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25화 합본. 기사단 무덤에서 검은 순례자의 시험까지
23화. 기사단 무덤의 단체 결투
굴뚝에서 올라오는 매캐한 연기가 코끝을 찔렀다. 내 등짐 속에는 녹슨 방패끈 수십 개가 짤랑거리며 불길한 리듬을 만들어냈다. 이게 다 돈이다, 아니, 정확히는 이번 심부름의 ‘선입금’ 항목이다. 잿불이 날리는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저 멀리 거대한 돌무지들이 보였다. 기사단 무덤. 말이 좋아 순례지이지, 내 눈에는 관리비만 비싸게 처먹고 영수증 발행은 더럽게 안 해줄 것 같은 유적지로밖에 안 보였다.
“분위기 한번 끝내주네. 여기서 하룻밤 자면 서비스로 악몽이라도 끼워주나?”
내 농담에 이네스의 어깨가 눈에 띄게 경직됐다. 그녀는 아까부터 한마디도 없었다. 성기사로서 이곳은 자부심의 근거가 아니라, 선배들이 패배하고 스러진 치욕의 현장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녀의 고결한 죄책감을 감상해줄 여유가 없었다. 내게 중요한 건 이 무거운 방패끈들을 제자리에 배달하고 확인 도장을 받는 거다.
무덤 입구에 다다르자 한 남자가 앞을 가로막았다. 무덤 관리인, 칼렌 오르트였다.
그는 마치 장례식에 참석한 조문객과 사기꾼을 반씩 섞어놓은 듯한 묘한 위압감을 풍겼다. 빳빳하게 풀을 먹인 검은 코트는 먼지 하나 없이 매끄러웠으나, 그 아래로 드러난 손가락은 서류 뭉치를 넘기느라 잉크가 검게 배어든 채였다. 움푹 들어간 눈동자는 순례객의 신심을 살피는 게 아니라 주머니의 무게를 가늠하듯 번득였고, 입가에 걸린 비즈니스용 미소는 마치 잘 닦인 비석처럼 차갑고 딱딱했다. 그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오래된 종이 냄새와 역한 향초 냄새가 섞여 나와 내 코를 찔렀는데, 그 몸짓 하나하나가 이곳을 성역이 아닌 자신의 사유지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오만했다.
“입장료는 인당 50리알입니다. 성자 일행이라도 예외는 없죠. 아, 배달원분은 도장을 원하시나? 그거라면 관람을 마친 뒤에 이야기합시다.”
칼렌이 내민 장부는 기름때가 묻어 있었다. 나는 투덜거리며 주머니를 뒤졌다.
“무슨 무덤 보는 데 입장료를 받아요? 죽은 사람들이 방세라도 낸답니까? 여기 배달 확인증에 도장이나 먼저 찍어주시죠.”
“규칙은 규칙입니다. 이곳 기사단은 ‘명예로운 전사’를 팔아 이 근방의 신앙을 유지하니까요.”
칼렌의 비릿한 말투에 이네스의 손등에 핏대가 섰다. 안내판에는 ‘장렬히 전사한 기사 300인’이라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내 눈은 장부보다 그 뒤에 늘어선 묘비들을 훑었다. 기묘했다. 안내판의 숫자와 실제 묘비 뒤에 숨겨진 작은 돌멩이들의 수가 맞지 않았다. 300명이라니, 대충 훑어봐도 그 두 배는 족히 넘는 이름 없는 흔적들이 무덤가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밤이 되자 무덤가는 전혀 다른 풍경으로 변했다. 묘비선을 경계로 서늘한 안개가 피어오르더니, 갑옷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망령 기사들이었다.
“결투 규정 위반이야! 무단 침입이다!”
피핀이 평소처럼 소리를 지르려다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다. 묘비들이 늘어선 광장의 구조, 관객석처럼 계단식으로 깎인 언덕. 그 모습이 왕궁의 원형 경기장을 닮았기 때문일까. 피핀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며 농담 대신 거친 숨소리만 내뱉었다.
망령들은 우리를 향해 검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그 기세가 이상했다. 몬스터 웨이브처럼 닥치는 대로 찢어발기려는 움직임이 아니었다. 이네스가 칼을 뽑으려다 멈칫하며 중얼거렸다.
“공격 대형이 아니야…….”
“그래, 저건 방패 대형이지. 그것도 아주 필사적인.”
내가 짐 속에서 녹슨 방패끈을 꺼내며 덧붙였다. 망령들은 서로의 어깨를 맞대고 외부를 향해 방패를 세우고 있었다. 그들의 발치, 그러니까 방패 안쪽 공간은 비어 있었다. 아니, 비어 있어야 했다.
모르그가 바닥에 떨어진 낡은 방패 하나를 뒤집었다. 그 안쪽에는 빽빽하게 이름들이 새겨져 있었다. 기사단의 이름이 아니었다. 아이, 노인, 부녀자들. 피난민들의 명단이었다.
“공식 기록에는 없는 이름들이군요. 기사단은 패배한 게 아니라, 이들을 대피시키느라 퇴로를 막고 서 있었던 겁니다.”
모르그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이네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명예로운 전사자로 포장된 300명 뒤에는, 방패 뒤에서 숨죽이며 살아남았던 수많은 ‘진짜 목숨’들이 있었다. 칼렌 오르트는 이 비극을 단순한 ‘기사단의 패배와 순례 상품’으로 가공해 팔아치우고 있었던 거다.
망령 기사 하나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내게 다가왔다. 그는 여전히 방패를 놓지 못하고 있었다. 수십 년 전의 임무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믿는 것처럼.
“자자, 손님들. 근무 시간 끝났습니다.”
나는 성자 권능 대신, 배달원으로서의 숙련된 솜씨로 녹슨 방패끈을 낚아챘다. 그리고 기사의 방패와 옆 기사의 갑옷 고리를 하나하나 연결했다. 이건 결투가 아니다. ‘호위 완료’ 조항에 따른 업무 종료 선언이다.
“심부름꾼 규정 제14조. 수하물이 목적지에 도착하고 수취인이 확인되면, 호위인의 의무는 자동 소멸한다. 당신들이 지키던 사람들은 이미 저 너머로 갔어요. 영수증도 안 끊어주는 연장 근무는 그만하시라고.”
내가 마지막 방패끈을 조이자, 팽팽하게 유지되던 망령들의 진형이 스르르 풀렸다. 승천이라기엔 너무나 무미건조한, 마치 퇴근 도장을 찍고 물러나는 야간 경비원들 같은 뒷모습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내 순례지가!”
칼렌이 달려와 무너진 묘비선을 보며 절규했다. 이네스는 그를 보지 않았다. 그녀는 방패 안쪽에 새겨진, 이끼 낀 이름들을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훑으며 외우기 시작했다. 명예라는 허울 대신, 실재했던 삶들을 기억하기로 한 것이다.
나는 칼렌의 품에서 배달 확인 장부를 뺏어 도장을 쾅 찍었다.
“도장은 내가 직접 찍었습니다. 입장료는 아까 낸 걸로 퉁치죠.”
짐을 정리하며 주머니를 뒤지자, 구석에서 종이 한 장이 더 나왔다. 다음 심부름 영수증이었다.
[회수 물품: 성유 보관용 식초병 1개 (빈 병)]
“식초병? 성유 대신 식초를 뿌린 놈이 있다고? 이거 느낌이 쎄한데.”
나는 찝찝한 기분을 떨치며 다음 목적지를 향해 발을 뗐다. 뒤에 남겨진 무덤가에는 더 이상 매캐한 연기가 나지 않았다.
24화. 성유 대신 식초를 뿌린 날
회수증에 찍힌 숫자를 다시 보았다. 서른두 병.
빈 병 하나당 보증금이 오 코퍼니까, 전부 돌려받으면 백육십 코퍼다. 이 정도면 성도 중심가에서 나름대로 구색을 갖춘 한 끼 식사에 후식까지 챙길 수 있는 거금이다. 하지만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백육십 코퍼의 안온함과는 거리가 아주 멀었다.
“이거, 냄새가 너무 노골적인데.”
코끝을 찌르는 시큼한 향. 성유 특유의 묵직한 올리브 향이나 은은한 침향 대신, 샐러드 드레싱에나 어울릴 법한 날카로운 산미가 예배당 복도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작은 순례 예배당은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기사단 무덤 일로 성도의 민심이 흉흉해진 탓인지, 사람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곳의 ‘기적’에 매달리고 있었다. 이네스는 아무 말 없이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투구를 쓰지 않은 그녀의 옆얼굴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기사들의 죽음을 목도한 이후, 그녀의 침묵은 깊은 늪처럼 변했다.
“로웬, 저기 봐. 아주 훌륭한 연극 무대야.”
피핀이 내 어깨 너머로 속삭였다. 평소라면 신랄하게 비웃었을 녀석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예배당 중앙, 금박을 입힌 화려한 제단 위로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검은 사제복 위에 금색 실로 정교하게 수를 놓은 영대를 걸치고 있었다. 빳빳하게 풀을 먹인 옷깃은 그의 목을 압박하듯 높게 솟아 있었고, 그 위로 드러난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투명한 종이 같았다. 움푹 들어간 눈동자는 차가운 유리구슬처럼 빛을 반사하고 있었는데, 그 시선은 신도들이 아니라 오직 손에 든 장부와 제단 위의 병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가늘고 긴 손가락은 깃펜을 쥔 채 쉴 새 없이 무언가를 적어 내려갔다. 그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사제복 자락에서 묵은 종이 냄새와 코를 찌르는 식초 향이 섞여 나왔다.
그가 바로 이 예배당의 실무를 총괄한다는 라비엔 크로스였다. 그는 내가 들고 있는 빈 병 자루를 보더니,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앞을 막아섰다.
“반품은 받지 않습니다. 성유의 보증금 반환 업무는 오늘부로 중단되었습니다.”
“중단이라뇨? 여기 회수증에 도장까지 찍혀 있는데. 규정대로라면 병 라벨만 멀쩡하면 즉시 지급해주셔야 합니다.”
나는 장부를 들이밀었다. 라비엔은 내 장부를 훑어보는 대신, 제단 아래 지하 성물실로 연결된 통로를 힐끗 보았다. 그의 손등에 핏대가 섰다.
“교회 내부 사정입니다. 물러나시죠.”
그때였다. 제단 위 신관이 ‘성유’라고 주장하는 액체를 지하 봉인석 위로 쏟아부었다.
치익, 하고 고기 굽는 소리가 났다. 원래 성유라면 봉인석에 스며들어 은은한 빛을 내야 정상이다. 그런데 식초와 향료, 그리고 정체 모를 금가루가 섞인 액체가 닿자마자 지하실에서 안개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산성 성분이 고대 유물의 표면과 반응하며 일으키는 화학 작용이었다.
“기적이다! 성자의 빛이야!”
순례객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금빛 안개가 자욱하게 퍼지자 사람들은 그것이 신의 응답이라도 되는 양 손을 뻗었다. 피핀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저건 기적이 아니라 그냥 사고인데. 다들 미쳤어.”
왕궁에서의 기억이 떠오른 모양인지 피핀의 말끝이 툭 끊겼다. 몰려드는 군중의 압력에 예배당 입구가 들썩였다. 이네스는 칼을 뽑는 대신, 자신의 몸을 방패 삼아 밀려드는 사람들을 저지했다. 그녀는 화를 내지도, 권위를 내세우지도 않았다. 그저 묵묵히, 사람들이 서로를 짓밟지 않도록 어깨를 펴고 벽이 되어줄 뿐이었다.
나는 그 혼란 와중에 라비엔의 장부를 낚채듯 잡아챘다.
“잠깐, 이것 좀 보시지.”
모르그가 내 곁으로 다가와 장부를 들여다보았다. 모르그의 눈이 기계적으로 번뜩였다.
“성유 매입 기록은 반년 전에서 멈춰 있군. 대신 식초 대량 구매 내역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어. 그런데 구매 단위가 특이해. ‘죽은 태양’ 세금 징수 장부에서나 쓰는 십이진법 단위야.”
모르그의 지적에 라비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건…… 그저 저렴한 공급처를 찾다 보니…….”
“성유가 끊겼는데 예배당 문은 닫을 수 없었겠지. 그래서 가짜를 만들었어. 그런데 문제는 말이야, 신부님.”
나는 식초병 라벨을 가리켰다.
“이 라벨, 반품 규정 제4조에 따르면 ‘인체에 유해한 반응을 일으키는 변질품’은 전액 환불 및 보수 비용 청구 대상이야. 지금 저 아래 봉인석, 식초 산성 때문에 녹아내리고 있다고.”
실제로 지하에서 올라오는 안개는 점점 매캐해지고 있었다. 금빛은 번쩍였지만 냄새는 고약했다. 순례객들도 하나둘 기침을 터뜨리며 주춤거렸다.
나는 당황한 라비엔의 손에서 인장을 뺏다시피 가져와 내 회수증에 찍었다. 쾅, 소리와 함께 보증금 반환 승인 도장이 찍혔다.
“도장은 받아 갑니다. 하지만 저 봉인석 부식되는 거 멈추려면 내가 가져온 중화제…… 아니, 알칼리성 세정제라도 좀 뿌려야 할 거야. 물론 그건 서비스가 아니지.”
나는 배달 가방에서 비누 제작용 재료로 쓰려던 잿물 주머니를 꺼내 라비엔에게 던졌다. 그는 멍하니 주머니를 받았다.
“보증금 백육십 코퍼에서 봉인석 복구 비용으로 구십 코퍼 깠습니다. 나머지는 나중에 정산하러 올 테니까 장부 정리 잘 해두쇼.”
사건은 일단락되는 것처럼 보였다. 순례객들은 ‘기적’이 짧게 끝난 것에 아쉬워하며 흩어졌다. 이네스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예배당 밖으로 걸어 나갔고, 모르그는 머릿속으로 식초 장부의 숫자들을 조합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내 손에는 도장이 찍힌 회수증과 짤랑거리는 동전 몇 개가 남았다. 하지만 기분이 개운치 않았다. 진짜 성유보다 싸구려 식초가 지하의 고대 성물 봉인에 더 강렬하게 반응했다는 사실이 뒷맛을 쓰게 만들었다.
예배당을 나서기 전, 나는 그늘진 기둥 뒤편을 보았다.
그곳에 검은 천 조각 하나가 걸려 있었다. 바람도 불지 않는데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일렁이는 그림자. 엘드가 말했던 ‘검은 순례자’의 표식이다. 마치 누군가 이 가짜 기적의 현장을 아주 즐겁게 지켜보고 있었다는 듯한 흔적.
“로웬, 안 오고 뭐 해?”
피핀의 부름에 나는 걸음을 옮겼다. 주머니 속의 동전들이 부딪히며 차가운 소리를 냈다. 성도에 뿌려진 것은 성유가 아니라 식초였고, 그 산성 냄새는 쉽게 가라앉을 것 같지 않았다.
내일은 더 고약한 심부름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25화. 검은 순례자의 시험
식초 냄새가 진동했다. 아무리 소매를 코에 처박아도 코끝을 찌르는 시큼한 악취는 가시질 않았다. 숙소 주인은 내가 방 안에서 금지된 연금술이라도 시도한 줄 알았는지, 보증금에서 세탁비 명목으로 은화 두 닢을 깎아버렸다. 억울해서 항변하려 했지만, 이미 마을 광장에는 ‘식초로 성스러운 봉인을 깨운 성자’에 대한 괴소문이 가래떡 뽑히듯 줄줄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성자님, 식초 향기가 은총의 전조였다니 정말 놀랍습니다.”
이네스가 진지한 표정으로 짐을 챙기며 말했다. 나는 그녀의 입을 꿰매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배낭 끈을 조였다. 은화 두 닢이면 길바닥에서 열흘은 더 버틸 수 있는 거금이다. 내 귀중한 여비를 갉아먹은 이 ‘성자 놀이’의 설계자를 잡으면 반드시 반송 수수료를 청구하리라 다짐하며 길을 나섰다.
성소로 향하는 길목, 세 갈래로 나뉜 교차로가 나타났다. 각 길목 앞에는 마치 우리를 기다렸다는 듯 낡은 표지판과 함께 의뢰서들이 꽂혀 있었다.
“어느 쪽이 성스러운 시련의 길일까요?”
이네스가 성호를 그으며 물었다. 피핀은 옆에서 “당연히 보물 상자 그려진 쪽이지! 아니면 공주님이 기다리는 쪽?”이라며 촐랑거렸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저 악성 재고가 쌓인 물류 창고의 입구처럼 보일 뿐이었다.
나는 가장 먼저 왼쪽 의뢰서를 집어 들었다. 종이의 접힘 자국이 지나치게 정갈했다. 이건 실제로 누군가의 손을 거쳐 전달된 의뢰가 아니라, 방금 막 책상 위에서 자를 대고 접은 흔적이다. 가운데 의뢰서는 인장 왁스에서 저가형 파라핀 냄새가 났다. 보통 귀족이나 성당에서 쓰는 고가 왁스는 은은한 침향이 나기 마련인데, 이건 시장통 싸구려 양초를 녹여 붙인 게 분명했다.
마지막 오른쪽 의뢰서. 환급 조건에 ‘성공 시 명예와 축복을 하사함’이라고 적혀 있었다.
“미쳤나. 명예로 여관비를 낼 수 있을 줄 알아?”
나는 코웃음을 치며 의뢰서를 내던졌다. 세 길 모두 가짜다. 이건 신의 시험이 아니라, 배달 사고를 유도해서 수수료를 떼어먹으려는 악덕 중개업자의 수작이다. 그때, 갈림길 중앙의 안개 속에서 한 남자가 형체도 없이 스르르 나타났다.
그는 빛을 흡수하는 듯한 칠흑 같은 로브를 걸치고 있었는데, 그 질감이 마치 살아있는 그림자처럼 구불거리며 바닥을 훑었다. 창백하다 못해 투명해 보이는 피부 위로 도드라진 입술은 기괴할 정도로 매끄러운 호선을 그리고 있었으며, 그 눈동자는 깊은 심연처럼 새카매서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영혼의 밑바닥을 들키는 불쾌함을 주었다. 그는 마치 세상의 모든 가치를 돈으로 환산할 수 있다고 믿는 노회한 장사꾼처럼, 우아하지만 오만한 손짓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그의 목소리는 오래된 양피지가 쓸리는 듯 건조하고 서늘했다.
나에게는 여비를 갈취하려 드는 시험 설계자였고, 이네스에게는 신앙을 뿌리째 흔드는 검은 순례자였으며, 모르그에게는 역사서의 빈칸을 채워 넣는 사악한 정보상인 남자.
남자의 가슴팍에 새겨진 기하학적인 문양, ‘엘드’의 표식을 확인한 순간 소름이 돋았다.
“성자라 불리는 자여, 길을 고르지 않는가?”
엘드가 물었다. 동시에 길의 풍경이 변했다. 황금빛이 쏟아지는 길, 화려한 성배가 놓인 길, 그리고 고난 끝에 왕좌가 보이는 길. 선택 조건은 시간이 갈수록 파격적으로 변했다. 당장이라도 발을 들이면 천문학적인 보상금이 쏟아질 것 같은 환상이었다.
“로웬, 저기 봐! 진짜 금괴 아니야?”
피핀이 눈을 빛내며 달려 나가려다 갑자기 멈춰 섰다. 녀석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아니…… 싫어. 왕궁에서도 그랬어. 왕이 그랬다고. 골라보라고, 어떤 게 네 목숨값이 될지 골라보라고…….”
피핀의 말끝이 덜덜 떨리며 끊겼다. 왕궁의 잔혹한 선택 게임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이네스 역시 평소라면 성스러운 언어로 나를 독려했겠지만, 지금 그녀는 입을 꾹 다문 채 내 앞을 가로막아 섰다. 그녀는 이 화려한 환상이 신앙의 언어가 아닌, 누군가의 의도된 연출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듯했다. 기도가 아닌, 육신으로 길을 막아서는 물리적 저지였다.
“모르그, 저 표지판 숫자 보여?”
내가 묻자, 모르그가 안경을 치켜올리며 계산을 시작했다.
“……단위가 이상합니다. 이건 현재 통용되는 화폐 단위가 아닙니다. ‘죽은 태양’ 시대의 장부 단위군요. 가치가 폭락하기 직전의, 껍데기만 남은 숫자들입니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이건 하이 리스크, 제로 리턴의 사기 계약이다.
나는 엘드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발아래 놓인 세 갈래 길의 경계선을 구둣발로 짓밟았다.
“이봐, 장사 똑바로 해. 이건 배달 의뢰가 아니야.”
“무슨 뜻이지?”
“수취인 불명, 주소 부정확, 무엇보다 발송인이 사기꾼이야. 이런 물건은 ‘반송’ 처리하는 게 우리 업계의 철칙이거든.”
나는 주머니에서 구겨진 인장 도장을 꺼내 허공에 찍는 시늉을 했다.
“이 길은 전부 반송이다. 반송 수수료는 네놈의 그 잘난 여유로 받지.”
내가 선언하는 순간, 화려했던 세 갈래 길의 환상이 유리창 깨지듯 박살 났다. 엘드의 무미건조했던 표정에 처음으로 미세한 균열이 생겼다. 그는 불쾌한 듯 눈을 가늘게 뜨더니, 이내 낮게 큭큭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거부하는 성자라. 재미있군. 하지만 로웬, 착각하지 마라. 네가 이 시험을 거부하고 비틀어버리는 그 행위조차, 내가 써 내려갈 새로운 신화의 훌륭한 재료가 될 뿐이니까.”
엘드의 몸이 안개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가 완전히 사라지기 전, 마지막 한마디를 남겼다.
“반쪽짜리 왕관이 새로운 숙주를 찾고 있다. 그게 네 머리 위가 아니길 빌지.”
안개가 걷히자 나타난 것은 황금길도 왕좌도 아닌, 질척이는 진흙탕과 썩은 나무뿌리들이 엉킨 진짜 잿더미 길이었다. 그리고 내 발치에는, 주인을 잃고 떨고 있는 기괴한 금속 파편 하나가 맥동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이번에도 제대로 된 수수료는커녕 골치 아픈 덤만 잔뜩 떠안게 생긴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