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8-299화. 약관 수정과 최초 반품 대상
298화. 약관 수정
붉은 숫자가 망막을 할퀴었다. 25, 24, 23…….
숨을 들이켤 때마다 폐부 깊숙이 비린내 나는 잉크 향이 스며들었다. 손에 쥔 펜은 차갑다 못해 손가락뼈를 얼려버릴 기세였다. 이 펜으로 저 하얀 종이에 점 하나만 찍어도, 윤서하라는 존재는 이 세상의 ‘재고 목록’에서 영원히 삭제될 것이다.
[반품 사유: 윤서하는 살아 있으면 안 된다.]
내 필체였다. 미래의 내가 썼든, 내 무의식이 뱉어냈든 간에 그건 명백한 사형 선고였다. 창구 너머의 문태식—아니, 그 껍데기를 뒤집어쓴 무언가가 나를 재촉했다. 이목구비가 문드러진 얼굴 위로 기괴한 사무적 미소가 걸려 있었다.
“작성하십시오, 보호자님. 계약의 유효성을 증명할 유일한 방법입니다.”
“야.”
나는 펜 끝을 종이 위에 가져다 댔다. 잉크가 번지기 직전의 찰나, 나는 고개를 들어 껍데기뿐인 문태식을 쳐다봤다.
“너네 보험사, 서비스 교육 다시 받아야겠다. 고객이 내용을 수정하고 싶다는데 왜 자꾸 강매를 해?”
“수정은 불가능합니다. 이미 결정된 운명은…….”
“운명? 웃기고 있네. 이건 그냥 악성 재고 처리반의 횡포지.”
나는 펜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안 된다]라는 세 글자 위에 거칠게 가로줄을 그었다. 종이가 찢어지는 비명이 들리는 것 같았다. 그 옆의 빈 공간에, 나는 내 영혼의 밑바닥을 긁어내듯 새로운 문장을 짓이기며 써넣었다.
[반품 사유: 윤서하는 살아 있으면 안 되는 계약의 증거다.]
순간, 창구 주변의 공기가 굳어버렸다.
‘살아 있으면 안 된다’는 결과값이 아니라, ‘살아 있으면 안 된다고 규정한 이 계약 자체가 불법’이라는 고발 사유로 문장을 비틀어버린 것이다.
우웅, 콰아아앙!
천장의 번호판이 미친 듯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B-04라는 숫자가 깨지며 노이즈가 발생했다. 시스템은 이 문장을 해석하기 위해 방대한 데이터를 뒤졌지만, ‘반품 사유’와 ‘고발 사유’가 한 문장 안에 섞여버린 논리적 모순을 견디지 못했다.
“에러…… 오류 검출…… 보호자 강도윤의 입력을…… 재해석…….”
문태식의 껍데기가 기괴하게 뒤틀렸다. 어깨가 솟구치고 목이 180도 돌아가더니, 그 균열 사이로 지직거리는 잡음과 함께 낯익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시스템의 기계적인 톤이 아니라, 진짜 문태식의 억울함이 섞인 듯한 잔향이었다.
“……도윤아…… 네 손…… 네 손가락의 감각을 믿지 마…….”
“문 실장?”
“도장은…… 네가 찍는 게 아냐…… 저 기계가…… 저 기계가 네 그림자를 먹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태식의 형태가 다시 잉크 소용돌이 속으로 뭉개졌다. 하지만 그 짧은 힌트는 충분했다. 내 시선은 자연스럽게 창구 한쪽에서 대기 중인, 낡은 무쇠로 된 자동 도장 기계로 향했다.
그때였다. 바닥에서 솟구친 잉크가 서하의 허리까지 차올랐다. 서하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손목을 감싸고 있던 검은 실을 꽉 쥐었다. 어머니, 한서윤이 남긴 마지막 흔적.
“도윤 씨! 저 괜찮아요! 저, 이번에는 안 숨을게요!”
서하의 눈동자에 투명한 빛이 감돌았다. 그녀가 쥔 실이 타오르듯 하얀 불꽃을 내뿜으며 잉크의 파도를 잠시 밀어냈다. 서하는 희생당하기를 기다리는 ‘상품’이 아니었다. 그녀는 제 어머니가 목숨 걸고 지켜낸 ‘증거’ 그 자체로서 이 공간에 버티고 서 있었다.
“형…… 저거 봐…….”
바닥에 쓰러져 있던 가온이가 떨리는 손가락으로 창구를 가리켰다. 가온이의 목덜미와 이마에 선명하게 박힌 [검수 완료] 도장 자국.
“내 몸에 박힌 거랑…… 저 기계 도장이랑…… 똑같아. 저 도장이…… 찍히면 끝이야.”
가온이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명확했다. 녀석의 몸에 새겨진 흉터 같은 도장 무늬는 복잡한 기하학적 문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창구의 자동 도장 기계가 내뿜는 불길한 붉은 안개 속에서, 똑같은 문양의 인면(印面)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백연 씨, 지금이에요!”
내 외침과 함께 백연이 마지막 남은 필름의 셔터를 눌렀다.
찰칵!
눈이 멀 것 같은 섬광이 공간을 가득 메웠다. 백연의 능력으로 고정된 ‘한 컷’의 현실. 그 정지된 화면 속에서 보이지 않던 진실이 정체를 드러냈다.
자동 도장 기계의 아래쪽, 붉은 직인이 찍히기 직전의 그림자가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뻗어 나와 있었다. 그리고 그 그림자의 끝은 놀랍게도 내가 쥔 검은 우산의 손잡이와 샴쌍둥이처럼 연결되어 있었다.
‘보호자’라는 직함은 권리가 아니었다. 도장을 찍기 위한 ‘손잡이’ 역할을 강제로 떠맡은 도구에 불과했다. 내가 보호자 직인을 수락하는 순간, 시스템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 그림자를 끌어당겨 서하의 이마에 저 저주받은 낙인을 찍었을 것이다.
“보험 약관의 함정은 항상 이런 식이지. 깨알 같은 각주에 독약을 섞어놓는다고.”
나는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카운트다운은 이제 ‘3’을 가리키고 있었다.
도장 기계가 서류를 향해 육중한 무게를 실어 낙하하기 시작했다. 잉크의 파도가 서하를 집어삼키려 아가리를 벌렸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검은 우산을 휘둘러, 도장 기계의 홈과 종이 사이의 빈틈에 손잡이를 억지로 끼워 넣었다.
콰드드득!
“크윽!”
팔을 타고 전해지는 충격이 어깨뼈를 탈구시킬 듯 강력했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우산의 검은 천이 비명을 지르며 찢겨 나갔고, 금색 글자들이 우산대에서 떨어져 나와 도장 기계 안으로 역류하기 시작했다.
[보호자: 강도윤]이라는 글자가 도장 기계의 내부 기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시스템이 요구하는 ‘정식 도장’ 대신, 계약서 자체인 우산을 기계 속에 처박아 넣은 것이다.
“자, 이제 누가 원본인지 따져보자고! 내 우산에 적힌 글자랑, 네 기계에 박힌 글자랑 어디 한번 제대로 싸워봐!”
지직, 지지직!
창구가 비명을 질렀다. 우산에서 흘러나온 금빛 잉크와 기계의 검은 잉크가 충돌하며 사방으로 불꽃을 튀겼다. 두 개의 서로 다른 ‘계약’이 하나의 직인을 두고 주도권 싸움을 벌이는 광경이었다. 시스템은 제어 불능 상태에 빠졌고, 창구 너머의 공간이 유리창 깨지듯 금 가기 시작했다.
그 균열 너머로, 숨겨져 있던 데이터의 심층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B-04: 윤서하]
[B-03: 강도윤]
[B-02: 반가온]
[B-01: 백연]
번호판의 숫자들이 급격히 뒤로 밀려나며 사라지더니, 그 바닥 밑에 묻혀 있던 태초의 기록 하나가 서서히 떠올랐다.
붉은색 경고등이 점멸하며 시스템의 가장 깊은 곳, ‘B-00’이라는 번호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저건…….”
서하가 멍하니 그 문자를 바라봤다. 잉크의 파도가 잦아들며 드러난 그 페이지의 첫 줄은, 내가 평생 알고 있던 모든 상식을 뒤엎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B-00 원본 접수 기록]
[최초 반품 대상: 한희주]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한희주.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이름. 20년 전, 내가 헌터가 되기도 전의 아주 어린 시절에 병으로 돌아가셨다던 내 어머니의 이름이었다.
기록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떨리는 눈으로 다음 문장을 읽어 내려가던 나는 호흡하는 법조차 잊어버렸다.
[상태: 반품 보류 (대체 보호자 한서윤의 계약 체결에 의해 이행 지연)]
윤서하의 어머니인 한서윤이 지키려 했던 것은 제 딸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내 어머니의 ‘반품’을 막기 위해, 그리고 그 여파가 어린 나에게 미치지 않게 하기 위해 이 거대한 시스템과 지옥 같은 계약을 맺고 버텨왔던 것이다.
“……엄마가, 강도윤 씨 어머니를?”
서하의 목소리가 떨림을 넘어 경악으로 물들었다.
창구의 도장 기계가 과부하로 폭발하기 직전, B-00의 기록지 마지막 줄에 새로운 문장이 생성되었다. 잉크가 아니라 붉은 핏물로 적힌 듯한 그 글자는 나를 조롱하듯 번뜩였다.
[현시점 반품 대상 확정: 강도윤 (지연된 계약의 최종 소급 적용)]
시스템이 보낸 최후의 청구서였다. 20년 동안 복리로 불어난 죽음의 부채가 이제야 내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도윤 씨, 위험해요!”
백연의 외침과 동시에, 박살 난 도장 기계에서 뿜어져 나온 거대한 잉크 손들이 창구를 넘어 내 온몸을 휘감았다.
나는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우산 손잡이를 더 깊숙이 박아 넣었다.
“보험금 타기 참 힘드네. 이거 완전 악질 보험 아냐?”
눈앞의 세상이 시커먼 잉크 속으로 침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누군가 내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는 차가운 손길이 느껴졌다. 20년 동안 꿈에서조차 잊지 못했던, 그리운 어머니의 향취와 함께.
299화. 최초 반품 대상
시커먼 잉크는 차가웠다. 하지만 그 밑바닥에 고여 있는 온기는 이질적일 정도로 다정했다.
폐부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은 질식할 것 같은 데이터의 소음이 아니라, 오래된 종이 냄새와 약간의 멸치 육수 향, 그리고 기억 저편에 처박아 두었던 낡은 우산의 눅눅한 천 냄새였다.
‘도윤아.’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아니, 부른다기보다는 내 고막 안쪽에 직접 지장을 찍는 듯한 울림이었다.
눈을 떴을 때, 나는 병실이 아닌 어느 낡은 관공서의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빛바랜 플라스틱 의자, 웅웅거리며 돌아가는 낡은 선풍기. 그리고 내 옆에는 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한희주. 나의 어머니.
20년 전의 그녀는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작고 말랐다. 그녀는 내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내 손은 지금보다 훨씬 작았고, 손가락 끝에는 먹지가 묻어 있었다.
“엄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대신 내 머릿속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여기는 20년 전이 아니다. 시스템의 가장 깊은 곳, B-00이라는 번호표가 붙은 원본 데이터의 저장소다.
어머니는 정면의 창구를 보고 있었다. 창구 너머에는 얼굴이 없는 상담원이 기계적인 손놀림으로 서류를 넘기고 있었다. 어머니가 내민 서류의 제목은 [생애 포기 및 대체 보호자 설정 계약서]였다.
“도윤아, 저기 봐. 아저씨가 도장 찍어주시면 이제 우리 도윤이는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살 수 있어.”
어머니가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유리공예 같았다. 그녀의 다른 한쪽 손에는 내가 지금 쥐고 있는 것과 똑같은, 하지만 아직은 멀쩡한 검은 우산이 들려 있었다.
그때 깨달았다. 어머니는 죽은 게 아니었다. 그녀는 ‘반품’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이 시스템의 담보로 잡혔다.
창구의 상담원이 쇳소리를 내며 말했다.
[반품 대상 한희주. 사유: 수명 고갈 및 부채 미납. 대안을 제시하십시오.]
“내 수명을…… 아니, 내 존재를 이 기록물 보관소에 묶어둘게요. 대신 내 아들은 이 목록에서 지워주세요. ‘보류’해 주세요. 내가 이 안에서 시스템의 노이즈를 청소하는 도구가 될 테니까.”
[대체 보호자 한서윤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창구 옆에서 한 여자가 걸어 나왔다. 서하의 어머니, 한서윤이었다. 그녀는 눈물이 그득한 눈으로 내 어머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여자는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그것은 비극적인 결탁이자, 자식들을 살리기 위한 불법 대출이었다.
“희주 언니, 꼭 이래야 해? 내가 어떻게든……”
“아니, 서윤아. 우리 도윤이는 헌터 같은 거 안 시키고 싶었는데. 이 아이가 나중에 커서 나처럼 보험금에 쫓기지 않게만 해줘. 부탁이야.”
그것이 ‘반품 보류’의 진실이었다. 내가 잔향청취라는 기괴한 능력을 얻은 이유, 죽은 자들의 목소리가 농담처럼 들렸던 이유. 그것은 내 어머니가 시스템의 잡음이 되어, 아들에게 위험을 미리 알리는 경고음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의 잔향이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20년 전의 그 차가운 손길이 지금의 내 심장을 얼려버릴 듯 파고들었다.
‘도윤아, 여기 있으면 안 돼. 여긴 공무원 시험 준비하는 곳보다 더 삭막한 곳이란다.’
어머니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슬픈 목소리여야 하는데, 말투는 묘하게 나를 닮아 있었다. 아니, 내가 어머니를 닮은 거겠지.
“엄마, 이게 뭐야. 보험은 들지 말랬잖아. 이런 종신계약은 더더욱.”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농담을 던졌다. 공포가 발끝부터 차올랐다. 이대로 이 따뜻한 어둠 속에 머물고 싶다는 유혹이 나를 잡아끌었다. 잉크의 파도가 다시 나를 덮치려 했다.
‘그러게 말이다. 약관도 안 읽고 서명하는 건 내 아들답네. 하지만 도윤아, 보험금 타 먹으려면 일단 살아남아야지? 넌 아직 만기 안 됐어.’
어머니가 내 등을 세게 밀었다.
“형! 정신 차려! 여기서 잠들면 진짜 재고 처리된다고!”
가온이의 비명이 고막을 찢었다.
갑자기 시야가 뒤틀렸다. 잉크 속에서 하얀 불꽃이 튀었다. 서하가 쥔 한서윤의 실이 어둠을 가르고 들어와 내 팔목을 감았다.
“도윤 씨! 손잡아요! 제발!”
서하의 목소리. 그녀는 더 이상 숨지 않겠다고 했다. 그녀의 의지가 실을 타고 전해져 시스템의 논리를 정면으로 거스르고 있었다.
동시에 내 목덜미 근처에서 기분 나쁜 진동이 울렸다. 가온이가 자신의 몸에 새겨진 [검수 완료] 도장 자국을 내 잉크 묻은 등에 갖다 대고 있었다.
“내 몸에 박힌 건 시스템의 승인 마크야! 이걸 역이용해서 형의 상태를 ‘정상 출고’로 바꿀 거야! 제발, 제발 먹혀라!”
가온이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녀석은 자신의 상처를 벌려 시스템에 노이즈를 주입하고 있었다. ‘검수 완료’된 상품이 ‘반품 대상’과 접촉하자, 도장 기계가 논리적 모순에 빠져 삐걱거렸다.
치직, 치지직!
그때, 내 눈앞으로 무언가 나풀거리며 떨어졌다. 타버린 필름 조각. 백연이 던진 마지막 승부수였다.
그 작은 필름 가장자리에는 사진으로 인화되지 못한 ‘원본’의 조각이 박혀 있었다. 직인이 찍히지 않은, 아직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데이터의 파편.
나는 본능적으로 그 필름 조각을 낚아챘다. 그리고 내 검은 우산의 찢어진 틈새에 밀어 넣었다.
[데이터 복구 시작…….]
[B-00 원본 기록과 우산의 계약을 대조합니다.]
“엄마, 미안. 나 효도는 나중에 할게. 일단 이 악덕 기업부터 때려치워야겠어.”
나는 어머니의 손을 놓았다. 아니, 어머니가 내 손을 놓아주었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마치 아주 긴 당직 근무를 마치고 퇴근하는 동료를 배웅하는 표정이었다.
‘가서 영수증 제대로 끊어와. 연체료까지 싹 다.’
쿠우웅!
세상이 뒤집혔다.
나는 시커먼 잉크를 토해내며 창구 바닥으로 튕겨져 나왔다. 폐가 찢어지는 고통과 함께 현실의 차가운 공기가 밀려들었다.
“도윤 씨!”
“형!”
서하와 가온이가 나를 붙잡았다. 백연은 바닥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형체를 알 수 없이 타버린 카메라가 들려 있었다.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입가에 묻은 검은 잉크를 소매로 닦아내고, 반쯤 박살 난 창구를 노려봤다.
창구의 번호판은 여전히 B-00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 떠오른 원본 기록지.
아까는 보지 못했던, 혹은 시스템이 가리고 있던 진실이 그곳에 있었다.
[B-00 원본 접수 기록]
[최초 반품 대상: 한희주]
[처리 상태: 소급 적용 중]
[처리 담당자: □□□□□□]
그 빈칸.
어머니의 목숨을 앗아가고, 한서윤의 인생을 망가뜨리고, 서하를 상품으로 취급하며, 가온이를 실험체로 만든 그 이름.
검은 우산? 아니, 그건 조직의 명칭일 뿐이다. 이 시스템을 돌리는 진짜 주체의 이름은 따로 있었다.
빈칸 위로 붉은 잉크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누군가 실시간으로 도장을 찍는 것처럼, 글자들이 하나씩 박혔다.
[처]
[리]
[담]
[당]
[자]
[:]
[헌] [터] [협] [회] [사] [망] [관] [리] [국]
심장이 차갑게 식었다.
대한민국 모든 헌터의 생사결을 관리하고, 마석의 유통을 통제하며, 시민의 안전을 책임진다는 그 거대 조직. 헌터협회.
그들의 심장부 깊은 곳에, 죽음을 상품화해서 이득을 챙기는 ‘사망관리국’이 도사리고 있었다. 우리가 싸워온 괴수보다 더 끔찍한 괴물은 바로 우리가 세금을 내고 의지하던 체제 그 자체였다.
“……협회였다고?”
백연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의 카메라는 협회의 지원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가온이가 갇혀 있던 시설도, 서하의 어머니가 도망쳐 나온 곳도 결국 그 거대한 그늘 아래였다.
우르릉, 콰아앙!
창구 너머의 공간이 무너지며 새로운 길이 열렸다. 잉크의 바다가 갈라지고, 황금빛으로 번들거리는 거대한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문 위에는 기괴하게 뒤틀린 저울 문양과 함께 서늘한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최종 심사실: 미수금 정산 구역]
“도윤 씨, 저건……”
서하가 내 옷소매를 잡았다. 나는 찢어진 우산을 고쳐 쥐었다. 우산대에서는 이제 금빛과 검은빛이 뒤섞인 불길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보험금이 너무 많이 쌓였어.”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대신 이빨을 드러냈다. 지금 울면 어머니가 비웃을 테니까. 20년을 버틴 그녀의 농담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저 안에 들어가서 사장 나오라고 해야지. 영수증 내역이 좀 이상하다고.”
나는 한 걸음을 내디뎠다.
이것은 단순히 서하를 살리기 위한 싸움이 아니었다.
20년 전 보류된 어머니의 죽음을 찾아오는 길이며, 이름도 없이 재고로 분류되어 사라져간 수많은 헌터의 증언을 완성하는 길이었다.
“가자. 퇴근 전에 결산은 확실히 해야지.”
최종 심사실의 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 너머에서, 수만 개의 서류 뭉치가 휘날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서늘한 환영 인사가 들려왔다.
[반품 대상 강도윤, 입장을 환영합니다. 귀하의 연체 이자는 ‘존재’로 청구됩니다.]
나는 대답 대신 우산을 휘둘러 문턱을 박살 냈다.
저들이 설계한 완벽한 장부의 마지막 줄을, 내 방식대로 오염시켜 줄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