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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화 합본. 천장 없는 대성당에서 죄를 재는 저울다리까지

19화. 천장 없는 대성당

붉은 인장은 끈질겼다. 빗물에 번져 흐를 법도 하건만, 운송표 귀퉁이에 찍힌 흰 사슴의 낙인은 오히려 습기를 머금을수록 선명한 혈색을 띠었다. 그 기괴한 이정표를 따라 도착한 곳은 도시 외곽의 고지대였다. 한때는 장엄한 위용을 자랑했을 대성당이 그곳에 있었다.

하지만 그 성당에는 이름보다 먼저 눈에 띄는 기묘한 특징이 있었다.

“……지붕이 없네.”

피핀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평소의 장난기 어린 활력이 거세되어 있었다. 비단 피핀뿐만이 아니었다. 이네스는 성벽처럼 솟은 대성당의 외벽에 새겨진 기사단의 문장들을 훑으며 검자루를 쥔 손등에 핏대를 세웠다. 모르그는 이미 젖어버린 장부를 품 안 깊숙이 밀어 넣으며, 성당 입구에 흐르는 빗물의 배수 상태를 확인하느라 눈을 가늘게 떴다.

로웬은 젖은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눈앞의 대성당은 폭격을 맞은 것도, 세월에 풍화된 것도 아니었다. 마치 거대한 거인이 정교한 칼로 도려낸 것처럼, 예배당의 천장만이 정갈하게 사라져 있었다. 그 위로 잿빛 하늘이 그대로 노출되어 쏟아지는 빗줄기를 고스란히 받아내고 있었다.

그런데도 성당 안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그들은 비를 피하려 들기는커녕, 성소 안마당에 무릎을 꿇고 서서 두 손을 하늘로 치켜들고 있었다.

“오소서, 회수하시는 주여.”

“하늘의 뜻이 땅의 무게를 덜어내시니.”

신도들의 합창은 빗소리에 섞여 기괴한 화음을 만들어냈다. 로웬의 눈에는 그것이 경건한 예배라기보다는, 압류 집행을 기다리는 채무자들의 집단적 체념처럼 보였다.

그때였다.

-콰앙!

천장이 사라진 허공에서 거대한 쇳덩이가 떨어져 내렸다. 그것은 종(鐘)이었다. 하지만 종탑에서 줄이 끊어져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 빗줄기가 갈라지는 틈새에서 불쑥 튀어나온 종은 그대로 성당 바닥의 홈에 정확히 박혔다.

“기적이다!”

“하늘의 회수(回收)가 시작되었다!”

신도들이 환호하며 바닥을 기었다. 로웬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 광경을 지켜봤다. 종이 떨어진 바닥에는 정교하게 파인 홈이 있었다. 그 홈 주변으로는 빗물이 고이지 않게 설계된 배수로가 뻗어 있었고, 종이 박히는 순간 그 진동을 흡수하도록 완충재가 덧대어져 있었다.

이것은 사고도, 갑작스러운 이적도 아니었다. 철저하게 계산된 ‘하역 작업’의 현장이었다.

로웬은 발걸음을 옮겼다. 비에 젖은 장화를 질척이며 성소 안으로 들어서자, 사람들의 시선이 따갑게 꽂혔다. 하지만 로웬의 관심사는 신앙심이 아니라, 오직 이 축축한 곳에서 빨리 도장을 받고 떠나는 것뿐이었다.

“실례합니다. 심부름 센터에서 왔습니다. 여기 확인 도장 좀…….”

로웬이 품 안에서 젖은 운송표를 꺼내려 할 때였다. 누군가의 손이 거칠게 그의 손목을 낚아챘다.

“멈추십시오. 기적의 시간입니다.”

낮고 떨리는, 그러나 단호한 목소리였다. 로웬을 가로막은 것은 회색 부제복을 입은 젊은 사제였다.

그의 옷차림은 처참했다. 한때 은실로 정교하게 수놓아졌을 소매는 이미 올이 다 풀려 너덜거렸고, 어깨 부근은 방금 전 낙하한 종의 파편에 스쳤는지 길게 찢어져 붉은 살점이 비쳤다. 물을 잔뜩 머금은 성가대 띠는 어깨를 짓누르는 굴레처럼 보였고, 비에 젖어 이마에 딱 붙은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눈동자는 맑으려 애쓰고 있었으나 그 끝은 미세하게 경련하고 있었다. 그는 떨어지는 종을 피하며 신도들을 지키느라 온몸이 멍투성이였지만, 손목을 쥐는 힘만큼은 비정상적으로 강했다. 그 힘은 신앙이 아니라,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이 참혹한 현장을 ‘기적’이라는 단어 하나로 지탱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세속의 종이를 펼치기에 이곳은 너무 신성합니다. 하늘이 성물을 거두어 가시는 중이니, 입을 다물고 경배하십시오.”

사제가 로웬의 운송표를 강제로 접어 밀어 넣으며 속삭였다. 로웬은 사제의 눈을 빤히 바라봤다. 겁에 질려 있었다. 그는 지붕이 사라진 이 상황이 재앙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재앙이라 인정하는 순간, 이곳에 모인 저 가련한 신도들이 무너질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로웬이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신성한 건 알겠는데, 부제님. 저기 떨어지는 종 안쪽 좀 보셨습니까?”

“……뭐라고요?”

“저 종, 안쪽에 소리가 나는 추가 없잖아요. 대신 복잡한 톱니바퀴랑 운송용 로프 고리가 달려 있네요. 저건 종이 아니라, 일정 무게가 차면 자동으로 낙하하게 설계된 ‘성물함 외벽’ 아닙니까?”

사제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로웬은 사제의 손을 뿌리치고, 방금 떨어진 종 근처로 걸어갔다. 주변의 신도들이 웅성거렸지만, 로웬은 아랑곳하지 않고 구석에 놓인 커다란 성물함을 가리켰다.

“여기 붙은 인장도 재밌네요. ‘반납 기한 경과에 따른 강제 회수’. 이거 신의 은총이라기보다는, 빌려 간 물건 안 갚아서 담보 잡으러 온 것 같은 문구인데요?”

“그, 그건…… 신학적인 비유일 뿐입니다! 하늘의 재산을 땅이 잠시 맡아두었다가……!”

“아, 예. 비유치고는 아주 구체적이네요. 성물 보관료 미납에 따른 연체 이자 계산법까지 적혀 있는 걸 보면.”

로웬은 이네스를 힐끗 바라봤다. 그녀는 성물함 한편에 새겨진 기사단의 낙인을 보며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그 표정은 분노라기보다는 수치심에 가까웠다. 피핀은 귀를 막은 채 바닥의 배수로만 응시했다. 종이 떨어질 때마다 울리는 박자가 그녀의 기억 속 어떤 비극적인 리듬을 건드리는 모양이었다.

모르그는 그사이 성당 벽면에 붙은 회계 장부를 훑고 있었다.

“주인님, 여기 ‘빈 옥좌 회계’ 표식이 있습니다. 이 성당, 이미 파산 상태입니다. 지붕이 날아간 게 아니라, 지붕 자체를 성물로 취급해서 회수당한 거군요.”

로웬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도들은 여전히 비를 맞으며 찬양을 부르고 있었지만, 그것은 예배가 아니라 거대한 물류 창고의 소음 속에서 길을 잃은 이들의 비명이었다.

로웬이 사제를 다시 돌아봤다.

“부제님, 이름이?”

“……세라핀. 세라핀 바일입니다. 이 성당의 임시 부제를 맡고 있습니다.”

사제, 세라핀은 이제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로웬은 그의 떨리는 손에서 구겨진 운송표를 다시 뺏어 들었다.

“좋아요, 세라핀 부제님. 신학 논쟁은 관심 없고요. 이 비 좀 멈추게 하죠. 도장 찍을 종이가 젖으면 곤란하니까.”

“비, 비를 어떻게 멈춘단 말입니까? 이건 하늘의……!”

“하늘이 아니라 배관 문제죠.”

로웬은 세라핀을 지나쳐 성당 중앙의 거대한 종줄로 다가갔다. 그는 종줄을 잡아당기는 대신, 그것을 꼬아 옆에 있는 천막 지지대에 걸었다. 그리고는 바닥에 흩어진 성물함 덮개들을 발로 차서 빗물 홈의 흐름을 뒤바꿨다.

“이네스, 저기 저 성물함 고리 좀 끊어줘요. 피핀, 가서 저쪽 배수로에 쌓인 오물 좀 치우고. 모르그는 운송표 도장 찍는 순서랑 물품 목록 일치하는지 대조해.”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세라핀이 소리쳤지만, 로웬은 멈추지 않았다. 로웬이 천막의 각도를 조절하고 종줄의 텐션을 바꾸자, 기묘한 현상이 일어났다. 사방으로 튀던 빗물이 일정한 방향으로 모여 성당 밖으로 거세게 뿜어져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동시에 허공에서 떨어지려던 다음 ‘종’이 엉킨 줄에 걸려 멈춰 섰다.

기적이 멈췄다. 아니, 정확히는 ‘회수 절차’가 물리적으로 중단됐다.

쏟아지던 빗줄기가 성소 중앙을 비껴가기 시작하자, 비로소 사람들 사이에서 정적이 흘렀다. 그들은 더 이상 비에 젖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에 당황하며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로웬은 젖은 옷을 털며 세라핀 앞으로 운송표를 내밀었다.

“자, 이제 비 안 오니까 도장 찍어주시죠. 그리고 세라핀 씨. 기적이라고 우기는 것도 정도껏 하세요. 천장 없으면 비 오는 게 당연한 거고, 물건 안 갚으면 뺏기는 게 당연한 겁니다. 그걸 신의 뜻이니 뭐니 포장해 봐야, 나중에 청구서 날아올 때 감당 못 해요.”

세라핀은 로웬의 손에 들린 운송표와, 비가 멎은 성소의 바닥을 번갈아 보았다. 그의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빗물과 섞여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품속에서 낡은 인장을 꺼냈다.

“……당신은, 대체 누굽니까? 성직자도, 기사도 아닌 것 같은데.”

“그냥 심부름꾼입니다.”

로웬이 건조하게 대답했다.

철컥, 하고 운송표에 도장이 찍혔다. 붉은 인장 옆에 성당의 공식 인장이 더해지자, 운송표에서 미세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명심하십시오.”

세라핀이 인장을 거두며 낮게 읊조렸다.

“지붕을 가져간 이들이 다음으로 노리는 건, 그 아래에서 숨 쉬는 자들의 영혼일 겁니다. 회수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요.”

로웬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하고 돌아섰다. 성당 밖으로 나가는 길, 피핀은 여전히 귀를 막고 있었고 이네스는 성물함에 새겨진 이름을 손톱으로 긁어내고 있었다. 모르그는 장부의 마지막 줄에 ‘지붕 소유권 이전 완료’라고 적어 넣었다.

대성당 뒤편, 구름 사이로 잠깐 드러난 해는 이미 죽어버린 듯 빛바랜 회색이었다. 로웬은 다음 심부름 목적지를 확인하며 젖은 장화를 고쳐 신었다. 지붕이 사라진 자리로, 다시 차가운 빗방울이 한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회수는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20화. 죄를 재는 저울다리

축축하게 젖은 인장이 낙하 종 안쪽의 저울 문장에 닿는 순간, 세상이 뒤집혔다. 아니, 정확히는 발밑의 감각이 수평을 잃고 거대한 축을 중심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우와악! 저, 저번보다 더 어지러운데요!”

피핀의 비명이 허공에서 흩어졌다. 로웬은 입술을 꽉 깨물며 품 안의 물건들을 갈무리했다. 차가운 강바람이 뺨을 때렸고, 비린내 섞인 물안개가 폐부 깊숙이 파고들었다. 시야가 돌아왔을 때, 그들의 발밑에는 돌바닥이 아니라 위태롭게 흔들리는 거대한 철제 다리가 놓여 있었다.

다리는 거대한 저울이었다. 강 양옆으로 뻗은 교각 위로 굵직한 쇠사슬이 연결되어 있었고, 사람들이 밟고 선 상판은 양쪽의 무게에 따라 기우뚱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내려놔! 더 내려놔야 한다고!”

“이건 내 아이의 유품이야! 제발, 이것만은!”

“죄가 무거우면 다리가 가라앉는다잖아! 당신 때문에 우리 다 죽을 셈이야?”

아수라장이었다. 다리 입구에는 수십 명의 생존자가 뒤엉켜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짐꾸러미를 강물 속으로 던져넣고 있었다. 식량 자루, 낡은 담요, 심지어는 가족의 유골함으로 보이는 단지까지도 차가운 강물 속으로 속절없이 추락했다.

그들의 목에는 하나같이 조잡한 나무 조각이나 금속 패가 걸려 있었다. ‘면죄표’라고 불리는 그것들을 서로 빼앗고 빼앗기는 광경은 가히 지옥도라 할 만했다.

“이네스, 정신 차려.”

로웬이 짧게 속삭였다. 이네스는 멍한 눈으로 사람들의 목에 걸린 이름표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사단의 명패가 쓰레기처럼 버려지던 잿더미 속의 기억이 그녀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녀의 손이 칼자루를 꽉 쥐어 하얗게 질렸다.

“……저들은 지금 뭘 버리고 있는 거지?”

이네스의 목소리가 떨렸다. 로웬은 대답 대신 다리 입구, 사람들의 앞길을 가로막고 선 한 남자를 가리켰다.

그는 다리 한복판에 설치된 거대한 저울대 앞에 서 있었다. 남자는 몰려드는 사람들의 짐을 하나하나 저울에 달고, 옆에 놓인 장부와 대조하며 고함을 질렀다. 사람들은 그를 죄를 심판하는 엄중한 재판관이라도 되는 양 두려워하며, 그가 입에서 굴린 숫자에 따라 자신의 전 재산을 강으로 던졌다.

로웬이 성큼성큼 다가갔다. 남자는 젖은 가죽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는데, 그 앞치마는 강물의 안개와 사람들의 땀이 절어 눅눅한 광택을 내뿜었다. 어깨 한쪽은 오랜 세월 저울끈을 지탱해온 듯 기형적으로 내려앉아 있었고, 손목에는 낡은 면죄표 끈들이 훈장처럼 칭칭 감겨 있었다.

그는 사람들의 비난과 애원을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았다. 대신 숫자를 읽을 때만 기계적으로 또또해지는 목소리로 판결을 내릴 뿐이었다. 거대한 눈금추를 옮길 때마다 허리를 삐끗하며 신음하면서도, 그의 시선은 오로지 다리의 눈금과 사람들의 떨리는 손끝 사이만을 분주하게 오갔다. 그는 재판관이라기보다는, 쏟아지는 원망을 숫자의 장막 뒤로 피하고 싶어 하는 가련한 부역자에 가까웠다.

“다음! 40리브라 초과다. 더 버려! 영혼의 무게를 줄이지 않으면 다리는 움직이지 않는다!”

남자의 외침에 한 노인이 울음을 터뜨리며 품에 안은 봇짐을 강물로 밀어 넣었다.

“잠깐.”

로웬이 저울대 앞을 가로막았다. 남자가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충혈된 눈이 로웬의 평범한 복장을 훑더니 다시 장부로 향했다.

“비켜라. 순서를 기다려. 짐이 많아 보이는군. 저 뒤로 가서 버릴 것부터 정하고…….”

“이 눈금, 영혼의 무게가 아니지?”

로웬의 말에 남자의 펜 끝이 멈췄다. 뒤편에서 지켜보던 모르그가 성큼 다가와 저울 옆면에 새겨진 마모된 문자를 손가락으로 훑었다.

“……단위가 이상하군. 이건 도덕적 수치가 아니다. 로웬, 이 눈금은 항구의 하역장이나 창고에서 쓰는 세금 산정 단위야. 여기 이 문양은 ‘보관료 체납’을 의미하는 인장이고.”

피핀이 옆에서 거들었다.

“보관료요? 그럼 이 사람들이 던지는 게 죄가 아니라 그냥 ‘창고 이용료’ 대신이라는 거예요?”

주변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짐을 버리려던 생존자들이 멍청한 얼굴로 로웬 일행을 바라보았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건 성당에서 내려준 저울다리다! 죄가 무거운 자는 건널 수 없다고 했단 말이다!”

군중 속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로웬은 코방귀를 뀌며 저울대 위에 놓인 장부를 낚아챘다. 계량원 남자가 당황해하며 장부를 뺏으려 했지만, 이네스가 검집 채로 그의 팔을 가볍게 누르자 금세 사색이 되어 물러났다.

“성당이 아니라 창고겠지. 정확히는 ‘연옥 화물 일시 보관소’ 정도 되려나.”

로웬이 장부를 빠르게 넘겼다.

“이름, 품목, 반입 일자, 그리고 연체료. 이 다리는 죄를 재는 게 아냐. 이 다리를 통과하는 비용, 즉 운송비와 보관료가 결제됐는지를 확인하는 장치일 뿐이지. 저울이 기우는 건 죄 때문이 아니라, 너희가 든 짐에 붙은 ‘미납 세금’ 무게 때문이야.”

로웬은 허리춤에서 아까 대성당에서 챙긴 젖은 인장을 꺼내 저울대 한복판의 홈에 끼워 넣었다.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저울의 눈금이 요동치더니, 붉은색이던 숫자들이 푸른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계량원 양반. 아니, 임시 계량원 오델 리브 씨?”

로웬이 장부 첫 페이지에 적힌 이름을 나직하게 읽었다. 남자의 어깨가 크게 움츠러들었다.

“당신, 이거 죄 재는 재판관 노릇 하는 거 즐거워서 하는 거 아니잖아. 그냥 여기 먼저 도착했다가 나가는 법을 알게 됐고, 뒤에 오는 사람들한테 통행세 걷는 심부름꾼 노릇 하는 거지? 그래야 당신 통행료가 면제될 테니까.”

오델 리브는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그는 더 이상 엄격한 계량원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눈초리를 피하려 고개를 숙인, 겁에 질린 피난민일 뿐이었다.

“……나도 어쩔 수 없었소. 이 다리는 무게가 맞지 않으면 절대 반대편 문을 열어주지 않는단 말이오! 누군가는 계산을 해야 했어! 내가 아니었어도 누군가는 이 장부를 잡았을 거란 말이야!”

“그래서 사람들의 생존 물자를 강에 버리게 했나?”

이네스의 목소리에 서늘한 분노가 서렸다. 그녀는 사람들의 목에 걸린 면죄표를 가리켰다.

“저 이름표들은 뭐지? 저것도 죄의 무게를 줄이는 데 필요한 건가?”

오델이 더듬거리며 답했다.

“그건…… 일종의 화물 인식표요. 왕궁이나 성당의 인장이 찍힌 표가 있으면 보관료가 할인되니까…… 그래서 다들 남의 것을 뺏으려고…….”

피핀의 안색이 나빠졌다. 그는 자신의 품 안을 슬쩍 확인하더니 입을 꾹 다물었다. 왕궁 표식이 찍힌 면죄표. 그것이 이곳에선 단순한 신분 증명이 아니라 ‘배송비 할인권’ 취급을 받고 있었다.

로웬은 저울의 균형추를 손으로 밀었다. 묵직한 철 덩어리가 끼익 소리를 내며 레일 위를 이동했다.

“죄를 고백할 필요 없어. 참회도 하지 마. 이건 신앙의 영역이 아니라 물류의 영역이니까.”

로웬이 군중을 향해 외쳤다.

“짐 버리지 마세요! 대신 짐에 붙은 이름표들을 다 떼서 여기 저울 접시에 올려놓으쇼. 그리고 여기 계신 계량원 친구가 장부에서 ‘미납’ 항목을 ‘이월’로 체크하면 다리는 움직입니다.”

“이, 이월이라니? 그게 무슨……?”

오델이 경악하며 물었다. 로웬이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외상 모르나, 외상? 여기 통과하는 놈들 다 죽은 놈들 아니잖아. 살아서 나갈 놈들인데, 나중에 청구서 보내면 될 거 아냐. 도착지 주소 적고, 서명 받아. 그게 심부름꾼의 방식이야.”

“하지만 주소가 어딘 줄 알고……!”

“잿불 심부름 센터.”

로웬이 이죽거리며 답했다.

“모든 비용은 그쪽으로 청구하라고 해. 내가 나중에 일괄 정산할 테니까.”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강물로 던져지려던 봇짐들이 다시 품 안으로 돌아왔다. 이네스는 여전히 납득하기 힘들다는 표정이었지만, 적어도 사람들의 목숨줄 같은 짐들이 버려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칼자루를 쥐었던 손을 느슨하게 풀었다.

모르그는 그사이 오델 리브의 장부를 빼앗아 숫자를 검토하고 있었다.

“로웬, 이 방식으로는 균형이 완벽하게 맞지 않는다. 이월 처리를 해도 물리적인 무게 차이는 여전해. 다리가 반대편 교각에 닿으려면 적어도 300리브라의 무게가 부족하다.”

“부족하다고? 아까는 무겁다며.”

“방금 네가 인장을 꽂아서 ‘보관료 면제’ 구역으로 설정을 바꿨잖아. 그러니 이제는 다리가 너무 가벼워서 반대편으로 기울지가 않는 거지.”

로웬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죄가 무거워도 못 가고, 너무 결백해도 못 가는 다리라니. 참으로 고약한 설계였다.

“야, 오델. 여기 남은 균형추 중에 제일 무거운 게 뭐지?”

오델 리브가 덜덜 떠는 손으로 다리 난간 아래에 매달린 거대한 무쇠 덩어리를 가리켰다.

“저, 저건 조절용이 아니라 고정용이라 옮길 수 없소. 저걸 움직이려면 성인 남자 다섯은 달라붙어야…….”

로웬은 이네스를 바라보았다.

“이네스, 기사단 훈련할 때 무거운 거 옮기는 법도 배웠나?”

이네스는 대답 대신 묵묵히 다리 난간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망토가 강바람에 펄럭였다. 그녀는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거대한 무쇠 추를 연결한 사슬을 움켜쥐었다.

“……으차!”

근육이 터질 듯 팽팽하게 당겨지고, 쇠사슬이 비명을 질렀다. 믿기지 않는 광경에 오델과 생존자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네스의 전신에서 은은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며, 고정되어 있던 무쇠 추가 서서히 레일을 따라 미끄러졌다.

다리가 기괴한 소리를 내며 반대편으로 천천히 기울기 시작했다. 안개 너머로 굳게 닫혀 있던 철문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됐어! 문이 열린다!”

피핀이 환호했다. 사람들은 앞다투어 열리는 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오델 리브는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자신의 손에 들린 펜을 내려놓았다. 그의 굽은 어깨가 조금은 가벼워 보였다.

“저기, 심부름꾼이라고 했나?”

오델이 로웬의 뒷모습을 불렀다. 로웬이 고개를 돌렸다.

“정말로…… 나중에 그쪽으로 청구하면 되는 거요? 이 사람들의 죄, 아니 세금을?”

로웬은 씩 웃으며 주머니에서 낡은 명함 한 장을 꺼내 저울대 위에 올려두었다.

“어차피 세상 모든 건 공짜가 없거든. 나중에 지옥에서 고지서 날아오면 내 이름 대고 할부해달라고 해.”

로웬은 이네스와 피핀, 그리고 장부를 챙긴 모르그를 이끌고 열린 문 너머로 발을 내디뎠다. 뒤편에서 오델 리브가 자신의 젖은 앞치마를 벗어 던지는 소리가 들렸다.

다리를 건너는 내내 이네스는 말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손바닥에 남은 쇠사슬의 붉은 자국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로웬.”

“왜?”

“죄가 무게라면, 오늘 우리가 옮긴 건 죄인가, 아니면 그냥 쇳덩이인가?”

로웬은 안개 너머를 응시하며 답했다.

“글쎄. 내 눈엔 그냥 지불해야 할 운송장으로 보이던데.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우리는 성자가 아니라 심부름꾼이니까.”

다리 너머, 다시금 어둠이 짙어졌다. 저울다리의 비명 소리가 멀어지고, 그들의 앞에는 새로운 의뢰서가 기다리고 있었다.

다리 아래 강물은 마지막까지 이상하게 고요했다. 흔들리는 철판 그림자 사이로, 빛을 잃은 둥근 눈금판 하나가 잠깐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그림자를 받아야 할 홈들은 아무것도 비추지 않았고, 모르그는 그 무늬를 보자마자 젖은 장부 귀퉁이에 `불 꺼진 태양시계`라고 적었다. 로웬은 그 글씨를 보고도 모른 척했지만, 운송표의 다음 칸은 이미 검은 물을 먹은 듯 어두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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