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잿불 성자의 가짜 유해 / 30화. 첫 번째 순례의 종착지 / 31화. 모르그의 예언 대조실
29화. 잿불 성자의 가짜 유해
품 안의 고지서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베라 할멈의 심부름통에서 나온 젖은 천 조각과 굳은 피 한 방울이 교회 전시 공고의 봉랍에 닿자, 붉은 인장은 마치 살아 있는 심장처럼 맥동했다.
그것은 공명이었다. 서류와 서류, 거짓과 진실이 같은 계통의 마력 아래에서 서로를 밀어내는 감각. 로웬은 인파가 몰리는 교구청 중앙 홀로 발을 옮겼다.
홀 중앙에는 거대한 성유리관이 배치되어 있었다. 천장부터 내려온 금색 비단과 성화들이 그 무게감을 더했고, 바닥은 신도들이 던진 헌금 동전으로 번뜩였다. 유리관 안에는 하얗게 탈색된 뼈들이 정갈하게 조립되어 있었다.
‘잿불 성자의 유해.’
교회가 공식적으로 선포한 영웅의 마지막이다. 로웬은 그 유리관을 향해 다가갔다. 관 앞을 지키고 있는 것은 무장 기사들이 아닌, 장부를 든 감식 수도사들이었다.
로웬이 관리대 앞에 섰다.
“반송하러 왔다.”
접수대를 지키던 수도사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깃펜을 움직였다.
“유해 참배는 저쪽 줄로 가서 기부금을 내십시오. 여기는 행정 업무 구역입니다.”
“행정 업무를 보러 온 게 맞다.”
로웬은 베라 할멈의 심부름 가방에서 꺼낸, 피가 묻은 서류 뭉치를 툭 내던졌다.
“잿불 성자의 사망 처리 서류. 그리고 이 유해가 가짜라는 증명서.”
서류를 넘기던 손길이 멈췄다. 깃펜 끝에서 잉크가 툭 떨어져 장부를 더럽혔다. 그제야 수도사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로웬의 얼굴을 보는 대신, 로웬의 가슴팍에 달린 심부름꾼 배지와 그가 들고 있는 서류의 인장을 대조했다. 남자의 손은 차가운 밀랍처럼 창백했고, 손가락 마디마디에는 향 냄새가 깊게 배어든 검은 감식용 가죽 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목에 걸린 납색 묵주가 그가 움직일 때마다 둔탁한 소리를 냈다. 그는 살아 있는 사람의 눈을 보기보다, 그 사람이 들고 온 서류에 적힌 활자와 인장을 먼저 분석하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마른 금속이 긁히는 듯한 목소리가 그의 얇은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사망자 본인 확인이 필요한 서류군요.”
남자가 로웬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는 경외심도, 당혹감도 없었다. 오로지 ‘상품’을 검수하는 자의 서늘한 계산기만 돌아가고 있었다.
“본인이 ‘잿불 성자’임을 주장하며 사망 처리를 취소하러 오셨습니까? 아니면, 이 유해의 진위 여부를 따져 보상금을 청구하러 오신 심부름꾼입니까?”
“둘 다 아니다. 기재된 내용과 실물이 다르니 수령 거부를 하러 온 거다.”
“저는 감식수도사 세브란입니다.”
남자가 장갑 낀 손으로 로웬의 서류를 낚아채듯 가져갔다.
“당신이 살아 있든 죽었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이 유리관 속의 뼈가 교회의 성검에 의해 ‘성자의 유해’로 인증되었다는 사실이죠. 만약 당신이 진짜라면, 우리는 당신의 생존마저 ‘죽음을 극복한 기적’이라는 이름으로 이 전시의 특별 부록에 포함할 뿐입니다. 입장료가 두 배는 뛰겠군요.”
그 순간, 홀을 가득 메운 관객들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누군가 기도를 올렸고, 누군가는 성자의 기적적인 일화에 파안대소하며 헌금을 던졌다.
웅성거림과 웃음소리가 커질수록, 유리관 속의 뼈들이 기괴하게 뒤틀렸다.
달그락.
관절과 관절 사이에 잿빛 마력이 스며들었다. 관객의 신앙과 즐거움, 그리고 교회에 바친 금전적 욕망이 동력이 되어 유해를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은 성자가 아니라, 사람들의 허영을 먹고 자라는 골렘이었다.
“물러나십시오, 로웬 님!”
이네스가 검을 뽑아 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검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기사로서 평생을 경외해 온 ‘성자의 유해’를 베어야 한다는 사실이 그녀의 본능을 억누르고 있었다.
“이네스 경, 저건 뼈가 아닙니다. 장부상에 존재하지 않는 허위 매물일 뿐입니다.”
모르그가 옆에서 사망 장부의 공란을 빠르게 넘기며 덧붙였다.
“감식서 최초 서명을 보십시오. 성검의 잔향이 섞여 있긴 하지만, 이건 행정적인 거짓말입니다. 죽은 자의 기록이 여기 있는데, 저 안의 뼈는 어디서 온 겁니까?”
피핀은 평소답지 않게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는 관객들의 웃음소리가 들릴 때마다 골렘의 관절이 더욱 강고하게 결착되는 것을 포착했다. 농담 한 마디가 저 괴물의 근력이 된다는 것을 깨닫자, 광대조차 입을 열 수 없었다.
유해 골렘이 유리관을 깨고 솟구쳤다. 세브란은 그 혼란 속에서도 로웬을 관찰하며 펜을 멈추지 않았다.
“자, 보여주시겠습니까? 당신이 진짜라면, 이 ‘공식적인 진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로웬은 대답 대신 자신의 검지 끝을 깨물었다. 피 한 방울이 배어 나왔다. 그는 그 피를 성검의 잔향이 서린 감식서의 봉랍 위에 떨어뜨렸다.
영웅의 일격도, 성자의 권능도 아니었다. 그것은 잘못 배달된 물건에 찍는 ‘반송 도장’과도 같은 간결한 동작이었다.
치이익!
로웬의 피가 봉랍에 닿는 순간, 성검의 첫 번째 거짓말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유리관 속 유해를 감싸고 있던 황금빛 마력이 로웬의 피와 반응하며 거칠게 끓어올랐다. 골렘의 뼈마디에 새겨진 가짜 문양들이 본래의 주인을 알아보고 비명을 질렀다.
성검이 처음으로 뱉었던 비겁한 서약의 잔향이 로웬의 피 아래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수수료는 저 뼈로 대신하겠다.”
로웬이 무너져 내리는 골렘의 머리를 짓밟으며 세브란에게 말했다.
“감식서 반송 확인 도장 찍어. 이건 물건이 아니라 오물이다.”
세브란의 눈이 비로소 경이로움으로 가늘어졌다. 그는 로웬의 피가 묻은 서류를 소중한 보물인 양 품에 안았다.
“재미있군요. 살아 있는 성자가 자신의 죽음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유해를 파기하러 오다니.”
세브란은 장부의 한 페이지를 찢어 로웬에게 건넸다. 거기에는 정갈한 필체로 새로운 좌표가 적혀 있었다.
“반송 처리는 완료되었습니다. 하지만 지하 창고에 당신의 ‘진짜 사망일’이 기록된 문이 하나 더 있더군요. 그 너머에는 주인을 잃은 빈 옥좌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로웬은 세브란이 건넨 종이를 갈무리했다.
교회 홀의 환호성은 어느덧 비명으로 바뀌어 있었다. 가짜 기적이 무너진 자리에서 로웬은 다음 심부름의 냄새를 맡았다. 그것은 썩은 뼈 냄새가 아니라, 오래전 닫힌 지하 문의 차가운 철 냄새였다.
30화. 첫 번째 순례의 종착지
바닥에 흩어진 뼛조각 위로 피가 스며든다. ‘성자의 유해’라는 거창한 이름표가 붙어 있던 그것은 방금 전 내 발길질에 박살 나 구석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위조된 유해 딱지는 수령인이 존재하지 않는 미수령 사유서처럼 지저분하게 구겨졌다.
성검은 입을 다물었다. 아니, 정확히는 대답할 가치를 못 느끼는 모양이었다. 주인 잃은 고철처럼 무겁게 늘어진 성검의 침묵이 오히려 장내를 억눌렀다.
“이게 무슨…… 성물을 파괴하다니! 감히!”
신권 대리자를 자처하는 노인이 파르르 떨며 소리쳤다. 그 뒤로 왕권의 잔당들, 그리고 눈먼 믿음을 구걸하는 순례자들이 나를 에워쌌다. 그들의 눈에는 갈망이 이글거렸다. 누구는 나를 성자로, 누구는 무너진 왕국의 왕으로, 또 누구는 제단에 바칠 고결한 제물로 보고 있었다.
나에게 붙이려는 그 거창한 송장(送狀)들을 볼 때마다 속이 메스꺼웠다. 나는 그저 배달원일 뿐이다. 물건을 전하고, 도장을 찍고, 무사히 퇴근하고 싶은 잿불 심부름꾼. 그런데 이 사람들은 나를 ‘반송 불가 물품’으로 분류해 이 낡은 성소에 박제하려 들고 있었다.
그때, 성소 중앙의 허공이 일그러지며 거대한 문이 솟아올랐다.
사망일의 문(門).
그 문 너머로 주인을 잃은 빈 옥좌가 보였다. 저 자리에 앉는 순간, 배달표에 찍힐 도장은 하나뿐이다. ‘배달 완료 및 폐기’. 내가 죽어야만 이 소동이 끝난다는 신의 계산서가 눈앞에 펼쳐진 셈이다.
“로웬 씨, 저건…….”
피핀이 마른침을 삼켰다. 문은 내 생애의 기록을 읽어 내리며 퇴근 시간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동행자들의 증언이 없다면, 내 사망일은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확정될 터였다.
그때, 장내의 소란을 잠재우며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그는 검은 상복에 가까운 사제복을 걸치고 있었는데, 옷자락이 움직일 때마다 마치 밤의 그림자가 바닥을 훑는 듯한 기묘한 소리가 났다. 창백하다 못해 투명해 보이는 피부 위로 서늘한 안광이 번뜩였고, 길게 내려온 은발은 피 냄새 진동하는 현장과 지독하게 어울리지 않는 결벽증적인 정갈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마치 산 자의 활기를 혐오하는 듯한 느린 걸음걸이로 다가와, 내 목 근처에 서늘한 시선을 고정했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사람의 것이라기보다 무덤 속에서 울리는 종소리에 가까웠다.
“계약되지 않은 자가 옥좌의 문을 열었군. 이 일의 책임을 누구의 서명으로 받게 될지 궁금하구나.”
신권의 새로운 대리자, 사가(Saga)가 나타난 것이다. 그는 나를 보며 ‘오배송된 물건’을 처리하려는 검수관 같은 표정을 지었다.
나는 동료들을 돌아보았다. 문이 완전히 열리기 전에 저들을 내보내야 했다. 이건 나 혼자 찍어야 할 도장이고, 나 혼자 감당해야 할 미수령 사유였다.
“먼저 나가. 여긴 곧 폐쇄될 거야.”
하지만 이네스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나를 향해 무릎을 꿇는 대신, 성검의 자루를 꽉 쥐며 내 곁에 섰다.
“숭배할 성자를 찾는 게 아닙니다. 나는 내가 지키기로 한 동행을 따를 뿐입니다. 당신이 저 문 안으로 들어간다면, 그건 내 호위 실패가 아니라 새로운 여정의 시작이 될 겁니다.”
피핀이 낄낄거리며 그 옆에 섰다. 평소 같은 농담조였지만 눈빛만큼은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에이, 로웬 씨. 내 증언이 빠지면 문 계산이 안 맞을 텐데? 당신이 나한테 빚진 술값이 아직 이만큼이라고요. 당신이 죽으면 그 빚은 누가 갚아? 그러니까 저 문은 아직 닫히면 안 돼요.”
모르그 역시 품 안에서 두꺼운 장부를 꺼내 들었다.
“깔끔한 부채 처리는 제 취향이 아닙니다. 이 책임은 로웬 혼자 지는 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연대 서명으로 돌리겠습니다. 혼자서 계산 끝내고 도망갈 생각 마십시오.”
사망일의 문이 흔들렸다. 일정한 퇴근 시간을 계산하던 문의 논리가 흩어지기 시작했다. 동료들의 증언과 부채, 그리고 거부권이 내 사망일이라는 확정된 데이터를 오염시키고 있었다.
성검이 짧게 진동했다. 마치 옥좌에 앉으라고 종용하는 듯한 압박감이 전신을 짓눌렀다. 저 빈 옥좌에 앉으면 모든 게 편해질 것이다. 성자라는 이름으로 추앙받으며, 세상의 모든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죽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나는 옥좌를 향해 걷는 대신, 문틀에 손을 얹었다.
“나는 성자 역할을 혼자 다 처먹을 생각이 없어.”
내 목소리에 사가의 눈썹이 꿈틀했다.
“성자는 너희들이 만든 허상이고, 나는 그 허상을 배달하러 온 심부름꾼일 뿐이다. 이 옥좌는 비어 있는 게 정상이야. 누구 한 사람을 여기 몰아넣고 희생시키는 계산은 이제 안 받는다.”
나는 옥좌를 향해 침을 뱉는 대신, 문 너머의 공간을 뒤틀어 버렸다. 성자가 되어 죽는 길을 거부하고, 성자가 아닌 채로 살아남는 길을 택했다. 이것은 규격 외 배달이다.
문이 굉음을 내며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그것은 소멸이 아니었다.
첫 번째 순례의 종착지는 닫혔지만, 그 파편 사이로 새로운 길이 보였다. 정해진 순서대로 성지를 도는 순례가 아니라, 박살 난 성물과 위조된 구원을 바로잡으러 가는 길.
“역순(逆順)이다.”
나는 발밑에 떨어진 가짜 유해 조각을 짓밟으며 말했다.
“이제부터는 우리가 받은 이 가짜 운명들을 하나씩 반송하러 간다.”
성소를 빠져나가는 내 등 뒤로, 아직 이름표를 붙이지 못한 다음 문의 냉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내 곁에는 계산을 틀어막아 줄 무식한 연대 서명자들이 버티고 있었으니까.
31화. 모르그의 예언 대조실
쿠르릉, 하고 무너져 내린 ‘사망일의 문’은 더 이상 거창한 신학적 상징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관리 부실로 무너진 낙후 건물의 잔해에 불과했다. 먼지 구름이 채 가시기도 전, 쏟아진 돌무더기 사이에서 종이 조각 하나가 팔랑거리며 내 발등 위에 떨어졌다.
나는 허리를 숙여 그것을 집어 들었다. 빳빳한 종이질에 숫자가 적혀 있었다.
[ 001 ]
“……번호표?”
익숙한 감각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구청 민원실이나 보급창고 접수처에서 흔히 보던 그것이다. 내 차례를 기다리기 위해, 혹은 내 불만을 접수하기 위해 쥐고 있어야 했던 하찮고도 절대적인 권력의 조각.
“이거 출구 번호표입니까? 아니면 여기서 나갈 때 반납해야 하는 물품 보관증 같은 건가요?”
내 질문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모르그였다. 그는 마치 폭발물이라도 본 사람처럼 안색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로웬 님, 그건…… ‘사망일 미정’에 대한 이의제기 호출장입니다. 저 너머, 예언 대조실에서 당신을 부르고 있다는 뜻이에요.”
“민원이군요.”
나는 납득했다. 하긴, 죽어야 할 놈이 안 죽고 문까지 부수며 버티고 있으니 관리자 입장에선 뒷목 잡을 일일 게다. 반송 사유가 불분명한 화물을 억지로 밀어 넣으려다 송장이 찢어진 꼴 아닌가.
우리는 먼지가 자욱한 잔해를 넘어 ‘문’이 있었던 공간 내부로 발을 들였다.
그곳은 신전이라기보다는 거대한 기록 보관소에 가까웠다. 코끝을 찌르는 것은 향유 냄새가 아니라 시큼하고 텁텁한 오래된 잉크와 양피지 먼지였다. 벽면을 가득 채운 서가에서는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천장 아래로는 구리로 만든 수로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는데, 그 안을 흐르는 것은 물이 아니라 새카만 액체 잉크였다.
서가 사이를 오가는 것은 사제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일정한 리듬으로 깃펜을 움직이며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는, 감정이 거세된 서기들이었다.
“접수창구는 저기인가 보네.”
나는 가장 거대한 서가가 위치한 중앙 홀로 향했다. 그곳에는 거대한 대리석 책상을 앞에 두고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은회색 머리카락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뒤로 넘겨 묶고 있었는데, 그 질감이 마치 오래된 기록화 속의 은박처럼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가 걸친 코트는 관복이라기엔 지나치게 날카롭게 재단되어 있어, 부드러운 천이라기보다는 잘 벼려진 종이 뭉치를 걸친 듯한 기묘한 위압감을 풍겼다. 잉크 얼룩 하나 묻지 않은 그의 긴 손가락은 서류 뭉치를 넘길 때마다 작두 날이 떨어지는 듯한 서늘한 파찰음을 냈다. 무엇보다 나를 소름 돋게 한 것은 그의 눈매였다. 감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무채색의 눈동자는 나를 살아있는 인간이 아니라, 반드시 지워내야 할 오탈자 혹은 규격 외의 파지(破紙)를 보는 것처럼 건조하게 훑어 내렸다.
그가 입을 열기도 전, 그가 들고 있던 펜촉이 내 번호표를 겨누었다.
“번호표를 내놓으십시오. 폐기 대상입니다.”
남자의 목소리는 금속을 긁는 듯 정교하고 딱딱했다.
“폐기라니요. 제 정당한 순번 아닙니까?”
내 말에 남자가 눈을 가늘게 떴다. 옆에 서 있던 모르그가 사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뱉었다.
“……아르벨 렌. 예언청의 수석 집행관이 왜 이곳에.”
“모르그, 파계한 기록관이 주제를 넘는군. 나는 지금 성계(聖界)의 명부를 오염시키고 있는 ‘로웬’이라는 오류를 수정하러 왔다.”
아르벨 렌이라고 불린 남자는 내 손에 든 번호표를 낚아채려 손을 뻗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번호표를 뒤로 감췄다. 배달부 인생 7년, 수령인의 서명을 받기 전까지는 절대로 송장을 넘겨주지 않는 것이 철칙이다.
“잠깐만요, 집행관님. 이게 왜 오류입니까? 저는 제 사망일이 확정되지 않아서 이의를 제기하러 온 민원인인데요.”
“성자 후보 명부로 이관될 기록에 ‘잿불 심부름꾼’ 따위의 비천한 경력은 필요 없다. 너의 배달 기록, 저급한 채무 관계, 그리고 이 근거 없는 동료들의 증언까지. 모두 이곳에서 소거한 뒤, 너를 ‘성자’라는 단일한 항목으로 재정의할 것이다.”
그의 말과 동시에 주변의 서가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로를 흐르던 잉크들이 역류하며 허공에 글자를 새겼다. 나의 과거, 내가 짊어진 부채, 내가 만난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둘씩 검은 액체에 젖어 지워지려 하고 있었다.
모르그가 자신의 장부를 가슴에 품으며 소리쳤다.
“안 돼! 이 기록은 산 사람의 역사다! 이걸 지우는 건 로웬을 죽이는 것과 다름없어!”
“정확한 기록만이 영원을 담보한다. 모르그, 네놈의 조잡한 수기도 곧 압류될 것이다.”
아르벨의 손끝에서 뻗어 나온 잉크 줄기가 모르그의 장부를 옭아매려 했다. 그때였다.
“와, 진짜 재미없게 사시네. 아저씨.”
피핀이 하품을 쩍 하며 서가 위로 올라앉았다. 피핀은 근처에 꽂혀 있던 아무 예언서나 집어 들더니 큰 소리로 낭독하기 시작했다.
“‘동쪽에서 온 자가 발가락 사이에 낀 잼을 핥을 것이니……’ 어라? 이거 예언 맞아요? 내가 방금 지어낸 건데?”
“무슨 짓이냐!”
아르벨이 당황하며 소리쳤다. 피핀이 낭독한 헛소리가 자동 서가 시스템에 입력되자, 정교하게 돌아가던 톱니바퀴들이 끼익, 비명을 지르며 멈춰 섰다. 헛소리와 진실이 뒤섞이자 서가들이 갈피를 못 잡고 좌우로 요동쳤다.
그 혼란을 틈타 이네스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는 방패를 지면에 박으며 거대한 벽을 만들었다.
“증인들의 서명이 아직 유효하다. 이 기록을 건드리고 싶다면, 기사단의 방패부터 뚫어야 할 거다.”
나는 아르벨을 똑바로 쳐다보며 번호표를 책상 위에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집행관님, 제가 배달하면서 배운 게 하나 있는데요. 수령인이 수령 거부를 하면 물건은 반송되어야 합니다.”
“무슨 헛소리를…….”
“제 삶의 기록을 성자 명부로 이관하는 거, 저는 수령 거부하겠습니다. 대신 이 번호표에 적힌 제 권리로 추가 서류를 제출하죠.”
나는 품 안에서 동료들이 서명했던 그 낡은 종이 뭉치를 꺼냈다. 내가 죽지 않기를 바란다며, 내 사망일을 저지하겠다며 적어 내려갔던 연대 서명들.
“이건 제 개인의 기록이 아니라, ‘공동 수령인’들의 연대 보증서입니다. 제 기록을 지우려면 여기 적힌 이 사람들의 삶까지 전부 대조해서 지워야 할 텐데, 예언청 업무가 마비되지 않겠습니까?”
아르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내 앞에 놓인 서명지와 번호표를 번갈아 보았다. 예언청의 논리대로라면, 내 기록은 이제 나와 연결된 수많은 타인의 기록과 엉켜버린 거대한 타래였다. 이것을 강제로 끊어내는 것은 시스템 전체에 과부하를 주는 행위였다.
잉크 수로의 흐름이 잦아들었다. 요동치던 서가들도 제자리를 찾았다.
아르벨 렌은 한참 동안 나를 응시하다가, 신경질적으로 도장을 집어 들었다.
“……규격 외의 민원이다. 절차적 정당성을 검토하는 동안 이 기록의 처리를 유예하겠다.”
그가 번호표 위에 거칠게 도장을 찍었다.
[ 반송 가능 (返送 可能) ]
그것은 내 사망일이 다시 한번 뒤로 밀렸음을 의미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합격 통지서였다.
“대신 명심해라, 로웬. 도장 찍히지 않은 예언서는 폐기물로 간주한다.”
아르벨이 차갑게 돌아서며 덧붙였다.
“그 쓰레기 더미 속에 네가 찾는 답이 있을지도 모르지. 관련 증인은…… 저기 있는 광대 녀석으로 충분하겠군.”
그의 시선이 서가 위에서 낄낄거리는 피핀에게 머물렀다.
나는 도장이 찍힌 번호표를 챙기며 피핀을 바라보았다. 녀석의 장난스러운 웃음 뒤로, 예언청의 어두운 구석에서 타오르는 폐기 예정 문서들의 불꽃이 보였다.
거기엔 도대체 무엇이 적혀 있길래 폐기하려는 걸까. 그리고 왜 피핀이 증인이라는 거지?
내 심부름은 아직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