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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화. 멈춘 0초의 그림자와 퇴근 카드의 이니셜 일러스트

202-203화. 멈춘 0초의 그림자와 퇴근 카드의 이니셜

202화. 멈춘 0초의 그림자

00:00:01.

숫자가 멈췄다. 하지만 세상이 멈춘 건 아니었다. 공기 중에 떠다니던 먼지 한 톨이 끈적한 꿀 속을 헤엄치듯 아주 느리게 하강했고, 기록 대리인이 든 라이터의 불꽃은 살아 있는 생물처럼 기괴한 각도로 일렁이며 제 몸집을 부풀렸다. 내 심장 박동 소리가 귓가에서 확성기를 댄 듯 크게 울렸다.

그 정적을 찢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이름을 돌려줘.

소름이 돋았다. 그건 내 목소리였다.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중얼거리고, 가끔 지긋지긋한 민원인들에게 억지 미소를 지으며 내뱉던 바로 그 음색. 하지만 결코 내 말투는 아니었다. 감정이라곤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오직 정보만을 전달하기 위해 설계된 기계적인 서늘함이 그 문장에 박혀 있었다.

벽면에 드리워진 아이의 그림자가 비정상적으로 부풀어 올라 있었다. 마치 검은 잉크가 번져나가듯, 그림자는 벽을 타고 천장까지 뻗어 나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입을 열려 했다. 내 목소리로 저런 소리를 하는 놈에게 한마디 해줘야겠다는 본능적인 거부감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차가운 손이 내 입을 틀어막았다.

“대답하지 마세요.”

윤서하였다. 그녀의 눈동자는 바쁘게 주위를 훑으면서도 흔들림이 없었다. 현장검증에 나선 헌터의 냉정함이 그녀를 지탱하고 있었다.

“기록망 안에서 자기 목소리로 응답하는 건 ‘본인 확인’ 절차나 다름없어요. 저 그림자가 도윤 씨의 목소리를 빌려 질문하고, 당신이 거기 응답하는 순간…… 이 시스템은 당신을 ‘기록의 소유자’로 확정 지을 거예요.”

“……!”

그녀의 말이 맞다. 이건 대화가 아니라 계약 절차였다. 내가 저 목소리에 반응하는 순간, 나는 저들이 짜놓은 시나리오 속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꼴이 된다.

옆에 서 있던 반가온이 코를 훌쩍였다. 녀석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형, 냄새가…… 너무 이상해요. 저 그림자에서 형 냄새랑 저 꼬맹이 냄새가 섞여서 나는데, 그게 다가 아니에요.”

“또 뭐가 나는데?”

“아주 오래된 종이 냄새…… 협회에서 쓰는 퇴근 카드 같은 거요. 그리고 낡은 계약서 냄새도 나고. 결정적으로…….”

반가온이 마른침을 삼키며 내 옷소매를 꽉 쥐었다.

“장례식장에서 나는 그 특유의 향 냄새가 나요. 아주 오래전부터 켜져 있었던 것 같은 냄새요.”

퇴근 카드와 계약서, 그리고 장례식의 향. 내 과거와 현재, 그리고 어쩌면 예정된 미래가 한데 뒤섞인 악취였다.

그때, 다급하게 우리를 몰아붙이던 기록 대리인의 태도가 돌연 바뀌었다. 그는 들고 있던 라이터를 정중하게 내리더니, 마치 귀빈을 모시는 안내원처럼 허리를 숙였다.

“강도윤 씨. 이제야 제대로 된 절차를 밟을 수 있겠군요.”

매끄러운 목소리였다. 너무 매끄러워서 바닥에 기름을 쳐놓은 덫처럼 느껴졌다.

“보호자 승인이 완료되면 당신은 더 이상 불완전한 증인이 아닙니다. 기록의 정식 관리자가 되는 겁니다. 억울하지 않습니까? 남의 짐을 대신 짊어지는 삶은 이제 끝내야죠. 승인하십시오. 당신의 이름을 되찾을 기회입니다.”

달콤한 유혹. 하지만 그 말 뒤에는 ‘그러니 순순히 우리의 시스템 일부가 되어라’라는 명령이 숨겨져 있었다.

아이는 내 옆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작은 손에 쥐어진 반쪽짜리 금속 단추 조각이 파르르 떨렸다. 아이는 자판기의 좁은 투입구와 나를 번갈아 보았다.

“……내가 이거 넣으면, 아저씨도 엄마처럼 바뀌어요?”

아이의 눈에 공포가 서렸다. 엄마가 ‘보호자’가 되고, 보호자가 ‘번호’가 되어 사라졌던 기억. 아이에게 이 자판기는 구원이 아니라 소중한 사람을 삼켜버리는 아가리였다.

나는 아이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넣으라고 할 수도, 넣지 말라고 할 수도 없었다. 타이머는 1초에서 멈춘 채 우리를 압박하고 있었고, 벽의 그림자는 당장이라도 나를 집어삼킬 듯 일렁였다.

그때, 윤서하가 자판기 투입구 쪽으로 몸을 바짝 붙였다. 그녀의 손가락이 가늘게 파인 홈을 따라 훑고 지나갔다.

“도윤 씨, 이거 봐요.”

“뭐 찾았어요?”

“홈이 이상해요. 보통 이런 단말기는 규격화된 동전이나 카드를 받게 되어 있잖아요? 그런데 이 투입구는 완전한 원형이 아니에요. 왼쪽은 깎여 있고 오른쪽은 툭 튀어나왔죠. 비대칭이에요.”

윤서하가 아이가 든 단추 조각을 가리켰다.

“애초에 ‘완전한 것’을 넣으라고 만든 기계가 아니라는 뜻이에요. 반쪽을 가진 사람만이, 혹은 반쪽만 남은 기록만이 통과할 수 있도록 설계된 거죠. 이건 결함이 아니라 설계예요.”

설계. 누군가 의도적으로 이 아이와 나를 ‘반쪽’으로 만들어 이곳에서 만나게 했다는 소리인가?

나는 침을 삼켰다. 기록 대리인이 다시 라이터를 켜려 했다. 더 지체하면 그는 ‘승인 거부’를 강제로 집행해 아이의 이름을 지워버릴지도 모른다.

나는 아이의 손에서 단추 조각을 뺏는 대신, 내 큰 손으로 아이의 작은 손을 덮어 쥐었다. 금속의 서늘한 감촉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거부’를 말하지도, 그렇다고 고분고분하게 승인하지도 않는다. 제3의 길.

나는 눈을 감고 내 안의 감각을 곤두세웠다. [잔향청취]를 활성화했다.

순간, 머릿속이 깨질 듯한 통증이 덮쳐왔다. 평소와는 비교도 안 되는 대가였다. 혀끝에서 내 이름의 한 음절이 연기처럼 흩어져 사라지는 생경한 감각이 느껴졌다. 내 정체성의 일부를 제물로 바쳐 강제로 과거의 문을 여는 행위.

—치익.

이명이 들리며 시야가 뒤집혔다.

좁고 어두운 복도. 자판기 앞에 아이들이 줄을 서 있었다. 아이들의 목에는 이름표 대신 번호가 적힌 플라스틱 판이 걸려 있었다. 그 뒤로 정장을 입은 어른들이 서류 뭉치를 든 채 기계적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보호자 관계 확인되었습니다.”

“기록 이관 완료.”

“다음 번호.”

마치 공장에서 물건을 출고하는 듯한 광경. 그 기괴한 행렬 속에서 한 여자가 보였다. 그녀는 얼굴이 흐릿했지만, 떨리는 손으로 아이 하나의 입을 막고 대열에서 빠져나가려 하고 있었다.

그녀의 앞을 누군가 막아섰다.

두꺼운 코트, 낡은 구두. 그리고 입에 문 담배 연기. 문태식이었다.

젊은 시절의 문태식은 지금보다 훨씬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는 여자를 막아 세우는 듯 보였으나, 이내 시선을 돌려 복도 끝의 비상구를 가리켰다. 아니, 단순히 가리킨 게 아니었다. 그는 비상구 문을 잠그려는 경비원들의 시선을 돌리며, 슬쩍 문 쪽으로 손을 뻗어 걸쇠를 풀고 있었다.

그는 아이를 빼돌리려는 여자를 돕는 것인가, 아니면 더 큰 함정으로 밀어 넣는 것인가.

장면이 빠르게 전환되었다. 여자가 아이의 팔찌 안쪽에 무언가를 급히 밀어 넣었다. 반쪽으로 쪼개진 금속 단추였다.

—이게 네 마지막 기록이야. 절대로 뺏기지 마. 네가 누구인지 잊지 마…….

여자의 목소리가 내 귓가를 스치고, 환각이 깨졌다.

“헉, 허억……!”

현실로 돌아왔을 때, 내 혀끝에는 여전히 사라진 내 이름의 감각이 아릿하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알 수 있었다. 이 단추 조각은 단순히 아이의 신원을 증명하는 열쇠가 아니었다.

이건 아이의 탈출구인 동시에, 오랫동안 누락되어 있던 ‘강도윤’이라는 기록의 빈칸을 채울 수 있는 유일한 매개체였다.

딸깍.

멈춰 있던 타이머가 다시 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숫자는 올라가지 않았다.

[00:00:00]

시간이 다 되었다. 자판기 내부에서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거친 기계음이 들려왔다. 기록 대리인의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지고 당혹감이 스쳤다.

“이럴 리가…… 아직 단추를 넣지 않았는데?”

내 손안의 단추 조각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잔향청취를 통해 내가 그 기록의 ‘기억’을 읽어 들인 순간, 시스템은 그것을 ‘입력’으로 간주한 모양이었다.

덜컹—!

자판기 하단의 배출구로 낡은 플라스틱 캡슐 하나가 떨어졌다. 아이들을 달래기 위해 사탕이 나와야 할 구멍이었지만, 떨어진 물건의 질감은 전혀 달랐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캡슐을 집어 들었다. 투명한 플라스틱 안에는 사탕 대신 때 묻은 종이 조각 하나가 들어 있었다.

그건 반으로 찢어진 낡은 퇴근 카드였다.

카드 상단에는 소속과 직인이 찍혀 있었고, 그 옆에 적힌 이름 석 자 중 앞부분이 찢겨나가 있었다. 남아 있는 건 성도 이름도 아닌, 단 하나의 알파벳 이니셜뿐이었다.

그 이니셜을 확인하는 순간, 내 뒷덜미에 서늘한 한기가 서렸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강도윤’이라는 이름과는 전혀 상관없는 글자였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벽을 가득 채우고 있던 거대한 그림자가 일그러지더니, 소리 없이 입을 벌려 웃었다.

내 목소리가 다시 한번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찾았네.

그림자가 나를 향해 쏟아져 내려왔다.

203화. 퇴근 카드의 이니셜

그림자가 쏟아졌다.

단순히 빛이 차단되어 생기는 물리 현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천장에서 쏟아지는 걸쭉한 먹물이었고, 동시에 누군가 내 이름을 대신 부르며 목을 죄어오는 환청이었다. 00:00:00. 타이머가 멈춘 순간, 세상의 모든 소음이 흡입구로 빨려 들어가듯 적막 속으로 사라졌고 오직 내 심장 소리만이 자판기 코인 굴러가는 소리처럼 요란하게 울렸다.

“강도윤 씨!”

날카로운 목소리와 함께 섬광이 터졌다.

윤서하가 자판기 옆으로 튀어나온 비상용 배선을 그대로 뜯어내 자판기 외벽에 마찰시켰다. 지지직, 하는 파열음과 함께 불꽃이 튀었고, 그녀는 다른 손으로 비상등의 알루미늄 반사판을 걷어차 궤도를 틀었다. 찰나의 순간, 인위적으로 뒤틀린 빛의 갈래가 내 머리 위로 쏟아지던 그림자의 목을 쳐냈다.

쿠웅, 하는 소리도 없이 그림자의 덩어리가 내 발치 옆으로 비껴가 바닥을 적셨다.

“……아윽.”

왼팔에 소름 끼치는 한기가 스쳤다. 얼음물이 아니라, 영하의 온도로 얼려진 잉크가 피부 속으로 침투하는 기분이었다. 팔을 타고 올라온 냉기가 혀뿌리에 닿았다. 아까 잔향청취의 대가로 흐려졌던 내 이름의 한 음절이, 이제는 아예 기억 저편에서 누군가 지우개로 박박 문지른 것처럼 하얗게 점멸했다.

나는 이를 악물며 자판기 배출구에서 떨어진 플라스틱 캡슐을 움켜쥐었다. 놓치면 죽는다. 이건 본능적인 직감이었다. 헌터 생활 짬밥이 알려주는 ‘사망 플래그’ 회피 기동이 뇌세포 구석구석에서 비명을 질렀다.

“도윤 형, 그거예요!”

반가온이 코를 킁킁거리며 내 앞을 막아섰다. 녀석의 눈동자가 고양이처럼 가늘어졌다.

“그림자 냄새가 형을 노리는 게 아니에요. 형 손에 든 그 종이 조각, 거기서 나는 냄새를 쫓고 있어요. 오래된 캐비닛 먼지 냄새, 그리고…… 피비린내.”

바닥에 고인 먹물 같은 그림자가 다시금 꿈틀거리며 내 손동작을 따라 고개를 치켜들었다. 녀석의 말대로였다. 그림자는 내 심장을 뚫으려는 게 아니라, 내 손아귀에 쥐인 낡은 퇴근 카드 조각을 낚아채려 하고 있었다.

[그 조각은 폐기 대상입니다.]

기록 대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까까지의 정중함은 간데없고, 기계음 섞인 서늘함이 대기실 전체를 짓눌렀다.

[보호자 승인 절차 중 발생한 오류 데이터입니다. 즉시 반납하십시오. 그것은 기록망의 질서를 해치는…… 해치는…… 불순물입니다.]

말끝이 미세하게 갈라졌다. 마치 낡은 테이프가 늘어지는 듯한 소리. 윤서하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차갑게 쏘아붙였다.

“질서를 해치는 게 아니라, 당신이 감당 못 할 기록이겠지. 목소리가 떨리는데? 기록 대리인에게도 ‘공포’라는 알고리즘이 입력되어 있나 보죠?”

그녀는 내 손바닥 위의 캡슐을 열어 카드 조각을 살폈다. 직접 손을 대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이미 현미경처럼 조각의 표면을 훑고 있었다.

“도윤 씨, 이거 단순한 퇴근 카드가 아니에요.”

“보면 압니다. 내 이름 이니셜이랑은 쥐뿔도 안 맞거든요.”

나는 캡슐에서 꺼낸 종이 조각을 빛에 비추어 보았다. 누렇게 변색된 플라스틱 혼방 용지. 협회 공용 퇴근 카드의 재질이었지만, 가장자리가 찢긴 모양새가 예사롭지 않았다. 기계로 반듯하게 자른 게 아니라, 누군가 급박하게 손으로 뜯어낸 흔적이었다.

카드 상단에 남은 알파벳은 고작 두 글자였다. 나는 그 글자를 보자마자 혀끝이 얼어붙는 기분이 들었다. 내 이름과는 접점조차 없었다. 하지만 윤서하의 시선은 글자보다 그 밑에 뚫린 펀칭 구멍과 날짜 각인에 머물렀다.

“날짜가…… 이 구역이 폐쇄되기 전날이에요. 그리고 여기 펀칭 위치를 보세요. 출근이나 퇴근 기록을 남길 때 찍히는 위치가 아니에요. 이건 협회 물류 센터에서 특정 ‘물품’을 구역 밖으로 반출할 때 찍는 승인 코드예요.”

“반출?”

“누군가 이 카드를 퇴근용이 아니라, 누군가를 시설 밖으로 빼내기 위한 통행증으로 썼다는 뜻이죠. 이건 출퇴근 기록이 아니라 ‘반출 기록’이에요.”

그 순간, 내 뒤에 숨어 있던 아이가 내 소매를 세게 잡아당겼다.

“아저씨…… 팔찌가 뜨거워요. 팔찌 안쪽이…….”

아이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이의 손목에 채워진 낡은 팔찌, 그 안쪽에 숨겨져 있다던 반쪽짜리 단추 조각이 반응하고 있었다. 자판기 내부에서 드르륵, 하고 기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사탕이 굴러 나오는 소리가 아니었다. 거대한 도서관의 서가가 통째로 이동하며 슬롯을 재배열하는 듯한 웅장하고도 기괴한 마찰음이었다.

기록 대리인의 형체가 일렁였다.

[반출 기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B4 구역의 모든 인원은 기록망 내에 보존되었습니다. 예외는…… 예외는 없습니다.]

“예외가 없기는. 당장 눈앞에 이 애는 뭔데?”

나는 비릿하게 웃으며 주머니 속에서 여성용 라이터를 꺼냈다. 손에 익은 서늘한 금속의 감촉. 라이터를 켜는 대신, 나는 그 금속 몸체와 카드 조각을 겹쳐서 벽면의 비상등 불빛에 비추었다.

라이터의 매끄러운 표면이 거울처럼 빛을 반사하며 카드 조각의 뒷면을 투사했다. 그냥 눈으로 볼 때는 보이지 않던 압인 흔적이 도드라졌다. 종이를 강하게 눌러 쓴 탓에 남은, 글자라기보다는 흉터에 가까운 자국들.

‘B4 반출 승인’

‘보호자 대체’

‘서명 불능’

문장들은 파편화되어 있었지만, 그 의미는 묵직하게 다가왔다.

“서명 불능?”

윤서하가 미간을 찌푸렸다.

“글을 모르는 아이였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아니, 기록망이 서명자를 인식하지 못하도록 누군가 일부러 지운 거겠지. 서명을 하는 순간 기록망에 ‘누가’ 이 아이를 데려나갔는지 남을 테니까. 자기 존재를 지울 줄 아는 놈이 이 아이를 빼돌린 거야.”

나는 카드 조각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림자가 발악하듯 내 구두 끝을 타고 올라오려 했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아이에게 이 조각을 돌려줘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이 조각에 담긴 진실이 무엇이든, 지금 이 겁에 질린 아이가 감당할 수 있는 무게가 아니었다.

[윤서하 헌터.]

기록 대리인의 목소리가 이번엔 그녀를 향했다.

[당신은 기록망의 승인된 관찰자입니다. 하지만 데이터의 오염을 방치한다면, 당신 역시 ‘대체명 후보’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입을 다무십시오. 그것은 존재해서는 안 되는 기록입니다.]

윤서하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대체명’이라는 단어가 그녀에게 어떤 공포를 주는지 나는 안다. 자기 이름이 사라지고, 기록망이 부여한 임시 번호로 평생을 살아야 하는 기록 미아가 된다는 위협.

하지만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내 곁으로 한 걸음 더 다가오며 차갑게 대꾸했다.

“협박은 무능하다는 증거죠. 그리고 난 오염된 데이터를 정화하는 게 전공이라서요.”

그때였다.

내 손바닥에 닿아 있던 카드 조각 뒷면에서 검은 액체가 번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림자의 습격이 아니었다. 종이 자체에서 배어 나오는, 아주 가느다란 검은 선들.

그 선들은 순식간에 얽히고설키며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가늘고 긴 직선, 그리고 그 위를 덮는 완만한 곡선.

우산이었다.

작고 정교한 검은 우산 자국이 카드 뒷면에 선명하게 인각되더니, 이내 내 손바닥 피부 속으로 스며들었다.

“……!”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눈앞에 반투명한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평소 보던 협회의 상태창과는 결이 다른, 낡고 지직거리는 노이즈 섞인 창이었다.

[알림: ‘퇴근 카드’의 데이터가 오염되었습니다.]

[승인 권한 충돌 발생.]

[대상자: 강도윤]

[상태: 퇴근 처리 취소]

나는 헛웃음을 삼켰다.

“이봐요, 대리인 씨.”

나는 스며드는 검은 자국을 보며, 혀끝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린 내 이름의 마지막 음절을 되찾으려 애썼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나온 것은 평소와 같은 비릿한 농담뿐이었다.

“나 오늘 연장 근무 수당 신청 안 했는데. 이거 노동법 위반인 거 알지?”

농담으로 넘기려 했다. 하지만 뒷맛이 써도 너무 썼다.

단순히 퇴근이 늦어지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 손바닥을 파고든 그 검은 우산 자국이, 마치 내 존재 자체를 기록망에서 도려내고 있었다.

시스템 창의 마지막 줄이 붉게 점멸했다.

[※ 경고: 현재 귀하의 퇴근 기록이 데이터베이스에서 영구 삭제되었습니다. 귀하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 퇴근자’입니다.]

그림자가 내 발밑에서 비웃듯 일렁였다.

나는 더 이상 퇴근할 곳이 없었다. 아니, 애초에 내가 퇴근해야 할 ‘집’이라는 기록 자체가 내 기억 속에서 하얗게 지워지고 있었다.

“……아.”

내 입에서 나온 짧은 신음이 대기실의 정적 속으로 흩어졌다.

나는 오늘도 퇴근에 실패했다. 아니, 어쩌면 영원히 퇴근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방금 내 손바닥에 새겨진 검은 우산의 형상처럼 짙게 드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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