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0-221화. 첫 번째 서명과 중첩된 서명의 대가
220화. 첫 번째 서명은 기록되지 않는다
[윤서하 / 보호자 후보]
아크릴 명찰 속의 글자가 형광등 불빛을 받아 차갑게 번득였다.
서하 씨는 얼어붙은 듯 그 명찰을 내려다보았다. 협회 수사관으로서 수많은 신분증과 명패를 봐왔을 그녀였지만, 자기 이름 뒤에 붙은 ‘보호자 후보’라는 기괴한 직함 앞에서는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그녀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명찰을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려가는 것을 보며 나는 짐짓 가벼운 말투를 던졌다.
“거봐요, 서하 씨. 내가 뭐라 그랬어. 아까 그 편의점 유통기한 지난 삼각김밥처럼 폐기 처분될 팔자는 아니라고 했잖아요. 후보긴 해도 일단 직함이 생겼는데, 이거 승진이라고 좋아해야 하나?”
입술을 놀리면서도 나는 내 왼손목을 슬쩍 등 뒤로 숨겼다.
농담이라도 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이 기괴한 정적에 잡아먹힐 것 같았다. 사실 농담이 아니라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다. 왼손의 마비는 이제 팔꿈치를 넘어 어깨 근처까지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단순히 감각이 없는 게 아니었다. 마치 내 몸의 일부가 ‘로그아웃’되는 기분이다.
‘잠깐, 내가 원래 숟가락을 어느 손으로 들었더라?’
당연히 오른손이었던 것 같은데, 순간적으로 뇌 회로에 과부하가 걸린 것처럼 확신이 서지 않았다. 오른손잡이로 삼십 년 가까이 살았는데, 이제 와서 젓가락질의 메커니즘을 의심해야 한다니. 보증의 대가라는 건 생각보다 치사하고 잔인했다. 단순히 힘을 뺏는 게 아니라, ‘나’라는 존재의 당연한 디테일들을 하나씩 압수해가고 있었다.
“……보호자.”
서하 씨가 신음하듯 내뱉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허공을 헤맸다.
“기억나요. 아주 잠깐…… 아주 차갑고 하얀 복도였어요. 병원이었나? 아니면 어디 지하 시설이었나. 아이는 울지 않았어요. 내 손에는 검은 우산이 들려 있었는데, 분명 밖에는 비가 쏟아지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우산 손잡이가 전혀 젖어 있지 않았어요. 마치 한 번도 펼친 적 없는 것처럼.”
그녀가 관자놀이를 짚으며 괴로운 듯 미간을 찌푸렸다.
“누군가 뒤에서 말했어요. ‘보호자 서명만 받으면 된다’고. 그게 절차의 끝이라고. 그런데 그 목소리가…….”
서하 씨의 시선이 역무실 안의 도니에게 향했다. 도니는 여전히 퀭한 눈으로 우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서하 씨의 명찰과 내 왼손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이봐, 도니.”
나는 도니의 책상을 툭툭 쳤다. 감각이 없는 왼손 대신 오른손으로.
“설명 좀 해봐. 보호자면 보호자지, 후보는 또 뭐야? 우리 서하 씨가 무슨 오디션 프로그램이라도 출연 중인 거야? 여기서 1등 하면 아이 키울 권리라도 주는 거냐고.”
도니의 입술이 경련하듯 움찔거렸다. 그는 내 왼손 보증 때문에 생긴 시스템 오류를 처리하느라 뇌 용량이 한계에 다다른 서버처럼 보였다.
“……원보호자 미회수.”
도니가 기계적으로 읊조렸다.
“해당 개체는 742일 전 ‘반품’ 절차에 들어갔으나, 원보호자의 회수 거부로 인해 임시 보관 상태로 전환되었다. 규정에 의거, 대체 보호자 후보 2인이 설정됨.”
그의 목소리가 지직거리는 노이즈와 섞여 들렸다.
“후보 1순위 윤서하. 사망 처리로 인한 권한 일시 정지. 후보 2순위…… 정보 오염. 계산원으로 강제 전환. 현재 시스템은 후보 1순위의 생존을 감지, 보호자 적격성 검증 단계로 복귀함.”
“잠깐, 후보 2순위가 계산원으로 전환됐다고?”
나는 도니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그럼 내 눈앞에 있는 이 퀭한 ‘나’가 원래는 보호자 후보였다는 소린가? 나랑 똑같이 생긴 놈들이 이 미친 지하철역 어딘가에 직렬로 배치되어 각자의 불행을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소름 끼쳤다.
그때, 내 바짓가랑이를 잡고 있던 가온이가 코를 킁킁거리며 서하 씨 곁으로 다가갔다.
“형, 명찰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
가온이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고 가라앉아 있었다.
“서하 누나 냄새만 나는 게 아니야. 아주 오래된 병원 소독약 냄새…… 그리고 그 검은 우산에서 나던 눅눅한 곰팡이 냄새가 섞여 있어. 아, 그리고 문태식 아저씨가 피우던 그 싸구려 담배 냄새도. 아주 조금이지만 확실하게 배어 있어.”
문태식. 그 인간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이 복잡한 퍼즐의 조각이 하나씩 맞춰지는 기분이 들면서도, 동시에 더 큰 구멍이 뚫리는 것 같았다. 그 아저씨는 대체 어디까지 발을 들이밀고 있었던 걸까.
아이는 서하 씨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여태껏 보여준 불안함이나 경계심과는 결이 다른 시선이었다. 그것은 마치, 창고 깊숙한 곳에 오랫동안 처박혀 있던 주인이 누구인지 가늠해보는 낡은 물건의 시선 같았다.
“……이 사람은 나를 버린 사람이 아니야.”
아이가 처음으로 입을 열어 서하 씨에 대해 말했다.
‘나를 구한 사람’도 아니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도 아니다. ‘버린 사람이 아니다’라는 부정의 긍정. 그 모호한 문장이 가슴 한구석을 찌릿하게 긁고 지나갔다.
“통과하려면 증명해.”
도니가 갑자기 상체를 내밀며 내 왼손을 낚아채려 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뺐다. 도니의 눈에는 이제 광기 어린 집착이 서려 있었다.
“기록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윤서하가 보호자가 되려면, 742일 전 그녀가 마쳤어야 할 ‘첫 번째 서명’을 찾아와야 해. 서명이 완성되지 않은 영수증은 폐기물일 뿐이다.”
도니가 역무실 뒤편의 낡은 철제 문을 가리켰다.
“저 안에 네가 잃어버린 서명부가 있다. 보증인이 동행하여 검증하라. 단, 왼손의 대가는 멈추지 않는다. 네가 기억을 잃기 전에 서명을 찾아내는 게 빠를지, 아니면 이 역의 부품이 되는 게 빠를지 결정해.”
철컥, 하고 역무실 뒤쪽의 문이 열렸다.
일반적인 역무원 휴게실이어야 할 공간이었지만, 문 너머로 흘러나오는 공기는 전혀 달랐다.
지하철역의 서늘함과는 다른, 미지근하고 끈적한 공기. 나는 침을 삼키며 서하 씨와 아이를 이끌고 문 안으로 발을 들였다.
“……여긴.”
서하 씨가 당혹스러운 듯 주위를 살폈다.
풍경이 일그러져 있었다. 오른쪽 벽면은 지하철 역무실의 타일 벽이었지만, 왼쪽 벽면은 장례식장 매점에서나 볼 법한 불투명한 유리 진열대가 늘어서 있었다. 진열대 안에는 소아용 수의처럼 보이는 작은 옷가지들과 조화, 그리고 ‘환불 불가’ 딱지가 붙은 장난감 자동차들이 기괴하게 뒤섞여 있었다.
천장에는 병원 소아과 병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름 모양 조명이 달려 있었지만, 그중 절반은 깨져서 스파크를 튀기고 있었다.
바닥에는 휠체어 바퀴 자국과 구두 굽 소리가 겹겹이 쌓인 채 지워지지 않는 얼룩으로 남아 있었다.
삶의 시작과 끝, 그리고 그사이의 가장 비극적인 순간들이 한 공간에 강제로 압축된 듯한 불쾌한 공간.
코끝을 찌르는 소독약 냄새에 머리가 어질거렸다. 왼손의 마비가 이제 목줄기까지 타고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가끔씩 내가 지금 누굴 데리고 여기 들어왔는지조차 깜빡깜빡했다. 방금 전까지 서하 씨라고 불렀던 여자의 성이 ‘윤’이었는지 ‘김’이었는지 헷갈려 입술을 깨물었다.
“도윤 씨, 저기요.”
서하 씨가 가리킨 곳은 공간 중앙에 놓인 낡은 접수대였다.
대학병원 원무과에서 떼어온 것 같은 낡은 플라스틱 데스크 위에는 두꺼운 장부 하나가 펼쳐져 있었다. 누렇게 변색된 종이들이 습기를 머금어 퉁퉁 불어 있었다.
우리는 홀린 듯 그 접수대로 다가갔다.
“이게…… 첫 번째 서명부?”
서하 씨가 떨리는 손으로 장부의 첫 페이지를 넘기려 했다. 하지만 장부는 이미 특정 페이지가 펼쳐진 상태로 고정되어 있었다.
[ 미등록 아동 보호자 위탁 기록 ]
그 제목 아래로 수많은 이름이 적혔다 지워진 흔적들이 가득했다. 어떤 이름은 피로 문지른 듯 붉게 번져 있었고, 어떤 이름은 칼로 파낸 듯 날카로운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리고 그 페이지의 가장 첫 번째 줄.
742일 전의 날짜가 찍힌 칸에, 우리가 그토록 찾던 서명이 남겨져 있었다.
나는 그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거기에는 윤서하의 이름이 적혀 있어야 했다. 그녀가 잃어버린 기억, 그녀가 마쳤어야 할 절차의 끝이 거기 있어야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곳에 적힌 이름은 정갈한 서하 씨의 필체가 아니었다.
삐딱하게 휘어지고, 마지막 획을 길게 빼는 버릇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너무나 익숙해서 소름 돋는 필체.
그것은 지금은 감각이 사라져가는 내 ‘오른손’으로 쓴 것이 분명한 내 이름이었다.
[ 강도윤 ]
날짜는 742일 전.
내가 헌터로 각성하기 전, 그저 편의점 야간 알바를 하며 하루하루를 때우던 평범한 민간인이었던 시절.
나는 아직 이곳에 오지 않았고, 이 아이를 만난 적도 없으며, 서명한 기억 따위는 더더욱 없다.
하지만 장부 속의 ‘강도윤’은 마치 오늘의 나를 기다렸다는 듯, 비릿한 잉크 냄새를 풍기며 나를 비웃고 있었다.
“……말도 안 돼.”
내 입에서 나온 목소리가 내 것 같지 않게 떨렸다.
왼손의 마비가 심장 부근까지 닿은 것처럼, 가슴이 차갑게 식어내렸다.
나는 내가 아직 하지 않은 서명을 보며, 서서히 지워져 가는 내 기억 속의 ‘나’를 붙잡으려 애써야 했다.
221화. 중첩된 서명의 대가
[강도윤]
장부의 첫 번째 줄, 누렇게 변색된 종이 위에 박힌 세 글자는 명백히 내 글씨였다.
단순히 닮은 수준이 아니다. '강'의 마지막 이응을 살짝 삐쳐 올리는 습관이나, '윤'의 니은을 길게 빼서 마무리하는 그 특유의 필체. 이건 초등학교 때부터 받아쓰기 점수 때문에 속을 썩이던 시절부터 굳어진,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내 오른손의 흔적이었다.
“……도윤 씨?”
서하 씨의 목소리가 멀게 들렸다. 그녀의 시선이 내 얼굴과 장부 위를 어지럽게 오갔다. 나는 대답하는 대신, 뒤로 숨겼던 오른손을 천천히 내밀었다.
감각이 사라진 왼손과 달리, 내 오른손은 미친 듯이 떨리고 있었다. 아니, 이건 떨림이 아니라 반응이었다. 장부 속의 잉크가 내 피부 아래 흐르는 혈액을 자석처럼 끌어당기는 기분. 손가락 끝이 장부 표면에 닿지도 않았는데, 손톱 밑이 아릴 정도로 욱신거렸다.
“아니야.”
나는 헛웃음을 삼켰다.
“나, 742일 전에는 여기서 알바 안 했어요. 그때는 그냥 평범한 동네 편의점 야간 알바였다고. 유통기한 지난 삼각김밥이나 까먹으면서 다음 달 방세 걱정하던 시기란 말입니다. 이런 기괴한 지하철역에 와서 서명 같은 걸 할 여유가 어딨어?”
내 말은 논리적이었다. 완벽했다. 적어도 내 머릿속의 연표에서는 그랬다.
하지만 부정하면 부정할수록, 코끝을 찌르는 낡은 종이와 잉크의 냄새가 뇌세포를 거칠게 헤집었다.
순간, 시야가 화이트아웃 되듯 하얗게 점멸했다.
—딸랑.
편의점 문에 달린 종소리가 들렸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새벽이었다. 습기로 눅눅해진 공기가 에어컨 바람과 섞여 비릿한 냄새를 풍기던 시간.
계산대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가 들고 있는 검은 우산만이 기억에 선명하게 박혔다. 밖에는 폭풍우가 몰아치는데, 그 우산은 빗방울 하나 묻어 있지 않은 채 보송보송하게 말라 있었다. 그 비현실적인 청결함에 소름이 돋았던 감각이 되살아났다.
그 사람 곁에 작은 아이가 있었다. 이름표도, 신발도 없는 아이.
나는 홀린 듯 포스기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거스름돈 통 구석에 굴러다니던 낡은 500원짜리 토큰 하나를 꺼내 그 아이의 손에 쥐여주었다.
『보호자 성함 적어주세요.』
누군가 그렇게 말했던가. 아니면 내가 물었던가.
나는 오른손에 모나미 볼펜을 쥐고, 그 젖지 않은 검은 우산을 든 사람 대신 장부 위에 내 이름을 적어 넣었다.
“……헉!”
숨을 들이켜며 현실로 돌아왔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방금 그건 환상인가, 아니면 내가 잃어버린 기억의 파편인가.
“도윤 씨, 괜찮아요?”
서하 씨가 내 어깨를 잡았다. 그녀의 손길에 정신이 조금 들었지만, 장부에서 시선을 뗄 수는 없었다. 서하 씨가 장부를 뚫어지게 응시하더니, 주머니에서 손전등을 꺼내 비췄다.
“잠깐만요. 서명이…… 이상해요.”
그녀가 장부를 가리켰다. 빛이 비스듬히 비치자, [강도윤]이라는 세 글자 밑에 숨겨진 흔적이 드러났다.
“글자가 한 겹이 아니에요. 도윤 씨의 필체 밑에, 다른 누군가의 서명이 먼저 적혀 있었어요. 그 위에 도윤 씨가 덧씌우듯 서명한 거예요. 마치 원래 있던 이름을 지워버리려는 것처럼.”
원래의 필체는 너무 희미해서 알아보기 힘들었다. 날카롭고 예리한 필체. 문태식의 것 같기도 했고, 어쩌면 서하 씨 자신의 것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형, 냄새가 이상해.”
가온이가 코를 킁킁거리며 장부 가까이 다가왔다. 녀석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세 겹이야. 형의 오른손에서 나는 그 진한 잉크 냄새가 제일 위에 있고…… 그 밑에는 문태식 아저씨의 지독한 담배랑 병원 소독제 냄새가 섞여 있어.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가온이가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비 냄새. 그런데 그냥 비가 아니야. 한 번도 내린 적 없는, 아주 차갑고 인공적인 비닐 냄새. 그 검은 우산에서 나던 냄새랑 똑같아. 형 냄새인데 형 냄새가 아니야. 형, 진짜 형 맞아?”
가온이의 질문은 비수가 되어 꽂혔다. 진짜 나? 그럼 이 장부에 이름을 갈겨쓴 742일 전의 나는 가짜란 말인가?
그때, 여태껏 내 옷자락을 잡고 침묵하던 아이가 손을 뻗었다. 아이의 작은 손가락이 장부의 첫 줄, 내 이름을 천천히 짚었다.
“이 사람은…….”
아이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그 눈동자 속에 비친 내 모습은 마치 깨진 거울 조각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계산대에 있었어.”
아이가 말했다.
“이름표를 달고, 500원을 줬어. 가지 말라고 했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계산대? 그건 편의점 알바였던 나를 말하는 건가, 아니면 역무실에서 퀭한 눈으로 우리를 보던 ‘도니’를 말하는 건가. 그것도 아니면, 742일 전의 기억 속에 박제된 또 다른 나를 말하는 건가.
기억의 실타래가 엉망진창으로 꼬여가던 그때였다.
치익, 치이익—!
접수대 뒤쪽, 장례식장 매점 진열대의 유리문이 예고도 없이 옆으로 스르르 열렸다. 자동문처럼 매끄러운 움직임이었다. 그 안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선반 한구석에 놓인 낡은 영수증 프린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작동하기 시작했다.
드르륵, 드륵.
흰 종이가 뱉어졌다. 나는 홀린 듯 그 영수증을 낚아챘다.
[ 결제 정보 : 보증 이전 승인 대기 ]
[ 메시지 : 첫 보호자 서명 정산 실패 ]
[ 사유 : 원보호자 권한 이탈 및 기록 오염 ]
[ 조치 : 대체 서명 요청 / 오른손 계산원 발령 완료 ]
[ 현재 상태 : 보증인 생존 확인 중 ]
영수증을 읽어내려가는 내내 뒷목이 서늘했다. ‘오른손 계산원 발령’. 그건 명백히 역무실의 도니를 뜻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체 서명’은 지금 장부 위에 덧씌워진 내 이름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했다.
“빌어먹을, 이거 완전 강매잖아.”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유통기한 지난 삼각김밥 환불해달라고 했더니, 편의점 통째로 인수하라는 격이네. 서비스 정신이 너무 과한 거 아닙니까?”
농담을 뱉었지만,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왼손의 대가는 이제 어깨를 넘어 목덜미까지 서늘하게 잠식하고 있었다.
갑자기, 머릿속의 전구가 깜빡거리는 것처럼 의식이 흐릿해졌다.
‘잠깐, 내 이름이…….’
분명 조금 전까지 영수증에 적힌 이름을 봤다. 내 성은 강 씨다. 강…… 강 뭐였지?
강도윤. 그래, 도윤이다.
그런데 왜 '도'라는 글자가 낯설게 느껴지는 걸까. 마치 평생 써온 단어가 갑자기 외국어처럼 낯설게 느껴지는 게슈탈트 붕괴 현상이 내 존재 자체에 일어나고 있었다.
강…… 강두? 강덕? 아니, 그건 너무 구리잖아. 내 이름은 좀 더 스마트한 느낌이었는데.
“도윤 씨! 정신 차려요!”
서하 씨가 내 팔을 거칠게 흔들었다. 나는 비틀거리며 접수대를 짚었다.
“아, 미안해요. 잠시 저혈당이 왔나 봐. 내가 원래 이름이 좀 흔하긴 하죠? 성이 뭐였더라, 아, 강…….”
입술이 달싹였지만, 다음 글자가 나오지 않았다. 공포가 해일처럼 밀려왔다. 단순히 힘을 뺏기는 수준이 아니다. 이 역은 내 존재의 증명서들을 하나씩 파쇄기에 넣고 갈아버리고 있었다.
“장부 건드리지 마세요!”
서하 씨가 내 손을 쳐내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는 내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직감한 듯했다. 그녀는 대신 자신의 가슴에 달린 [보호자 후보] 명찰을 떼어냈다.
“검증은 제가 합니다. 애초에 이건 제 서명을 찾으러 온 거니까요.”
서하 씨가 명찰을 장부의 첫 페이지, 내 이름 위에 살포시 올렸다.
그 순간이었다.
—우웅!
공간 전체가 진동했다. 형광등이 미친 듯이 깜빡거리며 역무실 전체에 기괴한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서하 씨의 명찰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흘러나오더니, 장부 밑바닥에 숨겨져 있던 그 희미한 필체와 공명하기 시작했다.
두 개의 서명이 중첩되며 종이가 타들어 갈 듯 뜨거운 열기를 뿜어냈다. 서하 씨는 고통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명찰을 누른 손을 떼지 않았다.
“서하 씨, 위험해요!”
내가 소리쳤지만, 그녀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서서히, 장부의 첫 페이지가 투명해지며 그 아래 숨겨져 있던 얇은 보조 페이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일반적인 장부의 일부가 아니라, 특정 조건이 갖춰졌을 때만 나타나는 ‘이면의 기록’이었다.
열기에 들뜬 종이 위에, 붉은색 잉크로 적힌 문구들이 하나둘씩 선명해졌다.
[ 원보호자 회수 거부 사유 기록 ]
우리는 숨을 죽이고 그 문장을 읽어 내려갔다. 당연히 '문태식'의 이름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 노인네가 아이를 버렸거나, 혹은 서하 씨를 대신해 뭔가를 꾸몄다는 명확한 증거가 있을 거라고.
하지만 거기 적힌 문구는 우리의 예상을 처참하게 짓밟았다.
[ 원보호자 회수 거부 사유 : 강도윤 생존 확인 전까지 보류 ]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내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742일 전.
내가 헌터가 되기도 전, 이곳에 발을 들이기도 전에 기록된 문서가 나를 지목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살아있는 강도윤’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이곳에 올 것을, 그리고 이 아이의 보호자 서명을 덧씌울 것을 누군가 아주 오래전부터 설계해두었다는 듯이.
“……도윤 씨.”
서하 씨가 떨리는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혼란과 경악, 그리고 알 수 없는 슬픔이 서려 있었다.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왼손의 마비가 이제 턱끝까지 올라와 입을 열기조차 버거웠다.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이 역인가, 아니면 이 아이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742일 전 비 오는 편의점에 검은 우산을 들고 나타났던 '나' 자신인가.
장부 너머로 들려오는 환청 같은 빗소리가 점점 더 크게 귓가를 때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