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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43화 합본. 검은 사과 증류소에서 성유 세관의 압류 창고까지 일러스트

40-43화 합본. 검은 사과 증류소에서 성유 세관의 압류 창고까지

40화. 검은 사과 증류소

금박이 입혀진 순례권 뒷면에 붙은 작은 스티커는 성스러운 축복의 증명이 아니었다. 그것은 ‘공병 보증금 50실버’라는 문구가 조밀하게 적힌, 지극히 세속적이고도 지독한 영수증이었다.

심부름꾼으로서 로웬의 사고 회로는 명확하게 작동했다. 보증금이 걸린 물건은 반드시 반납해야 하고, 그 가치는 온전히 회수되어야 한다. 배송 사고가 났다면 파손을 증명해야 하며, 수취인이 수령을 거부했다면 반송료를 청구하는 것이 업계의 철칙이다. 그러나 지금 로웬의 손에 들린 것은 라벨이 너덜너덜하게 해진 빈 유리병뿐이었다. 내용물은 이미 누군가의 폐부 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수취인 불명도 아니고 파손도 아니지. 이건 명백한 반송 규정 위반이야.”

로웬은 빈 병을 거칠게 흔들며 ‘검은 사과 증류소’의 접수 창구를 두드렸다. 증류소 내부는 신성한 성당의 부속 시설이라기보다 기괴하게 비대해진 화학 공장에 가까웠다. 천장까지 닿은 구리 증류기들이 씩씩거리며 뜨거운 증기를 내뿜었고, 그 틈새로는 달콤하면서도 구역질 나는 썩은 과일 향이 안개처럼 깔려 있었다.

창구 너머의 직원은 감정 없는 눈으로 장부를 넘기며 대답했다.

“빈 병만으로는 보증금을 돌려드릴 수 없습니다. 규정상 ‘죄책감’이 병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어야 하거든요.”

“병 번호 702번, 라벨 일치, 수취인 확인 스티커 부착 완료. 여기 원가표를 보면 공병 가격이 별도로 책정되어 있다. 내용물을 다 마셨다고 해서 병의 소유권까지 증류소로 귀속된다는 조항은 이 영수증 어디에도 없는데?”

로웬이 탁자 위에 들이민 것은 아까 챙겨둔 순례권 뒷면의 세칙이었다. 직원이 당황하여 입을 벙긋거리는 사이, 거대한 증류기 사이의 어두운 그늘 속에서 규칙적인 구두 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심부름꾼치고는 꽤나 꼼꼼하고 영악한 계산법을 구사하시는군요.”

그늘을 헤치고 나타난 남자는 장부를 펼쳐 보이며 로웬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는 로웬이 가져온 빈 병을 혐오스럽다는 듯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우리 증류소의 ‘고백 전용 성유’는 일반적인 술이 아닙니다. 귀족들이 맡긴 후회와 추잡한 죄악을 정수로 빚어낸 것이죠. 보증금은 그 후회가 온전히 반납되었을 때 지급되는 일종의 신용 담보입니다. 병이 비었다는 사실은, 그 안에 담겼던 죄가 세상 밖으로 유출되어 오염을 일으켰다는 뜻이지요.”

“내용물의 휘발은 배송 중 발생하는 자연적인 감모 손실 범위 내다. 나는 물건을 가져왔으니 정당한 대가를 받으면 그만이야. 보증금 50실버에 반송 수수료 10실버를 더해서, 깔끔하게 60실버 내놔.”

로웬의 억지스러운 요구에 남자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제야 옆에 서 있던 직원이 허리를 숙이며 그의 이름을 조심스럽게 읊조렸다. 세라프 도른. 이 불경한 향기를 관리하는 증류소의 총책이자, 성유 유통의 전권을 쥔 사내의 이름이었다.

세라프 도른의 피부는 마치 갓 구워낸 도자기처럼 매끄러웠으나 그 밑바닥에는 생기 없는 창백함이 깔려 있어,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목구멍이 텁텁해지는 불쾌감을 선사했다. 그는 손가락 마디마디를 기괴한 각도로 꺾으며 로웬을 관찰했는데, 그 시선은 마치 도살자가 가공할 고기의 무게를 가늠하듯 집요하고 사무적인 악의를 품고 있었다. 타버린 설탕과 썩은 사과가 뒤섞인 듯한 그의 체취는 공기 중에 끈적하게 달라붙어 로웬의 콧속을 후벼팠고, 낮게 깔리는 목소리는 녹슨 금속판 위를 흐르는 점액질처럼 고막을 타고 축축하게 파고들었다. 화려한 사제복 아래로 언뜻 보이는 그의 움직임은 인간이라기보다는 잘 설계된 태엽 인형의 몸짓처럼 딱딱하고 기형적이었다.

“이름이 로웬이라고 했던가요? 그럼 이 장부에 서명부터 하시죠. 죄책감까지 포함해 반납했다는 확인서입니다.”

도른이 내민 장부는 기름진 종이로 되어 있어 기분 나쁜 광택을 내뿜었다. 로웬은 펜을 잡는 대신 코를 찡그리며 뒤로 물러났다.

“싫은데. 나는 병만 돌려주러 온 거지, 내 기억까지 병입해서 팔아치울 생각은 없거든.”

그때 증류소 한쪽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성유’를 시음하던 누군가가 바닥에 쓰러져 제 얼굴을 손톱으로 긁으며 울부짖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횡령과 기만을 고함치며 스스로의 뺨을 때렸다. 그 눈물과 콧물이 바닥의 배수구로 흘러들자, 증류기 하단에서 다시금 향긋하고도 역겨운 향기가 솟구쳤다.

피해자의 고백을 농축해 귀족들의 ‘회개 대행용’ 향수로 만드는 공정. 이네스가 차갑게 굳은 얼굴로 방패를 세워 앞을 막아섰다.

“이건 기도가 아니야. 타인의 고통을 병에 가둬 파는 악취일 뿐이지.”

이네스의 방패에서 뿜어져 나온 서늘한 빛이 공간을 메우고 있던 끈적한 죄책감의 향기를 밀어냈다. 증류소 안의 열기가 잠시 주춤하는 사이, 환기구 창살 사이로 피핀의 목소리가 가늘게 새어 나왔다.

“와, 여기 약관 진짜 대박이라니까요? ‘고백 중 발생하는 정신적 붕괴는 사용자의 신앙심 부족 탓으로 돌림’이라고 깨알같이 적혀 있어요! 이 정도면 사기죄로 고소해도 무조건 승소라니까요?”

피핀은 환기구 안에서 렌치를 휘두르며 증류기 나사를 하나씩 풀고 있었다. 한편, 모르그는 창구 뒤편에 어지럽게 쌓인 장부 더미 속에서 익숙한 필체의 기록을 발견했다.

“로웬, 이걸 봐.”

모르그가 가리킨 것은 ‘죽은 태양’의 장부 사본이었다. 그곳에는 ‘첫 수확’이라는 항목과 함께 특정 날짜, 그리고 상세한 수량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세라프 도른이 들고 있는 성유 원가표 하단의 수량 체계는, 죽은 태양의 장부와 소수점 단위까지 정밀하게 일치하고 있었다.

“첫 수확은 곡물이 아니었어. 이 증류소에 처음으로 공급된 ‘신선한 죄책감’의 주인들이지.”

로웬의 눈이 가늘어졌다. 빈 병 보증금 50실버의 행방을 쫓아온 길은 이제 거대한 범죄의 증거로 이어지고 있었다. 세라프 도른은 여전히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로웬은 그의 발치에 놓인 원가표 하단의 문구를 놓치지 않았다.

[납품처: 귀족 감사 미사 특별석]

[후원자 좌석 번호: A-01부터 C-12까지]

“보증금은 나중에 한꺼번에 청구하도록 하지.”

로웬이 빈 병을 도른의 가슴팍에 거칠게 안겨주며 몸을 돌렸다.

“다음 배송지는 저 화려한 미사 현장이 될 테니까.”

41화. 귀족 감사 미사

검은 사과 증류소의 원가표 하단에 휘갈겨진 기록은 명백한 오기였다. ‘귀족 감사 미사 특별석 납품 일정’이라 적힌 칸 옆으로 나열된 좌석 번호 A-01부터 C-12까지. 로웬은 그 숫자들이 적힌 물품 보관증과 수령 서명의 필체가 대성당 창고에 보관된 장부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집중했다. 빈 병이 담긴 상자를 옆구리에 낀 채 대성당 본당으로 들어서는 그의 발걸음은 성자로서의 위엄보다는 체납된 고지서를 따지러 온 수금원에 가까웠다.

본당 안은 이미 성유 사업권을 따내고 일주일치 죄책감을 세탁하러 온 귀족들의 향수 냄새로 가득했다. 그들은 로웬이 들고 있는 먼지 묻은 나무 상자를 성자의 고행을 상징하는 유물쯤으로 여기며 경건한 표정을 지었지만, 로웬의 눈에 그들은 그저 엉터리 수령증을 발급한 공범일 뿐이었다.

로웬이 단상 근처의 사제에게 다가가 보관증 뭉치를 내밀려 할 때였다. 길고 창백한 손가락 하나가 로웬의 손등 위를 지그시 눌러 내렸다.

“보관증 확인은 미사가 끝난 뒤에. 지금은 침묵 고백이 우선입니다.”

앞을 가로막은 남자는 제복의 깃을 턱밑까지 단정하게 채우고 있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뒤로 넘긴 은빛 머리칼은 촛불을 반사해 서늘한 광택을 냈고, 깊게 패인 눈안개 너머의 눈동자는 감정의 동요 없이 로웬의 보관증 뭉치를 마치 불결한 오물이라도 보듯 응시했다. 그는 빳빳하게 풀을 먹인 사제복 위로 금색 자수가 놓인 대사제 전용 수대(手帶)를 두르고 있었는데, 그가 움직일 때마다 풍기는 침침한 침향 냄새는 로웬의 코끝을 찔러 숨을 막히게 했다. 로웬의 항의를 단 한 문장으로 짓누른 그의 목소리는 낮고 매끄러웠으나, 동시에 한여름의 서리처럼 상대의 의지를 얼려버리는 기이한 압박감을 품고 있었다.

그는 대성당의 의전 총책임자이자, 교황청의 입이라 불리는 율리안 베스크였다.

“성자께서는 그저 저 위에서 빛나시면 됩니다. 장부의 숫자를 맞추는 비천한 일은 저희의 몫이니까요.”

율리안은 로웬을 단상 위, ‘성자의 좌’로 떠밀었다. 로웬이 입을 열어 수취인 서명의 불일치를 따지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 소리가 본당을 압도했다.

단상 앞에는 정교한 톱니바퀴로 맞물린 ‘자동 고백문 낭독 장치’가 놓여 있었다. 로웬이 보관증을 흔들며 “여기 적힌 수령 번호가 틀렸단 말입니다!”라고 소리쳤으나, 장치의 마이크 역할을 하는 집음관을 통과한 목소리는 전혀 다른 형태로 변질되었다.

[저는 부족한 몸으로 귀족들의 헌신적인 감사에 응답합니다….]

장치 뒤편에 배치된 성가대가 일제히 화음을 쌓으며 로웬의 실제 목소리를 덮어버렸다. 로웬이 단상을 내려가려 하자, 좌우에 늘어선 의전 사제들이 마치 벽처럼 그를 에워쌌다. 그때, 은빛 방패가 단상 계단을 가로막으며 묵직한 파열음을 냈다. 이네스였다. 그녀는 기사단의 예복 대신 성자의 호위로서 육중한 갑주를 갖춰 입고, 로웬에게 다가오려는 사제들의 접근을 물리적으로 차단했다.

“성자께서 말씀하고 계시지 않나. 방해하지 마라.”

이네스의 차가운 일갈에 의전 사제들이 주춤하는 사이, 피핀이 제단 아래의 그림자 속에서 움직였다. 피핀은 성가대의 향로 줄과 자동 낭독 장치의 핵심 톱니 사이에 미리 준비한 낚싯줄을 걸었다.

끼릭, 기괴한 금속음이 울리며 낭독 장치의 원통형 기록판이 엇나갔다. 성자 신화의 구절을 읊조려야 할 장치는 이제 로웬의 품에 들린 보관증에 적힌 내용을 기계적으로 뱉어내기 시작했다.

[품목… 빈 병 상자… 수량… 열둘… 수취인 서명 불일치…!]

경건해야 할 미사 현장에 물류 창고의 재고 목록이 울려 퍼졌다. 귀족들은 당황하며 서로를 쳐다보았고, 율리안 베스크의 미간이 처음으로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장치는 멈추지 않았다. 피핀이 조율한 톱니는 의전의 권위를 조롱하듯 ‘A-01 결석’, ‘C-12 대납 확인’ 같은 행정 용어들을 성스러운 찬송가의 리듬에 맞춰 쏘아댔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모르그는 낭독 장치에서 흘러나오는 문장 구조에 주목했다. 그는 품속에서 미리 필사해둔 ‘죽은 태양’의 비자금 장부를 꺼내 대조했다.

‘서술어의 위치, 숫자를 표기하는 괄호의 모양… 자동 고백문의 서식과 비자금 장부의 행정 문장 구조가 완벽하게 일치해.’

이 미사는 감사가 아니었다. 성자의 입을 빌려 장부의 구멍을 메우려는 거대한 행정적 세탁 공정이었다.

혼란을 틈타 로웬은 제단 구석에 떨어진 보관증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율리안이 황급히 손을 뻗었지만 로웬이 더 빨랐다. 뒤집힌 보관증 뒷면, 빛이 바랜 종이 위로 붉은 인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피 없는 성배 재판 — 증거물 이관 승인]

성유 사업의 이권 뒤에 가려져 있던, 잿불 심부름꾼조차 닿지 못했던 과거의 재판 기록이 로웬의 손안에서 파르르 떨렸다. 로웬은 고개를 들어 단상 아래, 여전히 무표정을 연기하려 애쓰는 율리안 베스크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따져야 할 것은 빈 병의 개수만이 아니었다.

42화. 피 없는 성배 재판

보관증 뒷면에 찍힌 붉은 인장, ‘피 없는 성배 재판 증거 이관’이라는 글자가 아직 마르지 않은 채 번져 있었다. 로웬은 손가락 끝에 묻은 눅눅한 인장 잉크를 비벼 닦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성자니, 기적이니 하는 거창한 말들이 법정 내부를 소란스럽게 메우고 있었지만, 로웬의 눈에 이 상황은 고결한 종교 재판이 아니라 명백한 ‘행정 오류’였다.

수취인 번호 불일치, 봉인 번호 누락, 그리고 결정적으로 증거병 라벨에 적힌 서명 형식이 엉망이었다.

“성자의 피 한 방울이면 소유권은 명확히 정리될 것입니다. 이 지루한 서류 공방을 끝낼 가장 자비로운 방법이지요.”

두툼한 양피지 뭉치와 증거병 라벨을 낚아채듯 붙잡으며 누군가 로웬의 앞을 막아섰다. 로웬의 손을 잡아끄는 대신, 그는 보관증의 일련번호를 손톱으로 긁으며 기괴한 집착을 보였다. 법정 서기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호명했다.

“귀족 성유 조합 대리인, 세라프 드 마르겐 경의 입장을 확인합니다.”

그는 마치 뼈 위에 창백한 비단을 씌워놓은 듯한 불쾌한 인상을 풍겼다. 지나치게 빳빳하게 풀을 먹인 레이스 칼라가 목을 조르고 있는데도 그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고, 촛불 아래 드러난 피부는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납빛이라 살아있는 인간이라기보다 정교하게 박제된 성물의 모조품 같았다. 가늘게 뜬 눈꺼풀 사이로 번들거리는 안구는 로웬을 한 명의 인격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금전적 가치를 증명할 도장이나 인장쯤으로 여기는 탐욕스러운 식별자의 그것이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옷감에서 배어 나오는 자극적인 향수 냄새는 시신의 악취를 가리려 애쓰는 분취처럼 로웬의 코끝을 찔렀고, 느릿하게 읊조리는 목소리는 칠판을 긁는 금속성 저음이 섞여 있어 듣는 것만으로도 뒷목의 소름을 돋게 했다.

세라프가 손짓하자, 법정 바닥에 놓인 은제 촛대들이 공명하며 푸르스름한 결계를 형성했다. 촛대에서 뻗어 나온 빛의 줄기들이 로웬의 손가락을 강제로 증거병 입구 쪽으로 몰아붙였다. 성유병 안에 담긴 투명한 액체가 ‘성자의 피’를 갈구하듯 출렁였다.

“자, 증명하십시오. 당신이 이 성물의 진정한 주인임을.”

날카로운 바늘이 로웬의 손가락 끝을 향해 다가오는 순간, 묵직한 파열음이 법정을 뒤흔들었다.

쾅—!

이네스가 방패를 바닥에 내리찍으며 촛대들이 이루고 있던 마력의 원을 단칼에 끊어버렸다. 결계가 깨지며 불꽃이 튀었지만, 이네스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로웬의 앞을 막아섰다.

“내 심부름꾼의 몸에 함부로 손대지 마라. 이 배송물의 인계 과정에 의문이 있다면 절차대로 서류를 검토하는 게 먼저다.”

모두의 시선이 로웬의 허리에 차인 성검으로 향했다. 성배와 성자가 만나는 순간, 검이 공명하며 기적을 일으킬 것이라 기대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성검은 침묵했다. 그 어떤 빛도, 진동도 없었다. 고철 덩어리처럼 고요한 검의 모습에 귀족 조합원들 사이에서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보십시오! 검도 반응하지 않습니다. 가짜 성자를 내세워 성유 사업권을 가로채려 한 것 아닙니까?”

그때, 피핀이 법정 바닥에 흩어진 증거병 라벨 하나를 주워 들고는 과장된 몸짓으로 낭독하기 시작했다.

“아이고, 여기 대단한 ‘약관’이 적혀 있네요! ‘본 성유병의 마개 봉인이 훼손될 시, 귀족 조합은 어떠한 영적 책임도 지지 않으며, 발생하는 모든 신성 저항은 수취인의 과실로 간주함’. 세상에, 기도를 파는 게 아니라 면피용 계약서를 팔고 계셨군요? 존귀하신 조합 대리인님, 이 문구는 신학입니까, 아니면 잡화점 상술입니까?”

피핀의 비아냥에 세라프의 안면이 미세하게 경련했다. 그 사이 모르그는 증거 목록을 훑으며 차가운 목소리를 얹었다.

“이 증거 목록에는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 있군. 피해자의 이름이다. 그리고 이 서명 형식…….”

모르그가 가리킨 곳에는 조잡하게 꼬인 문양이 찍혀 있었다.

“죽은 태양 교단의 장부에서나 보던 부정한 서명 형식이군. 수취인의 이름을 지우고 일련번호로만 대체하는 방식 말이야. 이건 성유 재판이 아니라, 장부를 세탁하는 현장인가?”

로웬은 세라프가 쥐고 있던 증거병을 낚아챘다. 피를 낼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그는 병에 부착된 ‘위조 수취인 서명란’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성배가 반응한 것은 로웬의 피가 아니었다. 로웬의 손가락이 서명란의 마력 흔적을 짚어내자, 투명하던 성유병 내부가 검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기적이 아니라 ‘거부’였다. 서류상의 수취인과 실제 물건의 소유권이 어긋난 자리에서, 성배가 마치 반송 도장처럼 그 거짓을 검게 찍어냈다.

“수취인 불명, 서명 위조. 이 증거물들은 법적 효력을 상실했습니다.”

로웬이 무심하게 선언했다.

“피를 흘려 증명할 필요도 없군요. 애초에 당신들이 들고 온 이 서류 자체가 ‘반송’ 대상이니까.”

세라프 드 마르겐의 얼굴이 수치심과 분노로 일그러졌다. 법정 서기들이 당황하며 서류를 회수하려 했지만, 이미 성배의 검은 빛이 법정 전체에 증거 오염을 선포한 뒤였다. 재판장은 마지못해 의사봉을 두드렸다.

“증거 이관 무효를 선언한다! 해당 물품들은 절차에 따라 재분류될 때까지 임시 압류한다!”

소란스러운 법정 한구석, 로웬은 무효 처리된 성유병 몇 개에 달라붙은 새로운 꼬리표를 발견했다. 거기엔 붉은 글씨로 단호하게 적혀 있었다.

[ 성유 세관 압류 창고 — 즉시 이송 요망 ]

로웬은 보관증을 접어 주머니에 넣으며 생각했다. 다음 배달지는 아무래도 그 창고가 될 모양이었다.

43화. 성유 세관의 압류 창고

[성유 세관 압류 창고 — 즉시 이송 요망]

붉은 글씨가 낙인처럼 찍힌 꼬리표가 눈앞에서 너풀거렸다. 로웬은 그것이 성스러운 유물의 증명서라기보다는, 주소지를 잘못 찾아온 오배송 물품의 반송장처럼 보였다.

창고 안은 신성한 기운 대신 잉크 냄새와 눅눅한 종이 먼지, 그리고 철저하게 계산된 금전의 감각으로 가득했다. 거대한 선반마다 가득 찬 상자들 위에는 로웬의 이름을 교묘하게 비튼 분류명들이 붙어 있었다.

‘로웬 관련 성유’, ‘성자 부정 반응품’, 그리고 가장 질 나쁜 ‘피 없는 증거병 파생품’.

로웬은 품 안에서 낡은 도장 하나를 꺼내 들었다. 성자로서의 권능을 휘두르기 위함이 아니었다. 이 지독한 행정적 오류를 바로잡기 위한 ‘수령 거부’ 도장이었다. 그가 압류 꼬리표 뭉치를 향해 도장을 내리찍으려던 찰나, 차가운 손 하나가 허공에서 그의 손목을 낚아챘다.

“압류품은 반송 불가입니다. 그것이 세관의 제1 원칙이지요.”

낮고 건조한 목소리였다. 로웬의 손에서 압류 꼬리표 뭉치와 도장을 가로챈 사내는 그것을 공중에서 가볍게 흔들며 서류의 무게를 가늠했다.

“세관장님, 여기 기록된 입고 수량과 실물 무게가 맞지 않습니다!”

하급 서기 하나가 당황해 달려오며 사내의 직함을 불렀다. 성유 세관장, 라울 브릭. 그 이름이 불리고서야 사내는 로웬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는 인간이라기보다 정교하게 깎아 만든 금전 출납용 저울에 가까워 보였다. 빳빳하게 풀을 먹인 옷깃은 면도날처럼 날카롭게 세워져 그의 목을 죄고 있었고, 안경 너머의 눈동자는 상대의 영혼이 아니라 그 영혼이 시장에서 얼마에 거래될지를 측정하는 냉혹한 계측기의 바늘처럼 번뜩였다. 손가락 끝에는 항상 잉크 얼룩이 묻어 있었으나 그것은 학자의 지성이 아니라 장부상에서 숫자를 지우고 고치는 실무자의 집요함을 증명했으며, 그가 움직일 때마다 풍기는 서늘한 종이 향은 산 사람의 온기마저 압류하여 창고의 서늘한 공기 속에 박제해 버릴 듯한 위압감을 뿜어냈다. 로웬은 그를 마주하자마자, 눈앞의 남자가 사람의 무게를 잴 때 심장의 고동이 아닌 금괴의 순도를 먼저 따지는 종류의 인간임을 직감하고 불쾌한 소름을 느꼈다.

“수령을 거부한다고 해서 압류가 해제되지는 않습니다, 로웬 씨.”

라울 브릭이 서류 판을 탁 소리 나게 덮었다. 그 순간, 선반 위에 놓여 있던 ‘성자 부정 반응품’ 병들이 일제히 떨리기 시작했다. 세관 저울 위에 올려진 성유병들은 스스로의 무게를 바꾸며 계측을 방해했고, 어떤 병들은 깨지기 직전의 위태로운 소리를 내며 순례길 출구라고 적힌 바닥 홈으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철컹!

이네스가 거대한 방패를 내리찍어 출고 창살 앞을 막아섰다. 저울추가 요동치며 바닥으로 떨어지려 하자, 그녀는 방패의 가장자리로 그것을 받아내며 묵직한 파열음을 냈다.

“이것은 성물이 아니라, 당신들이 조작한 장부의 산물인가?”

이네스의 물음에 피핀이 옆에서 거창한 양식의 문서를 펼쳐 들며 가세했다.

“잠깐만요! 성유 세관 제14조 8항을 보시죠. ‘압류 보관료 산정 기준’에 따르면 보관 중인 물품이 자발적으로 이동하거나 무게를 변동시킬 경우, 이는 소유자의 관리 소진이 아니라 세관의 시설 결함으로 간주합니다. 게다가 ‘성자 관련 물품 특별 통행세’라니, 이 명세서의 수수료는 제국 표준의 세 배가 넘잖아요? 파손 시 순례자가 모든 책임을 진다는 조항은 또 뭡니까? 이 정도면 세관이 아니라 국가 공인 강도단이라고 해야겠는데요?”

피핀의 낭독이 이어질수록 라울 브릭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세관의 존칭과 복잡한 약관 뒤에 숨겨진 추악한 장사법이 낱낱이 파헤쳐지고 있었다.

그 사이, 압류 명세서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모르그가 로웬의 옷소매를 당겼다.

“로웬, 이 명세서의 회수 명령 문장 구조를 봐. 주어와 동사의 배치가 기묘하게 꼬여 있어. 이건 단순한 관청 문체가 아니야. 우리가 봤던 ‘죽은 태양의 장부’에 적힌 회계 주술의 구조와 정확히 일치해.”

로웬의 눈이 가늘어졌다. 엘드 또한 창고 구석에 쌓인 상자들의 라벨을 손가락으로 훑으며 나지막이 덧붙였다.

“어쩌면 이 압류는 신화를 막으려는 게 아닐지도 모르겠군. ‘국가 인증’이라는 빨간 라벨을 붙여서, 더 공신력 있는 형태로 세상 끝까지 신화를 퍼뜨리려는 공정의 일부일 수도 있어.”

라울 브릭은 여전히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로웬을 압박했다.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습니다. 이미 장부에 기입된 이상, 이 물품들은 ‘성자의 유물’로서 출고되어야 합니다.”

“아니, 출고는 멈춰야 할 겁니다.”

로웬이 라울의 손에서 뺏어 온 수령 거부 도장을 다시 꽉 쥐었다.

“방금 당신의 서기가 말했지? 실물 무게와 장부 무게가 맞지 않는다고. 세관 규정상 무게 불일치 품목은 전수 조사가 끝날 때까지 출고가 금지된다. 거기다 저 병들은 이미 금이 갔어. ‘깨진 병 보증금 환급 규정’에 따르면, 파손된 물품을 이송할 시 발생하는 모든 마력 누출의 책임은 세관장이 전액 배상하게 되어 있지. 내가 수령을 거부한 이 시점에서, 저 병들이 깨지면 당신은 세관 운영비 전체를 보증금으로 날리게 될 거야.”

로웬은 성자로서의 기적을 부리는 대신, 세관의 낡고 빡빡한 행정 논리를 들이밀었다. 라울 브릭의 눈 바늘이 거세게 흔들렸다. 무게가 맞지 않는 유물, 깨지기 쉬운 보관품, 그리고 완강한 수령 거부권자. 행정가에게 있어 가장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결국, 창살 너머로 향하려던 운송 수레가 멈춰 섰다. 출고 중지 명령이 떨어졌다.

하지만 로웬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그는 라울의 책상 위에 놓인 마지막 전표 한 장을 발견했다. 거기엔 이미 처리 완료 도장이 찍힌 행선지가 적혀 있었다.

[일부 성유 명세 및 로웬의 부정 발언 사본 — ‘겸손한 성자의 부정문 인쇄소’로 즉시 이관]

로웬이 그토록 부정해 왔던 말들이, 이제는 공식적인 ‘성자의 겸손’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대량 복제될 준비를 마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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