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4-216화. 사망 처리된 반납자 / 임시 보관인의 빈 서명 / 운반 대기의 압흔
214화. 사망 처리된 반납자
침묵은 비명보다 날카롭게 실내를 갈랐다. 촛불이 일렁이며 벽면에 길게 드리운 그림자들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망령처럼 보였다. 탁자 위에 펼쳐진 기록부, 그 누렇게 바랜 종이 위에는 도저히 믿기 힘든 문장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악보 반납자: 축복식 종료 전 사망 처리]
그 짧은 문구가 가진 무게에 모두가 숨을 멈췄다. 죽은 자가 돌아와 물건을 반납했다는 기담 같은 이야기가 성스러운 기록물에 버젓이 적혀 있었다. 그것도 성국의 가장 은밀하고 엄격한 관리가 필요한 제3성부의 공란 끝에서 발견된 것이다.
가장 먼저 침묵을 깨뜨린 것은 피핀이었다. 그녀는 평소의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운 채, 미간을 좁히며 기록부에 코를 가져다 댔다. 영민한 감각이 종이 결 사이사이에 스며든 아주 미세한 정보들을 읽어내기 시작했다.
“냄새가 나요. 아주 불쾌하고 눅눅한 냄새가.”
피핀의 중얼거림에 로웬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무슨 냄새지? 단순히 종이가 오래된 냄새는 아닐 텐데.”
“방부 향이에요. 시신을 보존할 때 쓰는 강한 향료요. 그리고... 비에 젖은 채로 방치된 리본 냄새도 섞여 있어요. 하지만 가장 이상한 건 이 냄새예요.”
피핀이 손가락으로 사망 처리 인장이 찍힌 부분을 가리켰다.
“쇳가루 냄새가 나요. 그것도 방금 갈아낸 것처럼 아주 날카로운 금속의 냄새요.”
방부 향과 젖은 리본, 그리고 쇳가루. 도저히 하나로 묶일 수 없는 조합이었다. 이네스는 피핀의 말을 듣자마자 서늘한 목소리로 지적을 덧붙였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성가대 운영 실무를 담당하며 쌓아온 원칙주의자의 서슬 퍼런 분노가 담겨 있었다.
“행정적으로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성가대원이 축복식 종료 전에 사망했다면, 그 즉시 제명 처리되고 모든 권한이 회수되어야 합니다. 장부상에 ‘반납자’로 이름을 올리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직접 악보를 들고 와서 반납 도장을 찍는단 말입니까? 이건 명백한 기록 조작입니다.”
이네스의 지적은 날카로웠다. 성국의 행정 시스템은 이토록 허술하지 않았다. 사망자가 발생하면 그가 가진 모든 직무는 즉시 정지되며, 소유하고 있던 성물과 악보 역시 사후 수거 절차를 밟아야 한다. 하지만 기록부에는 마치 그가 살아있는 상태에서 제 발로 걸어와 임무를 완수한 것처럼 적혀 있었다.
베라가 주먹을 꽉 쥐었다. 기사로서, 그리고 신앙인으로서 그녀에게 이 상황은 단순한 행정 오류를 넘어선 모독이었다.
“죽은 자의 이름을 방패로 쓴 것이로군. 이미 입을 열 수 없는 자의 명의를 빌려, 누군가 제3성부의 악보를 빼돌리거나 부정하게 처리했다는 뜻이다. 고인의 명예를 이런 식으로 이용하다니...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짓이다.”
베라의 눈동자에 서늘한 살기가 감돌았다. 그녀에게 죽음이란 숭고한 마무리어야 했으나, 누군가는 그것을 범죄를 은닉하기 위한 편리한 도구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때, 조용히 돋보기를 들고 인장을 살피던 모르그가 입을 열었다. 연금술사 특유의 무미건조하면서도 정확한 분석이었다.
“피핀이 맡은 쇳가루 냄새의 정체를 알 것 같습니다. 이 사망 처리 인장과, 저쪽 열쇠 반납 기록에 찍힌 인장을 보십시오. 육안으로는 같아 보이지만, 도장에 섞인 금속 가루의 성분이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모르그가 가리킨 곳에는 미세하게 반짝이는 입자들이 남아 있었다.
“인장을 위조하거나 급하게 수정한 흔적입니다. 원래 찍혀야 할 도장이 아니라, 특수한 금속 배합으로 만든 가짜 도장을 사용했어요. 사망 처리 인장과 열쇠 반납 인장에 동일한 금속 성분이 검출되었다는 건, 이 두 사건이 동일 인물에 의해 같은 장소에서 조작되었다는 확실한 물증입니다.”
조각들이 하나둘 맞춰지기 시작했다. 누군가 성가대원의 죽음을 이용해 열쇠를 가로챘고, 그 흔적을 지우기 위해 장부의 마지막 페이지를 가짜 인장으로 덮어씌운 것이다.
로웬은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기록부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성자라는 직위가 주는 신비로운 예언에 기대지 않았다. 대신 그가 선택한 것은 철저하게 실무적인 압박이었다. 상대가 성국의 법과 규칙을 이용해 숨었다면, 자신은 그 규칙을 더 정교하게 들이밀어 그들을 끌어낼 생각이었다.
“사망 처리된 성가대원의 이름은 아직 공란과 연결되어 있군. 그렇다면 절차대로 진행하겠다.”
로웬이 서늘한 명령을 내렸다.
“해당 인원에 대한 ‘사망진단 원본’ 및 ‘장례 접수 대장’의 제출을 정식으로 요구한다. 성국의 보건 규정상, 축복식 기간 내 발생한 모든 사망 사고는 대리인이 아닌 당직 사제가 직접 원본을 관리하게 되어 있다. 복사본이나 구두 보고는 인정하지 않겠다.”
로웬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장내를 장악하는 힘이 있었다. 기적을 행하는 성자가 아니라, 법령의 맹점을 찌르는 노련한 행정가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죽음을 조작한 자들이 가장 두려워할 것은, 자신들이 만든 거짓 서류가 진짜 서류와 대조되는 순간이었다.
“만약 원본이 없거나 기록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이 시간부로 이 장부에 접근했던 모든 인원을 성국 모독죄로 구금하겠다. 예외는 없다.”
로웬의 강경한 태도에 주변에 있던 하급 관리들이 사색이 되어 흩어졌다. 상부의 지시라는 핑계로 몸을 사리던 그들도, 로웬이 들이민 ‘절차적 정당성’ 앞에서는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먼지가 켜켜이 쌓인 장례 접수 대장의 별책이 로웬의 앞으로 도착했다. 조작된 기록부와는 달리, 실제 장례 절차를 기록하는 이 장부는 수정하기가 까다로운 이중 잠금 보관소에 들어있던 것이었다.
로웬은 천천히 장례 접수 대장의 마지막 장을 넘겼다. 조작된 사망 기록의 주인공, 그 시신이 마지막으로 어디로 향했는지, 그리고 누가 그 사후 처리를 담당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종이를 넘기던 로웬의 손가락이 어느 한 지점에서 멈췄다. 그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예상했던 고위 사제의 직인이 아니었다. 그곳에는 사망자의 신원을 보증하고 시신을 인계받은 인물의 직책이 기괴할 정도로 이질적인 단어로 적혀 있었다.
[장례 접수자: 예물 창고 임시 보관인]
성가대원의 시신을 수습한 자가 하필이면 예물 창고의 관리자라는 사실. 그것은 이 거대한 음모의 끝이 단순히 악보 한 장에 머물러 있지 않음을 시사하고 있었다. 로웬은 굳게 닫힌 예물 창고의 방향으로 시선을 던졌다. 진실은 이제 그 어두운 창고 깊숙한 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215화. 임시 보관인의 빈 서명
장례 접수 서류의 하단, 기입된 신청자의 직책을 확인한 로웬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아졌다. 종이 위에 선명하게 찍힌 관인 옆에는 ‘예물 창고 임시 보관인’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교단의 행정 체계 내에서 결코 양립할 수 없는 두 단어의 조합이었다.
“이상하군.”
로웬이 낮게 읊조리며 서류를 테이블 중앙에 내려놓았다.
“악보 반납자의 신변을 정리하고 장례를 접수하는 것은 통상적으로 구호국이나 호스피스 사제들의 소관입니다. 그런데 왜 창고의 물품을 관리하는 임시 보관인이 죽은 자의 마지막을 챙기겠다고 나선 거지?”
장례는 사람의 일이고, 예물 창고는 물건의 일이다. 이 명백한 직권 남용, 혹은 월권행위는 관료주의가 뿌리 깊은 교단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그때, 로웬의 옆에서 서류를 빤히 들여다보던 피핀이 코를 킁킁거렸다. 소년의 예민한 후각이 종이의 가장자리에서부터 시작해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미세한 입자들을 쫓았다.
“……로웬 형, 이거 냄새가 이상해.”
피핀이 얼굴을 찌푸리며 서류 모서리에 코를 바짝 들이댔다.
“장례식장에서 나는 향 냄새가 아니야. 이건 훨씬 더 눅눅하고…… 딱딱한 냄새야. 양초를 녹인 밀랍이랑, 시신이 썩지 않게 바르는 독한 방부 향 냄새. 그리고 아주 오래된 자루 천에서나 날 법한 먼지 냄새가 섞여 있어.”
피핀의 말에 이네스가 즉각 반응했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차가운 시선으로 서류를 훑었다.
“임시 보관인의 권한은 철저히 ‘예물 목록’에 기재된 물품에 한정됩니다. 보관인이 장례 서류에 손을 댔다는 건, 사망한 반납자를 인간이 아니라 창고에 보관해야 할 ‘물건’으로 취급했다는 증거겠군요.”
이네스의 목소리는 서늘했다. 그녀는 교단의 법규집을 통째로 외우고 있는 사람처럼 막힘없이 말을 이었다.
“규정상 보관인은 창고에 입고된 물품의 상태가 변질되었을 때만 처리 보고서를 작성할 수 있습니다. 사망 처리 인장 위에 보관인의 직인이 찍혔다는 건, 이 장례 자체가 일종의 ‘재고 폐기 절차’로 위장되었다는 뜻입니다.”
상황은 점점 단순한 행정 착오를 넘어 조직적인 은폐의 징후를 띠기 시작했다. 베라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덧붙였다. 그녀는 이미 성소 외부에서 입수한 당직 기록 사본을 펼쳐 보이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예물 창고 문 앞의 경비 배치표를 확인해 봤는데, 축복식이 진행되던 바로 그 시간에 대원들이 교체됐더군요. 평소보다 두 배나 많은 인원이 배치됐고, 그마저도 정식 명령 계통이 아니라 ‘임시 보관인’의 긴급 요청에 의해 움직였습니다.”
“축복식의 혼란을 틈타 창고 주변의 눈을 돌렸다는 건가.”
로웬의 질문에 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록상으로는 창고 보안 강화라고 되어 있지만, 실상은 그 안에서 뭔가를 밖으로 빼내거나, 혹은 안으로 들여보내기 위한 사전 작업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모르그가 조용히 다가와 서류 위에 마력을 띤 돋보기를 들이댔다. 연금술사 특유의 집요한 관찰력이 종이 위의 잉크 층을 분리해 내기 시작했다.
“로웬 님, 이것 좀 보십시오. 여기 서명란의 잉크 말입니다.”
모르그의 손가락이 지시한 곳은 임시 보관인의 이름이 적힌 자리였다.
“사망 처리를 알리는 붉은 인장이 먼저 찍혔고, 그 위에 보관인의 서명이 덧입혀졌습니다. 보통은 신청인이 서명을 하고 나서 승인 인장이 찍히는 게 순서죠. 하지만 이건 반대입니다. 이미 ‘사망’이라는 결과가 확정된 종이 위에, 나중에 누군가가 보관인의 직함을 빌려 이름을 써넣었다는 소리입니다.”
“선결재 후기입이라니. 아주 대담한 조작이군.”
로웬은 헛웃음을 삼켰다. 예언자로서의 직관이 아니라, 수년간 행정 업무를 처리하며 쌓인 실무자의 감이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누군가 급하게 서류를 만들어 사후 처리를 정당화하려 한 흔적이 역력했다.
로웬은 깃펜을 들어 결재판 옆의 공문 양식에 거칠게 휘갈겨 썼다.
“더 지체할 것 없다. 절차대로 밀어붙이지.”
그는 문서 하단에 자신의 인장을 강하게 찍었다. 평소보다 깊게 파인 인장의 자국이 단호한 결의를 보여주었다.
“구호국 대기실에 통보해라. ‘예물 창고 임시 보관 명령서 원본’과 ‘사건 당일 당직 경비 배치표 전체 내역’을 지금 즉시 집무실로 제출하라고. 직인이 찍힌 정식 요구다. 거부할 시에는 성소 보안 규정 위반으로 간주하겠다고 전해.”
로웬의 명령에 베라가 짧게 답하며 어둠 속으로 몸을 날렸다. 이제 공은 저들에게 넘어갔다. 서류를 조작한 자들은 자신들이 남긴 빈틈을 메우기 위해 더 큰 무리수를 던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동료들이 각자의 위치로 흩어지고 난 뒤, 로웬은 다시 한번 장례 접수 서류를 들어 불빛에 비추어 보았다. 모르그가 지적한 잉크의 층위 너머, 종이의 뒷면에서 묘한 질감이 느껴졌다.
그는 조심스럽게 서류를 뒤집어 비스듬한 각도로 조명을 비췄다.
단순히 잉크가 번진 자국이 아니었다. 글씨를 쓴 사람이 펜촉에 너무 강한 힘을 준 탓에, 아래에 깔려 있던 다른 종이에까지 새겨졌을 ‘압흔(壓痕)’이었다. 누군가 이 서류를 작성하기 전, 겹쳐 놓은 다른 종이 위에 적었던 문구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로웬의 눈이 가늘어졌다. 지워진 압흔이 빛의 각도에 따라 서서히 형태를 드러냈다.
[ 제3성부 악보 운반 대기 ]
로웬의 손끝이 싸늘하게 식었다. 죽은 자의 이름을 적어야 할 종이 밑바닥에, 사라진 성물의 행방이 낙인처럼 찍혀 있었다.
216화. 운반 대기의 압흔
종이 위에 남은 흔적은 소리 없는 고함과 같았다. 로웬은 책상 위에 비스듬히 빛을 비추며, 서류 더미 가장 아래쪽에서 발견된 압흔을 손가락 끝으로 조심스럽게 쓸었다. 꾹 눌러 적었다가 지워진 문장. 하지만 펜촉이 남긴 깊은 골까지는 지우지 못한 그 흔적이 로웬의 눈에 선명하게 박혔다.
‘제3성부 악보 운반 대기.’
로웬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단순히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가 도난당한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누군가의 지시 하에, 아주 조직적인 절차를 밟아 ‘반출’될 준비를 마쳤었다는 증거였다.
“단순한 실수가 아니었군요. 보관이 아니라, 이미 운반 단계였습니다.”
로웬의 낮은 목소리에 뒤를 지키던 일행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피핀이었다. 그녀는 고양이가 냄새를 맡듯 코를 킁킁거리며 로웬이 짚은 종이 근처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로웬 님, 여기서 이상한 냄새가 나요.”
“냄새라고?”
“응. 아주 미세하지만…… 뻑뻑한 수레바퀴 기름 냄새가 섞여 있어요. 그리고 젖은 삼베 특유의 퀘퀘한 냄새랑, 음…… 아주 묽은 소금물 냄새도요.”
피핀의 말에 로웬의 사고가 빠르게 회전했다. 수레 기름은 운반 도구를 의미하고, 젖은 삼베는 내용물을 외부 충격이나 습기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덮는 덮개일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소금물은 의외였다. 부패를 방지하기 위한 용도인가, 아니면 어떤 의식적인 절차의 흔적인가.
이네스가 곁으로 다가오며 차가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제3성부 악보는 성당의 핵심 자산입니다. 설령 임시 보관 중이었다 하더라도, 이것을 외부로 반출하거나 위치를 옮기려면 반드시 성가대장의 직인과 승인이 필요해요. 그 절차 없이 ‘운반 대기’ 상태로 두었다는 건, 내부 조력자가 관리 체계 자체를 기만했다는 뜻입니다.”
이네스의 지적은 타당했다. 성가대장인 안셀름의 승인 없이 악보가 움직였다면, 그것은 명백한 하극상이자 탈취였다. 하지만 서류상으로는 아무런 기록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직 이 눌러쓴 압흔만이 진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베라, 경비 기록과 대조해 봐. 하역문 쪽이다.”
로웬의 지시에 베라가 품 안에서 미리 확보해둔 성당 내부 경비 일지를 펼쳤다. 그녀의 손가락이 특정 시간대를 빠르게 훑어 내려갔다.
“찾았습니다. 축복식 당일, 오후 2시부터 3시 사이입니다. 이때가 성당 외곽 경비대의 교대 시간인데, 평소보다 교대 시간이 5분 정도 길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틈을 타서 창고 뒤편 하역문이 개방되었다는 기록이 있어요. ‘청소 및 폐기물 반출’이라는 명목입니다.”
“폐기물 반출이라. 그럴듯한 핑계군.”
로웬의 시선이 하역문 쪽으로 향했다. 일행은 곧장 창고 깊숙한 곳, 평소에는 굳게 닫혀 있는 육중한 철제 하역문으로 이동했다. 문 주변은 깨끗하게 청소된 듯 보였지만, 모르그의 눈은 피할 수 없었다.
모르그는 바닥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하역문 문턱에 남은 희미한 궤적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바퀴 자국이 있습니다. 일반적인 짐수레보다는 폭이 좁고 길군요.”
“어떤 수레인지 짐작이 가나?”
“표면에 남은 잔여물을 보십시오. 이 반질거리는 광택은 밀랍 코팅입니다. 성당에서 밀랍으로 바퀴를 코팅하는 수레는 단 하나뿐입니다. 시신을 운구할 때 소음을 줄이기 위해 사용하는 장례 운반 수레입니다.”
장례 운반 수레. 피핀이 맡았던 젖은 삼베와 소금물 냄새의 정체가 비로소 맞춰졌다. 죽은 자를 예우하기 위해 사용하는 물품들이 악보를 감추는 위장막으로 사용된 것이다. 성스러운 축복식 당일, 장례 수레가 움직인다는 것은 누구도 쉽게 의심하기 힘든 일이었다.
로웬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예언자의 직관이 아니더라도, 행정적인 구멍들이 하나의 거대한 음모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품에서 펜을 꺼내 메모지에 갈겨썼다. 그것은 요청서이자 압박이었다.
“베라, 지금 당장 행정동으로 가서 이 서류를 제출해. ‘축복식 당일 장례 운반 수레 출입 대장’과 ‘하역문 봉인 기록’ 전부를 즉시 제출하라고 해라. 거부한다면 성자 대행의 직권으로 창고 전체를 봉쇄하겠다고 전하고.”
로웬의 목소리에는 단호한 권위가 실려 있었다. 그는 기적을 부리는 성자가 아니라, 법과 절차를 무기로 적의 숨통을 조이는 실무자였다.
잠시 후, 베라가 숨을 헐떡이며 서류 뭉치를 들고 돌아왔다. 성당 측에서도 로웬의 서슬 퍼런 기세에 눌려 서둘러 내준 모양이었다. 로웬은 건네받은 출입 대장을 넘겼다. 장례 수레의 이동 경로는 치밀하게 조작되어 있었으나, 너무나 완벽하게 꾸며낸 탓에 오히려 위화감이 느껴졌다.
로웬의 시선이 대장의 마지막 줄, 수취인 확인란에서 멈췄다.
“여긴가.”
그의 손가락이 머문 곳은 다른 칸들과 달리 잉크가 미묘하게 번져 있었다. 급하게 적어 넣은 듯한 글씨, 혹은 누군가 확인을 마친 뒤 다시 빈칸으로 두려 했던 흔적. 하지만 날카로운 로웬의 눈은 그 빈칸 사이에 숨겨진 마지막 목적지를 기어이 찾아내고야 말았다.
출입 대장 하단, 수취 장소라고 적힌 빈칸에는 아주 흐릿한 필체로 이렇게 남겨져 있었다.
[수취 장소: 북문 빈 성가 연습실]
그곳은 현재 사용되지 않아 폐쇄된 구역이었다. 성당의 가장 북쪽,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는 그곳에 사라진 제3성부의 악보가 기다리고 있었다. 로웬은 대장을 덮으며 고개를 들어 북쪽 어둠을 응시했다. 이제 추적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