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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7-279화. 수취인 확인 전 개봉 금지 / 성자 서명 전 야시장 / 첫 축복 반품 창구 일러스트

277-279화. 수취인 확인 전 개봉 금지 / 성자 서명 전 야시장 / 첫 축복 반품 창구

277화. 수취인 확인 전 개봉 금지

대기실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방 한가운데 공중에 떠오른 붉은 봉투는 마치 살아 있는 심장처럼 기분 나쁜 고동을 내뿜고 있었다. 그 봉투를 칭칭 감고 있는 붉은 실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뱀처럼 로웬의 손등 위를 위태롭게 유영하고 있었다.

봉투 겉면에 적힌 글자가 흐릿하게 번지더니, 이내 서슬 퍼런 빛을 띠며 고정되었다. [수취인 확인 전 개봉 금지]. 그 문구는 단순한 경고가 아니라 절대적인 제약처럼 보였다. 봉투가 로웬의 손등을 향해 서서히 기울어졌다. 그와 동시에 텅 비어 있어야 할 봉투의 하단부에서 하얀 빛의 공백이 펼쳐졌다. 그것은 마치 수취인의 서명을 강요하는 듯한, 거부할 수 없는 압박감을 동반한 서명란이었다.

로웬은 마른침을 삼켰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손가락이 가늘게 떨렸다. 붉은 실 끝이 그의 손목을 낚아채려는 순간, 서늘한 금속의 감촉이 그 사이를 가로막았다. 베라의 검이었다.

“섣불리 만지지 마라. 저 실은 단순한 매듭이 아니야. 인과를 묶어두는 족쇄에 가깝다.”

베라의 경고에 로웬은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봉투는 집요했다. 로웬이 멀어질수록 봉투에서 뻗어 나온 붉은 빛의 실타래는 더욱 길게 늘어지며 그를 추적했다. 마치 이 배달의 끝을 매듭지을 사람은 오직 로웬뿐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려는 듯했다.

그때, 옆에서 팔짱을 낀 채 상황을 주시하던 이네스가 차가운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절차를 분리해야겠군요. 수취 확인과 개봉 권한, 그리고 외관 검수는 엄연히 별개의 영역입니다. 저 봉투가 요구하는 건 ‘누가 받을 것인가’이지, ‘누가 열어볼 것인가’가 아니에요.”

이네스의 눈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제국 행정관 특유의 사무적인 태도로 상황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로웬, 겁먹지 마세요. 당신은 지금 수취인으로서 저것을 마주하는 게 아닙니다. 심부름꾼으로서 물건의 상태를 점검하는 것뿐이죠. 수취 확인란을 채우지 마세요. 권한을 확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외관 검수’만을 신청하는 겁니다.”

“그, 그게 가능한가요? 저 실이 제 손목을 노리고 있는 것 같은데요.”

로웬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지금 당장이라도 이 방을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대마법사니 뭐니 하는 거창한 수식어는 지금의 그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였다. 그저 무사히 이 배달 사고를 수습하고 살아남고 싶을 뿐이었다.

그때였다. 조용히 봉투의 떨림을 관찰하던 피핀이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들려요. 받을 사람을 먼저 정하면 편지가 생긴대요. 아직은 아무것도 없지만, 누군가 이름을 적는 순간 저 안은 가득 차버릴 거예요.”

피핀의 목소리에는 기묘한 울림이 섞여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말을 그대로 옮기는 듯한 태도였다. 로웬은 등 뒤로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받을 사람이 결정되어야 내용물이 확정된다는 말은, 거꾸로 말하면 지금 저 봉투 안은 정해지지 않은 위험으로 가득 차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베라가 로웬의 앞을 막아서며 검기를 끌어올렸다. 붉은 실이 로웬의 손목에 감기려 할 때마다 베라의 검 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서늘한 기운이 그것을 쳐냈다.

“이네스의 말이 맞다. 로웬, 너는 저것의 주인이 아니다. 그저 운반자일 뿐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해라. 정체 모를 계약에 휘말리지 마.”

로웬은 심호흡을 했다. 그는 이네스가 지시한 대로, 수취인 확인란을 철저히 외면했다. 대신 배달원으로서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권한, ‘물품 상태 확인’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그는 떨리는 손을 뻗어 봉투에 직접 닿지 않을 정도의 거리에서 멈췄다.

“수취인 확인을 보류합니다. 배달원 권한으로 외관 검수만을 신청합니다.”

로웬의 입술에서 나온 말은 공식적인 배달 규정의 문구였다. 그 순간, 로웬의 손등을 노리던 붉은 실이 일시적으로 멈췄다. 봉투 주위를 감돌던 흉흉한 기운이 잦아들더니, 서명란 대신 희미한 마법적 궤적이 봉투 표면에 떠올랐다.

봉투는 열리지 않았다. 이네스의 분석대로 수취인이 확정되지 않았기에 봉투의 밀봉은 견고했다. 하지만 ‘외관 검수’ 절차가 승인되면서, 이 물건이 어떤 경로를 거쳐 이곳에 도달했는지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봉투의 겉면이 파르르 떨리며 잉크가 번지듯 글자들이 새겨졌다. 그것은 이 물건이 거쳐 온 경유지들의 기록이었다. 로웬과 일행들은 숨을 죽이고 그 글자들을 읽어 내려갔다.

대부분의 기록은 판독할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어 있었으나, 가장 마지막에 새겨진 문구만큼은 선명했다.

[경유지: 성자 서명 전 야시장]

로웬의 눈이 크게 떠졌다. 성자의 서명 전이라니. 그리고 야시장이라니. 그것은 지금 이 상황이 단순한 배달 실수가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정교하게 뒤틀린 시간과 공간의 산물임을 암시하고 있었다.

붉은 실은 이제 더 이상 로웬을 공격하지 않았지만, 대신 그의 발치까지 길게 늘어져 있었다. 마치 그곳으로 자신을 데려다 달라는 듯이. 로웬은 자신이 결코 이 수렁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으리라는 예감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278화. 성자 서명 전 야시장

대기실의 무거운 목재 문이 열렸을 때, 로웬의 코끝을 가장 먼저 자극한 것은 눅눅한 종이 냄새와 타오르는 향 연기였다. 문 너머는 다음 방이 아니었다. 발밑은 축축한 이끼가 낀 박석으로 바뀌어 있었고, 고개를 들자 끝도 없이 이어진 좁은 골목 양옆으로 붉은 등이 줄지어 매달린 야시장이 펼쳐졌다.

등불의 빛은 밝기보다 기괴했다. 그 빛 아래 놓인 매대 위에는 기이한 물건들이 가득했다. 성자의 서명이 들어갈 자리가 비어 있는 백지 계약서, 아직 주인을 찾지 못해 매끄러운 표면을 유지하고 있는 명패들, 그리고 수취인의 이름이 지워진 채 축복의 기운만 맴도는 영수증 뭉치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로웬은 품에 안은 붉은 실 봉투를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이곳은 성자가 되기 전, 혹은 성자가 되지 못한 이들의 잔해가 거래되는 시장 같았다. 골목을 메운 사람들은 얼굴에 흐릿한 그림자를 드리운 채 소리 없이 물건을 뒤적이고 있었다.

그때, 로웬의 가슴팍에서 기분 나쁜 박동이 느껴졌다. 붉은 실로 봉인된 봉투가 야시장의 공기에 반응하듯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실 끝이 꿈틀거리더니 근처 노점상을 향해 가늘게 뻗어 나갔다.

“서명권 감정료를 내야지. 이 귀한 걸 들고 지나가려면.”

노점 뒤에 앉아 있던 형체 없는 그림자가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로웬의 봉투를 탐욕스럽게 바라보며 손을 내밀었다. 봉투를 감싸고 있던 붉은 실이 마치 통행세라도 내려는 듯 움찔거리며 그림자의 손바닥을 향해 늘어졌다.

“멈추세요!”

이네스가 다급하게 로웬의 앞을 막아서며 외쳤다. 그녀의 눈은 노점상이 내민 빈 장부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감정료를 내는 순간, 이 물건에 대한 서명권 구매 의사가 있는 것으로 간주될 겁니다. 함부로 손대게 두지 마세요.”

로웬은 마른침을 삼키며 뒷걸음질 쳤다. 봉투는 마치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받고 싶어 하는 생물처럼 요동쳤다. 감정료라는 명목으로 무엇을 요구할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은 돈이 아니라 이름이나, 혹은 그 이름을 가질 수 있는 자격 그 자체일지도 몰랐다.

피핀은 노점들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기묘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몸을 떨었다. 노점 뒤편, 어둠이 짙게 깔린 구석에서 누군가 비웃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명하기 전엔 누구나 성자였다네. 그 백지를 채우는 순간, 평범한 인간으로 전락할 뿐이지.’

그것은 시장 전체를 감싸는 거대한 조롱 같았다. 누구나 영웅이 될 수 있다는 유혹과, 동시에 그 영웅이 되기 위해 지불해야 할 대가를 숨긴 덫이었다.

그림자 하나가 로웬의 그림자를 향해 긴 손가락을 뻗었다. 그 손끝에는 잉크가 뚝뚝 떨어지는 깃펜이 들려 있었다. 그림자는 로웬의 발치에 떨어진 그림자를 붙잡아 매대 위에 펼쳐진 빈 계약서 위로 끌어올리려 했다. 로웬의 이름 석 자가 계약서에 새겨지는 순간, 이 위험한 배달의 본질이 뒤바뀔 터였다.

그 찰나, 서늘한 검기가 허공을 갈랐다. 베라가 휘두른 검이 로웬의 그림자를 낚아채려던 손그림자를 가차 없이 베어냈다. 비명 같은 바람 소리가 골목을 휩쓸고 지나갔다.

“물러나. 건드리지 마라.”

베라의 차가운 경고에도 시장의 압박은 줄어들지 않았다. 노점상들은 이제 노골적으로 로웬을 에워싸며 저마다의 백지 계약서를 들이밀었다. 여기 이름을 적어라, 그러면 이 짐의 주인이 될 수 있다, 너는 누구보다 고귀한 존재가 될 자격이 있다. 수천 개의 속삭임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로웬은 눈을 질끈 감았다. 공포가 발끝부터 차올랐지만,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그는 이 거대한 서사의 주인공이 되러 온 것이 아니었다. 그저 시키는 대로 물건을 옮기는 말단 배달원일 뿐이었다.

로웬은 떨리는 목소리로, 그러나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여기서 무엇도 사지 않겠습니다.”

노점상들의 움직임이 멈칫했다. 로웬은 품 안의 봉투를 꽉 쥐고 그림자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제 이름을 남기지 않겠습니다. 이 물건은 누군가에게 전달되어야 할 배달물일 뿐입니다.”

상인들의 눈에 실망과 분노가 스쳤다. 로웬은 지침서에서 배운 대로, 감정이나 유혹에 대응하는 대신 행정적인 절차를 앞세웠다.

“경유지 검수만 요청합니다. 서명권 감정도, 구매 상담도 필요 없습니다. 이 구역을 통과했다는 확인서만 내어 주십시오.”

구매 의사가 없는 방문객에게 시장은 더 이상 강제로 물건을 팔 수 없었다. 그것이 이 기괴한 야시장을 유지하는 최소한의 규칙인 듯했다. 로웬의 말을 들은 노점상의 그림자가 투덜거리며 매대 아래에서 낡은 인장을 꺼냈다.

그는 로웬이 내민 경유지 기록용 봉투 뒷면에 거칠게 도장을 찍었다. 붉은 인크가 번지며 기록이 새겨졌다. 로웬은 그것을 받아 들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네스와 일행을 재촉해 골목 끝을 향해 달렸다.

야시장의 소란이 멀어지고, 다시금 고요한 어둠이 찾아왔을 때 로웬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멈춰 섰다. 손바닥은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고 심장은 터질 듯 뛰었다.

로웬은 방금 받은 검수 확인서를 떨리는 손으로 뒤집어 보았다. 그곳에는 방금 찍힌 붉은 도장 자국 밑에 날카로운 필체로 다음 행선지가 적혀 있었다.

[다음 경유: 첫 축복 반품 창구]

로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축복을 주는 곳이 아니라, 반품하는 곳이라니. 배달의 경로가 점점 더 이해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는 다시금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보이지 않는 수취인의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애써 억눌렀다.

279화. 첫 축복 반품 창구

철컥, 쇳소리가 야시장의 소음을 가르고 올라갔다. 골목 끝자락, 막다른 벽이라고 생각했던 곳에 낡은 셔터가 말려 올라가며 좁은 공간이 드러났다. 야시장의 화려한 등불조차 닿지 않는 그곳은 습기와 묵은 종이 냄새가 진동했다. 로웬은 코끝을 간지럽히는 먼지를 피하며 한 걸음 물러섰다.

창구 안쪽은 비좁았다. 성인 한 명이 겨우 앉을 만한 책상 위로 빛바랜 서류 뭉치와 잉크가 말라붙은 도장들이 무질서하게 쌓여 있었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금이 간 수정함 안에 담긴 정교한 은제 도장이었다. 한 번도 사용되지 않은 듯 날카로운 문양이 새겨진 그것은 ‘축복’이라는 글자가 거꾸로 박힌 채 정물처럼 놓여 있었다.

창구 정면의 작은 유리창 너머에서 실체가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품 사유를 기재하십시오.”

그 소리와 동시에 로웬의 발치로 종이 한 장이 미끄러져 나왔다. ‘첫 축복 반품 사유서’라는 제목이 박힌 종이였다. 신청자 칸은 비어 있었고, 수취인 칸 역시 주인을 찾지 못한 채 여백으로 남아 있었다. 오로지 사유를 적어야 할 공간만이 텅 빈 구멍처럼 로웬을 응시했다.

로웬이 무심결에 펜을 잡으려 손을 뻗었을 때, 곁에 서 있던 이네스가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차가운 금속 장갑의 감촉이 로웬의 정신을 일깨웠다.

“손대지 마세요.”

이네스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고 단호했다. 그녀는 경계 섞인 눈으로 창구 안쪽의 서류들을 훑었다.

“대리 작성이 곧 원신청자와 수취인 사이의 관계 승인입니다. 로웬 씨가 사유를 적는 순간, 이 행정적 결함의 모든 책임을 떠안게 됩니다. 반품되지 않은 축복의 연체료는 영혼의 무게로 매겨진다는 걸 잊었습니까?”

로웬은 마른침을 삼키며 손을 거뒀다. 확실히 이네스의 말대로였다. 심부름꾼으로서 가장 피해야 할 것은 출처 불명의 서류에 서명하는 일이었다. 잘못 엮였다가는 평생 야시장의 뒷골목에서 서류 정리나 하며 늙어 죽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때, 반품함 안쪽에서 기묘한 공명이 울려 퍼졌다. 피핀이 귀를 막으며 비틀거렸다. 아이의 눈동자가 평소와 다르게 초점이 흐려지더니, 창구 밑바닥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울림에 집중했다.

“……받지 않은 축복은 누구의 죄인가.”

피핀이 몽롱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받아야 할 사람이 거절한 걸까요, 아니면 줄 사람이 줄 수 없게 된 걸까요? 저 안에서 누군가 울고 있어요. 아주 오래된 일이라서, 자기가 왜 여기 있는지도 잊어버린 채로요.”

공명은 점점 거세졌다.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은제 도장이 스스로 떨리기 시작하더니,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튀어 올랐다. 도장은 허공을 가르며 로웬의 이마를 향해 직선으로 날아들었다. 마치 강제로라도 낙인을 찍어 접수 절차를 끝내겠다는 기세였다.

챙!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베라의 검이 도장을 쳐냈다. 도장은 벽에 부딪혀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여전히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며 다시 기어오르려 했다. 베라는 검끝으로 도장을 누르며 로웬을 등지고 섰다.

“심부름꾼, 정신 차려. 이건 제안이 아니라 강요다.”

창구 너머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조금 더 집요하고 기계적이었다.

“사유를 기재하지 않으면 퇴로가 차단됩니다. 반품 절차의 지연은 곧 배달 사고로 간주됩니다. 즉시 사유를 작성하십시오.”

로웬은 굴러다니는 도장과 서류를 번갈아 보았다. 당장이라도 이 지긋지긋한 업무에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문은 닫혔고 창구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로웬은 펜을 드는 대신, 창구 유리창의 좁은 틈새로 손을 밀어 넣었다.

“서류를 작성할 자격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로웬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그가 내뱉는 문장은 철저히 실무적이었다.

“이건 대리 작성 요청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원신청서의 효력이 아직 유지되고 있는지 확인하는 게 순서입니다. 신청자가 누구인지, 그리고 접수자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반품 사유를 쓰는 건 행정 절차상 어불성설입니다.”

창구 안의 공기가 일순간 멈췄다. 목소리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로웬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심부름꾼으로 구르며 익힌 뻔뻔함과 방어적인 태도를 최대한 끌어올렸다.

“원신청서 열람과 최초 접수자 확인을 청구합니다. 그게 확인되지 않는다면 이 사유서는 무효입니다. 저를 강제로 시키려 해도 기록에 남지 않는 업무는 수행할 수 없습니다.”

잠시 정적이 흐른 뒤, 창구 안쪽의 서류 뭉치들이 거칠게 뒤섞였다.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더니 책상 깊숙한 곳에서 누렇게 변색된 종이 한 장이 툭 튀어나왔다. 로웬이 요구한 원신청서였다.

로웬은 조심스럽게 그 종이를 끌어당겼다. 종이는 바스라질 듯 위태로웠지만, 하단의 인장만큼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이네스와 베라가 그 주위로 다가와 시선을 모았다.

신청서의 내용은 대부분 마모되어 읽을 수 없었다. 축복의 종류도, 수취인의 이름도 번진 잉크에 가려져 있었다. 하지만 단 한 곳, 가장 중요한 접수자 칸만큼은 기묘한 힘에 보호받은 듯 뚜렷하게 보였다.

그곳에 적힌 글자를 본 로웬의 눈썹이 꿈틀했다.

[접수자: 잿불 심부름꾼 임시 대리]

글자는 마치 방금 적은 것처럼 검은 잉크가 번져 나가고 있었다. 그것은 누군가의 이름이 아니라, 지금 로웬이 처한 상황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직함이었다. 로웬은 등 뒤로 서늘한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이곳에 올 것을 알고 미리 자리를 비워둔 누군가가, 이 낡은 서류 속에 자신을 가둬두려 했던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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