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39화. 서울 기록망 붕괴와 장례식장 매점의 승인자
제목: 38화. 서울 기록망 붕괴
쿵.
그건 소리가 아니었다. 진동이었다.
내 왼손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검은 우산 도장을 한지율의 손목 위, 그 기괴한 [KDY-00-ORIGINAL] 코드 위로 내리꽂았을 때. 세상의 모든 소리가 한순간에 빨려 들어갔다.
지하 2층 민원감사실의 비상등마저 꺼졌다. 완전한 어둠. 그런데 나는 볼 수 있었다.
한지율의 손목에서 터져 나온 빛이 내 왼손 태그 [YSH-00]과 연결되어 있었다. 가느다란 신경섬유처럼 보였고, 동시에 엘리베이터 열 대를 묶어 끌어내리는 것처럼 무거웠다.
[시스템 붕괴 시작.]
[최상위 원본 KDY 가동.]
머릿속에서 직접 울리는 이명. 그와 동시에 내 몸 안에서 무언가 우두둑 부러지는 느낌이 들었다. 내 기억, 내 신분, 내가 나라고 믿었던 데이터의 뼈대가.
"아악!"
나는 도장을 떼어내려 했다. 하지만 도장은 한지율의 손목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아니, 도장이 문제가 아니었다. 내 손가락이 문제였다. 검은 도장 손잡이를 쥔 손가락 끝이 잉크처럼, 아니 시커먼 녹처럼 녹아내리며 한지율의 손목에 새겨진 코드를 따라 흐르고 있었다.
내 살이 정보가 되어 흐르는 감각.
나는 반사적으로 농담을 던지려 했다. 이런 상황일수록 가벼워져야 버틸 수 있다.
"이봐요, 한지율 씨. 이거 보증금 돌려받으려면 원상복구 해야 하는데, 내 손가락 값은 빼고 계산해줘…."
말이 입 밖으로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혀가 마비된 것처럼 굳었다. 농담은커녕 신음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공포가, 내 존재 자체가 지워질 수 있다는 본능적인 공포가 유머까지 집어삼켰다.
주변이 변하기 시작했다. 단순한 정전이 아니었다.
벽면에 붙어 있던 민원 대기 번호판이 미친 듯이 점멸했다. [대기 001]이 [강도윤]으로 바뀌더니, 다시 [김철수], [이영희], [존 도], 그리고 다시 [강도윤]으로 돌아왔다. 이름들이 초 단위로 바뀌며 서울 시내의 사망자 명단과 생존자 명단을 뒤섞고 있었다.
바닥에 흩어져 있던 폐기 서류들이 숨을 쉬듯 부풀어 올랐다. 종이들이 서로 붙었다 떨어지며 새로운 계약서를 만들어냈고, 그 위에는 [갑: 강도윤], [갑: 원본 KDY], [갑: ⬛⬛⬛]라는 이름이 번갈아 찍혔다.
내 왼손 태그가 뜨거워졌다. 눈앞에 떠오른 홀로그램 인터페이스가 윤서하의 이름을 뱉어냈다.
[YSH-00 (윤서하) - 접근 권한: 마스터. 명령: 분리.]
그리고 내 심장박동이 한지율의 손목 코드가 뿜어내는 빛의 파동과 완벽하게 맞물렸다. 쿵, 쿵, 쿵. 그녀의 정보가 내 안으로 들어오고, 내 정보가 그녀에게 빨려 들어가는 치명적인 공명.
"이 병신아! 내가 안 된다고 했잖아!"
어둠 속에서 윤서하의 목소리가 터졌다. 그녀의 스틱이 허공을 갈랐다. 목을 노리는 게 아니었다. 스틱 끝은 나와 한지율의 손목, 그 녹아내리는 접점을 향하고 있었다.
그 순간 스틱의 잔향이 내 귀에 꽂혔다. 살의가 아니었다. 절규에 가까운 수술칼. 더 큰 붕괴를 막기 위해 오염된 부위를 도려내려는 의사의 잔혹함이었다.
"지금 분리 안 하면, 너라는 데이터는 이 여자애한테 완전히 덮어씌워져서 사라져! 서울의 모든 헌터 기록이 너를 원본 KDY로 인식하면서 터져버린다고!"
윤서하의 스틱이 내 손목을 내리치기 직전.
나는 들었다.
검은 우산 도장. 그 잉크처럼 녹아내리는 내 손가락과 한지율의 코드가 맞닿은 무음의 안쪽에서. 아주 작지만,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가.
(세 번째는 찍히는 게 아니라, 찍게 만드는 놈을 찾아. 도윤아.)
문태식.
그 영감님의 마지막 목소리였다. 유언도 농담도 아니었다. 경고였다. 내가 이 도장을 찍게 만든 '진짜 배후'가 이 공간 어딘가에, 아니면 이 시스템 너머에 있다는 증거였다.
그 소리를 들은 순간, 나는 공포를 뚫고 억지로 힘을 짜냈다.
"나, 안 사라져. 영감님한테 아직… 잔소리 덜 들었단 말이야."
이번에는 목소리가 나왔다. 아주 작았지만.
나는 녹아내리는 손가락에 힘을 주어 도장을 비틀었다. 한지율에게서 도장을 떼어내는 게 아니었다. 도장의 안쪽을 향해 내 잔향청취를 밀어 넣었다. 찍힌 건 나지만, 나를 찍게 만든 놈의 흔적을 도장에 역으로 새기기 위해서.
윤서하의 스틱이 내 손목 위 5센티미터 허공에서 멈췄다. 그녀는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그래도 내가 다른 시도를 하고 있다는 것만은 알아챈 듯했다.
[시스템 오류. 접근 시도 감지.]
[원본 확인자: 강도윤. 원격 승인자 확인 중.]
머릿속에서 메시지가 바뀌었다.
동시에 내 기억 일부가 뒤틀렸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책상 위에 붙어 있던 내 이름표가 강도윤이 아니라 원본-00으로 보였다. 감식반 계약서에 사인하던 내 손이 다른 사람의 손처럼 보였다가 돌아왔다. 문태식이 처음 내게 "야, F급치고 눈치 빠른 놈"이라고 했던 기억이 "야, 임시 증인"이라는 말로 덧칠되려 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기억이 바뀌어도 욕은 남는다. 그건 인간의 마지막 백업 파일이다.
"윽…."
그때, 한지율이 희미하게 눈을 떴다. 그녀의 눈동자는 여전히 초점이 없었지만, 나를 보고 있었다.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너는 강도윤이 아니야."
그 목소리는 너무 건조해서 다른 존재가 빌려 쓰는 것 같았다.
"너는… 너는…."
그녀는 내 이름을 부르려 했지만, 뒷말은 입안에서 공허하게 끊어졌다. 그녀의 눈앞에 떠오른 내 정보가, 그녀에게는 빈칸이거나 읽을 수 없는 코드명으로 보이는 듯했다. 한지율은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도장을 비튼 채, 도장에 새겨진 문태식의 잔향을 붙잡고 외쳤다.
"영감님! 누가 날 찍었는지 말해줘!"
그 순간, 민원감사실의 전면 벽이 스크린처럼 켜졌다. 수많은 오류 메시지가 폭포처럼 쏟아지다가, 한 줄의 메시지만 거대하게 남았다.
[최상위 원본 KDY 가동. 가동자(강도윤) 호출 승인 완료.]
[원격 승인자: 반가온]
"뭐?"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반가온. 가온 형?
던전 부산물 감정사. 물건보다 사람을 더 싸게 평가하는 독설가. 그래도 적어도 내 편이라고 믿었던 사람.
그가 왜? 그가 이 검은 우산 도장의 원격 승인자였다고?
"말도 안 돼…."
내 목소리가 떨렸다. 그 순간, 내 왼손 태그가 다시 한번 뜨거워지며 메시지 밑에 작은 글씨를 한 줄 더 토해냈다.
[승인 위치: 지상 1층, 장례식장 매점.]
나는 얼어붙었다.
1층 장례식장 매점.
내가 방금까지 가온 형과, 팀원들과 함께 육개장을 먹으며 웃고 있던 그곳이다.
작가의 말: 도윤의 기억이 조금씩 오염되기 시작했습니다. 가온 형의 이름이 떴지만, 장소는 여전히 장례식장 매점이네요. 도윤이는 이제 누구를 믿어야 할까요?
제목: 39화. 장례식장 매점의 승인자
지하 2층 민원감사실은 이미 현실의 물리 법칙을 잃어버렸다.
벽면을 가득 채웠던 민원번호들이 스크린샷처럼 찢어지며 바닥으로 쏟아졌고, 폐기 처리된 줄 알았던 수십 년 전의 서류들이 허공에서 눈보라처럼 휘날렸다. 그 종이 한 장 한 장에 새겨진 헌터 신분 태그와 사망자 명단이 끊임없이 점멸하며 서로의 코드를 잠식하고 있었다.
그 아수라장의 중심에서, 내 왼손과 한지율의 손목은 검은 인주 같은 액체로 연결되어 있었다.
'원본-00'
'임시 증인'
낯선 코드들이 내 뇌리에 덧칠되려 할 때마다 나는 이빨을 악물었다. 기억이 오염되는 걸 막아야 했다. 나는 지금 민원감사실에 있다. 한지율을 붙잡고 있다. 윤서하의 스틱이 만들어내는 쇳소리를 듣고 있다. 이게 현실이다.
"강도윤, 한지율 놔!"
윤서하가 소리쳤다. 그녀의 목소리에도 보기 드문 당혹감이 섞여 있었다. 민원감사실 벽면에 떠오른 메시지 때문이었다.
[원격 승인자: 반가온]
[승인 위치: 지상 1층, 장례식장 매점.]
반가온.
그 이름이 화면에 뜨는 순간, 윤서하의 스틱 끝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녀가 아는 반가온이 정말 이 일을 저질렀는지, 아니면 누군가 그의 권한을 도용한 것인지 판단이 서지 않는 눈치였다. 확실한 건 하나였다. 윤서하도 이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다.
"못 놓습니다."
나는 연결된 손목에서 느껴지는 한지율의 체온에 집중하며 대답했다. 식은땀에 젖어 축축하고, 기분 나쁘게 뜨거웠다. 이 온기를 놓치면, 내 이름이든 그녀의 이름이든 둘 중 하나는 기록망 붕괴 속으로 영영 사라질 것 같았다.
"이거 놓으면 나도 죽고 이 여자도 죽어요. 그리고 당신들이 찾는 진짜 KDY 원본도 증발한다고!"
한지율은 다시 의식을 잃은 채 내 팔에 매달려 있었다. 그녀의 손목에 찍힌 [KDY-00-ORIGINAL] 코드는 여전히 폭주하며 주변 데이터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내가 그녀를 버리면, 나는 '도윤'이라는 개인의 기억을 잃고 시스템의 '원본 코퍼스'로 환원될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녀대로 '사망 확정' 데이터에 먹혀버릴 테고.
이건 동반자살이 아니라, 동반생존을 위한 악력 싸움이었다.
"...따라와."
윤서하가 결단을 내린 듯 짧게 혀를 차고 스틱을 거두었다.
"지상으로 올라간다. 승인자를 직접 확인해야겠어."
그녀가 앞장섰다. 하지만 비상구 계단으로 향하는 통로는 이미 우리가 알던 구조가 아니었다.
[B2 계단 → 1F 장례식장]
원래라면 평범한 초록색 표지판이어야 할 것이 피처럼 붉은 글씨로 점멸했다. 매 초마다 서체도 바뀌었다. 어떤 때는 오래된 부고장 글씨처럼, 어떤 때는 해석 불가능한 기계어처럼.
기록망 붕괴는 장례식장의 공간 정보까지 왜곡하고 있었다.
우리가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을 때, 비상계단 벽면에는 이 병원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입원 기록과 사망 진단서가 벽지처럼 발려 있었다. 계단 손잡이를 잡자 차가운 금속의 감각 대신 종이 질감의 문장이 손바닥으로 스며드는 것 같았다.
[사망 원인: 마력 역류]
환각이 아니다. 데이터가 현실을 잠식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이래서 장례식장은 오기 싫었는데."
나는 한지율을 고쳐 업으며 빈정거렸다. 등 뒤로 느껴지는 그녀의 심장박동이 불안정했다.
"죽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정보량이 감당이 안 되나 보죠? 아주 그냥 과거 여행 명소가 따로 없네. 후기 별점은 0점입니다. 재방문 의사 없음."
윤서하는 대꾸 없이 앞만 보고 스틱을 휘둘렀다. 스틱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덧씌워진 데이터 벽이 찢어지며 잠깐씩 진짜 콘크리트 벽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지하 1층을 지나 지상 1층에 가까워질수록 공기는 기묘하게 바뀌었다. 붕괴하는 기록망의 탄내 대신, 익숙하고 지독하게 현실적인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싸구려 육개장 냄새.
그리고 보급형 컵라면 수프 냄새.
"어처구니가 없군."
지상 1층 복도로 들어선 윤서하가 멈칫했다.
민원감사실은 여전히 데이터 폭풍 속에서 무너지고 있겠지만, 이곳 지상 1층 장례식장은 지나치게 평온했다. 검은 양복을 입고 지친 표정으로 오가는 상주들, 화환 뒤에서 담배를 피우는 조문객들, 복도 끝에서 희미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매점.
그 대비가 오히려 더 기괴했다. 저기서 컵라면 국물을 마시고 있는 남자가 사실은 10년 전에 죽은 사람의 데이터 조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손목을 꽉 쥐었다. 통증. 아직 나는 강도윤이다. 문태식 팀장이 남긴 잔향도 떠올렸다.
세 번째는 찍히는 게 아니라, 찍게 만드는 놈을 찾아.
그래. 그놈을 찾으러 왔다.
우리는 매점으로 향했다. 윤서하의 존재 때문인지, 아니면 우리 세 사람의 차림새 때문인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피칠갑을 한 나, 의식 없는 한지율, 피 묻은 제복의 윤서하. 장례식장에서도 이 조합은 좀 과하다. 최소한 조문객 복장은 아니었다.
하지만 누구도 우릴 막지 못했다. 정확히는, 그들의 시선이 우리를 인식하지 못하고 통과하는 느낌이었다.
매점 입구. 평범한 유리문 너머로 '영업 중' 표지판이 걸려 있었다.
나는 침을 삼키고 문을 열었다.
딸랑.
방울 소리와 함께 쏟아지는 건 더 강렬한 현실의 감각이었다. 낡은 냉장고가 돌아가는 부웅 하는 진동, 온수통에서 물이 끓는 소리, 카운터 뒤 포스기의 대기 화면이 뿜어내는 푸르스름한 빛.
매점 안은 좁았다. 진열대에는 삼각김밥과 샌드위치, 컵라면이 칼같이 줄맞춰 놓여 있었다. 장례식장답게 조의금 봉투와 흰 장갑, 검은 넥타이도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승인자 반가온은 보이지 않았다.
"여기, 잔향이 남아 있어."
나는 한지율을 벽에 기대어 앉혀두고 매점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잔향청취. 죽은 자와 사물의 끝소리를 듣는 내 저주 같은 능력.
붕괴하는 기록망 탓인지 이곳의 잔향은 평소보다 훨씬 선명하고 날카롭게 들렸다. 누군가 내 고막에 직접 대고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다.
나는 포스기로 다가갔다. 전원이 켜져 있는 포스기 화면에는 로그온 아이디가 떠 있었다.
[BG_ON]
반가온의 이니셜.
손을 뻗어 포스기 모니터에 닿았다.
칙... 칙...
노이즈 너머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니야, 이건 내가 승인한 게... 아니, 내 아이디지만...]
반가온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는 승인을 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제발, 멈춰. 누가 내 권한을... 로그아웃이 안 돼. 누가 원격으로...!]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 그는 자신의 이름이 검은 우산 도장의 승인 권한으로 쓰이는 것을 막으려다 실패한 것처럼 들렸다. 적어도 이 잔향 속 반가온은 가해자가 아니었다. 이용당했거나, 뒤늦게 눈치챈 피해자였다.
나는 손을 뗐다. 이 포스기는 원격 접속의 터미널일 뿐이었다.
그럼 진짜 승인자는?
[검은 우산, 04번. 승인 완료.]
그때, 내 머릿속으로 아까 민원감사실에서 들었던 문태식 팀장의 잔향과는 다른 기계적인 음성이 스쳐 지나갔다. 잔향청취가 아니라, 내 기억의 데이터 코드가 직접 반응하는 소리였다.
나는 고개를 돌려 매점 안쪽, 컵라면 온수통 옆에 서 있는 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장례식장 매점 직원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키가 작고, 약간 굽은 등, 숱이 적은 머리카락. 평범하다 못해 지나가면 기억에도 남지 않을 인상이었다. 그는 컵라면에 물을 붓고 있었다.
그런데 남자의 가슴에 달린 명찰이 눈에 들어왔다.
[직원: 반가온]
윤서하가 그 이름을 확인하고 스틱을 꽉 쥐었다.
"반가온?"
그녀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스틱의 마력이 파지직거리며 매점 형광등을 깜빡이게 했다.
직원 명찰을 단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는 아주 무던한 표정으로, 매일 보는 손님을 대하듯 우리를 보았다.
"아, 컵라면 드시게요? 온수는 이쪽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방금 포스기에서 들었던 반가온의 목소리와 전혀 달랐다. 톤도, 억양도, 심지어 말투까지도.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반가온 씨, 본인 맞습니까?"
"네? 명찰에 써 있잖아요."
그는 자신의 명찰을 톡톡 두드렸다.
"제가 반가온입니다. 뭐 필요한 거 있으신가?"
나는 그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외형은 자료 사진에서 본 반가온과 비슷했다. 하지만 미묘한 이질감이 있었다.
나는 그가 컵라면에 물을 붓고 뚜껑을 닫는 동작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뚜껑을 닫고, 그 위에 조의금 봉투 뭉치를 꾹 눌러 놓았다. 컵라면 익을 동안 날아가지 말라고.
그런데 그 조의금 봉투 뭉치를 잡을 때, 그의 새끼손가락이 기괴할 정도로 안쪽으로 굽어 있었다. 인간의 관절 각도를 벗어난, 부러진 관절을 억지로 붙여놓은 듯한 움직임.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는 그의 눈을 보았다.
그의 눈동자 안쪽에서 아주 잠깐 검은 우산 모양의 무늬가 도장처럼 찍혔다 사라졌다.
"반가온 씨는."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와 윤서하 사이를 막아섰다. 윤서하의 스틱이 금방이라도 그의 심장을 뚫을 기세였기 때문이다.
"평소에 삼각김밥 유통기한을 감정할 때 포장지 재질부터 확인하는 버릇이 있다고 들었는데."
이건 순전한 억지였다. 나는 반가온에 대해 그딴 사소한 정보는 모른다. 하지만 미끼를 던져봐야 했다.
직원은 짐짓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 예... 뭐, 직업병이라."
그가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낚였다.
진짜 반가온 형이라면 '무슨 개소리냐, 유통기한은 날짜부터 보는 거지 포장지를 왜 감정하냐'라고 욕했을 것이다. 아니면 내 질문이 너무 멍청해서 삼각김밥 가격보다 내 지능을 먼저 감정했겠지.
그는 반가온의 프로필은 외우고 있어도, 반가온의 인간적인 습관은 몰랐다.
"거짓말."
나는 빈정거림을 멈추고 목소리를 깔았다.
"당신, 반가온 아니지?"
그의 표정이 굳었다. 무던했던 얼굴이 순식간에 표정을 잃고 무채색의 가면처럼 변했다.
"승인자는 반가온이 맞다."
그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더 이상 매점 직원의 것이 아니었다. 포스기에서 들었던 기계음, [검은 우산, 04번]이라고 말했던 그 무미건조한 음성이었다.
"하지만 나는 반가온의 이름과 권한을 빌려 쓰는 대리인일 뿐."
그가 컵라면 위에 올려두었던 조의금 봉투를 집어 들었다. 봉투 뒷면에는 검은 우산 모양의 도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승인 완료."
그가 봉투를 포스기 카운터 위에 툭 던졌다.
띠링.
포스기에서 영수증이 출력되는 날카로운 기계음이 매점의 침묵을 찢었다.
윤서하가 스틱을 휘두르며 남자에게 달려들었지만, 그는 이미 데이터 조각이 되어 허공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곳에 있던 건 진짜 육체가 아니라, 승인을 위해 구현된 임시 아바타였던 것이다.
나는 바닥에 떨어지는 영수증을 낚아채듯 주워 올렸다.
손끝에 느껴지는 영수증 종이의 감각. 이건 현실이다. 그리고 이 현실 위에, 붕괴하는 기록망의 마지막 승인 결과가 찍혀 있었다.
[결제 승인: 반가온]
[실사용자: 검은 우산 04번]
[승인 메모: KDY 원본 코드 이식 완료 - 임시 증인 대기 중]
"...젠장."
내 기억이 다시 한 번 '임시 증인'이라는 코드로 요동쳤다.
진짜 반가온은 어디에도 없었다. 우리는 그저 검은 우산 04번이 파놓은 덫에 걸려 한지율을 지상 1층으로, 이 매점으로 데리고 온 꼴이 되었다.
그리고 그 04번은, 이미 한지율의 손목에 있던 코드를 내게 이식하는 승인을 마친 상태였다.
작가의 말: 컵라면 익는 3분은 생각보다 긴 시간입니다. 특히 그 사이에 누군가 내 인생을 승인하고 있다면 더더욱요.
✦ 작가의 말
도윤이와 한지율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충돌하기 시작했습니다. 반가온의 이름은 떴지만, 진짜 손은 아직 검은 우산 뒤에 숨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