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35화 합본. 사망일 미정 항소장에서 성유 보증서의 붉은 밀랍까지
34화. 사망일 미정 항소장
주소 불명으로 반송된 서류 뭉치가 내 손안에서 기괴하게 비틀렸다. 종이 날붙이가 제멋대로 접히며 모서리를 세우더니, 이내 두툼한 항소장 봉투와 빳빳한 운송장의 형태로 탈바꿈했다. 손끝에 닿는 종이 질감이 서늘했다.
방금까지 ‘연대 보증’이라는 글자로 나를 옥죄던 서류는 이제 새로운 배송지를 가리키고 있었다.
[수신: 빈 옥좌]
[물품: 사망일 미정 항소장]
“배송 완료 기준부터 확실히 합시다.”
나는 떨리는 숨을 고르며 중얼거렸다. 심부름꾼의 제1원칙. 수령인이 누구인지, 그가 서명할 손가락이 붙어 있는지가 배송의 성패를 가른다. 그런데 수신인이 ‘빈 옥좌’라고? 이건 배송 사고의 전조였다. 수령인 부재로 인한 반송 처리라면 사양하지 않겠지만, 이 빌어먹을 성지 예언청의 장치들은 반송조차 목숨값을 요구하곤 했다.
빈 옥좌 홀은 왕좌실이라기보다 거대한 우편 분류장과 재판정을 뒤섞어 놓은 듯한 풍경이었다. 높은 천장에는 먼지 쌓인 장부들이 도서관 서가처럼 빽빽하게 박혀 있었고, 바닥에는 판결문으로 보이는 양피지들이 낙엽처럼 굴러다녔다. 권위가 머물러야 할 자리에는 오직 서류가 타다 남은 재 냄새와 잉크 비린내만이 가득했다.
그 적막을 깨고 구두 굽 소리가 들려왔다.
“고생이 많군요, 로웬. 아니, 성자님이라 불러야 할까요?”
기둥 뒤에서 나타난 엘드가 입꼬리를 부드럽게 올렸다. 그는 이 상황을 마치 잘 짜인 연극처럼 감상하고 있었다. 예언청의 시험 설계자. 나를 성자라는 벼랑 끝으로 밀어 넣고 여비라는 미끼를 던졌던 남자가 내 항소장을 빤히 바라보았다.
“절차는 간단합니다. 저 옥좌 앞에 서서, 당신 혼자 서명하면 모든 게 끝납니다. 항소는 수리될 것이고, 당신의 사망일은 다시 미궁 속으로 안전하게 숨겨지겠죠.”
엘드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친절했다. 하지만 심부름꾼은 안다. 배송원이 직접 서명하는 물건치고 제대로 된 물건은 없다는 걸.
나는 옥좌 뒤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난번 소동으로 박살 난 ‘사망일 문’의 잔해가 흉측하게 흩어져 있었다. 본래라면 내 죽음의 날짜가 적혀 있어야 할 칸은 기괴하게 뒤틀려 있었다.
비어 있는 게 아니었다.
내 이름이 적혀 있어야 할 칸은 갈기갈기 찢겨, 이곳에 모인 이들의 서명 조각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네스의 단단한 필체, 피핀의 장난스러운 낙서 같은 흔적, 그리고 모르그의 치밀한 숫자들. 내 죽음의 책임이, 혹은 삶의 무게가 그들에게 분산되어 있었다.
위이잉, 기계적인 소음과 함께 예언청의 인장 장치가 옥좌 위로 내려왔다. 톱니바퀴가 맞물리며 뿜어내는 증기가 홀을 가득 메웠다. 장치는 명확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대표자 단독 서명 요망.]
“로웬 님.”
이네스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방패에 새겨진 성스러운 각인이 빈 옥좌의 도장 홈과 공명하며 푸른 빛을 내뿜었다. 그 빛은 나를 보호하려는 듯하면서도, 동시에 나를 이 제단의 주인공으로 몰아세우고 있었다.
피핀은 평소답지 않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왕궁의 마법 시계가 가리키는 날짜가 항소장 가장자리에 번진 잉크처럼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피핀이 내 소매를 살짝 당기며 짧게 내뱉었다.
“……진짜 죽는 건 아니지?”
농담조차 섞이지 않은, 생생한 공포가 담긴 목소리였다.
모르그는 품 안에서 자신의 장부를 꺼냈다. 그는 장부에 기록된 분산된 사망일 기록들을 마치 법정의 증거물처럼 내밀었다.
“통계적으로 불가능한 수치입니다. 한 사람의 생명이 이렇게 여러 명의 장부에 나뉘어 기재될 수는 없어요. 이건 공식적인 오류입니다.”
엘드가 재촉했다.
“시간이 없군요. 장치가 작동하면 이 홀 전체가 ‘미정된 죽음’의 인과율에 휘말릴 겁니다. 어서 단독 서명을 하세요. 성자로서 그들을 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웅장한 희생. 성자라면 마땅히 그래야 할 터였다. 내가 이 모든 짐을 짊어지고 서명란에 이름을 적어 넣으면, 동료들은 안전해질 것이고 나는 다시 성자라는 사기극의 주인공으로 대우받으며 다음 성지로 향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펜을 들지 않았다. 대신 항소장의 운송장을 엘드의 코앞에 들이밀었다.
“수령인 부재.”
“……뭐라고요?”
“배송 원칙 제4조. 수령인이 현장에 없거나 신원을 확인할 수 없을 경우, 배송물은 인계되지 않는다. 지금 이 옥좌는 비어 있잖습니까? 주인이 없는 자리에 서명해봐야 법적 효력도 없어요.”
나는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인장 장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리고 이건 ‘공동 배송물’입니다. 여기 적힌 서명 조각들이 안 보입니까? 이건 내 단독 소유물이 아니라, 저 인간들과 얽힌 공유 화물이라고요. 그런데 왜 나보고 단독 서명을 하라는 겁니까? 이건 절차 위반입니다.”
엘드의 미소가 미세하게 경직되었다.
“이건 당신 운명을 다투는 항소입니다, 로웬. 배송 따위의 논리로 피할 수 있는 게…….”
“운명이든 뭐든, 내 손에 들어온 이상 이건 화물입니다.”
나는 이네스의 방패 각인이 반응하는 옥좌의 홈, 모르그의 장부, 그리고 피핀의 공포를 하나로 묶어 생각했다. 이 화물은 한 명의 명의로 확정될 수 없다. 확정되는 순간, 누군가는 배송 사고의 책임을 독박 써야 하니까.
“단독 서명 불가. 수령인 부재로 인한 반송 절차를 밟겠습니다.”
나는 항소장을 반으로 접어 옥좌의 도장 홈에 강제로 끼워 넣었다. 인장 장치가 내 손등을 찍으려 내려왔지만, 이네스의 방패가 그 사이를 막아섰다. 쾅! 하는 굉음과 함께 쇠붙이가 부딪히는 불꽃이 튀었다.
그 순간, 항소장의 글자들이 뒤바뀌기 시작했다. ‘사망일 미정 항소장’이라는 글귀가 흐려지더니, 그 위로 붉은색 낙인이 찍혔다.
[역순 순례 첫 공식 반송장]
성지로 향하는 길이 아니라, 성지에서 뱉어낸 첫 번째 거부권이었다. 시스템이 예상치 못한 ‘배송 논리’에 걸려 과부하를 일으켰다. 옥좌실의 서가들이 요동치고, 먼지 섞인 서류들이 폭풍처럼 휘날렸다.
나는 휘청거리는 몸을 이네스의 어깨에 기대며 엘드를 보았다.
“전달 완료라고 보고하지 마세요. 이건 ‘반송’이니까.”
홀의 진동이 가라앉을 무렵, 빈 옥좌의 팔걸이 아래에서 작은 금속 조각 하나가 툭 떨어졌다. 차가운 바닥을 구르며 내 발치에 멈춰선 것은, 다음 성지의 좌표가 새겨진 새로운 배송 꼬리표였다.
엘드는 더 이상 웃지 않았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품 안의 장부를 꺼내 무언가를 정교하게 적어 내려갔다.
‘실험체 로웬. 예언의 강제 집행을 물류 시스템의 결함으로 치환하여 회피함. 데이터 갱신 필요.’
그는 꼬리표를 줍는 나를 뚫어지게 응시하다가, 그림자 속으로 조용히 물러났다. 내 손에 쥐인 새 배송 꼬리표에서는 기분 나쁜 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반송은 성공했지만, 다음 배송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수령인은 사람이 아닐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35화. 성유 보증서의 붉은 밀랍
빈 옥좌 밑바닥에서 떨어진 꼬리표는 축축하고 끈적했다. 엘드가 장부에 무언가를 휘갈기는 소리를 뒤로하고 내가 집어 든 종이에는, 성스러운 인장 대신 기름진 음식물 얼룩과 함께 ‘귀족 성유 조합 임시 감정회 - 납품 전 최종 검수처’라는 조잡한 글귀가 적혀 있었다. 역순 순례의 다음 행선지가 성당이나 유적지가 아니라, 돈 냄새가 진동하는 상품 포장실이라니.
감정회장은 겉모습만 성당의 형식을 빌린 기괴한 경매장이었다. 높은 천장에는 스테인드글라스 대신 금박을 입힌 성유병 광고판이 천박하게 걸려 있었고, 제단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수백 개의 유리병이 줄지어 놓인 장편 탁자가 놓여 있었다. 공기 중에는 경건한 향유 냄새 대신, 코를 찌르는 뜨거운 밀랍 냄새와 잉크 비린내가 가득해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오셨습니까. ‘하늘의 뜻을 배달하는 분’께서 드디어 이 누추한 물류 창고에 발을 들이셨군요.”
탁자 너머, 보이지 않는 그림자 속에서 깃펜 사각거리는 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대답했다.
“성자가 아닙니다. 잘못 찾아오셨네요. 이건 배송 사고로 인한 반송 건 때문에 온 겁니다.”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어둠 속에서 하얀 손이 튀어나와 양피지에 무언가를 광적으로 적어 내려갔다.
‘성자 가라사대, 나는 이 땅의 형식을 입은 자가 아니니, 하늘의 물건을 되돌려 보내러 왔노라.’
“잠깐, 내 말은 그런 뜻이…….”
‘겸손의 극치. 스스로를 부정함으로써 오히려 그 존재의 당위성을 증명하시니, 오직 반송(歸還)의 논리로 세속의 탐욕을 꾸짖으시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내 발언은 이미 화려한 수식어가 붙은 상품 문구로 변질되고 있었다. 내 의사가 타인의 깃펜 끝에서 ‘성자의 잠언’으로 재조립되는 감각은 불쾌하다 못해 소름 끼쳤다. 마치 내 존재 자체가 거대한 광고판의 밑그림으로 소비되는 기분이라 등줄기가 서늘했다.
그제야 깃펜을 멈추고 어둠 속에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짙은 보라색 벨벳 코트 위에 금실로 성화(聖畵)를 조롱하듯 수놓은 화려한 에이프런을 겹쳐 입고 있었는데, 그 기괴한 복색은 마치 도살자와 귀족을 한데 뒤섞어 놓은 듯한 불길한 인상을 풍겼다. 시체처럼 창백한 피부와 대조되는 칠흑 같은 머리카락은 단 한 가닥의 흐트러짐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뒤로 매끄럽게 넘겨져 있었고, 번뜩이는 가느다란 안경 너머의 눈동자는 상대를 생명체가 아닌 ‘감정 가치가 매겨진 상품’으로 분류하는 듯한 서늘한 탐욕을 머금고 있었다. 손가락 마디마다 끼워진 육중한 인장 반지들을 가볍게 부딪치며 리듬을 맞추는 그의 움직임은, 마치 먹잇감의 목을 따기 전 칼날을 고르는 숙련된 도축업자의 손짓처럼 기만적이면서도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그가 입가를 비틀며 내뱉는 목소리는 잘 닦인 유리를 긁는 듯 매끄러우면서도 신경을 긁는 불쾌한 미성을 담고 있었다.
“귀족 성유 조합의 수석 감정관이자, 오늘 당신의 ‘반송장’을 성유 보증서로 세탁해 드릴 클로드 발미에르입니다.”
“세탁 같은 건 안 합니다. 이건 그냥 잘못 배달된 물건이라니까요.”
내가 반송장 꼬리표를 내밀자, 클로드는 그것을 보지도 않고 옆에 있던 기계 장치를 작동시켰다.
“훌륭합니다! ‘성자께서 겸손히 자신을 낮추며 성지 공인 절차를 인정하셨다’라…… 이 문구면 이번 분기 성유 판매량은 보장되겠군요.”
그가 레버를 당기자, 탁자 위에 설치된 붉은 밀랍 주입 장치가 굉음을 내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봉인 도구가 아니었다.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며 반송장 꼬리표에 담긴 마력 반응을 강제로 끌어내고 있었다. 꼬리표와 연결된 성유병들이 공명하며 떨리기 시작하더니, 뜨겁게 달궈진 붉은 밀랍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위험해!”
이네스가 반사적으로 방패를 들어 앞을 막아섰다. 챙그랑! 과부하를 견디지 못한 유리병 몇 개가 터져 나갔다. 사방으로 튀는 병 파편과 펄펄 끓는 밀랍이 우리를 덮쳤다. 하지만 그 아수라장 속에서도 귀족들은 비명을 지르기는커녕 눈을 빛내며 달려들었다.
“보십시오! 성자의 등장에 성유가 감응하여 스스로를 봉인하고 있습니다!”
“이네스 님의 방패에 튄 저 밀랍 자국을 보시오! 저건 성스러운 각인입니다!”
이네스의 방패에 묻은 지저분한 밀랍 얼룩조차 그들에게는 비싼 값에 팔아치울 ‘인증 마크’로 소비되고 있었다. 이네스는 자신의 신념이 담긴 방패가 상품 라벨 취급을 받는 것에 모욕감을 느낀 듯 안색이 파리해졌다. 옆에서 피핀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와, 진짜 대단하네. 이 정도면 내가 여기서 침을 뱉어도 ‘성자의 동료가 하사한 성수’라고 팔아먹겠는걸?”
클로드의 비서가 그 말을 놓치지 않고 받아 적었다.
‘동료의 해학적인 축복. 침묵보다 깊은 깨달음의 농담.’
피핀은 난생처음으로 자기 농담이 누군가에게 먹혔음에도 불구하고, 소름이 돋는다는 듯 입을 꾹 다물고 침묵을 선택했다. 그때, 뒤에서 묵묵히 상황을 지켜보던 모르그가 부서진 보증서 조각 하나를 집어 들었다.
“데이터 불일치 발견. 이 보증서 번호 774-가, 기록부 날짜와 맞지 않음.”
그녀의 건조한 목소리가 소란스러운 감정회장을 갈랐다.
“장부 12페이지의 수령인 서명 칸은 비어있지만, 밀랍 인장에는 이미 위조된 서명이 각인되어 있음. 이 공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허위임.”
클로드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그는 모르그를 철저히 무시하며 내게 다가왔다.
“사소한 행정적 오류일 뿐입니다, 성자님. 당신이 여기 서 계시는 것만으로도 이 물건들은 ‘진품’이 됩니다. 자, 이 황금 보증서에 서명만 하십시오. 그러면 이 소란도, 반송장도 모두 없던 일이 될 겁니다.”
그가 내민 금박 보증서가 내 눈앞에서 일렁였다. 이건 서명이 아니라, 내 존재를 저들의 상품 목록에 영원히 귀속시키겠다는 노예 계약서나 다름없었다. 나는 그 보증서를 밀어내며 차갑게 말했다.
“배송 규칙 위반입니다.”
클로드의 웃음기가 사라졌다.
“뭐라고요?”
“첫째, 수취인 불명. 이 성유를 받을 진짜 주인은 여기 없습니다. 둘째, 물품명 허위. 이건 성유가 아니라 마력으로 억지로 끓여낸 기름 덩어리일 뿐입니다. 셋째, 반품 주소 누락. 당신들은 이 물건이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면서 팔려고만 하는군요.”
나는 품 안에서 잿불 심부름꾼의 직인을 꺼내, 그가 내민 황금 보증서 정중앙에 찍어버렸다.
“마지막으로, 서명 왜곡. 나는 성자로서 서명하는 게 아닙니다. 심부름꾼으로서 이 ‘오배송된 쓰레기’의 수령을 거부하는 겁니다.”
지직, 소리와 함께 보증서에 찍힌 잿불 문양이 붉은 밀랍을 검게 태우기 시작했다. 성유병들의 공명이 멈추고, 가짜 신성력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감정회장은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귀족들은 경악한 표정으로 검게 타버린 보증서를 바라보았다.
클로드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광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다시 깃펜을 들었다.
“완벽해…… 완벽합니다! ‘성자께서 직접 거부하고 검증하신, 선택받지 못한 자들의 비원’!”
그는 무너진 현장에서도 새로운 마케팅 포인트를 찾아내고 있었다. 결국 감정회는 엉망이 된 채 해산되었지만, 나는 뒷맛이 개운치 않았다. 밖으로 나가는 길, 귀족들이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들었나? 성자가 거부한 성유라고 하더군. 희소성이 열 배는 뛰겠어.”
“그 검게 탄 보증서 조각이라도 구해야 하네. 그게 진짜 ‘성자의 거절’이 담긴 유물이라니까!”
나는 고개를 저으며 성유 조합 건물을 나섰다. 내 말은 반송되지 않았다. 오히려 저들의 탐욕스러운 장부 속에 더 깊숙이 박혀버렸다. 길가에 세워진 배송용 수레 옆에서 엘드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감정이 읽히지 않는 눈으로 나를 보며 장부를 덮었다.
“말이라는 건 물건보다 배달하기 어렵지.”
그의 말대로였다. 나는 물건은 되돌려 보냈을지 몰라도, 내게 씌워진 ‘성자’라는 이름표는 단 한 글자도 반송하지 못했다. 멀리서 클로드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듯했다.
“내일의 헤드라인은 이걸로 하죠. ‘성자, 성유의 시대를 끝내고 침묵의 시대를 열다’!”
망할. 다음 꼬리표는 제발 사람이 없는 곳으로 향하길 빌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