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153화. 보호자 후보 4번과 강도지의 감옥
제목: 152-153화. 보호자 후보 4번과 강도지의 감옥
제목: 152화. 보호자 후보 4번
냉장 폐기실의 육중한 문이 열리며 쏟아져 나온 것은 단순한 냉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누군가의 삶이 통째로 얼어붙었다가 썩어가는 취기였고, 동시에 결코 열려서는 안 될 금기를 건드렸을 때 느껴지는 본능적인 소름이었다.
그 어둠 속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아니, '남자'라고 부르기엔 위화감이 컸다. 검은 양복 상의를 어깨에 걸치고, 한 손에는 물기 하나 없이 매끄러운 검은 우산을 든 그림자. 그의 얼굴은 폐기실의 희미한 조명 아래서도 마치 노이즈가 낀 것처럼 흐릿했다.
“절차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강도윤 군.”
그가 입을 열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 목소리. 거울을 보며 혼잣말을 할 때 듣는 내 목소리와 지독하게 닮아 있었다. 하지만 말투는 전혀 달랐다. 90년대 구청 민원실의 깐깐한 서기 같기도 하고, 아이들을 훈육하는 보육 교사 같기도 한, 예의 바르지만 감정의 온도가 결여된 기계적인 어조.
“보호자 후보 4번. 당신의 출입 기록을 최종 확인하러 왔습니다.”
그가 한 걸음 다가오자, 옆에 있던 반가온이 내 소매를 꽉 움켜쥐었다. 녀석의 손이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형, 저 사람… 냄새가 안 나요.”
“뭐? 아예?”
“네. 사람이면 살 냄새든 땀 냄새든 나야 하는데, 그냥… 진공 상태 같아요. 그런데….”
가온이가 코를 킁킁거리며 그림자가 쥔 검은 우산의 손잡이를 가리켰다.
“저 우산 손잡이에서만 이상한 냄새가 나요. 아주 미세하게, 갓 칠한 노란색 크레파스 냄새요. 아이들이 스케치북에 꾹꾹 눌러 그릴 때 나는 그 특유의 왁스 냄새….”
크레파스라니. 이 삭막한 지하 처리실에서 가장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저 그림자가 내 ‘보호자’ 후보라고? 내 인생의 보호자 목록에 저런 불쾌한 비주얼은 추가한 기억이 없다.
“미안한데, 난 이미 성인이라 보호자가 필요 없거든요. 요즘은 자기 결정권이 대세인 거 몰라요? 헌터협회 민원 규정 제3조 2항에도 본인의 의사가 최우선이라고….”
“그것은 ‘손님’으로 머물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림자가 우산을 가볍게 바닥에 툭, 찍었다. 그 순간, 바닥에 고여 있던 차가운 냉기가 파동처럼 퍼져나갔다.
“강도원 씨가 설정한 당신의 지위는 ‘영구 방문객’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방금 시스템의 냉장 폐기실을 강제로 개방했죠. 무단 침입자, 혹은 폐기 대상자로 분류가 변경되었습니다. 이제 당신에게 남은 선택지는 둘뿐입니다.”
그림자가 서서히 우산을 펼쳤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은 천이 사방으로 퍼지자 주변의 공간이 왜곡되기 시작했다.
“보호자에게 귀속되어 영원히 이 층에 보관되거나. 아니면, 이 우산을 인수하여 직접 ‘보관자’가 되거나.”
보관자 위임.
말은 그럴싸했지만, 그가 내미는 우산은 마치 영혼을 낚아채려는 갈고리처럼 보였다. 저걸 잡는 순간, 나는 이 기괴한 백설 시스템의 일부가 되어버릴 것이 뻔했다.
“지정… 마요….”
윤서하 씨의 쇳소리 섞인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그녀는 아직 목소리를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지만, 행동은 누구보다 빨랐다.
그녀가 검집을 쥔 채 바닥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녀의 목표는 그림자의 본체가 아니었다. 바닥에 길게 늘어진, 그림자의 ‘그림자’였다.
챙-!
강철과 그림자가 부딪치는 소리라고는 믿기지 않는 금속음이 울렸다. 윤서하 씨의 검집이 바닥의 그림자를 정확히 끊어내듯 박혔다. 그림자의 움직임이 일순간 멈췄다. 그녀는 고통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나를 향해 눈짓했다.
어서 움직이라는 신호였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낡은 녹음기와 [KDY-Alpha]라고 적힌 상자를 쳐다봤다. 저 안에 답이 있다. 형이 나를 버린 게 아니라면, 문태식 팀장이 숨기려 했던 진실이 저 안에 고여 있을 것이다.
나는 떨리는 손을 뻗어 상자 위에 놓인 녹음기를 낚아챘다.
그리고 곧바로 능력을 끌어올렸다.
‘잔향청취.’
제발, 이번엔 깔끔하게 좀 들려줘라. 쪽팔린 거 시키지 말고.
내 간절한 바람은 시스템의 비웃음과 함께 박살 났다.
[시스템 메시지: ‘잔향청취’ 발동을 위한 감정적 등가교환을 시작합니다.]
[대상: B-04 구역 전체 방송망 연동.]
“아, 잠깐, 방송망은 안 돼…!”
내 비명이 터지기도 전, 천장에 달린 낡은 스피커들이 치직거리며 살아났다. 그리고 이곳저곳에서 맑고 고운 여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백설의 보육 모드였다.
알림 드립니다. ‘도구리’ 어린이가 화장실에서 실수를 했습니다.
‘도구리’ 어린이, 바지가 젖었으니 부끄러워하지 말고 선생님께 오세요. 다시 한번 알립니다. 우리 귀여운 도구리 강도윤 어린이….
“아악! 그만해! 그만하라고!”
내 뇌세포가 수치심으로 비명을 질렀다. ‘도구리’. 대여섯 살 무렵, 도토리처럼 생겼다고 형이 붙여준 별명이었다. 그리고 그 당시 내가 긴장하면 바지에 실례를 하곤 했던 흑역사 중의 흑역사였다.
그 부끄러운 기억이 이 지하 처리실 전체에, 심지어 내 동료들 앞에서 무한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도, 도구리…?”
가온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윤서하 씨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는 건 비웃음일까, 아니면 경악일까.
죽고 싶다. 그냥 여기서 폐기되는 게 사회적으론 더 이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수치심이 극에 달할수록,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잔향은 선명해졌다.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이명 속에서, 젊은 시절 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돼. 보호자로 묶는 순간 도윤이는 이 시스템의 ‘자산’이 되잖아.』
형, 강도원의 목소리였다. 그는 누군가와 거칠게 논쟁하고 있었다. 상대는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그림자와 비슷한 톤의 목소리였다.
『거래 조건은 명확합니다, 강도원 군. 당신이 보호자가 되어 이 아이를 시스템에 등록하면, 아이의 ‘병’은 멈출 겁니다. 폐기되지 않고 영원히 보존될 수 있죠.』
『보존이 아니라 박제겠지! 난 내 동생을 손님으로 남기겠어. 퇴실 권한이 있는 방문객으로 기록하란 말이야.』
『그렇게 되면 당신은… 보호자로서의 권한을 잃게 됩니다. 아이가 위험에 처해도 개입할 수 없고, 결국 시스템 밖으로 버려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좋습니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잔향 속에서 형의 가쁜 숨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어진 형의 목소리는 너무나 낮고 떨려서, 가슴 한구석이 아릿해질 정도였다.
『…상관없어. 내가 잊히더라도, 도윤이는 누군가의 소유물이 되면 안 돼. 그 대가로 내가 내놓아야 할 게 그거라면….』
그 뒤의 말은 치익- 하는 노이즈와 함께 지워져 있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기록을 훼손한 흔적이었다. 거래 조건의 핵심이 빠져 있었다.
형은 무엇을 대가로 나를 ‘손님’으로 남긴 걸까?
“잔향은 거기까지입니다, 도구리 어린이.”
그림자가 비웃듯 내 별명을 불렀다. 그는 윤서하 씨의 검집을 마치 종잇장처럼 가볍게 털어내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가 든 검은 우산 끝에서 검은 액체가 뚝뚝 떨어졌다.
“당신의 형은 실패했습니다. 그는 당신을 지키려 했지만, 결국 당신을 이 거대한 기계의 톱니바퀴 사이에 끼어버린 이물질로 만들었을 뿐이죠. 이제 그만 포기하고 우산을 받으십시오.”
그가 내민 우산의 손잡이. 가온이가 말했던 노란색 크레파스 냄새가 진동했다.
그 순간, 내 시야에 시스템 메시지 창이 강제로 팝업 되었다. 오류 때문인지 글자가 깨져 있었지만, 후보 4번의 이름이 서서히 복구되고 있었다.
[보호자 후보 4번: 강 도 □]
[분류 번호: KDY-0-Origin]
강도… 뭐?
강도원도, 강도윤도 아닌 또 다른 이름.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형의 이름은 강도원(源)이다. 근원 원 자를 썼지. 내 이름은 도윤(潤), 적실 윤 자다. 우리 집안 이름 돌림은 ‘도’자였다.
그렇다면 저 빈칸에 들어갈 글자는….
“형…?”
내가 멍하니 중얼거리자, 그림자의 흐릿한 얼굴이 일순간 뒤틀렸다. 그것은 웃음 같기도 했고, 지독한 증오 같기도 했다.
“그 이름으로 불리는 것도 오랜만이군. 하지만 난 당신이 생각하는 그 ‘보호자’가 아닙니다.”
그림자가 우산을 높이 치켜들었다.
폐기실 천장에 달린 수천 개의 낮잠 침대들이 일제히 요동치며 아래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단순한 추락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마치 거대한 짐승의 이빨처럼 우리를 가두기 위해 좁혀오고 있었다.
“난 당신이 버린, 혹은 당신을 버린 기록들의 집행관일 뿐.”
그의 우산 끝이 내 미간을 향했다.
그 순간, 상자 안에서 또 다른 물건이 보였다. 녹음기 밑에 깔려 있던, 낡은 헌터협회 신분증 하나.
사진 속 인물은 얼굴이 훼손되어 있었지만, 그 아래 적힌 직위는 선명했다.
[헌터협회 초창기 관리국장 : 강도지(知)]
할아버지? 아니면 그 이상의 과거?
생각할 틈은 없었다. 윤서하 씨가 내 허리춤을 낚아채며 뒤로 몸을 날렸고, 가온이는 비명을 지르며 내 등에 매달렸다.
“도윤 씨, 정신 차려요!”
서하 씨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맑게 들렸다. 그녀의 목에 감겨 있던 백설의 구속구가 파킨, 소리를 내며 깨져 나갔다. 그녀의 S급 마력이 폭주하듯 실내를 휘감았다.
하지만 그림자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우산을 활짝 펼쳐 우리를 덮어왔다.
“보호자 재지정 시간이 종료되었습니다. 이제부터 강제 수용 절차를 시작합니다.”
발밑의 바닥이 사라졌다.
우리는 다시 한번, 더 깊은 어둠 속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멀어지는 천장 너머로, 그림자의 흐릿한 얼굴이 아주 잠깐 선명해졌다.
그것은 나와 똑같은 얼굴을 한 채, 눈물처럼 노란색 크레파스 액체를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내 귓가에 마지막 잔향이 박혔다.
『도윤아, 절대로 우산을 잡지 마. 그건 네 할아버지가 남긴 ‘감옥’이야.』
형의 절박한 목소리와 함께, 우리는 B-0층보다 더 깊은, 기록조차 되지 않은 폐기 구역의 심장부로 떨어져 내렸다.
어둠 속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시스템 창에 새로 갱신된 붉은색 경고 문구였다.
[경고: ‘손님’ 강도윤의 상태가 ‘실종’에서 ‘영구 소장품’으로 변경 시도 중입니다.]
[관리자 ‘강도지’의 접속이 감지되었습니다.]
제목: 153화. 강도지의 감옥
추락은 예고 없이 찾아왔고, 착지는 다정하지 않았다.
"윽, 커흑!"
폐부의 공기가 한꺼번에 빠져나가는 감각에 상체를 굽혔다. 바닥은 딱딱했다. 아니, 단순히 딱딱한 게 아니라 비정상적으로 매끄러웠다. 마치 거대한 강화유리 위로 떨어진 기분이었다. 입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났지만, 농담이라도 한 마디 던질 여유는 없었다.
옆에서는 윤서하 요원이 신음 섞인 숨을 내뱉으며 검을 짚고 일어서고 있었고, 반가온은 엉덩방아를 찧은 채 멍하니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다들... 무사합니까?"
내 목소리가 묘하게 울렸다. 빈 강당에서 말하는 것처럼 공허한 울림이다. 윤서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려다 멈칫했다. 그녀의 하얀 목덜미, 그 매끄러운 피부 위로 가느다란 검은 선이 쩍 갈라지듯 돋아나 있었다. 검은 우산을 펼친 모양의 기괴한 균열이었다.
"말하지 마세요. 상태가 안 좋아 보입니다."
내가 손을 내밀어 그녀를 제지했다. 윤서하는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의 목을 만졌다. 손가락끝에 걸리는 균열의 감각에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우리는 지금 B-0층, 그 너머의 심연에 떨어졌다. 시스템이 '폐기 구역'이라 부르던 곳이지만, 내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쓰레기 처리장과는 거리가 멀었다.
"여긴... 박물관인가요?"
반가온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사방이 유리 진열장이었다. 끝도 없이 뻗은 복도를 따라 질서정연하게 배치된 유리장 안에는 물건들이 하나씩 들어차 있었다. 누렇게 변색된 헌터협회 초창기 수기 장부, 낡은 가죽 지갑, 이름 모를 헌터의 부러진 단검. 그리고 가장 많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검은 우산'들이었다.
수십, 수백 개의 검은 우산이 펴지지도 않은 채 박제된 표본처럼 유리장 안에 세워져 있었다. 단 하나도 젖어 있지 않았고, 단 하나도 낡지 않았다. 마치 시간이 박탈된 공간 같았다.
"냄새가... 이상해요."
반가온이 코를 킁킁거리며 인상을 썼다.
"어떻게?"
"전부 똑같아요. 오래된 종이를 라미네이팅한 냄새. 아니면 새 책을 막 뜯었을 때 나는 그 비닐 냄새 같은 것뿐이에요. 사람 냄새도, 먼지 냄새도 없어요. 그냥... 기록된 냄새뿐이에요."
그녀의 말대로였다. 이곳은 보육실도, 민원실도 아니었다. 기억과 존재를 박제로 만들어 보관하는 '기록 보관소'였다.
그때, 왼쪽 손등이 가려웠다. 무심코 긁으려다 나는 내 손을 보고 굳어버렸다.
"이건 또 뭐야."
손끝의 질감이 변해 있었다. 지문이 있어야 할 자리가 미세하게 평평해지더니, 투명한 플라스틱 막이 씌워진 것처럼 반질거렸다. 가슴팍에 붙어 있던 '손님' 스티커는 이제 옷감의 일부가 된 듯 딱딱하게 굳어, 마치 박물관 전시품 하단에 붙는 네임태그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상태: 영구 소장품으로 전환 중 (12%)]
허공에 뜬 시스템 메시지가 내 눈을 찔렀다. 실종자가 아니라 소장품. 그러니까 나를 이 유리장 안에 처넣겠다는 뜻이다. 몸이 점점 무거워졌다. 관절 마디마디에 뻑뻑한 기름을 친 것처럼 움직임이 둔해졌다.
"도윤 씨, 저거..."
반가온이 손가락으로 한 유리장을 가리켰다. 다른 우산들 사이에서 유독 이질적인 것. 그것은 물건이 아니라 종이였다.
어린아이가 크레파스로 삐뚤빼뚤하게 그린 그림 한 장.
그림 속에는 커다란 검은 우산이 하늘을 다 가리고 있었고, 그 아래에는 막대기처럼 그려진 사람 셋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 지렁이가 기어가는 듯한 글씨로 문장이 적혀 있었다.
[손님은 집에 가야 해]
"이 그림에서만 냄새가 나요."
반가온이 유리장에 코를 바짝 들이댔다.
"노란 크레파스 냄새... 그리고 아주 진한 피 냄새요.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처럼 축축한 피 냄새."
나는 홀린 듯 그 유리장 앞으로 다가갔다. 그림 속의 막대 인간 셋. 우연일까. 한 명은 긴 칼 같은 것을 들고 있고, 한 명은 작고, 나머지 한 명은... 멍청해 보였다. 꼭 우리 셋을 그려놓은 것 같은 기시감이 들었다.
'잔향청취'를 써야 한다. 이 그림이 누구의 손에서 나왔는지, 이 '집에 가야 한다'는 경고인지 소망인지 모를 문장이 누구의 목소리였는지 알아야 했다.
하지만 망설여졌다. 백설 시스템의 심장부에서 능력을 쓰는 건 내 존재를 시스템에 대놓고 노출하는 짓이다. 게다가 방금 전의 대가는 내 흑역사를 방송하는 수준이었지만, 이번에는 더 심한 것을 요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면 그냥 유리창 안의 수집품이 될 뿐이다.'
나는 굳어가는 손가락을 뻗어 유리장 표면에 가져다 댔다. 차가운 유리의 감촉이 아니라, 마치 누군가의 얼어붙은 피부를 만지는 듯한 소름 끼치는 감각이 전해졌다.
[능력: '잔향청취'를 활성화합니다.]
[주의: 해당 구역은 '기록 보존 구역'입니다. 잔향의 밀도가 너무 높아 사용자에게 영구적인 손상을 입힐 수 있습니다.]
[대가 산정 중... 소장품의 가치 보존을 위해 '기억의 유실'을 담보로 합니다.]
머릿속이 찡하게 울렸다. 누군가 내 뇌를 날카로운 수저로 긁어내는 기분이었다.
'기억의 유실?'
순간, 머릿속에서 형의 얼굴이 떠올랐다. 평소처럼 나를 '도구리'라고 부르며 비죽거리던 형의 웃음. 그런데 그 웃음의 곡선이 지워지기 시작했다. 형의 눈매가 어땠는지, 코 옆의 작은 흉터가 어느 쪽이었는지 순식간에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안 돼...!"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귓가에 낯설고도 익숙한 노인의 목소리가 내리꽂혔다.
도원아, 우산은 비를 막으려고 쓰는 게 아니란다.
기록의 잔향이었다. 흑백 영화처럼 눈앞에 펼쳐진 풍경 속에서, 어린 강도원이 커다란 검은 우산을 든 노인 앞에 서 있었다. 노인의 얼굴은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뿜어내는 압박감은 화면 너머의 나조차 숨 막히게 했다.
그럼 왜 써요? 무겁기만 한데.
기록이 새어나가는 걸 막는 거지.
노인, 강도지가 서늘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람의 삶은 흘러넘치기 마련이다. 슬픔도, 기쁨도, 죽음도... 그냥 두면 흩어져서 사라지지. 하지만 이 우산 아래에 묶어두면 영원히 보존할 수 있다. 그게 설령 감옥이라 불릴지라도, 유실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니?
어린 강도원이 뒷걸음질 쳤다. 소년의 눈에는 공포가 서려 있었다.
...그건 사람이 아니라 물건 취급하는 거잖아요. 할아버지는 무서워요.
강도지는 대답 대신 우산을 깊게 눌러 썼다. 그 우산의 그림자가 소년을 집어삼킬 듯이 길게 늘어졌다.
언젠가 네 동생도 이 가치를 알게 될 거다. 우리는 사라지는 것들을 지키는 파수꾼이니까.
잔향이 끊겼다.
"허억, 헉!"
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형의 얼굴... 형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다. 형이라는 존재는 분명히 인지하고 있는데, 그의 이목구비가 마치 픽셀이 깨진 사진처럼 뭉개져 있었다.
"도윤 씨! 괜찮아요?"
반가온이 내 어깨를 흔들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멀게 들렸다.
[시스템 공지: 증언자 자격 검증 완료.]
[윤서하(S급)를 '증언자 1호'로 등록합니다. 기록 보관을 위해 음성 기능을 영구 고정합니다.]
"안 돼...!"
윤서하가 목을 움켜쥐며 주저앉았다. 그녀의 목에 새겨진 우산 문양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녀가 말을 하려 할 때마다 시스템이 그녀의 존재를 '기록'으로 치환하려 들고 있었다. 이대로 두면 그녀는 이 보관소의 살아있는 오디오 가이드가 되어버릴 터였다.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손끝은 이제 완전히 투명한 플라스틱처럼 변해 감각이 없었다.
'사라지는 걸 지키는 파수꾼? 웃기지 마.'
그건 그냥 소유욕에 미친 수집가의 변명일 뿐이다. 할아버지든 뭐든, 그 노인네가 만든 이 미친 시스템이 내 주변 사람들을 갉아먹게 둘 순 없었다.
나는 가슴팍에 붙은 '손님' 스티커를 내려다봤다. 이미 옷감에 완전히 달라붙어 떼어내기 힘든 상태였다.
"도윤 씨, 뭐 하시게요?"
반가온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나는 단검을 꺼내 스티커 주변의 옷감을 통째로 도려내기 시작했다.
찌익, 하는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가슴팍의 피부가 당겨졌다. 스티커는 단순한 종이가 아니었다. 내 존재의 '입장권'이자 '권리'였다. 이것을 훼손한다는 건, 이 시스템에서 보호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권한마저 포기한다는 뜻이었다.
[경고: 손님 권한이 훼손되었습니다.]
[사용자의 '퇴실 권한'이 무효화됩니다.]
[영구 소장품 전환 속도가 가속화됩니다. (34%)]
몸이 급격히 무거워졌지만, 상관없었다. 스티커를 찢어내자 그 아래, 내 가슴팍 피부 위에 직접 새겨진 낙서 같은 것이 보였다.
"이건...?"
스티커 뒷면과 내 피부가 맞닿아 있던 자리에, 아주 미세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시스템의 글자가 아니었다. 잉크가 번진, 투박하고 급하게 갈겨쓴 사람의 필체.
형의 필체였다.
[도구리, 진짜 출구는 우산꽂이가 아니라 그림 뒤야.]
나는 고개를 들어 아까 그 어린아이의 그림을 보았다.
[KDY-0은 사람이 아니라 방 번호다.]
그림 하단, 노란색 크레파스로 칠해진 배경 구석에 작은 숫자가 숨겨져 있었다. 0.
이곳은 보관소의 끝이 아니었다. 시작점이었다.
나는 감각이 사라져가는 손으로 그림이 든 유리장을 내리쳤다.
"부숴, 당장!"
내 외침과 함께 윤서하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시스템의 경고음이 고막을 찢을 듯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유리 파편이 튀는 사이로, 우리는 기록되지 않은 진짜 심연으로 발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