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51화. 사망 예정자와 문태식 녹취록
제목: 50-51화. 사망 예정자와 문태식 녹취록
제목: 50화. 사망 예정자 출석 확인
문손잡이가 삐걱이며 안쪽으로 돌아갔다. 3분 12초. 손목의 태그 타이머는 마치 세상의 모든 째깍거림을 압축한 것처럼 요란하게 숫자를 깎아먹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시스템은 기어이 내게 죽음을 종용하는 것인가. 아니, 그보다 더 빡치는 것은 바로 그 다음 문구였다.
[사망 예정자 강도윤]
[출석 확인 필요]
사망 통보? 이해한다. 예정 시각? 받아들일 수 없지만, 그렇다 쳐 주지. 그런데 출석 확인이라니. 내가 지금 이 상황에 지각한 학생이라도 되는 건가? 아니면 직장인이라도 되는 건가? 죽으러 가는 길에도 회사 사규 준수하듯 출석부에 이름 석 자 박아야 하는 거냐고. 속에서부터 울컥 치밀어 오르는 분노가 머리끝까지 솟구치려다, 이내 허무하게 사그라들었다. 그래, 죽음을 앞두고 이딴 행정 절차에 빡칠 에너지가 있다면 차라리 도망치거나 싸우는 데 쓰는 게 맞지. 나 지금 무려 사망 예정자 강도윤인데. 죽음을 코앞에 두고도 현실적인 이성만 남아 나를 붙잡는 꼴이라니. 웃기지도 않았다.
문이 스르륵 열렸다. 예상했던 괴물의 기척은 없었다. 검은 우산의 본체도, 그림자 속에서 꿈틀거리는 무언가도 아니었다. 대신 오래된 나무 냄새, 쿰쿰한 종이 냄새, 그리고 흙먼지 냄새가 훅 끼쳐왔다. 심사실 안으로 밀려들어 온 것은 7년 전의 풍경이었다. 오래된 나무 교탁이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제자리를 잡았다. 낡은 교실 문턱이 복도 바닥처럼 심사실의 맨바닥과 어긋나게 겹쳐졌다. 그리고, 쨍그랑! 귀를 찢을 듯 날카로운 종소리가 울렸다. 정규 수업을 알리는 종소리가 아니라, 종착역에 닿은 기차의 마지막 경적처럼 아득하게 퍼지는 소리였다.
윤서하가 내 손목을 꽉 붙들었다. 차가운 손끝이 태그의 열기를 식히는 듯했다. “도윤 씨, 시스템이 시키는 대로 하지 마세요. 절대로.”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침착했지만, 미세하게 떨리는 진동이 느껴졌다. 내 시선은 문 안쪽에서 흘러나온 것, 교탁 위에 펼쳐진 낡은 출석부에 고정되어 있었다. 물에 젖은 흔적이 역력한 누런 종이, 잉크가 번지고 얼룩진 이름들이 마치 살아있는 듯 꿈틀거리는 착각이 들었다.
[사망 예정자 강도윤]
[출석 확인 필요]
문구가 다시 한번 눈앞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출석부의 잔향이 나를 집어삼키려는 듯 끌어당겼다. 마치 출석부에 적힌 이름 중 하나가 되기를 종용하는 것처럼. 시스템은 나를 사망 예정자 강도윤으로 처리하려 하고 있었다. 이 출석부에 내 이름을 올리는 순간, 현재의 강도윤은 기록상에서 소멸하고 KDY-00이라는 승인 계정과 합쳐질 터였다. 그게 이현우를 지우고 04번 생존자를 숨겼던 방식이었겠지. 나를 그렇게 만들려는 거였다.
“따라 하지 마.” 윤서하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녀답지 않은 짧고 단호한 반말에 가까운 어조였다. 감정을 억누르던 한계선이 잠시 무너진 것 같았다. 그녀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고, 내 손목의 태그 타이머가 멈춘 듯 깜빡였다.
한편, 한지율은 문 안쪽의 교실로 이미 몸이 기울어지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초점을 잃고 멍한 상태였다. “04번… 나… 04번인가….”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불안하게 흔들렸다. 04번 생존자의 잔향이 그녀를 더 강하게 끌어당기는 모양이었다. 그녀의 발이 교실 문턱을 넘으려는 찰나, 나는 기어코 소리쳤다.
“한지율!”
내 목소리에 그녀의 몸이 기우뚱 멈췄다. 푸른 눈동자에 아주 희미하게 초점이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04번이 아니라, 한지율을 불렀다. 그녀의 현재 이름. 그 이름이 그녀를 붙잡고, 이 세계에 다시 고정시키는 주문처럼 작용했다. 간신히 한지율은 문턱 앞에서 멈춰 섰다.
나는 윤서하의 경고를 상기하며 출석부를 노려봤다. 이놈의 시스템은 내가 죽음을 거부하면 결석 처리라도 할 생각인 건가? 아니면 그냥 무단 사망으로 처리하고 내 영혼에 벌점이라도 매기려나? 죽는 것도 행정 절차를 거쳐야 한다니, 정말이지 이 세계의 행정 시스템은 과하게 꼼꼼했다.
내 손이 떨리는 윤서하의 손을 지나, 물에 젖은 출석부 위로 천천히 뻗어갔다. 손끝이 젖은 종이의 차가운 표면에 닿았다. 잉크가 번진 이름들 사이로 오래된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강도윤… 이 이름이 누군가를 감추는 데 쓰이겠지만… 언젠가 진짜 ‘강도윤’이 이 이름을 가지게 될 거야. 그때까지… 잘 숨어 있기를 바라야지.”
문태식의 목소리였다. 잔향처럼 울리는 그 목소리는 마치 과거의 나에게 닿으려는 듯 아득했다. 그가 KDY-00이라는 계정이 언젠가 실제 인물인 나를 지칭하게 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건가? 그가 이현우와 04번을 숨기려 했던 것이라면… 그는 선의였을까? 아니면 또 다른 함정이었을까? 그의 말 속에는 알 수 없는 경고와 체념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단정할 수 없었다. 그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문득, 출석부의 한 귀퉁이, 04번이라고 적힌 칸이 눈에 들어왔다. 그 옆에는 붉은색 펜으로 결석이라는 글자가 거칠게 휘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글자 아래, 아주 희미한 잔향이 느껴졌다. 마치 누군가 급하게 지워버린 흔적처럼. 그 잔향 속에서 나는 한 가닥의 익숙한 기척을 느꼈다. 반가온이었다. 7년 전, 그가 04번을 결석 처리하여 기록이 더 이상 쫓지 못하게 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기록에 잡히지 않도록 숨겨준 것인가, 아니면 이현우와 다른 학생들이 더 깊이 묻히게 만든 원흉이었던가. 그것도 알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퍼즐 조각이었다.
타이머는 1분 37초를 가리키고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 나는 다시 한번 눈앞의 시스템 메시지를 노려봤다.
[사망 예정자 강도윤]
[출석 확인 필요]
사망 예정자로 출석할 수는 없다. 나는 강도윤이다. 현재의 강도윤.
나는 결심했다. 이 빌어먹을 행정 시스템은 빈틈이 많다고 배웠으니까.
“나는 사망 예정자 강도윤이 아니라, 현재명 강도윤입니다.” 내가 입을 열었다. 내 목소리는 뜻밖에 단호했다. “그리고 지금 출석이 아니라 지각 신고를 하러 온 겁니다.”
내 말에 윤서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지율의 흔들리던 시선도 내게로 향했다.
시스템 메시지가 일순간 혼란스럽게 깜빡였다.
[오류: 사망 예정자는 지각 신고가 불가합니다.]
[강도윤(KDY-00) 계정으로 출석 처리하시겠습니까?]
“아니요.” 나는 단호히 답했다. “나는 사망 예정이 아니라 생존 예정입니다. 그리고 헌터 협회는 생존 예정자에게도 지각이라는 행정 절차를 인정해야 합니다. 이게 협회 규정 아닙니까?”
어디선가 7년 전의 협회 행정 기록이 ‘삑’ 소리를 내며 오류를 뿜어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마치 구시대의 서버가 버벅거리는 소리 같았다. 협회 규정을 들이밀자, 시스템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이내 다시 새로운 문구가 떠올랐다.
[강도윤(현재명) 지각 신고 접수 완료.]
[기록 처리: 유예 (Suspension)]
내 손목의 태그 타이머가 0초에서 멈추지 않고, 유예라는 단어를 띄웠다. 일시적으로 죽음을 미룬 셈이었다. 나는 안도감과 동시에 또 다른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이 모든 것이 마치 누군가가 미리 설정해 둔 절차의 일부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였다. 내 손목의 태그에서 강도윤이라는 이름 중 강이라는 글자가 희미하게 사라졌다. 마치 오래된 스티커가 벗겨져 나가는 것처럼. 이름이 침식되고 있었다.
“도윤 씨!” 윤서하가 내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내 귀를 맴돌았다. “강도윤! 당신은 강도윤이에요!”
그녀가 내 이름을 힘주어 부르자, 사라졌던 강이라는 글자가 마치 잉크가 다시 스며들듯 흐릿하게 재조립되었다. 임시적으로는 붙잡아둔 셈이었다. 하지만 이 유예 상태가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알 수 없었다. 이 이름 침식은 결국 언젠가 완전히 나를 집어삼키겠지.
[유예 종료 전 확인 필요 기록 열람.]
[문태식 원본 확인 녹취록]
그리고, 그 다음 문장이 홀로 심사실 공중에 떠올랐다.
어디선가 문태식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7년 전의 잔향이 아니라, 지금 막 녹음된 듯 생생한 음성이었다.
“도윤아, 네가 이걸 듣고 있다면 나는 한 번 죽은 게 아니다.”
제목: 51화. 문태식 원본 확인 녹취록
“도윤아, 네가 이걸 듣고 있다면 나는 한 번 죽은 게 아니다.”
그 문장이 심사실의 공기를 찢었다. 7년 전 교실의 눅눅한 칠판 냄새와, 내가 서 있는 기록 열람실의 건조한 종이 냄새가 한데 뒤섞여 기괴하게 휘말렸다. 시스템 문구를 따라 하지 않고 ‘지각 신고’를 감행한 대가로 내 태그에서 ‘강’ 글자가 지워져 나간 직후였다.
서하 씨가 내 팔을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녀의 체온이 지워져 가는 내 존재의 가장자리를 간신히 붙들고 있었다.
그때, 주변 풍경이 비틀렸다. 심사실도, 교실도, 열람실도 아니었다. 사방이 방음 패드로 마감된, 비좁고 어두운 녹음실의 형상이 우리를 집어삼켰다.
녹취는 파일처럼 재생되지 않았다. 문태식이 죽기 직전 남긴 잔향이 층층이 벗겨지며 우리를 녹음실 안으로 밀어 넣었다.
[치이익—]
노후한 협회 녹취 장비가 돌아가는 삐걱거림이 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그 위로 빗소리가 겹쳤다. 열람실 천장에서 들리던 환청 같은 빗소리가 아니라, 7년 전 그날, 창문을 때리던 실제 빗소리였다.
그리고 낡은 교실 방송 스피커 특유의 하울링 섞인 잡음이 고막을 찔렀다.
[…아, 아. 마이크 테스트. 들리나?]
문태식의 목소리였다. 잔향 속에서 들었던 것보다 훨씬 지치고, 그러나 기묘하게 안도하는 듯한 어조.
[말했지. 난 한 번 죽은 게 아니라고. 도윤아, 이건 수수께끼가 아니야. 행정적 절차에 대한 설명이지.]
녹음실 한구석, 보이지 않는 책상 위에서 펜이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첫 번째 죽음은 서류 위에서였다. 너를 ‘04번 생존자’로 승인하고 내 이름을 그 옆에 적었을 때, 협회 기록 내에서 ‘팀장 문태식’의 공신력은 사망했다. 나는 미친놈, 혹은 배신자가 되었으니까.]
[두 번째 죽음은 이 우산 아래서였다.]
검은 우산의 그림자가 녹음실 바닥을 가로질렀다.
[이름을 포기한 자들을 확인하는 순간, 내 존재의 원본성이 뜯겨 나갔지. 그들이 나를 ‘확인자’로 부를 때마다, 나는 조금씩 진짜 나를 잃어갔어.]
[그리고 세 번째 죽음은, 지금 네가 듣고 있는 이 순간의 진짜 육체적 사망이다. 나는 이 기록을 남기기 위해 내 마지막 잔향을 연료로 쓰고 있거든. 꽤 가성비 떨어지는 장사지만, 어쩌겠냐. 회사원이 까라면 까는 거지.]
지독한 회사원식 농담. 하지만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의 소멸을 앞둔 자가 부리는 마지막 허세였다.
나는 서하 씨에게 붙잡힌 채로, 내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강’ 글자가 사라진 자리는 투명하게 비어 있었다. 서하 씨가 나를 부르지 않았다면, 나 역시 저 목소리처럼 다층적인 죽음을 맞이했을 터였다.
[시간이 없다. 도윤아. 잘 들어.]
문태식의 목소리가 방송 잡음을 뚫고 또렷해졌다.
[시스템은 지금 너를 ‘사망 예정자’로 출석시키려 할 거다. 7년 전 네가 버린 이름, 혹은 네가 뒤집어쓴 이름을 근거로.]
내 앞의 빈 허공에 7년 전 교실 출석부가 다시 떠올랐다. 젖어서 흐물거리는 종이 위, ‘04번’ 칸이 검게 그을려 있었다.
[거기에 대항하려 하지 마. 네 현재의 이름을 증명하려 애쓰지 마라. 그건 트랩이다. 네가 스스로를 증명하려 할수록, 시스템은 네 원본 데이터와 현재 데이터의 불일치를 파고들어 너를 ‘오류’로 규정하고 삭제할 테니까.]
그럼 어쩌라는 말인가. 이름이 지워져 가는데 증명하지 말라니.
[증명해야 할 것은 네 이름이 아니다.]
[네가 불렀던 이름들을 증명하라.]
그 순간, 내 등 뒤에 서 있던 지율이가 윽, 하고 신음했다.
출석부의 ‘04번’ 결석 처리 칸이 녹취 속 문태식의 목소리에 반응하며 거칠게 떨렸다. 그 진동은 04번의 잔향에 가장 근접해 있는 지율이를 잡아끌었다.
지율이의 실루엣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이름 태그, ‘한지율’이라는 세 글자가 7년 전의 결석자 명단 속으로 빨려 들어가려 하고 있었다.
“가… 온…?”
지율이가 멍한 눈으로 04번 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현재의 한지율이 아니었다. 7년 전, 무언가를 간절히 감추려 했던 반가온의 목소리에 가까웠다.
두 번째 트랩이었다. 내가 내 이름을 붙잡으려 하면 내가 지워지고, 지율이가 04번의 잔향에 휩쓸리면 그녀가 지워진다.
“한지율!”
나는 지체 없이 소리쳤다.
문태식의 단서가 머릿속에서 스파크를 일으켰다.
네가 불렀던 이름들을 증명하라.
나는 지금 내 이름을 붙잡기 위해 서하 씨에게 기댄 채, 지율이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 이현우의 이름을 불러 그를 대피시켰다. 그것들이 내가 가진 유일한 실체였다.
내 외침에 지율이의 눈동자가 초점을 되찾았다. 04번 칸으로 빨려 들어가던 그녀의 존재가 ‘한지율’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고정되었다.
하지만 대가는 바로 왔다.
콰아아—!
내 태그에서 ‘도’ 글자마저 희미해졌다. 이제 남은 것은 ‘윤’ 한 글자뿐이었다. 팔이 투명하게 비쳐 바닥이 보였다. 소름 끼치는 상실감이 전신을 덮쳤다. 이대로라면 5분도 버티지 못하고 나는 대기 중으로 흩어질 것이다.
[하하, 역시 넌 그렇게 할 줄 알았다.]
녹취 속 문태식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 그거면 됐다. 도윤아, 이 검은 우산은 사람의 이름을 훔치지 않아. 사람들이 스스로 이름을 포기하게 만들지. 공포로, 혹은 대가로. 하지만 네가 방금 한 행동은 그 반대다. 너는 네 이름을 대가로 바쳐 타인의 이름을 붙잡았어.]
[이것이 내가 남기는 마지막 ‘원본 확인’의 조건이다.]
갑자기 빗소리가 멈추고, 녹음실의 어둠이 걷혔다. 다시 심사실과 열람실이 겹쳐진 기괴한 공간으로 돌아왔다. 우리 앞의 허공에 거대한 시스템 팝업창이 떴다.
【경고: 원본 확인자 ‘문태식’의 최종 기록이 열람되었습니다.】
【시스템은 대상자(강도윤/윤/사망예정자)의 원본 일치 여부를 최종 판단합니다.】
【요청: 대상자는 자신의 ‘원본 이름’을 구술하여 승인 프로세스를 완료하십시오.】
타이머는 멈췄지만, 여전히 ‘유예’ 상태였다. 이제 내가 내 이름을 말하면, 시스템은 그것을 7년 전 데이터와 대조할 것이고, 불일치가 발견되면 나는 ‘사망 예정자’로 확정되어 지워진다.
말하지 않으면, 이대로 침식이 진행되어 지워진다.
진퇴양난.
나는 서하 씨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내 팔을 붙잡고 있었다. 내 몸이 투명해져 가는데도 그녀는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오히려 내 이름 태그가 지워질수록 그녀의 눈빛은 더 차갑게, 더 지독한 집중력을 띠고 가라앉았다.
“강도윤.”
그녀가 다시 내 이름을 불렀다.
그건 단순히 나를 붙잡는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지금 이 비합리적인 시스템의 요구를 정면으로 보고 있었다. 그녀의 냉정함이 나에게 전해졌다.
나는 문태식의 녹취를, 그 지독했던 회사원 선배의 마지막 조언을 떠올렸다.
네 이름을 증명하려 하지 말고, 네가 불렀던 이름들을 증명하라.
[원본 확인은 내가 하지만, 그 대가는 네가 치러야 할 거다.]
녹취의 마지막 문장이 뇌리를 스쳤다.
나는 심호흡을 했다. 지워져 가는 ‘윤’ 글자에 마지막 힘을 쏟았다.
시스템이 요구하는 ‘내 원본 이름’을 말하는 대신, 나는 내가 이 공간에서 확인하고 붙잡았던 실체들을 호명했다.
“나는 ‘원본’을 제출하지 않는다.”
내 목소리가 심사실에 울려 퍼졌다.
“대신, 이 기록의 목격자들과 그들이 증언하는 현재의 이름들을 제출한다.”
시스템의 소용돌이가 일시 정지했다. 예측하지 못한 입력값에 논리 회로가 덜컥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7년 전 결석자 04번이 아닌, 현재의 ‘한지율’.”
나는 지율이를 가리켰다. 지율이는 움찔했지만, 단단해진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 미스터리의 첫 번째 생존자, ‘이현우’.”
보이지 않지만, 그가 이 공간의 열람을 가능하게 했던 첫 번째 열쇠였음을 나는 알고 있다.
“그리고.”
나는 나를 붙잡고 있는 윤서하를 바라보았다.
“지금 내 존재를 증명하고 있는, ‘윤서하’.”
마지막으로 나는 나를 호명했다. 사라져가는 이름이 아니라, 그들이 부르고 있는 이름으로.
“그들이 부르는, 현재명 ‘강도윤’.”
“우리는 모두, 이 미스터리의 원본 목격자들이다.”
나 혼자의 이름이 아니다. 우리가 서로의 이름을 붙잡고 맺은 이 기괴한 연대 자체를 원본 데이터로 던져버린 것이다. 이것은 행정적으로 보면 일종의 ‘참고인 집단 진술’이자 ‘공동 보증’이었다.
【시스템 오류…! 논리적 모순 발생.】
【‘원본 확인’의 정의를 다시 판정합니다.】
【대상자의 단독 증언이 아닌, 목격자 집단의 공동 증언으로 접수 형식을 변경합니다.】
【분석 중…】
시스템 창이 격렬하게 점멸했다. 7년 전 교실의 잔향과 현재의 열람실 공간이 서로를 밀어내며 충돌했다.
콰앙—!
엄청난 충격파와 함께 주변 풍경이 산산조각 났다. 우리는 바닥에 나뒹굴었다.
[…윽.]
나는 거친 숨을 내쉬며 바닥을 짚었다. 손이 보였다. 불투명하게, 제대로 된 피부색을 띠고 있었다.
다급히 머리 위를 확인했다.
【강도윤】
‘강’ 글자가 돌아와 있었다. 침식이 멈춘 것이다.
우리의 공동 증언이 시스템의 논리 트랩을 임시로 우회하는 데 성공했다. 문태식이 남긴 단서는, 나 혼자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있을 때만 작동하는 열쇠였다.
[도윤 씨, 괜찮아요?]
서하 씨가 나를 부축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차분했지만, 나를 붙잡았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 역시 자신의 이름이 녹취와 증언에 연루되는 순간, 무언가 거대한 압박을 느꼈을 터였다. 하지만 그녀는 감정적으로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차갑게, 이 상황을 분석하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지율이도 구석에서 몸을 추스르며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가온이가… 나를 숨기려 했던 게 맞나요? 그리고 도윤 형 이름은….”
지율이가 물었지만,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문태식의 녹취는 많은 것을 암시했지만, 결정적인 것은 아직 보여주지 않았다.
그때, 우리 앞의 허공에 떠 있던 출석부와 시스템 창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새로운 홀로그램 파일이 떠올랐다.
문태식의 녹취록이 종결되면서, 다음 단계의 기록이 해금된 것이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그 파일의 제목을 읽었다.
【검은 우산 보관함: 살아 있는 결석자 명단】
이현우가 말했던 ‘사망자가 아닌 결석자’들의 명단인 듯했다. 그것은 7년 전 교실 출석부가 아니라, 협회 보안 포맷으로 작성된 현대의 파일이었다.
[서하 씨, 이것 보세요.]
내 목소리가 떨렸다.
파일의 첫 줄이 천천히 선명해졌다.
[1. 한지율 (C급 헌터, ID: HJZ-07, 전(前) 7년 전 04번)]
[2. 이현우 (무등급, ID: LHW-01, 첫 번째 생존자)]
문태식이 이 파일의 ‘원본 확인자’로 등록되어 있었다. 그는 이 이름을 가진 자들을 감시하거나, 혹은 보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 줄.
그 이름이 나타나는 순간, 심사실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지율이는 비명을 지르듯 입을 막았고, 서하 씨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크게 흔들렸다.
[3. ……]
거기에 적힌 이름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이름이었다.
[3. 윤서하 (A급 헌터, 제1공격팀장, 현(現) 목격자 및 공동 증언자)]
왜 그녀의 이름이 ‘살아 있는 결석자 명단’에, 문태식이 관리하던 그 위험한 명단에 올라와 있는가.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부축하고 있는 윤서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태그 위, A급 헌터라는 화려한 타이틀 아래로, 검은 우산의 잔향이 아주 미세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