도 전에 혀가 굳었다. 누군가 내 목구멍 안에 납덩이를 부어 넣은 것 같았다. 이름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시스템이 거부 반응을 일으키고 있었다. 내 이름의 이니셜과 형의 이름, 그리고 정체 모를 자음들이 내 몸이라는 좁은 영토 안에서 서로를 밀어내며 전쟁을 벌였다.
“도윤 씨, 안 돼요! 부르지 마!”
문틈 사이에 반쯤 걸쳐진 윤서하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녀의 목소리는 아직 완전히 이승의 것이 아니었다. 손끝과 팔목 일부에 겨우 생기가 돌아와 선홍빛을 띠었지만, 어깨 너머로는 여전히 차가운 청보랏빛의 소멸이 일렁이고 있었다.
“이름은 안 돼. 지금은 이름이 아니라…… 절차를 봐야 해요. 그들이 원하는 건 확정된 ‘대상’이니까.”
그녀의 말이 맞았다. 벽면의 [대리 보호자 후보: 강도윤 (신분 확인 필요)]라는 글자가 잉크처럼 번지며 기괴하게 꿈틀대고 있었다. ‘신분 확인’이라는 네 글자가 마치 굶주린 입술처럼 나를 삼키려 들었다.
“도윤 형…… 냄새가 이상해.”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반가온이 코를 킁킁거렸다. 녀석의 눈동자가 공포로 잘게 떨렸다.
“형 이름이랑, 그…… 형네 형 이름이랑, 똑같은 가방 안에 쑤셔 넣어둔 것 같은 냄새가 나요. 낡은 사물함 속에서 곰팡이 핀 서류더미가 뒤섞인 것 같은…… 그런 기분 나쁜 냄새.”
가온이 느끼는 감각은 정확했다. 내 이름 강도윤과 형 강도원은 지금 이 병원의 비정상적인 행정 시스템 안에서 같은 ‘보관함’에 처박혀 분류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다.
“형, 이름 부르지 마. 부르면 저기서 바로 받아 적어.”
작은 아이가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으며 경고했다. 녀석은 평소처럼 나를 ‘형’이라 불렀지만, 지금 그 호칭은 단순한 친밀함이 아니었다. 시스템이 내지르는 비명 같았다. 아이의 눈은 내가 아니라 내 머리 위, 혹은 내 등 뒤에 붙은 보이지 않는 이름표를 보고 있었다. 기록상의 혼동. 나는 지금 내가 누구인지 증명해야 하면서도, 동시에 증명해서는 안 되는 모순에 빠져 있었다.
복도 쪽에서 찌르르, 하는 습기 찬 소리가 들렸다.
‘진짜 보호자’는 물러나지 않았다. 문턱 너머, 병실 안으로는 들어오지 못했지만 놈의 존재감은 검은 물웅덩이가 되어 복도를 잠식하고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바닥에 끌리는 젖은 코트 자락과 병원용 슬리퍼의 앞코, 그리고 놈이 서 있는 자리마다 고이는 검은 물방울뿐.
그 물웅덩이 속에서, 기계적인 음성이 잔향처럼 들려왔다.
— [동명이 아닌 동보관(同保管)입니다. 서류를 재확인해 주십시오. 칸이 부족하면 옆 칸을 침범해도 무방합니다.]
블랙코미디 같은 행정 문구였다. 이름이 같아서 헷갈리는 게 아니라, 같은 장소에 보관되어 있어서 구분할 수 없다는 뜻인가? 강도윤, 강도원…… 그리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이름 ‘…현’.
심장이 조여들었다. 저 ‘진짜 보호자’가 문턱을 넘는 순간, 내 신분 확인이 끝나는 순간, 나는 형을 대신해 저 차가운 물속으로 끌려가거나 혹은 형을 이곳으로 불러들여야만 할 것이다.
‘안 돼. 그렇게 둘 순 없어.’
나는 떨리는 손으로 주변을 훑었다. 문태식의 침대 옆, 바닥에 흩어진 환자용 인식 팔찌들. 가온이가 아까 떼어냈던 라벨지들. 그리고 문태식의 가슴에서 떨어진 전극 패드.
나는 그것들을 닥치는 대로 긁어모았다.
“서하 씨, 조금만 버텨요. 가온아, 거기 테이프랑 매직 좀 줘.”
“뭐 하려구? 도윤 씨!”
나는 대답 대신 내 환자복 소매를 찢어 팔목에 감았다. 그리고 그 위에 여러 개의 환자 팔찌를 겹쳐 채웠다. 각 팔찌에는 조금씩 다른 이름을 적어 넣었다. [강도융], [강도연], [강도윤(임시)], [강도원(대리)].
이름의 파편화. 신분 확인이 필요하다면, 확인해야 할 신분의 가짓수를 무한정 늘려버리면 된다. 시스템이 나를 ‘강도윤’ 하나로 특정하지 못하게, 내 데이터에 노이즈를 주입하는 거다.
“미친 짓이야. 그러다 형 자체가 지워지면 어쩌려고!”
가온이 비명을 질렀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문태식의 모니터에서 떼어낸 전극 패드를 내 몸 여기저기에 붙이고, 그 끝을 병실 벽면의 [대리 보호자 후보] 항목 근처에 가져다 댔다.
치직, 치지직!
잔향청취 능력을 역으로 쏟아부었다. 내 신분을 확인하려는 시스템의 촉수 위로 가짜 이름들의 잔향을 덧씌웠다.
그 순간, 시야가 하얗게 점멸했다.
『비가 오고 있었다.
비린내 나는 병원 복도, 아니면 보호시설의 긴 복도.
어린 내가 서 있었다. 내 옆에는 나보다 조금 더 큰 아이가 있었다.
우리는 똑같은 우산을 들고 똑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누군가의 손이 다가왔다. 차갑고 축축한 손.
그 손은 내 가슴에 달린 이름표를 낚아채 뒤집어 붙였다.
“이제부터 네가 형이다.”
아니, “이제부터 네가 도윤이다.”였나?
빗소리에 섞여 목소리가 뭉개졌다.
이름표 뒤에 숨겨진 진짜 이름이 살짝 보였지만, 잉크가 번져 읽을 수 없었다.
다만 그 글자의 끝에 ‘현’이라는 획이 아주 잠깐 스쳤을 뿐.』
“허억!”
숨이 턱 막히며 현실로 돌아왔다. 코끝에선 비릿한 쇠 냄새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진동했다. 과부하된 뇌가 비명을 질렀다.
침대 위의 문태식이 아주 미세하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는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본능적으로 산소호흡기 튜브 옆의 먼지 쌓인 협탁 위를 긁었다.
점 세 개. 그리고 비스듬한 획 하나.
‘…현’과 연결되는 기호처럼 보였다. 하지만 끝내 완성되지 못한 채 그의 손은 힘없이 떨어졌다.
벽면의 글자가 요동쳤다.
[대리 보호자 후보: 강도윤 (신분 확인 필요)]
[데이터 충돌 발생……]
[임시 분류 중……]
글자들이 흐릿해지더니, 마침내 새로운 문구로 고착되었다.
[임시 보관명: 강도윤]
“됐……나?”
성공했다. ‘보호자 후보’라는 명확한 타깃에서 ‘임시 보관물’이라는 모호한 상태로 격하되었다. 당장 끌려갈 위험은 넘겼지만, 내 신분이 사물함 속의 물건처럼 취급되기 시작했다는 뜻이었다. 언제든 누군가 ‘수령’하러 오면 끝장인 상태.
“도윤 씨, 손!”
윤서하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내가 쥐고 있던, 찢어진 반송 서명권 절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없던 종이 조각 위에, 아주 작은 직인이 찍혀 있었다. 붉은색이 아닌, 검은색 직인이었다.
직인 안에는 글자가 없었다. 대신 정교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검은 우산, 그리고 그 우산 아래 놓인 어린아이의 가느다란 손목. 그 손목에는 내가 방금 내 팔에 둘렀던 것과 똑같은 형태의 환자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이건…….”
말을 맺기도 전에, 병실 밖 복도에서 소름 끼치는 금속음이 들려왔다.
딩—.
복도 끝 엘리베이터의 층수 표시기가 점멸했다.
B4.
우리가 있는 곳.
그러나 숫자는 멈추지 않았다.
B4에서 0으로.
이 건물에 존재하지 않아야 할 ‘0층’이 붉은 숫자로 선명하게 타올랐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복도를 타고 낮게 깔렸다. 젖은 슬리퍼가 바닥을 질질 끄는 소리가 다시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형의 이름을 부르지 않기 위해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하지만 내 가슴팍의 화상은 이제 형의 이름이 아니라, 누군가 내려오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며 터질 듯이 뜨거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