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8화 합본. 반쪽 왕관의 폭주에서 베라 할멈의 진짜 심부름까지
26화. 반쪽 왕관의 폭주
손바닥 위에서 진동하던 금속 파편이 일순간 거대한 고동을 내뿜었다. 웅, 하고 공기를 울리는 파장마다 광장의 공기가 희박해졌다. 사람들은 그것을 기적의 징조라 여겼다. 성자의 손 위에서 빛나는 황금색 조각이 그들의 죄를 사하고 구원을 가져다줄 성물이라도 되는 양, 무릎을 꿇고 손을 모았다.
내 눈에는 전혀 다르게 보였다.
이건 성물이 아니다. 발송인이 불분명한 데다 내용물이 변질되어 누출 사고를 일으키고 있는 ‘위험 수하물’이다. 규격 외의 마력이 불특정 다수를 향해 살포되는 꼴을 보며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성자시여, 그것을…… 그 조각을 높이 들어 주소서!”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군중의 열기가 임계점을 넘으려던 찰나, 광장의 그림자 사이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그는 먼지 하나 앉지 않은 새까만 벨벳 코트를 걸치고 있었으나, 그 옷차림은 마치 수백 년 전의 유행을 억지로 꿰맞춘 듯 기괴한 불협화음을 자아냈다. 핏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창백한 피부 위로 번들거리는 눈동자는 광신적인 열망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가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오래된 무덤에서나 날 법한 눅눅한 향신료와 피 냄새가 진동했다. 뻣뻣하게 굳은 목을 비정상적인 각도로 꺾으며 입술을 달싹이는 모습은 마치 줄에 매달린 꼭두각시가 억지로 사람의 흉내를 내는 것 같아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 끼치는 불쾌감을 주었다. 그는 내게는 억지로 물건을 떠넘기려 드는 악성 발주자였고, 이네스에게는 신앙을 왕권의 발밑으로 끌어내리려는 유혹자였으며, 피핀에게는 잊고 싶은 왕궁의 악몽을 일깨우는 도살자였다.
“……그분이다.”
피핀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아이의 눈동자에 붉게 물들었던 왕궁의 복도와 비명 소리가 일렁였다. 피핀에게 저 자는 단순한 적이 아니라, 가문과 일상을 난도질했던 학살의 집행관 그 자체였다.
대리인은 나를 향해 기괴하게 휘어진 손가락을 뻗었다.
“찬란한 왕권의 조각이 주인을 찾았군. 비천한 심부름꾼의 껍데기를 벗고, 이 반쪽짜리 왕관을 써서 무너진 질서를 바로잡으시오. 그게 당신의 운명이다.”
그의 말이 신호라도 된 듯, 내 손바닥 위의 파편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파편은 단순히 빛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살아있는 기생충처럼 꿈틀거리며 가장 가까운 인간의 머리 위로 날아갔다.
“아악! 뜨거워, 뜨겁다고!”
파편이 머리 근처에 머물자, 한 사내의 눈이 뒤집히며 거품을 물었다. 왕관 조각은 숙주를 고르는 중이었다. 사내의 그릇이 부족하다고 판단했는지, 파편은 곧바로 옆에 있던 여인의 머리 위로, 다시 노인의 머리 위로 옮겨 다니며 인간의 정신을 갉아먹었다.
“300 데드 선(Dead Sun) 단위를 돌파했습니다. 로웬, 저건 이미 물질의 영역을 벗어났어요. 영혼을 연료로 태우는 장부상의 ‘결손 자산’입니다.”
모르그가 차가운 목소리로 경고했다. 그녀의 눈에는 저 황금빛 파편이 얼마나 많은 생명력을 탕진하고 있는지 수치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이네스는 검을 뽑으려다 멈칫했다. 그녀의 눈에는 고통받는 군중보다, 그 중심에서 빛나는 파편과 나를 번갈아 보는 혼란이 서려 있었다. 만약 저것이 정말 성자의 권능과 결합해야 할 왕의 유산이라면, 자신이 가로막는 것이 신의 뜻에 어긋나는 것 아닐까 하는 치명적인 오해.
나는 한숨을 내쉬며 한 걸음을 내디뎠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내 목소리에 대리인의 눈동자가 번득였다. 나는 허공에서 미쳐 날뛰는 파편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이 물건은 발송인이 이미 사망했습니다. 구 시대의 왕권이라는 발송처는 멸망과 함께 소멸했죠. 그리고 수취인 지정도 잘못됐습니다. 나는 이런 위험한 물건을 주문한 적이 없으니까요.”
“무슨 망언을! 그 조각은 선택받은 자만이 받을 수 있는……!”
“아니, 이건 ‘수취인 불명’ 물품입니다. 게다가 보시다시피 내용물이 파손되어 주변에 피해를 입히고 있는 위험 수하물이죠. 반송 규정에 따르면, 발송처가 사라지고 수취인이 거부한 위험물은 현장에서 폐기하거나 영구 격리하는 게 원칙입니다.”
나는 성자의 권능을 휘두르는 대신, 심부름꾼으로서 쌓아온 ‘물류의 논리’를 끌어올렸다. 내 손끝에서 잿빛 마력이 가늘게 뿜어져 나와 허공의 파편을 옭아맸다. 공격이라기보다 배달 사고가 난 물품에 붙이는 ‘반송 불가/폐기 대상’ 라벨과 같았다.
왕관 조각이 내 마력에 닿자 비명을 지르듯 진동했다. 나는 왕관 조각을 억지로 머리에 쓰는 대신, 손바닥 안에 가두어 강하게 쥐어짰다.
“이 배달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반송할 곳도 없으니, 원래 있어야 할 빈자리로 돌아가 죽어버리시지.”
내가 끝까지 수령을 거부하자 파편은 갈 곳을 잃고 폭주했다. 내 손 안에서 빠져나간 파편은 대리인의 비명 섞인 부름을 무시한 채, 서쪽 하늘—지금은 비어 있는 제국의 옛 옥좌가 있는 방향을 향해 유성처럼 날아갔다.
대리인은 허망한 표정으로 그 빛을 바라보다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소동은 가라앉았지만, 광장에 남은 사람들의 눈빛은 전보다 더 기묘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보았는가? 성자께서 왕의 권능조차 거부하셨다.”
“세속의 왕관 따위는 필요치 않다는 뜻이야. 진정한 신의 대리자이시기에…….”
이네스조차 감격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피가 배어 나오는 손바닥을 대충 털어내며 혀를 찼다.
단순히 위험물 취급 주의 사항을 따랐을 뿐인데,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왕관을 거절한 성자’라는 황당한 소문이 또 하나 배달될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저 멀리 날아간 파편이 빈 옥좌에 닿을 때쯤이면, 이 오해는 얼마나 더 거대해져 있을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27화. 죽은 신의 손톱
빈 옥좌 위로 쏟아지던 잔광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광장에 가득 찼던 백색의 환희가 걷히자, 그 자리에 남은 것은 기괴하게 뒤틀린 침묵뿐이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였다. 왕관을 거절한 성자라니. 이 말도 안 되는 소문이 실시간으로 살을 붙여 광장을 떠돌았다.
하지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신심 깊은 신도들의 눈물이 아니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아주 불쾌하고 위험해 보이는 ‘배달 사고’의 흔적이었다.
깡그랑, 하고 돌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유난히 날카롭게 울렸다.
옥좌의 주인이 남기고 간 낙하물. 그 물건은 성물이라기엔 지나치게 검었고, 보석이라기엔 지나치게 날카로웠다. 길쭉하게 휘어진 모양새가 누군가의 신체 일부를 떼어낸 듯한 형상. 사람들은 그것을 '죽은 신의 손톱'이라 부르는 모양이었다.
“이건 또 뭐야. 송장도 없는 물건이 왜 여기 떨어져 있어.”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낙하 지점을 노려보았다. 내게 저건 축복의 상징이 아니었다. 발송인 사망, 수취인 불명, 심지어 봉인마저 훼손된 채 공공장소에 투기된 위험 등급 압수품일 뿐이었다. 이런 물건은 보통 세관에서 폐기하거나 특수 보관함에 처박아야 한다. 잘못 만졌다간 수취인 부담으로 영혼까지 털리기 십상이다.
그때였다. 인파를 가르며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아직 이름도 직함도 알 수 없었지만, 내게는 인수증도 없이 위험 성물을 떠넘기려 드는 관청형 악성 민원인으로 먼저 보였고, 이네스에게는 신앙을 보호 명령으로 바꾸는 목소리였으며, 피핀에게는 왕궁 지하에서 들었던 학살 명령어의 되풀이였다.
그는 상복처럼 매끄러운 흑색 사제복 위로 창백할 정도로 하얀 외투를 걸치고 있었다. 바람 한 점 없는 광장에서 그의 옷자락만은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기분 나쁘게 일렁였다. 길게 늘어뜨린 은색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눈동자는 초점 없는 유리구슬 같았고, 입가에는 비릿한 사무적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가 발을 내디딜 때마다 그림자가 비정상적으로 길게 늘어나며 주변의 온도를 급격히 떨어뜨렸다.
“……성자시여, 신의 파편이 당신을 선택했습니다.”
남자의 목소리는 텅 빈 대성당에서 울리는 메아리처럼 공허했다. 그는 품 안에서 낡은 양피지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성물 운반자 서류였다.
“여기에 피로 서명하시지요. 그러면 이 ‘손톱’은 정식으로 당신의 계승물이 됩니다.”
그의 시선이 옆에 서 있던 이네스에게 향했다. 찰나의 순간, 성기사 이네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남자의 존재 자체가 그녀에게는 신앙을 보호 명령으로 치환하라는 거부할 수 없는 유혹처럼 다가가는 모양이었다. 꼿꼿하던 그녀의 검 끝이 바닥을 향해 힘없이 내려갔다. 신의 대리자 앞에 선 기사가 가져야 할 본능적인 복종이었다.
피핀은 아예 숨을 멈춘 듯했다. 녀석의 눈동자에 어린 공포는 단순한 압박감이 아니었다. 저 남자의 목소리가, 과거 왕궁 지하에서 울려 퍼졌던 ‘학살의 명령어’를 되살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녀석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경련하며 보이지 않는 단검을 찾는 듯 꿈틀거렸다.
모르그 역시 장부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상인의 감각으로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겠지. 죽은 신의 장부를 산 사람에게 청구하러 온 징수자. 모르그의 눈에는 저 남자가 '데드 선(Dead Sun)' 단위로 환산할 수 없는 거대한 부채 덩어리로 보일 터였다.
“서명이라니. 이봐요, 민원인 양반.”
나는 남자가 내민 양피지를 밀쳐내며 혀를 찼다.
“이 물건, 발송인이 누굽니까? 죽은 신이라고요? 그럼 발송인 사망이네. 수취인은 나라고 적혀 있지도 않은데 그냥 하늘에서 떨어진 거 아닙니까. 이건 수취인 불명입니다.”
남자의 미소가 미세하게 굳었다.
“신의 뜻이며…….”
“뜻이고 뭐고 간에, 규정대로 합시다. 봉인은 이미 깨져서 바닥을 굴렀으니 봉인 훼손이고, 이런 위험물은 반송하고 싶어도 보낼 곳이 없으니 반송 불가 물품입니다. 즉, 이 물건은 계승할 성물이 아니라 ‘처리 주체 불분명한 유해 압수품’이라는 소리예요.”
나는 허리춤에서 집행관용 압수 주머니를 꺼냈다. 그리고는 ‘죽은 신의 손톱’을 가차 없이 쓸어 담았다. 성스러운 권능으로 정화하거나 몸에 받아들이는 연출 따위는 없었다. 그저 장갑 낀 손으로 더러운 오물을 치우듯 무심한 동작이었다.
“성자께서 신의 손톱을…… 압수하셨다?”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 논리는 명확했다. 서류 미비, 절차 위반. 사칭자인 내게 있어 가장 안전한 방패는 시스템의 구멍을 파고드는 관료적 사고방식이었다.
“이 물건은 내가 압수합니다. 증거물 보관함에 처박아둘 테니, 불만 있으면 정식으로 소장 접수하세요. 아, 물론 보관료와 위험물 관리 비용은 청구할 겁니다.”
신권 대리자의 눈에 처음으로 당혹감이 스쳤다. 그는 피핀을 조종하지도, 이네스를 굴복시키지도 못했다. 내가 성물 자체를 ‘행정 오류’로 정의해버리는 순간, 그가 준비해온 종교적 엄숙함은 갈 곳을 잃고 공중에 붕괴했다.
남자는 검은 안개처럼 흐릿하게 물러나며 입을 열었다.
“……그 오만함이 언제까지 갈지 지켜보지요.”
남자가 사라진 자리, 광장에는 여전히 기묘한 열기가 남아 있었다. 나는 압수 주머니의 끈을 꽉 묶었다. 그런데 주머니 너머로 전해지는 손톱의 잔흔이 내 손등에 닿는 순간, 기분 나쁜 소름이 돋았다.
그 진동은 베라 할멈이 내게 남겼던, 아주 오래된 심부름 표식과 반응하고 있었다. 할멈이 준 낡은 인장이 뜨겁게 달아오르며 검은 손톱의 기운을 빨아들이듯 진동했다. 단순한 성물로 치부할 수 없었다. 이건 할멈이 말했던 '마지막 배달'과 이어져 있었다.
하지만 광장의 군중들에게 내 행위는 전혀 다르게 해석되고 있었다.
“보았나? 성자께서 신의 손톱마저 압수하셨어!”
“감히 신의 권능조차 마음대로 다루시는 분이라니……!”
왕관을 거절한 것도 모자라, 이제는 신의 신체 일부마저 몰수해버린 오만한 성자. 소문은 이미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괴물처럼 몸집을 불리며 도시 전체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나는 욱신거리는 손등을 거칠게 문질렀다. 역시, 공무 수행 중에는 산재 보험부터 들어놨어야 했다.
28화. 베라 할멈의 진짜 심부름
죽은 신의 손톱 잔흔이 내 손등 위에서 맥동했다. 그 서늘한 기운이 닿자마자, 오랫동안 잠잠했던 손바닥의 낙인이 들끓기 시작했다. 베라 할멈이 내게 억지로 떠넘겼던, 아니, 어쩌면 내가 무의식중에 수령을 거부해왔던 그 ‘미수령 심부름’의 표식이다. 배달표 위로 검은 글자가 일렁이며 떠올랐다.
[수취인: 존재하지 않음]
[미수령 사유: 기록 말소 및 의도적 방치]
[주의: 반송 불가 물품]
심부름꾼의 직관이 경고음을 울렸다. 이건 단순한 빵 배달이나 장작 패기 따위가 아니다. 수십 년 전, 잿불 성자가 실패했던 그 현장에서 누락된 ‘잔금’이다.
“결국 들켰구먼. 하긴, 성자님 흉내를 내려면 그 정도 눈치는 있어야지.”
어느새 내 뒤에 선 베라 할멈은 더 이상 빵집의 인자한 노인이 아니었다. 할멈의 얼굴은 오랜 가뭄 끝에 갈라진 논바닥처럼 깊고 어두운 주름이 골골이 패여 있었고, 그 주름 사이사이에는 빵가루가 아니라 오래된 세월의 먼지와 서릿발 같은 냉기가 서려 있었다. 늘 밀가루가 묻어 있던 앞치마는 이제 낡은 수의처럼 헤져 있었으며, 그 아래로 드러난 할멈의 손은 마치 마른 나뭇가지처럼 비틀려 내 옷소매를 옥죄어 왔다. 백내장이 낀 것처럼 뿌옇던 할멈의 눈동자가 이 순간만큼은 번뜩이는 도끼날처럼 나를 꿰뚫어 보았고,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숨결에서는 갓 구운 빵 냄새 대신 서늘한 무덤 속 흙내음이 짙게 배어 나왔다.
할멈이 내민 것은 비에 젖어 눅눅해진 천 꾸러미였다.
“이걸 가져가게. 그때 그 양반이 끝내 전해주지 못한 거야.”
내 손에 들린 꾸러미는 묵직했다. 겉면의 배달표는 이미 잉크가 번져 수취인의 이름을 알아볼 수 없었다. 꾸러미의 틈새로 삐져나온 것은 작고 조잡하게 깎인 나무 말 인형, 그리고 흙탕물에 절은 아이용 덧신 한 짝이었다.
나는 말없이 꾸러미를 고쳐 쥐었다. 성자 신화의 화려한 뒷면에 가려진, 누구도 기억하기 싫어하는 ‘실패’의 찌꺼기.
폭풍이 몰아치는 마을은 죽은 듯 고요했다. 평소라면 술주정꾼의 고성이나 개 짖는 소리라도 들렸겠지만, 지금 이 순간의 마을은 마치 거대한 관 속처럼 숨을 죽이고 있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젖은 흙바닥에서 올라오는 비린내가 코끝을 찔렀다.
마을 외곽, 잿불 성자의 첫 번째 기적이 일어났다고 칭송받는 옛 제단 터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이미 이네스와 피핀, 그리고 모르그가 서 있었다.
이네스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성전의 기록에 따르면 이곳은 성자가 신의 손톱을 막아내어 마을의 아이들을 구원한 영광의 장소여야 했다. 하지만 내 눈에 보이는 것은 달랐다. 제단의 주춧돌 아래, 은폐하듯 덧칠해진 성스러운 문양들 밑바닥에는 검게 타버린 아이들의 손자국이 무수히 찍혀 있었다.
“로웬 님, 이건…… 기록과 다릅니다. 성자님은 분명 모두를 구하셨다고……”
이네스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네스의 신앙이라는 견고한 성벽에 처음으로 커다란 균열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옆에 선 피핀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녀석의 시선은 내가 들고 있는 꾸러미 속 나무 말에 고정되어 있었다. 평소라면 떠들썩하게 아는 체를 했을 녀석이, 이 아이의 이름이 무엇이냐는 내 무언의 질문에 고개를 돌려버렸다. 침묵은 때로 가장 잔인한 긍정이 된다.
모르그는 품속에서 두툼한 장부를 꺼냈다. 그가 관리하는 죽은 자들의 명단. 그는 장부를 넘기다 멈춰 섰다.
“이 날짜에는…… 장례 기록이 없습니다. 미배달, 미기억. 마을의 어떤 장부에도 이 존재들의 흔적은 남겨져 있지 않군요.”
나는 젖은 꾸러미를 제단 중앙에 내려놓았다.
“배달이 늦었습니다.”
내 목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차갑게 가라앉았다. 나는 누구를 원망하거나 위로하지 않았다. 심부름꾼에게 감정은 사치다. 대신, 나는 꾸러미 위의 번진 배달표를 가리켰다.
“수취인은 이미 사망했으니 반송 처리해야 마땅하나, 이 건은 반송 불가 물품입니다. 그래서 묻는 겁니다. 누가 이 아이들을 잊기로 서명했습니까? 누가 이 배달을 ‘완료’로 조작했지?”
나의 추궁에 제단 주변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이네스는 뒷걸음질 쳤고, 피핀은 떨리는 손으로 제 가슴의 성표를 쥐었다.
나는 꾸러미를 풀었다. 그 안에는 나무 장난감 외에도 피에 젖어 딱딱하게 굳은 천 조각 하나가 들어 있었다. 성자의 옷자락이었을지도 모를, 혹은 성자를 사칭하던 누군가의 허물이었을지도 모를 헝겊이었다.
천 조각 끝에 묻은 핏방울이 마치 방금 흘린 것처럼 붉게 타올랐다. 이것은 기적의 증거가 아니다. 사기꾼의 실패를 덮기 위해 지불된 희생의 영수증이다.
나는 그 천 조각을 집어 들었다. 내일이면 마을에는 잿불 성자의 새로운 ‘진짜 유해’가 발견되었다는 소문이 돌 것이다. 그리고 이 핏자국 묻은 천 조각은 아주 비싼 값에 팔려나갈 가짜 유해가 되어, 또 다른 심부름의 시작을 알릴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