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8-229화. 귀가 거부자의 증언 보관실
228화. 귀가 거부자의 자격
[강도윤]
“내리실 문은…… 없다고?”
안내방송의 건조한 목소리가 고막을 긁었다. 보통 지하철역이라면 문이 열리고, 승객이 발을 내디뎌 플랫폼으로 나가는 게 상식이다. 하지만 이 미친 열차의 시스템은 상식을 ‘투척’이라는 단어로 대체해버렸다.
쿠우우웅―!
열차가 급제동하며 객차 전체가 비틀거렸다. 나는 가온이와 아이를 양팔로 껴안고 구석의 안전 바를 생명줄처럼 붙잡았다. 윤서하 씨도 창백해진 얼굴로 내 팔을 붙들었다.
“도윤 씨, 저거 봐요!”
그녀가 가리킨 창밖에는 내가 매일같이 드나들던, 지겹도록 익숙한 4층짜리 원룸 건물이 서 있었다. 공동현관문 옆에 덕지덕지 붙은 ‘무단투기 금지’ 경고문, 계단실 창틀에 쌓인 뽀얀 먼지, 그리고 1층 필로티 주차장 구석에 누군가 던져둔 편의점 비닐봉지까지. 봉투 안에는 먹다 남은 삼각김밥 껍데기와 다 마신 캔커피가 들어있는 것까지 보였다.
그건 환각이라기엔 너무나 지독하게 생활감이 넘치는 풍경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창문에 불이 꺼진 채 검은 우산들이 깃발처럼 걸려 있는 모습은, 그곳이 더 이상 내가 알던 ‘집’이 아님을 선언하고 있었다.
[ ― 본인 확인 절차를 개시합니다. ]
[ ― 귀가 대상자 : 강도윤. ]
[ ― 확인 방식 : 수하물 투척. ]
“잠깐, 투척이라니! 내가 쓰레기봉투야? 종량제 봉투도 안 씌우고 어디를 던져!”
불안이 목구멍까지 차오르자 헛소리가 튀어나왔다. 하지만 농담으로 넘길 상황이 아니었다. 열차의 유리창이 서서히 흐물거리기 시작했다. 고체가 액체로 변하는 듯한 기괴한 일렁임. 창밖의 원룸 건물이 마치 거대한 아가리를 벌린 괴물처럼 우리를 빨아들이려 하고 있었다.
물리적인 중력이 아니라, 공간 자체가 우리를 밀어내는 감각이었다. 발바닥이 바닥에서 뜨고, 몸이 창문 쪽으로 쏠렸다.
“형! 냄새가 이상해!”
가온이가 내 품에서 코를 킁킁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저 건물, 형네 집 모양인데 형 냄새가 하나도 안 나! 대신 그…… 우산 아저씨한테 났던 라벤더 방향제 냄새랑, 젖지도 않은 비닐 냄새가 꽉 차 있어! 그리고 엄청 오래된 편의점 영수증 잉크 냄새도!”
잉크 냄새? 가온이의 말에 나는 창밖의 원룸 1층, 우편함 함체에 시선을 고정했다. 202호. 내 이름이 적혀 있어야 할 우편함에 하얀 종이 한 장이 삐져나와 있었다.
“서하 씨, 저기 봐요! 저게 제 집인가요?”
서하 씨는 가슴팍의 명찰을 꾹 누르며 창밖을 응시했다. 그녀의 명찰에 간 균열이 보랏빛으로 번쩍이며 시스템의 정보를 억지로 긁어모으고 있었다.
“……아니요. 저건 ‘주소’일 뿐이지 ‘집’이 아니에요. 시스템에서 판정하는 집의 조건은 주거지가 아니라, ‘돌아왔음을 누군가 확인해 주는 장소’예요. 그런데 저기엔 아무도 없어요. 도윤 씨를 맞아줄 사람도, 도윤 씨가 돌아왔음을 증명해 줄 기록도…… 전부 지워졌어요.”
“지워졌다고요?”
그때, 내 품에 안겨 있던 아이가 작은 손가락으로 창밖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아이의 눈동자는 공포로 잘게 떨리고 있었다.
“……저기서 누가 아저씨 이름을 지웠어.”
“뭐? 누가?”
“검은 우산을 쓴 아저씨가…… 아저씨가 오기 전에 저기 가서 슥슥 지우고, 다른 걸 적어 넣었어. 그래서 아저씨 자리가 없대. 저긴 이제 아저씨 집이 아니야.”
아이의 목소리는 낮고 확신에 차 있었다. 742일 전의 기억일까, 아니면 이 공간이 보여주는 잔혹한 진실일까.
나는 오른손의 ‘계산원’ 낙인에 집중했다. 욱신거리는 통증과 함께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잔향청취] 스킬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폭주하듯 터져 나왔다.
시공간이 뒤틀리며 742일 전의 풍경이 겹쳐 보였다.
비가 오던 밤이었다. 하지만 빗줄기는 그 원룸 건물에 닿지 않았다. 누군가 검은 우산을 쓴 채 내 자취방 앞 우편함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익숙한 동작으로 202호 우편함에서 편의점 영수증 한 장을 꺼냈다. 내가 퇴근길에 무심코 던져두었을, 날짜와 금액이 찍힌 종이였다.
[ 틱, 티틱― ]
금속성 라이터를 켜는 소리. 익숙했다. 문태식 점장의 것이 분명한 그 딸깍 소리.
하지만 우산을 든 남자의 손목에는 기괴한 바코드 낙인이 찍혀 있었다. 그는 검은 우산의 손잡이 끝부분을 영수증 위에 꾹 눌렀다.
그 손잡이 끝에는 도장이 달려 있었다.
[ 귀가 완료 ]
푸른색 잉크가 영수증 위를 덮었다. 아니, 그건 잉크라기보다 어떤 ‘확정된 사실’을 새기는 낙인 같았다.
[ ― 자, 이걸로 강도윤은 집에 도착한 겁니다. 기록상으로는 말이죠. ]
남자가 낮게 읊조렸다. 라벤더 방향제 냄새가 진동했다. 그는 영수증을 다시 우편함 깊숙이 밀어 넣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진짜 강도윤이 아직 일터에서 돌아오기도 전에, 누군가 ‘강도윤의 귀가’라는 행위를 먼저 결제해버린 것이다.
그 결제가 끝난 순간, 나는 돌아갈 곳을 잃은 ‘미수령 수하물’로 전락했다.
“이런 미친…… 내 월세가 얼마짜리 방인데!”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내 삶의 한 조각을 누군가 가로채서 제멋대로 도장을 찍어버렸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었다.
쿠웅!
열차가 다시 한번 크게 흔들렸다. 창문의 경계가 완전히 무너졌다. 이제 공기는 우리를 밖으로 밀어내는 수준이 아니라, 거대한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으아악! 도윤 씨!”
“형!”
가온이의 몸이 공중으로 붕 떴다. 나는 이를 악물고 녀석의 발목을 낚아챘다. 다른 한 손으로는 아이를 안고, 어깨로는 서하 씨를 지탱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내 이름표 [미수령]과 아이의 [임시 승객권]만으로는 이 열차에 머물 ‘자격’이 부족했다.
‘귀가 완료’라는 위조된 기록이 존재하는 한, 시스템은 나를 이 가짜 집으로 던져버리려 할 것이다. 그리고 불 꺼진 창문 너머로 던져지는 순간, 나는 영원히 저 검은 우산들의 장식품이 되겠지.
“서하 씨! 방법이 없나요? 이대로는 다 같이 튕겨 나가요!”
서하 씨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가슴팍에 달린 명찰을 움켜쥐었다. 그녀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결심을 굳힌 듯한 표정.
“도윤 씨, 제 명찰을…… 당신 이름표랑 같이 잡으세요!”
“네? 하지만 이건 서하 씨 건데…….”
“제 명찰은 ‘보호자 후보’용이에요. 아직 확정되지 않은 권한이지만, 대리인으로서 누군가의 존재를 ‘확인’해 줄 수 있는 기능이 있어요. 제가 도윤 씨의 귀가를 저 집이 아니라, 이 열차 안에서 확인해 주겠다고 선언하는 거예요!”
“그게 가능해요?”
“비용은 제가 감당할게요. 빨리요!”
나는 주저하지 않고 그녀의 손위에 내 오른손을 겹쳤다. [미수령] 이름표와 아이의 승객권, 그리고 서하 씨의 명찰이 하나로 묶였다.
“나, 윤서하는…… 미수령 승객 강도윤과 임시 승객 M-17의 보호자 대리인으로서, 이들의 귀가 위치를 재설정합니다!”
서하 씨의 외침과 함께 그녀의 명찰에 거대한 균열이 갔다. 쩍, 하는 소리가 객차 안에 서늘하게 울려 퍼졌다.
[ 띠링― ]
[ 긴급 판정 개시…… ]
[ 확인자 : 윤서하 (대리인 자격) ]
[ 수령인 : 강도윤, M-17 ]
[ 판정 내용 : 공동 보호 확인을 통한 ‘일시적 귀가 보류’ ]
순간, 우리를 밀어내던 강력한 압력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붕 떴던 몸들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하아, 하아…….”
나는 거친 숨을 내쉬며 바닥을 짚었다. 살았다. 하지만 안도의 한숨은 길지 않았다. 내 손밑에서 서하 씨의 명찰 파편이 바스러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열차 상단의 전광판이 미친 듯이 점멸했다. 시스템의 오류를 수정하는 과정에서 서하 씨가 숨기고 싶어 했던 정보들이 노이즈 섞인 화면 위로 짧게 스쳐 지나갔다.
[ 대상자 : 윤서하 ]
[ 대리 확인 1회 수행 ]
[ 위반 내역 : 원본 열람 제한 구역 무단 진입 기록 감지 ]
[ 패널티 : 대리인 자격 등급 하향 ]
“서하 씨……?”
나는 전광판과 그녀를 번갈아 보았다. 원본 열람 제한 구역? 그녀가 나 몰래 시스템의 깊숙한 곳을 뒤졌다는 뜻인가? 서하 씨는 고개를 숙인 채 깨진 명찰을 손으로 가렸다. 그녀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묻고 싶은 게 산더미 같았지만, 열차는 질문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 딩동― ]
창밖의 원룸 건물이 빠르게 뒤로 밀려나며 다시 어둠이 찾아왔다. 안내방송이 평소보다 훨씬 더 무겁고 눅눅한 톤으로 변했다.
[ ‘불 꺼진 창문’ 역을 통과합니다. ]
[ ‘투척’ 절차가 실패함에 따라, 미결제 품목을 대조실로 이송합니다. ]
[ 다음 역은 ‘증인 보관실’, ‘증인 보관실’ 역입니다. ]
증인 보관실. 그 이름이 나오자마자 객차 안의 공기가 급격히 차가워졌다. 가온이가 내 등 뒤로 숨으며 속삭였다.
“형…… 저기, 객차 끝 문에…… 누가 서 있어.”
나는 고개를 돌려 열차의 연결로 쪽을 보았다. 불투명한 유리문 너머로 누군가의 실루엣이 보였다. 그는 젖지 않는 검은 우산을 지팡이처럼 짚고 서 있었다.
치익―.
스피커의 노이즈가 기분 나쁜 웃음소리처럼 들리더니, 문태식 점장의 목소리와 소름 끼칠 정도로 닮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 아아, 손님 여러분. 안내 말씀 드립니다. ]
연결로의 문이 천천히 열렸다. 라벤더 향기가 파도처럼 객차 안을 덮쳤다.
[ ― 혹시, 분실된 라이터를 찾으러 오셨습니까? 아니면…… 아직 찍지 못한 도장을 찾으러 오셨습니까? ]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것은, 누군가의 손목에 새겨진 선명한 바코드 낙인이었다.
229화. 증언의 점화 장치
치익, 치이익―.
스피커가 찢어지는 듯한 노이즈가 고막을 긁고 지나갔다. 연결로의 문이 열리자마자 쏟아져 들어온 것은 질식할 것 같은 라벤더 향기였다. 평소라면 방향제 냄새라고 반겼겠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의 라벤더는 죽은 자의 몸 위에 뿌려진 조화 냄새보다 더 역했다.
그 안개 같은 향기 너머로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검은색 안내원 제복. 구김 하나 없이 빳빳한 그 옷차림 위로 젖지 않는 비가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남자의 얼굴은 그림자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들고 있는 길쭉한 검은 우산과 손목의 선명한 바코드 낙인은 내 심장을 바닥으로 떨어뜨리기에 충분했다.
[ ― 혹시, 분실된 라이터를 찾으러 오셨습니까? ]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나는 하마터면 "점장님?"이라고 부를 뻔했다.
문태식. 내가 742일 전까지 형이라 부르며 따랐던, 그 짠돌이 편의점 점장의 목소리와 소름 끼칠 정도로 똑같았다. 담배에 찌든 중저음과 특유의 끝을 흐리는 비음까지.
나는 가슴팍을 짓누르는 공포를 애써 농담으로 밀어냈다. 입술이 바르르 떨렸지만, 헛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저기요, 안내원 양반. 유실물 센터 직원이 이렇게 불길하게 등장하는 건 서비스업 규정 위반 아닙니까? 고객 만족도 조사하면 내가 별점 1점도 아까워서 반 개 줄 것 같은데."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옥타브 높았다. 내 안의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저건 문태식이 아니다. 하지만 문태식의 무언가를 뒤집어쓰고 있는 존재다.
"형……."
가온이가 내 옷자락을 꽉 쥐었다. 녀석의 코가 실룩거렸다.
"냄새가 이상해. 라벤더 냄새가 너무 진한데, 그 밑에 아주 얇게…… 형네 점장님 냄새가 섞여 있어. 매일 마시던 캔커피랑 싸구려 담배 냄새. 그런데 그게 살아있는 사람 냄새가 아니라, 아주 오래전에 말려버린 종이에서 나는 냄새 같아."
"말린 종이?"
나는 안내원을 응시했다. 그는 내 농담에는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가락 사이에는 낡은 금속제 지포 라이터 하나가 들려 있었다. 문태식이 늘 주머니에 넣고 만지작거리던, 모서리가 반질반질하게 닳은 바로 그 물건이었다.
[ 틱, 티틱― ]
안내원이 라이터 덮개를 열고 부싯돌을 튕겼다. 작은 불꽃이 일렁이는 순간, 허공에서 기괴한 현상이 일어났다.
[ ― 야, 도윤아. 넌 그냥 모르는 척하고 집에 가라. 응? 이건 형이 알아서 계산할 테니까……. ]
불꽃의 흔들림에 맞춰 문태식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스피커를 통한 방송이 아니라, 불꽃 그 자체가 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742일 전, 내가 마지막으로 들었던 점장님의 목소리 중 일부였다.
"……점장님?"
내가 무의식적으로 한 발짝 다가서려 하자, 옆에 있던 아이 M-17이 내 팔을 강하게 붙들었다. 아이의 얼굴은 밀랍 인형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아저씨, 가지 마. 저 사람은 나를 데리러 온 사람이 아니야."
아이가 잇새를 누르며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 사람은…… 나를 반품하러 온 사람이야. 쓸모없어진 물건을 창고로 다시 집어넣으러 온 사람이라고!"
반품. 그 단어가 주는 서늘함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왔다.
윤서하 씨는 깨진 명찰 조각을 손에 쥔 채, 안내원과 라이터를 번갈아 보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정보를 읽어내기 위해 격렬하게 흔들렸다. 명찰의 균열이 커질 때마다 그녀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도윤 씨, 조심하세요. 저 안내원은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에요. '증인 보관실'의 관리 단말기 같은 거예요. 그리고 저 라이터…… 저건 단순한 유실물이 아니에요."
서하 씨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을 이었다.
"저건 '점화 장치'예요. 증인 보관실은 사람을 가두는 감옥이 아니라, 세상 밖으로 나가면 안 되는 '증언'들을 박제해서 보관하는 장치예요. 저 라이터를 켜는 행위가 보관된 증언을 재생하는 스위치인 거죠."
[ ― 정확한 해석입니다, 보호자 대리인. ]
안내원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하지만 그 동작은 예의 바르다기보다 기계적인 정중함에 가까웠다.
[ ― 증인은 입을 열 때만 가치가 있는 법. 하지만 열어서는 안 될 입은 닫아두는 것이 이 열차의 규정입니다. 강도윤 님, 당신의 742일 전 기록은 이곳에 '미결제' 상태로 묶여 있습니다. 이 라이터를 받으시겠습니까? ]
안내원이 라이터를 든 손을 내 쪽으로 더 뻗었다.
[ ― 이걸 받으면, 문태식 씨가 당신에게 마지막으로 남기려 했던 증언의 전문을 들을 수 있습니다. 결제 오류의 원인도, 당신이 왜 '미수령 수하물'이 되었는지도 알게 되겠지요. ]
달콤한 제안이었다. 지난 2년 동안 나를 괴롭혔던 모든 의문을 풀 수 있는 열쇠가 눈앞에 있었다. 하지만 내 오른손의 '계산원' 낙인이 미친 듯이 박동하며 경고를 보냈다.
[ 시스템 경고 : 해당 물품 수령 시 '증인 보관실 입고' 상태로 전환됩니다. ]
[ 주의 : 입고된 물품은 수령인이 나타날 때까지 외부 출입이 금지됩니다. ]
미친. 라이터를 손에 쥐는 순간, 나도 저 유리 사물함 속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는 뜻이다. 증언을 듣는 대가로 나 자신이 '증언'이 되어 박제되는 셈이었다.
"와, 사은품 치고는 조건이 너무 빡센데? 편의점에서 1+1 행사할 때 '증정품으로 영혼을 내놓으세요'라고 하면 누가 사겠어요? 이거 완전 악질 상술이네."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굴렸다. 받지 않으면 단서는 영영 사라진다. 받으면 나는 여기서 끝이다.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나는 이 열차의 승객이 아니라 '계산원' 권한을 가진 변수다.
"안내원 양반. 내가 그쪽한테 배운 게 하나 있거든요."
나는 천천히 오른손을 뻗었다. 안내원은 라이터를 건네줄 준비를 하며 미동도 하지 않았다.
"물건을 받을 때는 직접 손으로 받는 방법만 있는 게 아니라고요."
나는 라이터를 쥐는 대신, 공중에 대고 손가락을 튕겼다.
"계산원 권한 행사. 미결제 품목에 대한 '임시 보관 영수증' 발행."
[ 띠링―! ]
[ 권한 확인 중…… ]
[ 계산원 '강도윤'의 서명 확인. ]
내 오른손의 낙인에서 푸른 빛이 뿜어져 나왔다. 안내원의 손에 들려 있던 라이터 위로 투명한 영수증 한 장이 길게 소환되어 감겼다.
[ 품목 : 문태식의 점화 장치 (증언 스위치) ]
[ 상태 : 임시 보관 중 (수령 보류) ]
[ 보관 장소 : 승객 강도윤의 귀속 공간 ]
"어이쿠!"
나는 영수증 꼬리를 낚아채서, 그대로 내 발밑에 떨어져 있던 낡은 이름표 하나에 라이터를 묶어버렸다. 내 몸에 직접 닿지 않게, 시스템상의 '바닥 물건'과 라이터를 연결해버린 것이다.
안내원의 고개가 기괴한 각도로 꺾였다. 계산에 없던 행동이라는 듯, 그의 바코드 낙인이 붉게 점멸했다.
[ ― ……편법이군요. ]
"편법이라니, 정당한 권리 행사라고 해주죠. 난 지금 바빠서 나중에 수령할 테니까, 일단 이 이름표랑 같이 임시 보관해두는 겁니다. 보관료는 나중에 내릴 때 한꺼번에 정산할게요."
라이터가 바닥에 닿자마자, 불꽃이 한 번 더 튀었다. 이번에는 안내원의 의지가 아니라, 영수증에 기록된 잔향이 억지로 터져 나오는 소리였다.
[ ― ……아직 계산하면 안 돼! ]
문태식의 목소리가 객차 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평소의 비겁하고 쩨쩨하던 목소리가 아니었다. 무언가에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절규에 가까운 외침이었다.
[ ― 강도윤 그 녀석은 아직이야! 걔는 건드리지 마! 내가…… 내가 대신 보관될 테니까! ]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점장님이 나를 팔아넘긴 게 아니었다. 오히려 나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증인'으로 던졌던 것이다.
직후, 차갑고 낯선 다른 목소리가 이어졌다.
[ ― 거래 성립. 증인은 보관실로 입고한다. 해당 품목 강도윤은 '미결제' 처리 후 방치함. ]
그 소리를 끝으로 라이터의 불꽃이 꺼졌다.
객차 안은 무거운 침묵에 잠겼다. 가온이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고, 서하 씨는 떨리는 손으로 내 어깨를 짚었다. 나는 바닥에 묶인 라이터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742일 전.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그날의 진실은, 내가 버려진 게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지켜진 시간이었다.
[ 딩동― ]
열차의 속도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창밖으로 어슴푸레한 푸른 빛이 번지기 시작했다. 안내원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문 옆으로 물러나 섰다.
[ 이번 역은 우리 열차의 중간 종착지, ‘증인 보관실’ 역입니다. ]
[ 내리실 때에는 잃어버린 기억과 두고 온 증언이 없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치이익―.
열차 문이 열렸다.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지하철 플랫폼이 아니었다. 끝도 없이 이어진 거대한 도서관, 혹은 거대한 창고 같았다. 천장 끝까지 닿을 듯한 수천, 수만 개의 유리 사물함들이 격자무늬로 배열되어 있었다.
그 유리 상자 안에는 사람이 들어있지 않았다. 대신, 살아 움직이는 말풍선들이 마치 갇힌 새처럼 투명한 벽을 두드리고 있었다. 수많은 문장과 단어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환청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그리고 우리 앞에 가장 먼저 나타난 사물함.
그곳에는 낡은 편의점 조끼가 한 벌 걸려 있었고, 전면 유리에는 굵은 매직으로 쓴 것 같은 글씨가 떠 있었다.
[ 관리 번호 : 742-MT ]
[ 품목 : 문태식 / 미개봉 증언 ]
[ 수령 권한 : 강도윤 ]
"……점장님."
내 목소리가 공허한 복도에 울려 퍼졌다. 사물함 속의 편의점 조끼가 마치 내 목소리에 반응하듯 미세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 사물함 바로 옆, 아직 이름표가 붙지 않은 빈 사물함 안에는 젖지 않는 검은 우산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 다음 수령 대기자 : M-17 ]
아이의 손이 내 손바닥 안에서 얼음처럼 차갑게 식어가는 것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