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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187화 합본. 사과문을 받을 수 없는 주소에서 대신 용서받은 사람까지 일러스트

185-187화 합본. 사과문을 받을 수 없는 주소에서 대신 용서받은 사람까지

185화. 사과문을 받을 수 없는 주소

“수취인 불명(Address Unknown). 내용물이 반송 사유에 해당한다.”

회랑의 목소리는 서늘했다. 그는 집게손가락으로 봉투의 상단, 텅 빈 수신인 칸을 툭툭 쳤다. 그것은 마치 판사가 판결문을 낭독하는 것처럼 단호했다.

“발신인은 로웬, 너다. 받을 사람이 확인되지 않으니, 이 서류는 작성자에게 돌아가는 게 원칙이지. 가져가라.”

회랑이 내민 봉투가 로웬의 턱밑까지 다가왔다. 로웬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 봉투를 응시했다. 184화에서 그가 주장했던 ‘내용물 검수 권한’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셈이었다. 하지만 로웬은 손을 뻗는 대신 뒷짐을 지며 한 걸음 물러섰다.

“사과는 제가 받을 물건이 아닙니다. 회랑 님.”

로웬의 어조는 딱딱했다. 감정적인 거부라기보다는, 마치 잘못된 서류를 마주한 하급 관리의 사무적인 태도에 가까웠다.

“사과문이 배달되지 않았다는 건, 공정 과정에 결함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발신인에게 책임을 묻기 전에 주소지 검수부터 하는 게 절차상 맞습니다.”

“주소지가 없는데 무슨 검수를 하겠다는 거냐?”

“비어 있는 것과, 지워진 것은 다릅니다.”

로웬의 시선이 봉투의 수신인 칸에 고정되었다. 그저 백지가 아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종이의 결이 미세하게 일어나 있었다. 누군가 날카로운 칼날이나 거친 도구로 적혀 있던 글자를 박박 긁어낸 흔적이었다.

로웬이 확인을 위해 손을 뻗으려던 찰나, 옆에 서 있던 베라가 번개처럼 움직였다. 그녀의 차가운 손가락이 로웬의 손목을 낚아챘다.

“건드리지 마.”

베라의 목소리에 서린 경고는 진심이었다. 그녀는 로웬의 손을 강제로 뒤로 물리며 회랑을 노려보았다.

“수신인 칸에 이름이 없다고 해서 네 이름을 써넣거나, 네가 수취인으로 확정되는 순간 이 편지의 ‘무게’가 너한테 묶여. 이건 단순한 종이가 아니야. 일종의 계약이고 저주지.”

로웬은 베라의 손길에서 느껴지는 떨림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로웬이 이 기괴한 사과문의 ‘수신인’이라는 구멍에 빠져드는 것을 막고 있었다.

이네스가 그 틈을 타 봉투를 관찰했다. 그녀는 특유의 논리적인 눈빛으로 상황을 정리했다.

“수취인 불명은 주소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을 때 쓰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건 ‘수취인 말소’군요. 누군가 의도적으로 받을 사람을 기록에서 지워버린 겁니다. 로웬의 말이 맞아요. 이건 반송할 게 아니라, 왜 지워졌는지를 먼저 파악해야 하는 건입니다.”

성녀의 목소리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성자 교단의 법무적인 논리가 회랑의 압박을 밀어냈다.

그때, 침묵을 지키던 모르그가 성큼 다가왔다. 그는 봉투 모서리에 찍힌 인장을 손끝으로 덧그렸다.

“이 봉인… 성자 교단의 방식이 아니군.”

모르그의 눈이 낮게 가라앉았다. 고대의 지식에 해박한 그답게, 그는 봉투에 숨겨진 낡은 흔적을 읽어내고 있었다.

“교단이 세워지기 전, 귀족들이나 상단들 사이에서 통용되던 사설 배달 규약이다. 보낸 이의 익명성을 보장하기 위해 특수한 잉크를 쓰지. 하지만 이 정도로 지독하게 긁어낸 건 처음 보는군.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이름이라도 적혀 있었던 것처럼.”

피핀이 코를 킁킁거렸다. 그녀는 공중에 떠도는 보이지 않는 냄새를 쫓듯 고개를 연신 까딱였다.

“이상한 냄새가 나요.”

피핀이 봉투에 코를 바짝 들이댔다.

“문턱에 쌓인 매캐한 재 냄새… 그리고 다 식어버린 수프 냄새도 나요. 아, 이건 눅눅해진 빵봉투 냄새랑 섞여 있어요. 아주 오래된, 버려진 집에서 날 법한 그런 냄새요.”

아이의 감각은 정확했다. 그 냄새는 단순한 악취가 아니었다. 그것은 가난과 외로움, 그리고 잊힌 삶의 편린들이 뒤섞인 지독한 생활감의 잔상이었다.

그 순간, 이름 없는 증인은 자신의 손바닥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뜨거워.’

그의 손바닥에 새겨진 인장이 맥박치듯 붉게 달아올랐다. 머릿속에서 거대한 명단 하나가 펼쳐지는 환영이 보였다. 수만 명의 이름이 적힌 그 명단에서, 한 줄이 마치 불에 타듯 검게 그을리며 사라지고 있었다.

증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 지워진 한 줄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새 이름도, 직함도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선이 지워질 때마다 자신의 존재감 일부가 깎여 나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는 이것이 단순한 기록의 삭제가 아니라, 존재 자체의 말소임을 직감했다.

로웬은 피핀이 말한 ‘눅눅해진 빵봉투’라는 단어에 반응했다. 그는 품 안에서 아까 챙겨두었던 낡은 종이 조각 하나를 꺼냈다. 쓰레기 더미 사이에서 발견했던, 재가 묻은 빵봉투의 잔해였다.

“피핀, 네가 맡은 냄새가 이 조각에서도 나나?”

피핀이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똑같아요. 완전히 똑같은 냄새예요!”

로웬은 주저하지 않고 그 재 묻은 빵봉투 조각을 봉투의 지워진 주소 칸 위에 가만히 올려두었다.

지직, 하는 기분 나쁜 소음이 들리는 듯했다.

긁어내어 하얗게 일어났던 종이 결 위로, 빵봉투의 재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마치 자석에 끌려가는 쇳가루처럼, 재들은 특정한 형상을 이루며 글자를 만들어냈다.

회랑의 눈썹이 꿈틀했다. 베라는 숨을 죽였고, 이네스는 안경을 고쳐 썼다.

떠오른 것은 주소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문장이었다.

[ 받을 수 없는 주소 ]

처음에는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재가 더 촘촘하게 박히며 문장의 중간에 숨겨져 있던 글자들이 드러났다. 로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 받지 ‘못하게 만든’ 주소 ]

그것은 단순한 배달 사고의 기록이 아니었다. 누군가 인위적으로, 수취인이 사과를 받을 수 없도록 주소를 세계의 기억 속에서 도려냈음을 증명하는 낙인이었다.

“수취인이 사라진 게 아니었군.”

로웬이 낮게 읊조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실무적인 차분함 대신, 서늘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

“받아야 할 사람을 찾지 못하게, 누군가 주소를 죽여버린 거야.”

봉투 위로 검은 재가 번지며, 마치 피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아래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185화의 진실은 그 끈적한 검은 자국 속에 숨겨져 있었다.

186화. 주소가 죽은 집

“이미 죽은 주소입니다.”

회랑의 목소리는 차갑게 식은 돌벽의 감촉을 닮아 있었다. 그는 손끝에 닿은 서류의 온기를 밀어내듯, 기록판을 가볍게 덮었다.

“받아야 할 주소지가 더는 이 세상의 법령 아래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건은 배달 불능으로 종결됩니다. 더 이상의 추적은 자원 낭비일 뿐입니다. 절차를 종료하십시오.”

그것은 명령에 가까운 권고였다. 회랑의 눈은 이미 다음 사건의 목록으로 향해 있었다. 하지만 로웬은 그 자리에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긁혀 지워진 주소 칸, 그리고 그 위에 겹쳐진 ‘받지 못하게 만든 주소’라는 문장에 고정되어 있었다.

“종료할 수 없습니다.”

로웬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명확했다. 회랑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성자라 칭송받는 자의 자비심 같은 것은 묻어나지 않았다. 그저 낡은 규정집을 통째로 씹어 삼킨 서기 같은 딱딱함만이 감돌았다.

“사설 배달 규정 제14조 3항에 따르면, 수취 거부나 수취인 부재가 아닌 ‘주소지 소멸’의 경우, 반드시 반송 사유 코드와 함께 현장 확인 기록이 첨부되어야 합니다. 단순히 주소가 죽었다는 선언만으로는 이 봉투를 보관함으로 옮길 수 없습니다.”

“지금 내 판단보다 문서상의 코드가 더 중요하다는 건가?”

“절차가 그렇습니다. 현장을 확인하지 않고 작성된 종결 보고서는 추후 감사에서 반려 사유가 됩니다. 저는 제 업무를 미결 상태로 남겨두고 싶지 않습니다.”

로웬의 고집은 감정적인 호소가 아니었다. 그것은 철저히 실무적인 방어였다. 회랑은 잠시 불쾌한 기색을 보였으나, 로웬의 논리에 빈틈을 찾지 못했다. 결국 그는 턱 끝으로 회랑 바깥의 어두운 골목을 가리켰다.

그때, 코를 킁킁거리던 피핀이 로웬의 옷소매를 살짝 당겼다.

“……냄새가 나요.”

피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아이는 허공에 코를 들이밀며 무언가를 쫓고 있었다.

“재 냄새, 그리고…… 오래전에 식어버린 수프 냄새요. 눅눅해진 빵봉투 냄새도 섞여 있어요. 이 냄새들이 전부 저쪽으로 이어져요. 회랑 바깥, 저기 아주 좁은 골목 끝에 있는 폐가 문턱까지요.”

피핀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은 지도에도 제대로 표시되지 않은 구역이었다. 한때는 누군가의 거처였겠지만, 이제는 도시의 부스러기처럼 남겨진 폐허였다.

로웬이 발을 떼려 하자, 옆에 서 있던 베라가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의 손에 들린 단검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태도는 날카로운 칼날과 같았다.

“잠깐. 직접 만지지 마.”

베라는 로웬의 손과 봉투 사이에 자신의 가죽 장갑 낀 손을 끼워 넣었다.

“이건 ‘받지 못하게 만든’ 주소야. 누군가 악의를 가지고 지워버린 흔적이지. 네가 직접 이 봉투를 들고 저 문턱을 넘는 순간, 네가 이 주소의 부채를 뒤집어쓸 수도 있어. 증거물 보존함에 넣어. 내가 들 테니까.”

베라는 로웬이 주소지의 원한이나 물리적인 덫에 묶이지 않도록 철저히 차단했다. 로웬은 순순히 봉투를 증거물용 투명 케이스에 옮겼다.

현장으로 향하는 발걸음 사이로 이네스가 끼어들었다. 그녀는 휴대용 검수 단말기를 꺼내 빠르게 수치를 입력했다.

“임시 검수 표식을 부착합니다. 수취인 불명 상태에서 현장 확인을 할 때, 시스템이 가장 가까운 생존자를 수취인으로 오인하는 경우가 간혹 있거든요. 로웬, 당신 이름이 수취인 칸에 자동으로 박히지 않게 락(Lock)을 걸어뒀어요. 절대로 그 칸에 손대지 마세요.”

철저히 사무적인 보호. 로웬은 동료들의 배려가 모두 ‘규정’과 ‘안전’이라는 실무적 용어로 포장되어 있음을 알았다. 그것이 그들의 방식이었다.

폐가 앞에 도착했을 때, 모르그가 입을 열었다. 그는 어둠 속에 잠긴 폐가의 문턱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며 사설 배달 규약의 한 구절을 읊조렸다.

“‘주소 사망’과 ‘거짓 수령’은 종이 한 장 차이지. 주소가 죽었다고 판단되는 순간, 그곳에 남은 모든 기록은 유령의 것이 된다. 하지만 누군가 죽은 자의 이름을 빌려 서명했다면, 그건 배달 사고가 아니라 범죄야.”

모르그의 눈이 번뜩였다.

“이 집은 주소가 죽은 게 아니라, 살해당한 것 같군.”

이름 없는 증인은 그들의 뒤를 따르며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주소지에 가까워질수록 손바닥에 새겨진 인장이 화끈거렸다. 달궈진 인장처럼 뜨거운 열기가 손목을 타고 올라왔지만, 그는 입을 다물었다. 지금 자신이 느끼는 이 통증이 무엇인지, 어떤 직함으로 불려야 하는지 알 수 없었기에 그저 견딜 뿐이었다.

폐가의 문턱은 낮았다. 발만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 피핀이 가리킨 지점, 썩어가는 나무 문턱 아래에 흙먼지에 싸인 금속판 하나가 드러나 있었다. 배달원이 수취인의 확인을 받기 위해 사용하는 확인판이었다.

로웬이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그는 장갑을 낀 손으로 조심스럽게 먼지를 털어냈다. 보통이라면 그곳에는 수취인의 서명이 있거나, 정갈한 인장이 찍혀 있어야 했다.

하지만 드러난 확인판 위에 찍힌 것은 이름이 아니었다.

“이건…….”

로웬의 미간이 좁아졌다.

오래된 도장 자국이었다. 잉크는 이미 바래서 갈색에 가까워졌지만, 그 위에 새겨진 글자는 기괴할 정도로 선명했다.

[대신 용서받음]

그것은 수취인의 확인이 아니었다. 누군가 수취인을 대신해, 혹은 수취인이 받아야 할 사과를 가로채어 찍어버린 판결문과도 같았다.

로웬의 손끝이 확인판의 가장자리를 스쳤다. 주소가 죽어버린 이유, 사과문이 전달되지 못한 진짜 이유가 그 낡은 도장 자국 아래에서 서늘한 냉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187화. 대신 용서받은 사람

폐가의 문턱은 낮았으나, 그 위에 찍힌 도장은 거대한 성벽처럼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붉은 인묵이 마르지 않은 듯 기괴한 광택을 내뿜으며 확인판의 여백을 차지했다.

‘대신 용서받음.’

그 다섯 글자가 비죽하게 튀어나온 것을 보며 회랑이 긴 칼날을 갈무리했다. 긴장이 풀린 듯한, 혹은 지루한 숙제를 끝낸 듯한 목소리가 적막한 폐가 마당에 울려 퍼졌다.

“끝났군. 수취인이 없어도 도장이 찍혔으니 이 건은 이걸로 종결이다. 사과문은 전달된 셈이고, 용서라는 결과값도 도출됐으니까.”

회랑의 선언은 명쾌했다. 하지만 그 명쾌함이 로웬의 미간을 찌푸리게 했다. 로웬은 배달 확인판의 구석진 곳, 도장의 테두리가 문드러진 부분을 유심히 살폈다.

“아니, 종결되지 않았습니다.”

로웬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낮고 딱딱했다. 그는 감정적인 호소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철저히 실무자의 관점에서, 그는 이 상황의 모순을 짚어냈다.

“배달의 완성은 수취인의 의사가 확인될 때 성립합니다. 서명이 있어야 할 자리에 정체불명의 도장이 찍힌 건, 배달 완료가 아니라 ‘위조 수령’입니다. 받는 사람이 없는데 누가 누구를 대신해 용서한다는 겁니까?”

로웬이 확인판으로 손을 뻗으려던 찰나였다. 곁에 서 있던 베라가 전광석화처럼 그의 손목을 낚아챘다. 로웬이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자, 베라는 품 안에서 깨끗한 아마포 한 조각을 꺼내 그의 손등을 덮었다.

“직접 닿지 마. 이 ‘대리 용서’라는 구조는 위험해. 손 끝이라도 닿는 순간, 너도 이 억지스러운 인과관계에 묶여버릴 수 있어. 네 의사와 상관없이 ‘용서받은 자’가 되어버린다고.”

베라는 천을 겹겹이 말아 로웬의 손과 도장 사이를 철저히 차단했다. 로웬은 그녀의 손길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떨림을 읽었다. 이것은 단순한 금기가 아니라, 영혼의 장부를 조작하려는 시도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이었다.

이네스가 그 틈을 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확인판에 새겨진 마법적 파동과 행정적 기표들을 대조하며 차갑게 덧붙였다.

“베라의 말이 맞아요. 대리 용서와 대리 수령은 절차부터가 완전히 다릅니다. 수령은 물건의 위치 이동을 증명하는 것이지만, 용서는 채무의 소멸을 뜻하죠. 지금 이 도장은 수취인의 부재라는 ‘공백’을 메우기 위해 강제로 찍힌 인장이에요. 법적으로는 무효, 술식으로는 기만입니다.”

“기만이라…… 확실히 그렇군.”

구석에서 곰방대를 만지작거리던 모르그가 낮게 읊조렸다. 그는 먼지 쌓인 문턱 주위를 지팡이 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이건 아주 오래된 사설 규약이야. 예전 뒷골목 길드들이나 몰락한 가문에서 수취인의 행방불명을 은폐할 때 종종 쓰던 수법이지. ‘받는 이가 없으니 기록이라도 깨끗하게 닦아두자’는 식의 치졸한 눈가림이야. 여기 찍힌 도장은 용서의 증표가 아니라, 사람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덮으려는 봉인석 같은 걸세.”

모르그의 판독이 끝나자마자, 피핀이 코를 킁킁거리며 도장 근처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녀의 예민한 후각이 붉은 인묵 뒤에 숨겨진 찰나의 냄새들을 잡아냈다.

“이상한 냄새가 나요. 그냥 인묵 냄새가 아니야.”

피핀이 얼굴을 찌푸리며 손부채질을 했다.

“오래전에 식어버린 멀건 수프 냄새…… 그리고 비에 젖어서 눅눅해진 빵봉투 풀 냄새도 나요. 아, 이건 문턱 밑에서 올라오는 재 냄새인가? 누군가 아주 오랫동안 여기서 누굴 기다리면서 끼니를 때운 것 같은 냄새예요. 근데 그 냄새들이 전부 이 도장 밑에 깔려 있어요.”

피핀의 말에 일행의 시선이 다시 도장으로 향했다. 그것은 신성한 용서의 징표라기보다는, 생활의 비루함과 기다림의 끝에 남겨진 얼룩에 가까웠다.

그때, 그림자 속에서 내내 침묵을 지키던 이름 없는 증인이 움직였다. 그는 품 안에서 낡은 명단을 꺼내 펼쳤다. 수많은 이름이 적혀 있고, 그보다 더 많은 빈 줄이 늘어진 명단이었다. 증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펜 끝을 들어, 이름이 적히지 않은 빈 줄 옆에 작은 점 하나를 찍었을 뿐이다.

그 점은 마침표처럼 보였으나, 동시에 아직 할 말이 남았다는 부호처럼 보이기도 했다. 증인의 시선은 도장을 지나 폐가의 어두운 복도 끝으로 향해 있었다.

로웬이 다시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지잉, 하는 공명음과 함께 도장 아래 깔려 있던 공기가 일렁였다. 베라가 씌워준 천 너머로 로웬은 보았다. 붉은 인묵의 압력에 눌려 보이지 않았던, 아주 가느다란 손글씨의 한 획이 스르르 떠오르는 것을. 그것은 도장의 각진 글씨와는 결이 다른, 누군가 절박하게 휘갈긴 필체의 일부였다.

동시에 로웬의 가방 안에 들어있던 사과문의 뭉치가 요동쳤다.

주소가 비어 있어 열리지 않았던, 그 단단하게 봉인되어 있던 두 번째 사과문 장이 아무런 예고 없이 스스로 펼쳐졌다. 바스락거리는 종이 소리가 폐가의 적막을 찢었다.

첫 번째 장이 ‘받지 못하는 주소’에 대한 절망이었다면, 새로 펼쳐진 두 번째 장의 첫 줄은 전혀 다른 온도를 품고 있었다.

[……용서는 빌었으나, 나는 아직 그를 보내지 못했다.]

로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도장 밑에 숨겨져 있던 손글씨의 획이, 새로 펼쳐진 편지의 필체와 완벽하게 일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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