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141화. 24시간 고객센터와 이름표를 두 번 확인해라
제목: 140-141화. 24시간 고객센터와 이름표를 두 번 확인해라
제목: 140화. 24시간 고객센터
편의점 차임벨 소리가 고막을 긁으며 멀어졌다. 기분 나쁜 전자음의 여운이 가시자마자 폐부를 찌른 것은 냉동기 특유의 건조하고 비린 공기였다.
방금까지 눈앞에 있던 '최초의 점장'과 형광등 불빛 아래 즐비하던 가판대는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대신 내 손에는 방금 출력된 것처럼 따끈하고 빳빳한 영수증 한 장이 들려 있었다. 아니, 소환장이라고 불러야겠지.
“……갔나?”
이현우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구석에서 태블릿 PC를 껴안은 채 덜덜 떨고 있었다. 녀석의 안경 너머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간 게 아니라, 우리가 쫓겨난 거겠지. 영업시간 끝났다고.”
나는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백설(원본)] 팔찌가 여전히 미친 듯이 박동하고 있었다. 마치 살아있는 심장을 손목에 이식한 기분이었다. 팔찌의 진동은 내 혈관을 타고 올라와 머릿속에 소음처럼 울려 퍼졌다.
“아저씨.”
반가온이 내 소매를 붙잡았다. 녀석은 코를 찡그리며 내가 든 소환장 주위의 공기를 조심스럽게 들이마셨다.
“이거 냄새가 이상해요. 비닐 포장지 안에 15년 동안 갇혀 있던 영수증 냄새가 나요. 그리고…….”
“그리고?”
“아저씨 냄새도 나고, 서하 언니 냄새도 나는데, 아주 오래된 눈(雪) 냄새도 섞여 있어요. 가본 적도 없는데 익숙한 냄새요.”
가온이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녀석이 ‘익숙한 냄새’라고 말할 때는 보통 내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혹은 내가 잊으려 애쓰는 과거의 파편들이 튀어나올 때였다.
나는 소환장 하단에 찍힌 사원번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사원번호: 00-1204-DW]
12월 4일. 우리 형, 강도원의 생일이다. 그리고 DW는 당연히 그의 이니셜이겠지.
“도윤 씨, 그 팔찌 상태가…….”
윤서하가 내 곁으로 다가와 내 손목을 살폈다. 그녀는 방금 전 점장 앞을 막아서느라 기력을 다 소진했는지 안색이 창백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이면서도 눈빛만은 날이 서 있었다.
“서하 씨, 일단 좀 쉬어요. 그쪽은 지금 ‘정밀 감사’ 대상도 아니고, 그냥 덤으로 끼어 있는 상태니까.”
“덤이라니요. 아까 들으셨잖아요. 나도 내 선택으로 여기 서 있는 거라고.”
“알겠으니까 고집 좀 피우지 마요. 내 팔찌가 박동하는 건 내 문제지, 서하 씨 문제는 아니잖아요.”
내 농담 섞인 핀잔에도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내 손목을 꽉 쥐었다. 차가운 그녀의 손길이 닿자 팔찌의 발작적인 박동이 아주 미세하게 잦아들었다.
“대신 죽어주는 건 안 한다고 했어요. 하지만 같이 가는 건 별개의 문제죠. 저 소환장, 24시간 이내라고 적혀 있었잖아요. 혼자 갈 생각 마세요.”
나는 헛웃음을 삼켰다. 내 인생은 왜 1+1 행사 품목도 아닌데 고난만 찾아오면 꼭 세트로 묶여서 오는지 모르겠다. 한 놈만 패는 법이 없다. 항상 내 주변 사람들까지 도매금으로 넘기려 든다.
“현우야, 그거 분석 돼?”
내 부름에 이현우가 정신을 차린 듯 손가락을 바삐 움직였다. 태블릿 화면 위로 복잡한 로그 기록과 바코드 스캔 결과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이거…… 미쳤어요. 일반적인 QR코드가 아니에요. 이건 좌표계예요. 그것도 물리적인 공간만 가리키는 게 아니라, ‘기록의 밀도’가 임계치를 넘은 지점을 추적하고 있어요. 고객센터라는 곳, 우리가 아는 그런 상담실이 아닐 가능성이 99.9%입니다.”
“그럼 뭔데?”
“폐점되지 않은 첫 번째 점포의 심장부요. 시스템상으로는 ‘반품 및 폐기 대기 구역’이라고 뜨는데, 문제는 여기가 살아 있는 사람과 이미 폐기된 데이터가 한데 뒤섞여 접수되는 곳이라는 겁니다. 일종의 블랙홀 같은 거죠.”
이현우의 목소리가 점점 빨라졌다. 불안할 때 나오는 녀석의 고질병이다.
“게다가 이 사원번호…… 강도원이라는 이름으로 발급된 이 아이디는 지금 ‘휴직’이나 ‘퇴사’ 상태가 아니에요. ‘영구 근무 중’으로 떠요. 잠도 안 자고, 밥도 안 먹고, 15년째 24시간 내내 클레임을 처리하고 있다는 뜻이라고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형이 살아 있다는 희망보다, 형이 어떤 형태로 그 시스템 안에 ‘재사용’되고 있을지에 대한 공포가 앞섰다. 시스템의 부품이 되어 버린 형. 내가 알던 강도원은 그 안에서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나는 떨리는 손으로 소환장을 다시 쥐었다. 그 순간, 손바닥을 통해 서늘한 감각이 타고 올라왔다. [잔향청취]가 내 의지와 상관없이 강제로 개방되었다.
치익, 치이익…….
잡음 섞인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편의점 무전기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은 탁하고 기괴한 음성.
……도윤아.
형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예전의 그 다정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기계적으로 늘어지고, 마치 여러 사람의 목소리를 조각조각 기워 붙인 것 같은 이질적인 음향.
……이름을…… 빼앗긴다……. 고객센터에서는…… 네 이름표를 두 번 확인해…….
목소리는 경고하고 있었다. 아니, 단말마에 가까운 비명이기도 했다.
오지 마……. 아니, 와야 해……. 백설을…… 반품하지 마…….
“형? 형!”
내가 허공에 대고 소리치자 일행들의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잔향은 순식간에 끊겼고, 내 손바닥에는 영수증의 날카로운 모서리에 베인 듯한 통증만 남았다.
“도윤 씨, 왜 그래요? 뭐 들었어요?”
윤서하가 내 어깨를 흔들었다. 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환청 좀 들었어. 이놈의 귀는 퇴근을 몰라서 문제네.”
억지로 농담을 던졌지만 입안이 써서 침이 넘어가지 않았다. 형을 구하고 싶다. 그 시스템을 부수고 형을 꺼내오고 싶다는 욕망이 내 안에서 불꽃처럼 일렁였다. 하지만 그 대가가 내 옆에 서 있는 이들이라면?
가온이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슬쩍 내 손을 잡았다.
“아저씨, 무서워하지 마요. 내가 이 냄새 계속 붙잡고 있을게요. ‘가족 냄새’를 기준점으로 묶어뒀으니까, 길 잃어버릴 일은 없을 거예요.”
“……조그만 게 못 하는 말이 없어.”
나는 가온이의 머리를 대충 헝겊 인형 다루듯 쓰다듬었다. 그리고 이현우를 보았다.
“현우야, 우리한테 남은 시간은?”
“정확히 23시간 14분 남았습니다. 그 안에 도착 못 하면 소환 불응으로 ‘강제 회수’ 절차 들어간대요. 제가 일단 이 소환장의 GPS 추적을 교란하려고 가짜 클레임 번호를 생성해서 시스템에 쑤셔 넣긴 했는데…… 임시방편일 뿐이에요.”
“윤 씨는?”
윤서하가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임시 권한, 함부로 안 쓸게요. 도윤 씨가 걱정하는 거 알아요. 하지만 제 선택권을 뺏지는 마세요. 그게 나를 위하는 거라고 생각하지 말란 말이에요.”
그녀의 말은 거짓말 같았다. 상황이 닥치면 그녀는 또 자신을 깎아 먹으며 나를 지키려 들겠지. 하지만 지금은 그 거짓말이라도 믿고 싶었다.
“좋아. 그럼 가보자고. 그 24시간 고객센터라는 데가 대체 어디 처박혀 있는지 주소나 불러봐.”
이현우가 태블릿을 조작했다. 지도가 확대되며 목적지에 붉은 점이 찍혔다.
“위치 떴습니다. 그런데 여기가…… 좀 이상해요. 일반적인 건물 주소가 아니라, 지금은 소유주도 없고 폐쇄된 구역으로 나오거든요.”
화면에 뜬 주소를 확인한 순간, 나는 얼어붙고 말았다.
경기도 양평군, XX면 산 12-4.
거기는 15년 전, 눈보라가 치던 밤 어린 내가 백설을 놓쳤다고 믿었던 그 폐건물이 있던 자리였다. 내 트라우마의 시작점이자, 모든 것이 엉망진창으로 꼬여버린 그 장소.
“도착 예정 시간은?”
내가 갈라진 목소리로 묻자, 이현우가 시계를 보더니 창백한 얼굴로 대답했다.
“우리가 지금 바로 출발해서, 시스템이 요구하는 ‘최적 경로’를 따라가면 정확히 내일 새벽 4시 44분에 도착합니다.”
새벽 4시 44분.
그것은 병원 차트와 사망 진단서에 기록된, 형 강도원의 공식적인 사망 시각과 일치했다.
“운명 치고는 참 친절하기도 하네.”
나는 소환장을 구겨 주머니에 처넣었다.
“가자. 고객 불만이 폭주하기 전에 환불이든 뭐든 끝장을 봐야지.”
나는 앞장서 걸었다. 내 손목의 백설이 다시 한번 강하게 진동했다. 마치 그곳에 가면 기다리고 있겠다는 듯이. 혹은 절대로 오지 말라는 비명처럼.
고객센터의 문이 열리기까지, 이제 24시간도 남지 않았다.
제목: 141화. 이름표를 두 번 확인해라
냉장 폐기실의 공기는 무겁다 못해 폐부 깊숙한 곳까지 얼려버릴 기세였다. 방금 전까지 형의 목소리가 들렸던 소환장이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형의 사원번호, 00-1204-DW. 그리고 그 아래에 찍힌 '영구 근무 중'이라는 네 글자가 내 망막을 할퀴고 지나갔다.
"저기, 도윤 씨. 가기 전에 이거 좀 봐줄래요?"
이현우가 내 가슴팍을 가리켰다. 정확히는 내 헌터 자격증 겸 임시 출입증이 담긴 투명 케이스를. 나는 무심코 고개를 내렸다.
[강도윤 / E급 헌터 / 임시 출입자]
평소와 다름없는 글자였다. 내 이름, 내 등급, 내 초라한 신분. 뭐가 문제냐고 물으려는데, 형의 경고가 머릿속을 스쳤다.
—고객센터에서는 이름을 먼저 빼앗긴다. 네 이름표를 두 번 확인해.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다시 한번 이름표를 쳐다보았다.
처음에는 그저 잉크가 번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글자가 살아서 꿈틀대고 있었다. '강도윤'이라는 세 글자의 획이 뒤틀리더니, 그 아래에 숨어 있던 다른 글자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강도원]
심장이 바닥으로 툭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강도원'이라는 이름 위에 붉은색 시스템 폰트가 겹쳐서 출력되기 시작했다.
[보관 실패 책임자]
"이게 뭐야…."
내 목소리가 내 것이 아닌 것처럼 갈라져 나왔다. 잉크 냄새가 아니라, 비릿한 철분 냄새와 오래된 서류 뭉치가 썩는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내 이름이 지워지고, 그 자리에 형의 이름과 기괴한 직책명이 들어앉아 있었다. 마치 이 시스템이 나를 강도윤이 아니라, 형의 실패를 대신할 부품으로 보고 있는 것 같았다.
"HR 부서가 제법 열일하는데요. 출근하기도 전에 직책부터 박아주고. 연봉 협상도 안 끝났는데 말이죠."
나는 짐짓 농담을 던졌지만, 손끝이 가늘게 떨리는 것까진 숨기지 못했다. 농담이라도 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이 이름표가 내 가슴을 뚫고 들어가 영혼까지 이 시스템에 귀속시킬 것 같았으니까.
"도윤 씨만 그런 게 아니에요."
이현우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윤서하였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표를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다. 평소의 서늘한 표정이었지만, 입술이 미세하게 깨물려 있었다. 그녀의 이름표 뒤쪽에는 우리가 본 적 없는 작은 주석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윤서하 / A급 헌터]
그리고 그 뒤에 아주 작게, 하지만 선명하게 박힌 글자.
[대체 개체 : 03번] [복제본 잔여 로그 확인됨]
서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얼마나 예민한지 알고 있다. '원본'이 아닌 '대체제'라는 낙인은 그녀에게 가장 치명적인 공격이었다. 시스템은 이미 우리 일행의 가장 아픈 구석을 후벼 파며 이름을 선점하려 들고 있었다.
"서하 씨, 그건 그냥…."
내가 위로의 말을 건네기도 전이었다. 서하가 거칠게 이름표를 낚아채더니, 손가락 끝으로 [대체 개체]라는 글자를 벅벅 긁어냈다. 플라스틱 케이스가 긁히는 기분 나쁜 소리가 폐기실에 울려 퍼졌다.
"내 이름은 내가 확인해."
서하가 고개를 들었다. 눈동자에는 흔들림 없는 살기가 서려 있었다.
"시스템이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어. 내가 나라는 걸 잊지 않으면 그만이야. 남이 붙여준 라벨 따위로 날 정의하게 두지 않겠어."
그녀는 긁어내도 지워지지 않는 글자 위에 검은색 절연 테이프를 붙여버렸다. 물리적인 가림막이었지만, 그녀의 결의가 느껴졌다.
"단순한 환상이 아닙니다."
이현우가 태블릿을 두드리며 분석을 내놓았다.
"이건 '이름 선점(Name Preemption)' 현상이에요. 고객센터라는 공간은 기록과 실재를 동일시합니다. 거기서 이름을 잃는다는 건, 단순히 호칭이 바뀌는 게 아니라 존재의 권한 자체를 빼앗긴다는 뜻이죠. 도윤 씨 이름이 형님의 이름과 겹치는 건, 시스템이 도윤 씨를 강도원 씨의 연장선상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한마디로 나를 형의 대타로 쓰겠다는 거군. 형이 못한 '보관'을 나더러 끝내라는 소리고."
나는 손목의 [백설(원본)]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소름 끼치게 다가왔다.
"냄새가… 너무 섞여 있어요."
반가온이 코를 킁킁거리며 내 곁으로 다가왔다. 아이의 얼굴이 창백했다.
"도윤 아저씨한테서 아저씨 냄새랑, 그 소환장에서 났던 형아 냄새가 반반씩 나요. 가짜 이름표가 아저씨의 진짜 냄새를 가리고 있어요. 이대로 가면 나중에는 누가 누구인지 구분 못 할지도 몰라요."
"가온아, 넌 구분할 수 있지?"
"지금은요. 근데… 가족 냄새가 너무 강하게 섞이면 저도 헷갈릴 것 같아요. 도윤 아저씨가 형아를 너무 보고 싶어 하니까, 그 마음이 냄새를 더 섞이게 만들어요."
가온의 말은 정곡을 찔렀다.
솔직히 말하면, 이름표가 [강도원]으로 바뀌었을 때 마음 한구석에서 기괴한 유혹이 일었다. '형의 이름으로 들어가면, 형에게 더 빨리 닿을 수 있지 않을까?' '형의 권한을 내가 이어받으면, 형을 이 지옥에서 꺼내오는 게 더 쉽지 않을까?'
내가 강도원이 된다면. 형의 고통을 내가 대신 짊어질 수만 있다면.
"그 생각 집어치워, 강도윤."
서하의 서늘한 목소리가 내 망상을 깨트렸다. 그녀는 어느새 내 바로 앞까지 다가와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네가 강도원으로 위장해서 들어가는 순간, 시스템은 너를 '대체 근무자'로 확정 지을 거야. 그럼 너는 형을 구하는 게 아니라, 형이 하던 일을 교대해 주러 가는 꼴밖에 안 돼. 형은 풀려나겠지만, 너는 영원히 그 고객센터에 박혀서 '보관'이나 하고 있겠지. 그게 네 형이 바라는 일일 것 같아?"
"…아니겠지."
"정신 차려. 우리는 강도원을 구하러 가는 거지, 강도윤을 버리러 가는 게 아니야."
나는 마른세수를 하며 크게 숨을 들이켰다. 찬 공기가 폐를 찌르자 비로소 정신이 좀 들었다. 위험했다. 입구에 가기도 전에 이미 시스템의 로직에 휘말릴 뻔했다.
"준비하죠."
이현우가 장비를 챙기며 말했다.
"각자 이름 확인 절차를 만듭니다. 10분마다 한 번씩, 서로의 진짜 이름을 소리 내서 부르세요. 가온 양은 우리 냄새의 기준점을 잡고, 냄새가 변조될 때마다 신호를 주세요. 제가 이름표 백업 로그를 임시로 생성해서 휴대용 단말기에 동기화해두겠습니다. 만약 실제 이름표가 완전히 변하면 단말기의 로그를 진짜로 믿으세요."
서하는 내 곁으로 다가와 내 손목의 팔찌와 이름표 사이를 가로지르며 얇은 마력 실을 감았다.
"임시 봉인이야. 팔찌가 네 이름을 집어삼키지 못하게 동기화율을 강제로 낮췄어. 대신 출입 권한이 불안정해질 수 있으니 주의해."
"고마워. 이래저래 신세만 지네."
"나중에 월급으로 갚아."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무장을 마쳤다. 보이지 않는 적, '이름을 훔치는 시스템'에 대항하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막이었다.
떠나기 직전, 이현우가 백업 로그를 최종 점검하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상하네. 도윤 씨, 과거 로그 백업 중에 이상한 항목이 하나 걸렸습니다. 시스템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어서 이제야 복구됐는데…."
"내 흑역사라도 나왔어? 중학교 때 쓴 일기 같은 거라면 그냥 삭제해 줘."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20년 전 기록입니다. 양평 폐건물 사건 당시의 병원 및 현장 수습 기록인데, 관리자 권한으로 은폐되어 있었네요."
나는 이현우의 단말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낡은 디지털 문서가 복구되며 글자가 떠올랐다.
[사건 코드: 00-1204 / 장소: 양평군 산 12-4]
[처리 현황:]
보호자 0번: 강도원 (신분: 매니저 후보자)
인계 대상: 백설 (원본 유지 성공)
삭제 대상: 강도윤 (처리 상태: 보류 중)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삭제 대상'.
내가 어린 시절 눈보라 속에서 길을 잃었던 것, 형이 나를 구하지 못한 것, 그 모든 일이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다는 뜻인가?
"삭제 대상이라니? 내가 왜?"
"당시 시스템은 백설의 안정적인 보관을 위해 '불필요한 감정적 연결고리'를 제거하려고 했던 모양입니다. 강도원 씨가 매니저가 되는 조건으로, 그의 유일한 약점인 동생을… '폐기'하려 했던 기록이에요."
글자가 흐릿하게 번져 보였다. 20년 전, 그 폐건물에서 형이 마주했을 진실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형은 나를 잃어버린 게 아니었다. 나를 '삭제'하려는 시스템으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 나 대신 자기 자신을 통째로 시스템에 넘겨버린 것이었다.
그는 나를 위해 '영구 근무'를 택했고, 나는 그 대가로 '보류'된 채 살아남았던 것이다.
"도윤 씨, 괜찮아요?"
이현우의 목소리가 멀게 들렸다. 나는 이름표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강도윤]
이 이름은, 형이 제 목숨과 존재를 팔아 지켜낸 이름이었다.
"가자."
나는 떨리는 손을 꽉 쥐고 앞을 향해 걸음을 뗐다.
"가서, 그 새끼들이 왜 내 이름을 지우려고 했는지 직접 물어봐야겠어. 그리고 형 이름표도 돌려받아야지."
새벽 4시 44분.
우리는 형이 죽었다고 기록된 그 시각을 향해, 가장 깊은 어둠 속으로 차를 몰았다. 경기도 양평, 모든 것이 시작되었고 모든 것이 멈춰버린 그곳, '고객센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