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7-219화. 북문 빈 성가 연습실 / 대체 지휘봉 보관함 / 음성 확인 생략
217화. 북문 빈 성가 연습실
서늘한 공기가 흐르는 집무실 안, 로웬의 시선은 출입 대장 하단의 여백에 고정되어 있었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아야 할 빈칸 위로, 특수한 약품 처리를 거쳐 서서히 드러난 글자들은 마치 오래된 저주처럼 선명했다.
‘수취 장소: 북문 빈 성가 연습실.’
로웬은 잉크가 번진 자국 하나하나를 뜯어보듯 응시했다. 그저 장소 하나가 밝혀졌을 뿐인데도,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 끼워 맞춰질 때 느껴지는 기묘한 전율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그는 고개를 들어 곁에 선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북문이라…….”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피핀이었다. 그는 강아지처럼 코를 씰룩거리며 로웬이 들고 있는 종이 근처로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일반적인 인간의 후각으로는 감지할 수 없는 미세한 입자들이 피핀의 감각망에 걸려들었다.
“로웬 형, 이 종이에서 냄새가 나요.”
“냄새?”
“네. 아주 오래된 가죽끈 냄새요. 아마 악보를 묶을 때 쓰는 거겠죠. 그리고…… 눅눅한 먼지가 낀 목재 바닥 냄새랑, 불이 꺼진 지 한참 된 식은 촛농 냄새도 섞여 있어요.”
피핀의 눈동자가 확신으로 빛났다. 단순히 글자만 남은 것이 아니었다. 이 대장을 작성하고 보관했던 자의 몸에 밴 공간의 흔적이, 압흔의 틈새마다 미세하게 스며들어 있었던 것이다. 피핀이 묘사한 냄새는 영락없는 성가 연습실의 그것이었다.
그러자 이네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기록지를 훑었다. 그녀는 성내 행정 절차와 구역 관리에 누구보다 밝았다.
“이상하군요. 북문 성가 연습실이라면 축복식 기간 내내 폐쇄 구역으로 지정되었던 곳입니다. 공식적으로는 아무도 출입할 수 없었을 텐데요.”
이네스의 지적에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폐쇄된 구역이 수취 장소로 활용되었다는 것은, 내부의 조력자가 단순히 길을 열어준 수준을 넘어 행정망 자체를 기만했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베라가 탁자 위에 지도를 펼쳤다. 그녀의 손가락이 북문 근처의 복잡한 동선을 짚어 내려갔다.
“이네스의 말이 맞아요. 하지만 전술적인 관점에서 보면 여긴 최적의 장소죠. 보세요. 북문 순찰로와 창고 하역문이 교차하는 지점인데, 경비병들의 교대 시간이 되면 정확히 3분 동안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사각지대가 발생합니다.”
베라의 손가락이 연습실에서 하역문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따라 움직였다.
“연습실을 거점으로 삼았다면, 외부에서 들어온 물자나 인원이 성내 깊숙한 곳까지 눈에 띄지 않고 이동하는 게 가능했을 겁니다. ‘수취 장소’라는 표현이 괜히 쓰인 게 아니에요.”
모르그는 돋보기를 들고 종이의 질감을 세밀하게 분석하고 있었다. 그는 로웬에게 종이를 건네받아 빛에 비춰 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압흔이 남은 종이 섬유의 밀도를 보십시오. 이건 일반적인 출입 대장용지가 아닙니다. 연습실 사용 허가서에 쓰이는 특제 재생지군요. 대장 밑에 허가서를 받쳐놓고 글자를 꾹꾹 눌러 쓴 겁니다. 범인은 이 연습실의 출입 권한을 공식적으로 쥐고 있었거나, 혹은 그 권한을 훔친 자입니다.”
동료들의 분석이 하나로 모이고 있었다. 우연이 아니었다. 누군가 철저히 계산된 동선 위에 성가 연습실이라는 빈 공간을 배치했고, 그곳을 통해 금지된 무언가를 주고받았다.
로웬은 펜을 들어 백지 한 장을 새로 꺼냈다. 그의 손끝은 망설임이 없었다. 예언자의 직관이 아닌, 수사관의 집요함이 담긴 문장들이 종이 위를 채워 나갔다.
“모르그, 지금 즉시 행정국으로 가서 이 문서를 제출하세요.”
“무엇입니까?”
“‘북문 성가 연습실 폐쇄 명령서 및 예외 출입 허가 원본 제출 요구서’입니다. 이네스가 말한 대로 폐쇄 구역이었다면, 반드시 그 폐쇄를 명령한 문서와 예외적으로 드나든 자들의 명단이 남아 있어야 합니다.”
로웬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단호했다.
“우리는 이제 단순히 범인을 쫓는 게 아닙니다. 시스템의 빈틈을 파고든 ‘허가된 침입자’를 찾아내려는 겁니다. 그들이 남긴 공적인 기록이 오히려 그들의 목을 죄는 밧줄이 될 겁니다.”
모르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를 챙겨 신속히 방을 나갔다. 남은 이들은 긴장된 침묵 속에서 다음 단계를 준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르그가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먼지가 뽀얗게 앉은 서류 뭉치가 들려 있었다. 행정국의 서고 깊숙한 곳에서 방치되어 있던, 북문 성가 연습실에 관한 공식 기록이었다.
로웬은 서둘러 서류를 넘겼다. 폐쇄 명령서의 날짜, 담당자의 서명, 그리고 예외 출입자의 명단까지. 모든 것이 형식적으로는 완벽해 보였다. 그러나 로웬이 명령서의 마지막 장을 넘기려던 찰나, 종이 뒷면에 희미하게 그려진 표식이 그의 시선을 붙들었다.
“이건……?”
로웬이 종이를 뒤집어 동료들에게 보였다. 폐쇄 명령서의 뒷면에는 정갈한 글씨로 지도상의 한 지점이 표시되어 있었다. 연습실 내부 구조도 위에 작게 덧칠해진 그 위치에는 짧은 주석이 달려 있었다.
[임시 지휘자 대기석]
성가 연습실에는 본래 지휘자석이 고정되어 있다. 굳이 ‘임시’라는 명칭을 붙여 대기 장소를 따로 지정할 이유는 없었다.
로웬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누군가 이곳에서 누군가를 기다렸고, 지휘봉 대신 다른 것을 휘두르며 이 성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그 ‘임시 지휘자’라는 이름 뒤에 숨은 실체가 이제 막 수면 위로 드러나려 하고 있었다.
218화. 대체 지휘봉 보관함
폐쇄 명령서의 뒷면은 단순한 여백이 아니었다. 로웬은 빛 바랜 종이를 들어 올려 연습실의 정밀 구조도 위에 겹쳐 놓았다. 두 장의 종이가 겹쳐지며 흐릿했던 선들이 하나로 맞물리기 시작했다. 연습실 구석, 기둥 뒤편에 숨겨진 좁은 공간 위로 ‘임시 지휘자 대기석’이라는 글자가 정확히 내려앉았다.
로웬의 손가락이 도면 위의 그 지점을 가볍게 짚었다. 성자식의 예언처럼 번뜩이는 직관이 아니었다. 철저하게 기록과 수치를 대조하여 얻어낸 실무적인 결론이었다.
“구조도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이곳이 가리키는 지점은 연습실 내부에서도 가장 구석진 자리군요.”
로웬의 말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피핀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코를 킁킁거렸다. 수사관으로서의 감각보다도, 본능에 가까운 후각이 먼저 움직였다. 피핀은 빈 공기를 헤집듯 코끝을 실룩거리더니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이상한 냄새가 나요, 로웬 님. 아주 오래된 것 같은데…….”
“뭐가 느껴지느냐, 피핀?”
“낡은 지휘봉에 칠하는 옻칠 냄새예요. 그리고…… 목캔디로 쓰는 말린 허브 향도 섞여 있어요. 그런데 제일 이상한 건 이거예요. 비에 젖은 검은 가죽 장갑 냄새.”
피핀의 묘사는 구체적이었다. 마치 누군가 방금 전까지 그 자리에 앉아 있다가 황급히 자리를 비운 것처럼 생생했다. 눅눅하고 서늘한 기운이 연습실 안을 감돌았다.
옆에 서 있던 이네스가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교단의 의전과 절차에 정통한 인물답게 ‘임시 지휘자’라는 직함이 가진 특수성을 짚어냈다.
“임시 지휘자라……. 통상적인 편제에는 없는 직무입니다. 오직 축복식 리허설 기간에만 한시적으로 허가되는 예외 직무죠. 정식 지휘자가 성가대 전체의 화음을 조율한다면, 임시 지휘자는 그 이면의 동선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그렇다면 성가대원들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모르그의 물음에 답한 것은 베라였다. 그녀는 이미 도면과 실제 연습실의 시야각을 계산하고 있었다. 베라의 눈매가 날카롭게 가늘어졌다.
“아니, 이 위치는 이상해. 대기석이라고는 하지만 성가대석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야. 반대로 북문 하역문 쪽은 아주 잘 보이는 자리지. 이건 지휘를 위한 자리가 아니야. 감시나 물류 확인을 위해 만들어진 자리지.”
베라의 지적은 날카로웠다. 축복식이라는 거창한 명분 뒤에 숨겨진 실무적인 구멍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로웬은 도면을 다시 살피며 표식 아래를 손톱 끝으로 긁어냈다. 잉크가 겹쳐진 부분에 미세하게 눌린 자국이 보였다. 단순한 표식이 아니라, 종이 아래에 적힌 글자가 배어 나온 것이었다.
모르그가 등불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그림자가 일렁이며 숨겨진 글자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대체 지휘봉 보관함.”
모르그가 낮게 읊조렸다. 지휘자가 사용하는 도구치고는 지나치게 엄중한 이름이었다. 로웬은 그 단어를 확인하자마자 망설임 없이 품 안에서 인장을 꺼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든, 그는 행정가로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권한이 없는 자가 정보를 숨기려 했다면, 그는 더 높은 권한의 서류로 응수할 뿐이다. 로웬은 공무용 서신지에 거침없이 글자를 써 내려갔다.
[축복식 임시 지휘자 지정서 및 대체 지휘봉 보관함 열람 기록 제출 요구]
종이 위에 찍힌 붉은 인장이 선명하게 빛났다. 예언자의 계시보다도 확실한, 행정적 강제력이 담긴 인장이었다. 로웬은 완성된 서류를 들어 올리며 팀원들을 바라보았다.
“기록이 생략된 부분이 있다면 반드시 흔적이 남기 마련입니다. 예외적인 직무라면 더더욱 그렇겠죠.”
로웬은 보관함으로 추정되는 벽면의 이음새를 손가락으로 덧그렸다. 보관함의 입구는 정교하게 숨겨져 있었지만, 이미 위치를 파악한 이상 그것을 찾아내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때, 피핀이 보관함 근처에서 작은 명패 하나를 발견했다. 반쯤 떨어져 나간 명패에는 누군가의 서명이 적혀 있어야 할 자리가 비어 있었다. 대신 그 자리에는 기계적인 로그 기록만이 짤막하게 남겨져 있었다.
로웬의 시선이 그 기록의 마지막 줄에 닿았다. 그것은 일반적인 보관함 운영 원칙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내용이었다.
[반납자 음성 확인 생략]
219화. 음성 확인 생략
침묵은 때로 잉크보다 선명한 흔적을 남긴다. 로웬의 시선이 대체 지휘봉 보관함 열람 기록지의 가장 하단, 유독 여백이 도드라진 문구에 머물렀다.
[반납자 음성 확인 생략]
그것은 단순한 메모가 아니었다. 성가대와 지휘봉을 관리하는 교단의 철저한 보안 규정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의도적인 구멍이었다. 로웬은 손가락 끝으로 그 글자를 천천히 훑었다. 종이의 질감 너머로 이 기록을 남긴 자의 교묘한 오만함이 느껴지는 듯했다.
“음성 확인 생략이라니.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이네스가 차가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녀의 미간이 깊게 패였다. 교회의 성인(聖人)들을 기리는 성가대에서 목소리는 곧 신분증이자 영혼의 지문이나 다름없었다. 대리 출석이나 신분 위조를 막기 위해, 지휘봉 같은 성물을 반납할 때는 반드시 관리자 앞에서 정해진 성구를 낭독해 음성을 대조해야 했다. 그것이 이 거대한 대성당을 지탱하는 수만 가지 실무 절차 중 하나였다.
로웬이 기록지를 가까이 가져가려 할 때, 옆에서 코를 킁킁거리던 피핀이 갑자기 상체를 쑥 내밀었다. 소년의 예민한 후각이 종이 위에 남은 미세한 정보들을 낚아채고 있었다.
“……로웬 님, 여기서 이상한 냄새가 나요.”
피핀이 기록지의 특정 지점을 가리키며 눈을 가늘게 떴다. 로웬은 방해하지 않고 소년의 분석을 기다렸다.
“아주 써요. 목약(沒藥) 냄새예요. 상처를 소독할 때 쓰는 그 약초요. 그리고…… 아주 아주 미세하게 날카로운 냄새도 섞여 있어요. 대장간에서 날 법한 금속 분진 냄새 같은 거요.”
소년의 손가락이 종이의 귀퉁이를 따라 움직였다.
“결정적인 건 이거예요. 검은 장갑 안감에서나 날 법한 젖은 양털 냄새. 비에 젖은 게 아니라, 땀이나 습기에 오랫동안 절어 있다가 가죽 냄새랑 섞인 그런 냄새요. 반납자가 이 기록지에 손을 올리고 글을 썼거나, 기록을 확인했다는 증거예요.”
피핀의 말에 베라가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북문 방향, 거대한 종루가 보이는 곳이었다.
“축복식 날이었죠. 북문의 종소리는 유독 크고 길게 울립니다. 게다가 그때는 성가대의 연습 소음이 복도 전체를 뒤덮고 있었을 시간이에요. 누군가 음성 확인 절차를 생략하자고 속삭였거나, 혹은 아예 목소리를 내지 않았더라도 주변 소음에 묻혀버리기 딱 좋은 환경이었단 뜻이죠.”
베라의 분석은 타당했다. 환경적 요인이 범행의 허점을 가려주고 있었다. 하지만 물리적인 흔적까지 지울 수는 없었다. 이번엔 모르그가 돋보기를 꺼내 들고 기록지의 필적을 살폈다.
“필압(筆壓)을 보십시오, 로웬 님.”
모르그가 가리킨 곳은 ‘생략 승인’ 란이었다.
“앞서 지휘봉을 보관하고 관리해야 했던 임시 보관인의 서명란은 비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음성 확인 생략’이라는 문구를 적은 펜촉의 깊이와 종이가 눌린 정도를 보시지요. 서명란을 비워둔 채 넘어갔던 그 필적의 결세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즉, 관리자 자신이 스스로 규칙을 어기기로 승인했다는 소리입니다.”
로웬의 눈이 가늘어졌다. 누군가 외부에서 침입해 기록을 조작한 것이 아니다. 내부의 관리자가, 혹은 관리자의 권한을 대행하는 자가 직접 문을 열어준 셈이었다.
성물 관리실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기록지 한 장에 담긴 모순들이 하나둘씩 맞춰지며 거대한 부정의 형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로웬은 허리춤에 손을 올린 채, 책상 위에 놓인 기록지를 서늘하게 내려다보았다.
“음성 확인을 생략할 수 있는 권한은 청지기 본인, 혹은 그에 준하는 전권을 위임받은 대행자뿐이다.”
로웬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그는 더 이상 추측에 머물지 않았다. 실무자로서 그가 취해야 할 다음 단계는 명확했다.
“이네스, 지금 즉시 행정실로 가서 ‘음성 확인 생략 승인 원본’을 찾아오세요. 문서 번호가 부여되지 않았더라도 관리대장에는 반드시 비고 사유가 남아야 합니다. 그리고 베라, 북문 종지기에게 가서 축복식 당일의 ‘종소리 운용표’를 받아오십시오. 정확히 몇 시 몇 분에 종이 울렸고, 누가 종루를 지켰는지 확인해야겠습니다.”
로웬은 잉크가 채 마르지 않은 것처럼 선명한 기록지의 비망록 위로 인장을 찍듯 단어를 뱉었다.
“절차를 무시한 자는 절차에 의해 증명될 겁니다.”
로웬의 요구는 단순한 서류 제출 압박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록 뒤에 숨어 목소리를 지운 범인을 향한 선전포고였다. 기록지는 범인이 남긴 완벽한 알리바이라 생각했겠지만, 로웬에게 그것은 오히려 범인의 목을 죄는 올가미가 되어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로웬 님.”
준비를 서두르던 이네스가 문득 멈춰 서서 물었다.
“음성 확인을 생략했다는 건, 단순히 귀찮아서가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요? 만약 그 반납자가…… 도저히 목소리를 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면요?”
로웬은 대답 대신 보관함의 빈 공간을 응시했다. 피핀이 말했던 젖은 양털 냄새와 금속 분진, 그리고 목약의 쓴 향기. 그것들을 종합하면 하나의 기괴한 초상화가 그려진다.
소리를 들을 수 있어도 소리를 내지 못하는 자. 혹은 타인의 목소리를 들을 필요조차 없는 자.
“관리자가 그를 보고도 통과시켜 줬다면, 이유는 하나뿐이겠지.”
로웬의 눈동자에 서늘한 확신이 어렸다.
“그 관리자 역시, 자신의 귀를 닫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일 겁니다.”
철저한 침묵 속에서 이루어진 반납. 목소리가 사라진 기록지 위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대리인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성가대의 찬양 소리가 울려 퍼져야 할 신성한 복도 끝에서, 로웬은 보이지 않는 실체를 향해 한 걸음을 내디뎠다.
기록지에 적히지 않은 이름. 소리 없이 지휘봉을 건네받고 사라진 유령 같은 존재. 사람들은 그를 행정적인 수식어로 부르겠지만, 이 사건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로웬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명칭만이 맴돌았다.
규정의 사각지대에서 태어난, 귀 없는 청지기 대행.
이제 그 침묵의 대가를 치르게 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