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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62화 합본. 순례자용 성자 인형 리콜에서 공식 성자 심문장까지 일러스트

60-62화 합본. 순례자용 성자 인형 리콜에서 공식 성자 심문장까지

60화. 순례자용 성자 인형 리콜

성자가 아침마다 잿불을 들고 성소를 나서는 모습이 경건하다고들 했다. 그러나 그 경건함이 태엽의 회전축에 끼워지고, 그의 목소리가 작은 유리병 속에 갇혀 수십 개씩 복제되었을 때 벌어질 일까지 예상한 이는 없었다.

성자의 성흔을 본떠 수놓았다는 인형의 손바닥이 아이의 뺨을 할퀴었다. 정교하게 설계된 ‘심부름 습관’은 밤이 되면 오작동을 일으켜, 인형들이 주인의 물건을 제멋대로 옮기거나 창밖으로 투신하는 소동으로 번졌다. 순례길의 안식을 약속하던 인형은 이제 안식을 방해하는 괴담이 되어 길거리에 나뒹굴었다.

“이것 좀 보세요! 우리 애 손등이 다 긁혔다니까요? 성자님 인형이라더니, 밤마다 가위눌린 것처럼 덜덜 떨기나 하고!”

“인형이 성자님 목소리로 자꾸 이상한 말을 해요. 보급소에선 리콜하겠다는데, 그럼 우리가 지불한 성금은 어쩌라는 겁니까?”

순례자 보급소 앞은 아수라장이었다. 그 혼란의 한가운데에서 한 남자가 묵묵히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는 항의하는 부모들의 고함에는 귀를 닫은 채, 울고 있는 아이의 손등에 약을 바르고 천천히 붕대를 감아주었다. 그의 옆에는 목이 꺾인 성자 인형 하나가 배가 갈린 채 놓여 있었다.

로웬이 다가가자, 남자는 고개를 들지 않고 품 안에서 구겨진 종이 뭉치 몇 장을 내밀었다. 그것은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은 리콜 대상 명단과 인형의 내부 회로를 형상화한 ‘실밥 지도’였다.

“……인형의 배를 가르는 것보다, 아이의 울음소리를 멈추는 게 더 급한 법이죠.”

남자의 목소리는 쇳가루가 섞인 듯 낮고 무거웠다. 그가 건넨 서류에는 태엽의 회전수와 목소리 병의 납품 장부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로웬이 그 서류를 훑어보는 사이, 뒤늦게 달려온 순례상인들이 남자의 멱살을 잡으려 들며 소리를 질렀다.

“야스펠 린트! 당신, 미쳤어? 내부 기밀을 함부로 외부에 넘겨? 수선공 주제에 감히!”

야스펠 린트. 그 이름이 불리는 순간, 로웬은 비로소 눈앞의 남자를 제대로 응시했다.

기름때와 실밥이 엉겨 붙은 앞치마를 두른 그는, 성자를 모시는 기술자라기보다는 업보를 짊어진 고행자에 가까운 분위기를 풍겼다. 헝클어진 머리칼 사이로 비치는 눈매는 결함을 알면서도 제작을 멈추지 못했던 자 특유의 깊은 죄책감으로 침전되어 있었다. 마디가 굵고 거친 손가락 끝은 미세하게 떨리면서도, 바늘을 잡을 때만큼은 이상할 정도로 정교한 궤적을 그렸다. 그는 낡은 톱니바퀴 냄새와 눅눅한 성수 향이 뒤섞인 기묘한 체취를 풍겼고, 로웬은 그를 스스로를 수선하지 못한 채 고장 난 채로 방치된 자동 인형처럼 위태롭고도 단단한 사람으로 받아들였다.

“내 이름은 중요하지 않아. 다만 이 인형들이 당신들의 성자를 어떻게 망가뜨리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나?”

야스펠이 차갑게 쏘아붙이자 상인들은 움찔하며 물러섰다.

옆에서 지켜보던 피핀은 자신의 얼굴을 본뜬 광대 인형이 조롱거리로 전락했을 때보다 더 큰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성자님 목소리로 사기를 쳐? 이것들이 정말……!” 피핀이 주먹을 불끈 쥐며 나서려다 멈칫했다. 인형을 꼭 껴안고 “그래도 성자님인데, 버리면 안 되잖아요.”라고 웅얼거리는 아이의 눈망울을 본 탓이었다. 아이에게 이 인형은 사기극의 증거가 아니라, 유일한 위안이었다.

이네스는 인형의 결함을 비웃는 주변의 구경꾼들을 차가운 시선으로 제압했다. “불안을 사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그 불안을 이용해 즐거움을 탐하는 것은 죄악입니다. 입들을 조심하시죠.” 그녀의 한마디에 소란스럽던 광장이 일순간 정적에 잠겼다.

모르그는 야스펠이 넘겨준 서류들을 바닥에 펼쳐놓고 대조하기 시작했다. “리콜 명단에는 500개라고 적혀 있지만, 목소리 병 납품 장부에는 2천 개가 넘어요. 태엽 보증서 번호도 앞뒤가 안 맞고. 이건 단순 오작동이 아니라, 저가형 불량품을 성물로 둔갑시켜 밀어내기 한 거네요.”

엘드가 그 옆에서 무게를 잡으며 덧붙였다. “문제는 선택 비용이지. 인형을 부수면 구매자가 지불한 성금이 날아가고, 놔두면 밤마다 저 인형들이 성자 흉내를 내며 사고를 칠 거다. 구매자들에게 손해를 뒤집어씌우는 구조야.”

상인들은 배를 내밀며 배짱을 튕겼다. “우린 절차대로 리콜 공지를 했소! 가져오지 않는 건 본인들 책임이지. 그리고 이 많은 인형을 우리가 일일이 수거하러 다닐 순 없단 말이오!”

로웬은 잠시 인형의 손바닥에 새겨진 조잡한 성흔을 내려다보았다. 야스펠이 건넨 ‘실밥 지도’를 다시 펼쳤다. 인형들은 성자의 행동 패턴을 복제했다. 그중에는 ‘배달을 마치면 반드시 원래 자리로 돌아간다’는 심부름꾼의 귀환 본능도 포함되어 있었다.

“부술 필요도, 설교할 필요도 없습니다.”

로웬이 무릎을 굽혀 인형의 등에 달린 태엽 조절 나사를 살짝 비틀었다. 그리고 실밥 지도의 끝부분, 목적지를 가리키는 매듭을 풀고 다시 묶었다.

“이 인형들은 성자를 닮았죠. 성자는 길을 잃지 않습니다.”

로웬의 손길이 닿은 인형이 갑자기 덜덜거리며 일어서더니, 정확히 순례자 보급소의 리콜 접수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하나가 움직이자, 광장 곳곳에 버려져 있던 인형들이 태엽 소리를 내며 일제히 방향을 틀었다. 수백 개의 성자 인형들이 줄을 지어 상인들의 발등을 짓밟으며 접수처로 행진하는 기괴하고도 장엄한 광경이 펼쳐졌다.

“뭐, 뭐야! 왜 지들이 알아서 기어 들어와!”

상인들이 당황해 막으려 했지만, 모르그가 장부 불일치를 근거로 작성한 판매 중지 권고서를 들이밀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인형들은 스스로 리콜을 ‘수행’하고 있었다. 마치 성자의 심부름을 완수하려는 것처럼.

야스펠 린트는 그 광경을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로웬에게 짧게 고개를 숙였다. “……수선공보다 심부름꾼이 인형의 마음을 더 잘 아는 모양이군.”

소동이 일단락될 무렵, 피핀의 손에 화려한 금박이 입혀진 초대장 한 장이 날아들었다.

“어? 이게 뭐야? 성자님, 이것 좀 보세요!”

초대장에는 붉은 인장이 찍혀 있었다.

[ 피핀의 마지막 공연장 — 성자의 광대 특별 초대 ]

그것은 다음 목적지가 광장이 아니라, 더 화려하고도 위험한 무대임을 알리는 신호였다. 로웬은 멀어지는 자동 인형들의 태엽 소리를 들으며, 다음 심부름의 무게를 가늠했다.

61화. 피핀의 마지막 공연장 예고

금박이 입혀진 초대장은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손바닥을 태울 듯 뜨거웠다. '성자의 광대 특별 초대'라는 문구 위로 덧칠해진 화려한 필체는 피핀의 이름을 호명하는 것이 아니라, 전시될 상품의 규격을 확인하는 낙인처럼 보였다.

일행이 발을 들인 공연장 로비는 이미 불쾌한 열기로 가득했다. 무대 위로 드리워진 검은 커튼 너머에서 기괴한 그림자 연극이 상영되고 있었다. 은빛 가느다란 실에 매달린 목각 인형이 왕궁의 회랑을 닮은 배경 속에서 제 목을 꺾으며 웃음을 터뜨리는 시늉을 했다. 그 그림자가 일렁일 때마다 피핀의 어깨가 눈에 띄게 움츠러들었다.

“아, 오셨군요. 오늘의 주역, 아니 정확히 말하면 예약된 ‘상품’의 원본 되시는 분.”

아직 이름조차 밝히지 않은 남자가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다. 그는 손에 들린 두툼한 장부를 펜촉으로 툭툭 치며 피핀의 얼굴을 노골적으로 훑었다. 그의 뒤편에는 '피핀의 웃음 10분권 — 선매입 완료', '왕궁의 비극적 농담 패키지'라는 팻말이 경매 물품처럼 진열되어 있었다.

“기다리는 손님들이 많습니다. 당신의 그 기적 같은 웃음 한 번에 성자의 축복이 깃들어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거든요. 이미 웃음 소리 예약금만으로 극장 한 달치 대관료를 뽑았으니, 자, 어서 무대 위로 올라가서 그 값어치를 증명하시죠.”

피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웃지 않으면 무능한 광대로 낙인찍혀 버려질 것이고, 웃음을 터뜨리는 순간 그가 간직한 왕궁의 처절한 기억은 구경꾼들의 안줏거리로 전락할 터였다.

“이봐, 예고꾼. 사람의 감정을 미리 팔아치우는 계약은 이 도시의 상도에도 어긋나는 것 같은데.”

이네스가 성큼 앞으로 나서며 피핀의 앞을 가로막았다. 구경하듯 몰려들던 관객들이 그녀의 서늘한 기세에 주춤거렸다. 그때, 극장 안쪽에서 직원이 달려와 남자에게 허리를 숙였다.

“세르비 도른 예고꾼님! 웃음 세금 장부가 비었습니다. 무대 장치 점검도 끝났습니다.”

이름이 불린 세르비 도른은 그제야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금박이 벗겨진 예고꾼 모자를 벗어 가슴에 대었다.

그는 뱀의 허물처럼 매끄럽게 흐르는 비단 코트를 걸치고 있었고, 금박이 벗겨진 붉은 예고복의 결이 바뀔 때마다 보라색과 검은색이 기분 나쁘게 뒤섞여 보는 이의 시각을 어지럽혔다. 가늘게 찢어진 눈매는 상대의 영혼을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금전적인 가치만을 매기려는 저울추처럼 차갑게 빛났다. 입술 주변에 남은 옅은 흉터는 웃는 입 모양으로 굳어 있었고, 로웬은 그 흉터가 그가 웃음을 팔아치우기 위해 스스로의 감정마저 얼마나 난도질해왔는지를 말해 준다고 느꼈다. 길게 뻗은 손가락은 광대 가면 끈을 장부 끈처럼 감았다 풀며 공중에서 무형의 화폐를 세듯 꼼지락거렸고, 그의 목소리는 잘 닦인 금속판 위를 긁는 듯한 금속성 잔향을 남기며 웃음과 빚 독촉을 같은 높이로 로비에 흩뿌렸다.

“세르비 도른입니다. 이 극장의 마지막 공연을 알리는 예고꾼이자, 웃음과 눈물을 먼저 팔아 장부에 묶는 사람이지요.”

세르비가 피핀을 향해 손을 뻗으려 하자, 이번에는 모르그가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모르그의 품 안에서는 이미 수십 장의 서류 뭉치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잠깐 확인이 필요하군요. 여기 '웃음 소리 선매입 계약서'와 '광대 가면 대여 계약서', 그리고 당신들이 관리하는 '웃음 세금 장부'를 대조해 봤습니다만.”

모르그의 손가락이 장부의 특정 구절을 날카롭게 짚었다.

“이 초대권 발행 명단의 수령인과 실제 계약 대상자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즉, 피핀의 웃음을 팔 권리는 이 극장에 귀속된 적이 없다는 소리죠. 장부 불일치는 이 도시에서 가장 엄격하게 다스리는 중죄라는 걸 잊으셨습니까?”

세르비의 얼굴에서 여유로운 미소가 순식간에 휘발되었다. 그는 서류를 뺏으려 손을 뻗었지만, 이네스의 검집이 그의 손등을 가볍게 쳐냈다.

피핀은 로웬의 곁에서 숨을 몰아쉬었다. 로웬은 피핀에게 어서 웃으라고 재촉하지도, 혹은 억지로 참으라고 강요하지도 않았다. 그저 피핀이 제 발로 무대의 중력에서 벗어날 때까지 묵묵히 그 곁을 지키며 그림자를 나누어 가질 뿐이었다.

“내 웃음은…….”

피핀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떨렸지만, 더는 인형처럼 실에 매달린 음색이 아니었다.

“내 웃음은 당신들의 장부에 적힐 숫자가 아니야. 내 기억도, 내 상처도…… 내가 허락하지 않은 곳에선 팔리지 않아.”

피핀이 쥐고 있던 금색 초대권을 바닥으로 던졌다. 그것은 더 이상 초대장이 아니라, 낡고 지저분한 종이 조각에 불과했다. 모르그가 내민 장부의 허점을 반박하지 못한 세르비 도른이 이를 갈며 물러섰고, 관객들은 야유를 보내며 흩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상황이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사람들 발치에, 누군가 고의로 흘린 듯한 전단 한 장이 피핀의 구두 끝에 걸렸다.

[ 긴급 공지: 증인 초상 경매 예고 — 성자의 곁을 지킨 자들의 얼굴을 소유하십시오. ]

피핀의 안색이 다시 하얗게 질렸다. 그것은 며칠 뒤에 들이닥칠, 웃음보다 더 가혹한 압박의 시작이었다.

62화. 공식 성자 심문장

손안에 구겨진 전단 뒤편에는 경매 품목 대신 서슬 퍼런 문장이 적혀 있었다. ‘심부름꾼 로웬은 즉시 공식 성자 심문장으로 출두하라.’ 초상화 한 장이 성물로 팔려 나가는 광경을 보며 피핀이 치를 떨던 바로 그 순간, 성도의 행정 체계는 이미 로웬의 목덜미를 낚아챌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안내된 곳은 화려한 대성당의 예배당이 아니었다. 습기가 배어든 석재 벽면과 잉크 냄새가 진동하는, 기록과 말소의 냄새가 지배하는 차가운 방이었다. 중앙에는 삐걱거리는 나무 의자가 놓여 있었고, 그 맞은편에는 높게 단을 쌓은 필사관의 좌석이 배치되어 있었다.

로웬이 자리에 앉기도 전이었다. 단 위에 앉아 있던 이름 모를 남자가 깃펜을 내려놓고 작은 칼을 들었다. 그는 양피지 위를 거칠게 긁어내기 시작했다. 사각거리는 불쾌한 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남자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물었다. 로웬은 아직 입도 떼지 않은 상태였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방금 하셨군요. ‘아니’라고.”

남자의 손이 기민하게 움직였다. 날카로운 삭제 칼 끝이 로웬이 말하지도 않은 문장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앞뒤 맥락을 도려냈다. 양피지 표면이 하얗게 일어나며 가루가 흩날렸다. 그가 남긴 것은 단 세 글자, ‘아니다’뿐이었다.

“잠깐, 그건 사기잖아요!”

옆에서 지켜보던 피핀이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로웬의 말은 무대 대사가 아니에요! 그렇게 앞뒤 다 잘라내서 성자가 아니라는 말만 남기면, 그게 어떻게 성자의 증언이 돼요? 당신들이 멋대로 편집해서 시장바닥에 뿌릴 ‘부정하는 성자의 잠언집’이라도 만들 생각인가요?”

피핀의 예민한 감각은 이미 이 공간의 의도를 꿰뚫고 있었다. 로웬이 스스로를 부정할수록, 그 부정의 말은 역설적으로 거룩한 교리가 되어 활자로 인쇄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때, 뒤편에서 차가운 구두 굽 소리가 들렸다. 이네스가 서류 뭉치를 옆구리에 낀 채 앞으로 나섰다.

“심문 절차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이 심문장은 피심문자의 발언권을 보장하는 곳이지, 필사관의 창작 욕구를 충족하는 곳이 아닙니다. 지금 작성 중인 증언란의 소유권은 일차적으로 발언자인 로웬에게 있습니다. 동의 없는 삭제와 편집은 기록물 변조에 해당합니다.”

“변조라니요. 정제(精製)라고 해 두죠.”

남자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문 밖에서 대기하던 성기사가 엄숙하게 이름을 호명했다.

“오르벤 사트 필사관, 삭제 칼을 준비하라.”

그제야 드러난 오르벤 사트의 모습은 마치 한 자루의 낡은 깃펜 같았다. 검은 사제복 위에 잉크 얼룩이 튄 회색 덧옷을 걸친 그는, 뼈마디가 도드라진 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쉴 새 없이 삭제 칼의 날을 세웠다. 움푹 들어간 눈동자에는 산 사람의 온기 대신 장부 속 숫자를 대조하는 사무적인 냉혹함이 서려 있었고, 입술을 달싹일 때마다 종이 긁히는 듯한 메마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의 목 주변에는 만년필 촉처럼 날카로운 금속 장식들이 촘촘히 박혀 있어,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기괴한 금속성을 내뿜었다.

오르벤은 로웬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은 성자입니까?”

로웬이 입을 열려는 찰나, 엘드가 그림자 속에서 낮게 읊조렸다.

“말하면 교리가 되고, 침묵하면 긍정이 된다. 어느 쪽을 택하든 자네의 이름은 인쇄기의 톱니바퀴에 물려 돌아가겠지. 저들이 원하는 건 진실이 아니라, 박제할 수 있는 문장뿐이니까.”

엘드의 말대로였다. 오르벤의 손은 이미 로웬의 입술이 떨어지기도 전에 ‘성자가 아니다’라는 문장의 첫 획을 긋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모르그가 오르벤의 책상 위에 낡은 장부 한 권을 툭 던졌다.

“잠깐 멈추시지. 필사관 오르벤. 이 빈 증언란의 수령인 명단과 지금 이 장부를 교정하는 권한자, 그리고 삭제 칼 사용 기록에 적힌 이름이 일치하지 않는군. 장부에는 ‘대필사관’의 인장이 찍혀 있는데, 자네에게 위임된 건 임시 필사 권한뿐이야. 절차상 이 기록물은 작성되는 순간 무효가 된다.”

오르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모르그는 집요하게 장부의 행간을 짚어내며 이어갔다.

“필사 장부의 교정권자가 공석인 상태에서 삭제 칼을 휘두르는 건 명백한 월권이야. 성도의 장부는 정직해야지, 안 그런가?”

절차상의 허점이 드러나자 오르벤의 칼끝이 멈췄다. 로웬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오르벤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당신들이 기다리는 문장이 무엇인지 압니다. 하지만 틀렸군요.”

로웬은 자신의 가슴팍에 걸린, 이제는 낡아 버린 심부름꾼의 휘장을 만졌다.

“제가 ‘성자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건, 당신들이 받아 적어 교리로 만들라고 던져주는 선언이 아닙니다. 저는 그저 사실을 배달할 뿐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문장은, 제 심부름의 도착지가 아닙니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로웬의 말은 오르벤이 준비한 양피지 칸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성자’라는 단어를 긍정하지도, 그렇다고 그들이 이용하기 좋게 부정하지도 않은 채, 심부름꾼의 논리로 교묘하게 질문의 틀을 빗겨 나갔다.

“절차 불일치와 증언 거부로 기록할까요?”

오르벤이 이를 갈며 물었다. 하지만 이미 모르그와 이네스가 장부의 오류를 잡아낸 이상, 강압적인 심문을 이어갈 명분은 사라져 있었다.

“아니, ‘배달 사고’라고 적어 두지.”

모르그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장부를 덮었다.

심문장을 빠져나가는 로웬의 등 뒤로, 오르벤은 분노 섞인 손길로 양피지를 구겼다. 그러나 그가 앉아 있던 책상 밑, 어두운 상자 안에는 이미 수만 개의 납 활자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중 가장 앞줄에 배치된 활자판에는 이미 차가운 금속으로 새겨진 문구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부정하는 성자의 첫 번째 인쇄본 : 나는 성자가 아니다]

그것은 아직 찍히지 않았지만 이미 로웬의 목덜미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 차가운 철의 예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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