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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39화 합본. 백금 세례장에서 금박 순례권 위조 사건까지 일러스트

36-39화 합본. 백금 세례장에서 금박 순례권 위조 사건까지

36화. 백금 세례장의 값싼 기적

로웬의 시선에 포착된 백금 세례장은 신성한 기적의 산실이라기보다, 가동률이 형편없는 액체 화물 터미널에 가까웠다. 잿가루가 섞인 습한 공기 속에서도 유독 번들거리는 백금의 광택은 관리 상태의 우수함을 증명하기보다, 주기적으로 닦아내지 않으면 금세 드러날 오염을 필사적으로 덮으려는 기만처럼 보였다. 순례자들은 그 매끄러운 금속 제단 앞에 무릎을 꿇은 채, 배송 사고나 다름없는 기적의 찌꺼기를 한 방울이라도 더 받으려 손을 모으고 있었다.

“규정 제14조, 파손된 인장은 수취 거부 및 반송의 근거가 된다.”

로웬이 나지막이 읊조리며 군중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그 중심에는 세례장의 관리인과 대치 중인 한 여인이 서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성수가 담겼어야 할 은제 병이 들려 있었는데, 병목을 감싼 밀랍 인장은 조잡하게 뭉개져 제 기능을 상실한 상태였다.

“이건 명백한 계약 위반입니다. 세례장의 축복이 닿기도 전에 보증 문구가 변조되었군요. 여기 적힌 ‘로웬 보증’이라는 문구, 당신들이 임의로 새겨 넣은 것 아닙니까?”

그녀의 목소리는 차가운 금속이 매끄러운 대리석 바닥에 떨어질 때 발생하는 날카로운 파찰음을 닮아 있었다. 로웬은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의 이름이 도용된 사실보다, 누군가 배송 시스템의 신뢰를 상징하는 보증 문구를 ‘변조’하여 유통했다는 사실이 물류 규정상 심각한 결함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여인이 관리인에게 들이민 서류에는 로웬의 서명을 어설프게 흉내 낸 필체가 적혀 있었고, 마땅히 찍혀 있어야 할 ‘반송 불가’ 도장 대신 ‘성자의 가호에 따른 무한 보증’이라는, 물류업계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비과학적인 문구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제야 로웬은 목소리의 주인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아델린 드 벨루아.

그녀의 손을 감싼 백금빛 장갑은 둔탁한 세례장의 조명을 반사하며 서늘한 빛을 내뿜었고, 귓가에서 흔들리는 물방울 모양의 귀걸이는 마치 누군가의 정제된 슬픔을 박제해 놓은 듯 기묘한 무게감을 유지하며 그녀의 고고한 턱선을 강조했다. 하얀 망토가 움직일 때마다 살짝 드러나는 안감은 젖은 공기조차 스며들지 못할 만큼 매끄러운 고가의 방수 비단으로 짜여 있었는데, 이는 그녀가 딛고 선 이 축축하고 불결한 장소와는 결코 섞일 수 없는 계급적 간극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지표였다. 습기로 가득해 발을 헛디디기 쉬운 대리석 위를 걷는 그녀의 걸음걸이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느릿하고 견고하여 대지의 인력조차 그녀의 의지 아래 통제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낮게 깔리는 그녀의 목소리는 주변의 소음을 단숨에 얼어붙게 만드는 냉기를 머금고 있었으나, 그 끝에 매달린 희미한 웃음의 온도는 타인의 고통을 관조하는 자 특유의 여유로운 잔인함마저 품고 있었다.

“그 보증, 제가 작성한 것이 아닙니다.”

로웬이 끼어들자 아델린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그녀의 시선이 로웬의 낡은 심부름꾼 외투와 가슴팍에서 미세하게 떨리는 계량기를 훑었다.

“수취인께서 들고 계신 물품은 배송 전 단계에서 이미 오염되었습니다. 인장의 밀랍 농도가 규격 미달인 데다, 결정적으로 이 문구에는 심부름꾼의 식별 번호가 누락되어 있군요. 한마디로, 가짜 기적에 속으신 겁니다.”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피핀이 낄낄거리며 끼어들었다.

“와, 이거 대박이네. 완전 약관 제8조 ‘무지한 고객의 과실은 공급자의 이득으로 귀환한다’는 독소 조항의 표본이잖아? 아가씨, 여기 성수라는 거 사실 그냥 여과된 빗물이야. 저기 봉인 장치 보여? 저거 사실 식초 같은 산성 액체에 훨씬 민감하게 반응해서 녹아내리는 저가형 합금이거든. 사제들이 기도하는 척하면서 술 마시다 남은 식초 좀 뿌려주면 ‘짠!’ 하고 열리는 걸 순례자들은 기적이라고 믿는 거지.”

피핀의 조롱은 신랄했지만, 그 화살은 속아 넘어간 순례자가 아니라 기만적인 약관을 설계한 사제들을 향해 있었다. 로웬은 세례장 입구의 구리 배관을 유심히 살폈다. 이음새마다 묻어 있는 시큼한 잔해들. 기적의 향기라고 칭송받던 그 냄새는 발효된 식초가 금속을 부식시키며 내는 비릿한 악취에 불과했다.

아델린은 피핀의 폭로에도 흔들림이 없었다. 다만 그녀의 시선이 로웬에게 깊게 머물렀다.

“가짜라……. 그렇다면 진짜를 배송하는 법도 알고 있겠군요, 심부름꾼.”

“제 업무는 확정된 물품의 전달이지, 실존하지 않는 기적을 창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로웬은 단호하게 영수증을 갈무리했다. 그러나 아델린이 은제 병을 내려놓으며 한 걸음 다가왔을 때, 로웬의 코끝을 스치는 기묘한 향기가 있었다.

세례장의 식초 냄새도, 그녀의 화려한 옷에서 풍기는 비싼 향료 냄새도 아니었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 누군가 일부러 썩혀서 문드러뜨린 것 같은, 그러나 지독하게 달콤하여 뇌를 마비시키는 ‘검은 사과’의 향이었다.

로웬의 계량기 바늘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배송 리스트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분명히 반납되어야만 할 불길한 화물의 냄새가 그녀의 그림자 끝에 걸려 있었다.

37화. 흉터 탁본 경매장

탁본(拓本)이라 불리는 종이 뭉치들이 유리 진열함 안에서 기괴한 조명에 몸을 비틀고 있었다. 로웬의 눈에 그것은 성스러운 문양이나 고통의 흔적이 아니었다. 배송 중 찢기고 짓눌린 박스 표면, 혹은 수취인의 서명이 번져 알아볼 수 없게 된 연체 송장 번호들의 집합체였다.

주문서 번호는 누락되었고, 반품 주소는 불분명했다. 로웬은 무대 위로 올라오는 종이 조각들을 보며 자신의 몸뚱이가 받았던 취급을 떠올렸다. 진열함 하단에 붙은 라벨의 도장 번짐이 심했다. 규격 외 품목이다.

“다음 경매품은 세간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성자의 고난’ 연작입니다.”

경매사가 장갑 낀 손으로 탁본을 들어 올렸다. 그것은 로웬의 왼쪽 어깨부터 쇄골까지 이어지는, 예리한 칼날에 베여 짓물렀던 흉터의 복사본이었다.

“성자 본인은 자신의 신성함을 부정하고 있으나, 그 부정이야말로 이 흉터의 가치를 증명하는 완벽한 인장이지요. 본인 부정 및 비협조 사실이 포함된 ‘고가 인증 세트’입니다. 시작가는 금화 오백 닢부터입니다.”

사람들의 눈이 탐욕으로 번뜩였다. 로웬은 그 광경을 보며 무덤덤하게 생각했다. 저건 오배송된 물건이다. 받는 사람도, 보낸 사람도 존재하지 말아야 할 흉측한 반송물이다. 그런데 이곳의 인간들은 그 불량한 포장지를 서로 가지지 못해 안달이 나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군. 저건 유물이 아니라 폭행의 증거물이야. 기사단의 압수 품목에 들어가야 할 물건이지, 저급한 수집가들의 장식장에 들어갈 게 아니라고.”

이네스가 이를 갈며 속삭였다. 그녀의 손이 방패 손잡이를 으스러뜨릴 듯 쥐었다. 분노가 실린 신성력이 미세하게 진동하며 공기를 울렸다. 하지만 그녀는 무작정 단상 위로 난입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성교회의 기사로서 이 모욕적인 연극을 끝낼 가장 효율적인 절차를 택했다.

“로웬, 저 탁본들이 가짜라는 걸 증명해. 저건 네 몸에 새겨진 그늘을 흉내 낸 조잡한 모조품일 뿐이야.”

그녀가 방패를 비스듬히 들어 올렸다. 방패의 매끄러운 표면이 경매장의 인공 조명을 굴절시키며 단상 위를 비추었다. ‘거울의 성벽’이라 불리는 기사단의 비기였다. 그 빛이 탁본에 닿자, 정교하게 그려진 흉터의 선들이 기괴하게 일그러지며 검은 잉크의 악취를 풍겼다.

“가짜라고? 이건 성자의 몸에서 직접 뜬 것인데!”

경매사가 당황하며 소리쳤으나, 이미 관중석의 술렁임은 걷잡을 수 없었다. 그때, 무대 뒤편 어둠 속에서 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는 경매장의 지배자이자 이 모든 판을 짠 설계자였다. 세드릭 발랑. 그의 이름이 사회자의 입에서 나오기도 전에, 로웬은 그가 풍기는 지독하게 사무적인 냄새를 맡았다.

칠흑 같은 외투는 마치 죽은 자의 그림자를 겹겹이 덧대어 지은 듯 서늘한 무게감을 떨구었고, 그 아래로 드러난 은색 커프스 버튼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직각을 유지하며 빛을 반사했다. 창백하다 못해 투명해 보이는 피부 위로 서린 것은 인간의 온기가 아니라 잘 닦인 수술용 칼날의 서늘함이었으며, 감정이 소거된 채 가라앉은 눈동자는 마주하는 상대의 영혼을 가치 있는 부품과 폐기물로 즉각 분류해 버리는 잔인한 명석함을 담고 있었다. 그가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주변의 공기는 마치 얼어붙은 진공 상태처럼 밀도를 잃고 흩어졌고, 저음으로 낮게 깔리는 그의 목소리는 귀가 아닌 고막 안쪽을 차갑게 긁어내리는 사형 선고의 확정 도장과도 같은 질감을 남겼다. 로웬은 그 남자를 보며 사람을 상대한다는 느낌보다, 잘못 접수된 반송품 위에 아무 감정 없이 폐기 도장을 찍는 관청의 검은 인장을 마주한 듯한 압박을 느꼈다.

세드릭은 로웬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일그러진 탁본들을 서늘한 눈길로 훑었다.

“탁본의 가치는 원본의 성질에 귀속되는 법이지. 원본이 스스로를 배송물이라 주장한다면, 그 위에 찍힌 낙인 또한 화물 송장에 불과해진다.”

세드릭이 손을 뻗어 탁본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 순간, 로웬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성검이 비명을 지르듯 몸체를 떨었다. 자존심 강한 성검이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세드릭이 든 그 탁본, 심장 부근의 흐릿한 흉터를 본뜬 종이에서 비릿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성자의 흔적이 아니라, 신의 권위에 도전했던 자의 처참한 실패가 남긴 낙인이었다.

피핀이 부채를 팔랑거리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어머, 세드릭 님. 귀족들의 수집욕은 세금을 깎아준다고 해도 못 말린다더니, 이제는 남의 상처 입은 등판을 벽지 대신 바를 기세군요? 경매 약관에 ‘원본이 살아 움직이며 항의할 경우 전액 환불’이라는 조항은 없었나 봐요?”

세드릭은 피핀의 농담을 가볍게 무시했다. 그는 대신 품 안에서 종이 한 조각을 꺼내 로웬의 발치에 던졌다.

“이곳의 장부를 정리하다가 나온 오물이다. 네 ‘배송물’ 목록에 포함되어야 할 것 같군.”

로웬이 허리를 숙여 그것을 주웠다. 그것은 탁본이 아니었다. 축축하게 젖었다가 마른, 거칠게 찢긴 종이 한 조각이었다.

[검은 사과 증류소 — 원가 산정표]

종이에서는 시큼하고도 달콤한, 썩어가는 사과의 향취가 진하게 배어 나왔다. 로웬의 눈이 가늘어졌다. 수취인 불명, 배송지 불명이었던 그의 과거 속 한 페이지가, 지독한 술 냄새와 함께 고개를 들고 있었다.

38화. 밀랍왕자의 재계약서

“이건 배송물 수령 확인서가 아닙니다. 장기 할부 결제에 따른 신체 포기 각서에 가깝군요.”

로웬은 미간을 찌푸린 채 누런 양피지 뭉치를 넘겼다. 백랍 성의 잔당들이 내민 서류에서는 역한 파라핀 냄새와 썩은 유지향이 진동했다. 잿불 심부름꾼의 눈에 비친 그것은 고결한 성유의 보증서가 아니라, 미수금을 회수하려고 독촉장을 날리는 악질 사채업자의 장부였다.

성유를 주입해 젊음을 유지한다는 ‘밀랍왕자’의 계약은 이미 파기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성 안의 사제들은 여전히 탐욕스러운 손길로 계약 갱신을 종용하고 있었다.

“수취인 불일치입니다. 서명란에 적힌 이름은 ‘알베르토 폰 비스’지만, 실제로 이 육신을 점유하고 있는 건 정체불명의 기름 덩어리잖습니까. 본인 확인 절차가 누락된 서류는 규정상 수리할 수 없습니다.”

로웬의 무미건조한 지적에 사제들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때, 그림자 속에서 육중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화려한 예복을 입었으나 그 안의 육신은 기괴하게 뒤틀린 사내가 로웬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대답 대신 로웬의 오른손을 거칠게 낚아챘다.

“말이 많군. 심부름꾼이라면 그저 보증만 서면 된다.”

사내는 미리 준비한 인육색 인주에 로웬의 엄지손가락을 강제로 눌렀다. 로웬은 저항하기보다 그의 손가락이 닿는 감각에 집중했다. 사내는 로웬의 손가락을 인간의 신체 부위가 아니라, 계약의 효력을 발생시킬 ‘배송인 보증 인장’ 그 자체로 취급하고 있었다. 양피지 하단에 로웬의 지장이 찍히고 나서야 사내는 손을 놓았다.

그제야 백랍 성 잔당 중 하나가 그를 오베르 딕스, 성의 인형 공증인이라고 불렀다.

오베르 딕스는 마치 촛농을 겹겹이 발라 굳힌 듯한 기이한 피부 질감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가 움직일 때마다 옷감 사이로 마찰음 대신 끈적이는 수액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수놓인 금사가 무색할 정도로 비대한 어깨와 대조적으로 그의 목소리는 쇳가루를 섞은 듯 날카로우면서도 습기를 머금고 있어, 듣는 이의 고막에 불쾌한 점막을 씌우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깊게 파인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듯 흐릿했으나 그 안에는 갓 잡은 생선의 눈알처럼 비릿한 욕망이 번들거리고 있었고, 그가 숨을 내뱉을 때마다 공기 중에는 타다 남은 심지의 매연과 기름진 악취가 뒤섞여 로웬의 후각을 마비시켰다. 로웬에게 그는 사람이라기보다, 반송 도장을 거부한 채 스스로 접수대 위로 기어 올라온 밀랍 인장처럼 보였다.

“지장이 찍혔으니 계약은 성립됐다. 이제 성유는 우리의 것이다.”

오베르 딕스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러나 뒤에서 장부를 훑어보던 모르그가 차갑게 끼어들었다.

“잠깐. 이 계약 날짜, 뭔가 이상한데.”

모르그의 손가락이 ‘죽은 태양 장부’의 한 지점을 짚었다.

“계약 갱신일이 이 자의 사망 예정일보다 앞서 있어. 게다가 첫 수확 기록을 보라고. 영혼의 정수 채취일이 몸 주인인 왕자의 생일과 일치해. 이건 젊음을 사는 계약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죽을 날을 저당 잡고 조금씩 갉아먹는 할부 살인 계약이잖아?”

“어머, 세상에. 강제로 손가락 도장을 찍게 하더니 내용까지 이 모양이라니.”

이네스가 성검의 자루를 만지작거리며 서늘한 기운을 내뿜었다. 그녀의 눈은 로웬의 엄지에 묻은 인주를 향해 있었다.

“로웬, 저런 무식한 논리에 휘둘리지 마. 신체 보증이라니, 기사단에서도 그런 식의 서명은 무효로 쳐.”

“무효라고 하기엔 이미 접수 번호가 발급되었습니다, 이네스 님. 다만 절차상 중대한 오류가 발견되었을 뿐이죠.”

로웬은 더러워진 엄지손가락을 옷소매로 닦아내며 오베르 딕스를 응시했다.

피핀이 옆에서 혀를 찼다.

“젊음을 돈 주고 산다니, 참 귀족 나으리들다운 발상이긴 한데 말이야. 이거 완전 낙장불입이네? 한 번 부은 성유는 환불 불가고, 늙기 시작하면 위약금이 몸뚱아리 전체라니. 차라리 정직하게 늙는 게 싸게 먹히겠어.”

피핀은 늙음 그 자체를 조롱하지 않았다. 다만 그 두려움을 빌미로 사람을 밀랍 인형으로 만드는 사제들의 상술을 비웃을 뿐이었다.

로웬은 오베르 딕스가 들고 있는 양피지를 가리켰다.

“오베르 딕스 님. 방금 당신이 강제로 찍게 한 제 지장은 ‘수취 거부’ 항목에 찍혔습니다. 인주의 점도가 낮아 번지는 바람에 칸을 넘어갔거든요. 심부름꾼의 지장이 수취 거부 란에 닿는 순간, 이 성유는 반품 확인서로 전환됩니다.”

“뭐... 뭐라고?”

“즉, 이 성에 보관된 모든 성유는 이제 ‘배송 중 파손 물품’으로 분류되어 회수 대상이 된다는 뜻입니다. 미수금 청구서는 나중에 따로 보내드리죠.”

로웬의 말에 오베르 딕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로웬은 혼란에 빠진 그들을 뒤로한 채, 품 안에서 금박이 입혀진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성 잔당들이 통행증이라며 건네준 순례권이었다.

“그리고 이건 돌려드리겠습니다. 성함이 틀렸더군요.”

금박 순례권 하단에는 로웬의 이름이 ‘로웬’이 아닌, 철자가 뒤틀린 국적 불명의 이름으로 박혀 있었다.

“성명 미일치로 인한 검문 불통과는 심부름꾼에게 가장 모욕적인 배송 지연 사유입니다. 다음 귀족 검문소에선 이따위 종이 쪼가리 대신 제대로 된 서류를 준비해 두시길.”

로웬은 차갑게 등을 돌렸다. 등 뒤에서 오베르 딕스의 고함이 터져 나왔지만, 심부름꾼의 발걸음은 이미 다음 목적지인 귀족령의 검문소를 향하고 있었다.

39화. 금박 순례권 위조 사건

“번호 제00-412-88번. 수취인 성명, ‘로왠’. 배송지, 귀족 검문문 서편 3번 진입로.”

로웬은 손가락 끝에 걸린 금박 종이를 서늘한 눈으로 훑었다. 심부름꾼의 감각이 경보를 울리고 있었다. 이건 단순한 통행권이 아니다. 종이의 질감은 빳빳했으나, 금박을 입힌 방식이 조잡했다. 무엇보다 오타가 치명적이었다. 자신의 이름 ‘로웬’이 ‘로왠’으로 적혀 있었다. 배송 사고 중에서도 가장 악질인 기재 오류다.

“이름이 틀렸군. 반송 사유 1호다.”

로웬이 나지막이 읊조렸지만, 눈앞의 풍경은 반송 처리 정도로 끝날 기세가 아니었다.

귀족 구역으로 향하는 거대한 철문 앞은 인산인해였다. 잿가루 섞인 바람을 맞으며 서 있는 순례자들의 손에는 하나같이 로웬이 쥐고 있는 것과 같은 금박 종이가 들려 있었다. 순례상인들은 목청을 높이며 이 종이를 ‘성자 로웬의 가호가 깃든 프리패스’라 광고하며 팔아치웠다.

“자, 자! 성자님의 성함이 박힌 순례권입니다! 이 표만 있으면 저 무시무시한 문지기 괴물도 여러분을 귀족으로 대접하며 입을 벌릴 겁니다! 단돈 500 세르!”

성자의 권위니 구원이니 하는 거창한 수식어는 로웬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을 채운 것은 오직 규정뿐이었다.

첫째, 수취인 성명 불일치. 둘째, 배송지 규정 위반. 귀족 검문문은 일반적인 화물 하역장이 아니다. 셋째, 발행 도장의 마모 상태로 보아 위조 가능성 농후.

“줄 똑바로 서! 표 없는 놈들은 신앙이 부족한 거니까 당장 꺼져!”

교회 검문단 단원들이 거칠게 순례자들을 밀쳐냈다. 그들은 위조품임을 뻔히 알면서도 압수한 금박 표를 뒷주머니에 챙기느라 여념이 없었다. 위조라며 소리를 지르면서도, 그 위조품에 적힌 ‘성자의 이름’이 가진 통행 가치는 탐내는 모순적인 광경이었다.

그때, 화려한 사제복 위로 두꺼운 가죽 코트를 걸친 사내 하나가 로웬의 앞을 막아섰다. 그는 로웬의 가슴팍에 달린 심부름꾼 배지를 힐끗 보더니,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손바닥을 내밀었다.

“이봐, 거기 심부름꾼. 네 놈이 들고 있는 그 표, 성자님 성함이 적힌 거 아냐? 본인 이름 사용료는 냈나?”

로웬이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이름이 틀렸다. 로웬이 아니라 로왠이라고 적혀 있군. 오기입된 화물은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

“허, 이 새끼 봐라? 왠이든 웬이든 신앙 안에서는 다 같은 이름이지. 성자 보증 통행세랑 이름값 해서 1,000 세르 내놔. 안 그러면 이 표는 압수고 너는 신성 모독으로 지하 감옥행이다.”

사내는 억지를 부리며 로웬의 어깨를 꽉 쥐었다. 그제야 로웬은 상대의 면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말릭 테르소는 잿더미 한복판에 서 있으면서도 단 한 점의 먼지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매끄러운 상아색 실크 사제복을 걸치고 있었다. 장부 계원의 깃펜처럼 가늘고 날카로운 눈매는 로웬을 한 명의 인간이 아니라 과세 대상인 물건으로 분류하여 훑어 내렸다. 그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옷감 안쪽에서 들려오는 묵주 부딪치는 소리는 기도보다는 상인의 주머니에서 짤랑이는 동전 소리에 가까운 금속음을 냈다. 입을 열 때마다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여러 번 재사용되어 산패한 성유처럼 미끈거리고 끈적거렸으며, 듣는 이의 귓가에 불쾌한 무게감을 남기며 달라붙었다.

이 남자가 바로 이곳 검문소의 총책임자이자, 위조 표 유통의 배후인 말릭 테르소였다.

“내 이름은 말릭 테르소. 이 구역의 통행 권한과 성자 이름의 저작권을 관리하지. 자, 돈을 낼 건가, 아니면 저기 ‘문지기’ 밥이 될 건가?”

말릭이 가리킨 곳에는 거대한 괴물이 있었다. 철문과 일체화된, 놋쇠와 살덩이가 뒤섞인 기괴한 형상의 ‘검문문’이었다. 그것은 순례자들이 바치는 금박 표를 삼켜야만 육중한 입을 벌려 통로를 만들어주었다.

“이네스.”

로웬의 부름에 이네스가 방패를 고쳐 쥐며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눈에는 신앙을 돈표로 바꾸어버린 이 상황에 대한 노골적인 혐오가 서려 있었다.

“성자의 이름을 팔아 성문을 세우다니. 역겨운 짓을 하는군.”

“말 조심해, 아가씨. 이건 다 교회의 유지비로 들어가는 거니까.”

말릭이 낄낄거렸다. 로웬은 이네스에게 눈짓했다.

“시간을 벌어줘. 절차상 오류를 바로잡아야겠다.”

이네스가 성큼성큼 걸어가 검문문 앞을 가로막았다. 검문단원들이 무기를 치켜들었지만, 그녀의 육중한 방패가 지면을 울리자 기세에 눌려 주춤거렸다. 그사이 로웬은 말릭이 빼앗으려던 위조 표를 검문문의 투입구에 밀어 넣었다.

꺽, 커억!

표를 삼킨 문지기 괴물이 갑자기 경련을 일으켰다. 정교하게 설계된 마법 회로는 ‘로왠’이라는 틀린 철자를 인식하지 못했다. 규격 외의 데이터가 목구멍에 걸린 셈이었다.

“어, 어? 왜 이래!”

말릭의 당황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괴물의 입에서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오더니, 기계적인 굉음과 함께 통행로가 폐쇄되기 시작했다.

“약관 위반입니다.”

피핀이 어느새 검문소 난간 위에 앉아 장부를 흔들며 끼어들었다.

“금박 순례권 제4조 2항. 발행 주체와 수취인의 명칭이 일치하지 않을 경우, 검문 시스템은 해당 화물을 ‘불량’으로 간주하여 즉각 폐기 절차에 들어간다. 아, 물론 여기 줄 서 계신 분들의 ‘패스트트랙 특권’도 전부 무효가 되겠네요? 돈은 이미 지불하셨는데, 어쩌나!”

가난한 순례자들은 당황하며 웅성거렸지만, 피핀은 그들을 조롱하는 대신 그들이 낸 돈이 어떻게 쓰레기가 되었는지를 명확히 짚어주며 화살을 말릭에게 돌렸다.

소란을 틈타 땅바닥에 흩어진 위조 표 몇 장을 수거한 모르그가 로웬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표에 적힌 일련번호들을 대조하고 있었다.

“로웬. 이 번호 배열, 단순한 일련번호가 아니군.”

“무슨 뜻이지?”

“번호의 좌표값이 ‘잿불길’의 고대 지도와 일치해. 귀족 구역으로 이어지는 비밀 군수 도로의 좌표야. 이 표를 들고 특정 구역을 지나면, 검문망의 감지 마법이 무력화되도록 설계되어 있어.”

단순한 돈벌이 위조 사건이 아니었다. 누군가 성자의 이름을 빌려 귀족 구역의 보안망을 조직적으로 뚫으려 하고 있었다.

로웬은 말릭의 뒷주머니에서 흘러나온 압수된 표 뭉치 하나를 낚아챘다. 그리고 그 뒷면을 뒤집었다.

번쩍이는 금박 뒷면, 구석진 곳에 아주 작은 인장이 찍혀 있었다.

[검은 사과 증류소 - 빈 병 보증금 환불 가능]

“...술꾼들이 만든 표였군.”

로웬의 눈이 가늘어졌다. 위조된 성자의 이름표 뒤에 숨겨진 알코올 냄새. 다음 배송지는 결정되었다.

잿불이 흩날리는 검문소 너머, 검은 사과 향이 진동하는 증류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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