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8화 합본. 용의 이빨 방앗간에서 흰 사슴의 장례행렬까지
17화. 용의 이빨 방앗간
회색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차가운 결정이 아니라, 땅에서 솟구쳐 공중에 머무는 텁텁하고 무거운 가루의 눈이었다. 잿빛 분진은 행인들의 속눈썹에 내려앉아 딱딱하게 굳었고, 들이마실 때마다 목구멍 안쪽에 꺼끌꺼끌한 모래칠을 했다.
로웬은 코끝을 간지럽히는 비린내를 맡으며 걸음을 멈췄다. 성자의 그림자 극장에서 훔쳐낸—아니, 정당하게 수거한—밀가루 포대에서 흘러나온 흔적은 도심 한복판의 거대한 석조 건물로 이어져 있었다.
“방앗간치고는 너무 요란하군.”
로웬의 말대로였다. 육중한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소리가 지면을 타고 발바닥까지 전해졌다. 쿵, 쿵, 쿵. 일정한 박자로 울리는 진동은 마치 거대한 괴물이 바닥 아래에서 심장을 두드리는 것 같았다. 건물 정문 앞에는 누더기를 걸친 사람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빈 그릇이나 낡은 자루가 들려 있었고, 눈에는 생기 대신 지독한 허기만이 번들거렸다.
“성자의 은총입니다! 한 줄로 서세요! 밀가루는 도망가지 않습니다!”
건물 입구에서 목청을 높이는 사내들이 보였다. 그들은 신전의 사제복 대신 때 절은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으나, 사람들은 그들을 성자라도 보는 양 숭배 섞인 눈길로 바라보았다.
“성자의 은총이라니. 저 가루에 뭐가 섞였는지 알면 그런 소리가 안 나올 텐데.”
피핀이 코를 킁킁거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평소의 능청스러운 미소는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건물의 육중한 진동이 울릴 때마다 어깨를 움츠렸다. 왕궁 지하의 어두운 기억이 저 톱니 소리에 섞여 나오기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이네스는 허리춤의 검자루를 꽉 쥔 채 건물을 살폈다.
“건물 외벽에 새겨진 문양을 보십시오, 로웬 님. 저건 일반적인 방앗간의 표식이 아닙니다. 옛 왕국군 군수 보급소의 상징입니다. 그것도 최전방 요새에나 쓰이던……”
“이름은 거창하네요. 용의 이빨 방앗간이라니.”
로웬이 문 앞에 걸린 낡은 간판을 가리켰다. 톱니바퀴 모양의 용머리가 새겨진 간판은 녹슬어 있었지만, 그 눈 부분만큼은 검게 빛나고 있었다. 로웬은 어깨에 메고 있던 빈 포대를 고쳐 잡으며 군중 사이를 파고들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등기 우편 확인하러 왔습니다.”
“뭐? 뭐야, 당신! 줄 뒤로 가!”
앞치마를 두른 덩치 큰 사내가 로웬의 앞을 막아섰다. 로웬은 대답 대신 품 안에서 꼬깃꼬깃한 운송장을 꺼내 보였다. 그림자 극장에서 챙겨온, 검은 직인이 찍힌 장부였다.
“운송장 도장이 누락됐더라고요. 이거 확인 안 되면 나중에 내 장부 수지타산이 안 맞아서요. 책임자 어디 있습니까?”
덩치 큰 사내가 장부를 보더니 안색을 바꿨다. 그는 로웬의 행색을 훑어보다가, 뒤에 선 이네스와 모르그의 기세에 눌린 듯 마지못해 길을 터주었다.
“안쪽 사무실에 계신다. 하지만 지금은 바쁘시니까……”
로웬은 사내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방앗간 안으로 발을 들였다.
내부는 바깥보다 훨씬 더 지독했다. 거대한 화강암 맷돌이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었고, 그 위로 쏟아지는 것은 순수한 밀만이 아니었다. 누런 곡물 사이사이에 허연 뼛가루와, 기분 나쁜 광택을 내뿜는 검은 사과 씨앗이 섞여 들어가는 광경이 로웬의 눈에 포착됐다.
그 맷돌 뭉치 너머, 복잡하게 얽힌 기계 장치 한가운데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밀가루와 뼛가루가 땀에 엉겨 붙어 마치 회색 석고상을 방불케 하는 기묘한 외형을 하고 있었다. 팔꿈치까지 걷어붙인 셔츠는 본래의 색을 짐작할 수 없을 만큼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고, 허리춤에는 쇳소리를 내는 낡은 군수용 열쇠 꾸러미가 묵직하게 매달려 있었다. 남자의 머리카락은 가루가 굳어 고드름처럼 뻣뻣하게 뻗쳐 있었는데, 그가 고개를 돌릴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로웬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핏발이 서 있었으나 눈동자만큼은 기계적인 정확함으로 장부의 숫자를 쫓고 있었고, 톱니바퀴가 부딪치는 금속음에 맞춰 말끝을 툭툭 끊어 뱉는 습관은 그가 오랫동안 이 소음 속에 매몰되어 살아왔음을 증명했다. 로웬은 그를 보는 순간, 이 남자가 단순히 빵을 만드는 이가 아니라 거대한 유기체와도 같은 이 기계의 일부로 기능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도장? 배급 시간엔…… 안 받는다. 뒤로 가서…… 줄이나 서.”
남자가 쇳가루가 섞인 듯한 쉰 목소리로 내뱉었다.
“이거 제때 처리 안 하면 저주가 섞인 가루가 온 시내에 퍼질 텐데요.”
로웬이 맷돌 옆에 쌓인 포대 하나를 툭 걷어찼다. 포대 입구가 벌어지며 검은 씨앗이 섞인 가루가 쏟아져 나왔다.
남자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기름칠용 붓을 내려놓고 로웬에게 다가왔다.
“저주? 그런 한가한 소릴…… 하는군. 밖을 봐라. 저주보다 무서운 게…… 뭔 줄 아나? 배고픔이다. 저 사람들은…… 이게 악마의 살점이라도…… 기꺼이 씹어 삼킬 거다.”
“그렇다고 불멸왕의 군량 체계를 되살리는 건 이야기가 다르죠. 이건 사람을 먹이는 게 아니라, 잠재적인 시체들을 살찌우는 거 아닙니까?”
로웬의 지적에 남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네스가 검을 반쯤 뽑으며 경계 태세를 갖췄지만, 남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나는 코르빈 렌. 이 방앗간의…… 관리인이자, 군수 계약 보관인이다. 성자께서…… 원자재를 대주시고, 나는 갈 뿐이다. 기계는…… 멈추지 않는다. 멈추면…… 폭동이 일어날 테니까.”
“멈춰야 할 것 같은데요. 지금 장치가 과열됐어요.”
로웬이 맷돌의 구동축을 가리켰다. 분진이 자욱한 공기 사이로 매캐한 타는 냄새가 섞여 들고 있었다. 톱니바퀴의 맞물림이 미세하게 어긋나며 불꽃이 튀었다.
“사과 씨앗은 유분이 많아요. 거기다 뼛가루는 건조하죠. 이 상태에서 마찰열이 올라가면, 여기 있는 가루들이 전부 거대한 폭탄으로 변할 겁니다. 분진 폭발이라고 들어봤습니까?”
코르빈 렌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는 급히 레버를 당기려 했으나, 이미 열팽창으로 인해 금속 막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안 움직여……! 톱니가…… 물렸어!”
“비켜봐요. 이래 봬도 빵집 배달하면서 방앗간 밥 좀 먹었으니까.”
로웬이 코르빈을 밀치고 장치 앞으로 다가갔다. 피핀이 질겁하며 소리쳤다.
“로웬! 미쳤어? 저거 터지면 우리 다 가루가 된다고!”
“그러니까 안 터지게 해야지. 이네스, 저기 습기 찬 포대들 보이죠? 저거 이쪽으로 던져요! 모르그, 장부 챙겨서 벽 뒤로 숨고!”
로웬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빵을 구울 때 화덕의 열기를 조절하던 감각을 되살렸다. 가루의 무게, 공기의 흐름, 그리고 습도. 그는 코르빈이 애지중지하던 투입 순서를 무시하고, 아직 갈리지 않은 축축한 호밀 포대를 강제로 구동축 사이에 끼워 넣었다.
끼이익—!
고막을 찢는 듯한 비명이 들렸다. 금속과 금속이 비명을 지르며 마찰을 일으켰다. 로웬은 뜨거운 증기가 솟구치는 와중에도 손을 떼지 않았다. 그는 톱니의 물림이 느슨해지는 찰나를 기다려, 옆에 있던 냉각수 통을 통째로 들이부었다.
치이익!
자욱한 수증기가 방앗간 내부를 덮었다. 거대한 맷돌이 몇 번 더 덜컥거리더니, 이내 서서히 속도를 줄이다가 완전히 멈춰 섰다.
침묵이 찾아왔다.
방금 전까지 대지를 흔들던 진동이 사라지자, 오히려 그 공백이 귀를 먹먹하게 만들었다. 코르빈 렌은 넋이 나간 듯 멈춰버린 기계를 바라보았다. 그의 회색 머리카락에서 땀과 섞인 가루가 뚝뚝 떨어졌다.
“멈췄어…… 기계가…… 멈췄다고.”
그는 떨리는 손으로 장치를 만져보려다, 열기 때문에 손을 거두었다.
“축하합니다. 폭발은 면했네요.”
로웬이 옷에 묻은 가루를 털어내며 무심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멈춘 기계 너머, 창밖을 향해 있었다.
방앗간 안쪽의 소란을 감지한 군중들이 술렁이고 있었다. 맷돌 소리가 멈췄다는 것은, 곧 배급이 중단되었다는 뜻이었다. 사람들의 눈빛에 당혹감이 서렸고, 이내 그것은 굶주린 짐승의 살기로 변해갔다.
코르빈 렌이 비틀거리며 로웬의 멱살을 잡았다.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봐라. 저주? 군량? 그게 다…… 무슨 상관이야! 이제 저 사람들에게…… 뭘 줄 거지? 빈 포대뿐이라고!”
로웬은 남자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그는 코르빈의 허리춤에서 흔들리는 군수 열쇠 꾸러미를 차갑게 응시했다.
“저주받은 빵을 먹고 산송장이 되는 게 나은지, 굶더라도 사람으로 죽는 게 나은지는 내가 정할 일이 아니죠.”
로웬은 바닥에 굴러다니는 빈 포대 하나를 발로 찼다.
“나는 그저 주문받은 대로 잘못 배달된 물건을 회수하러 온 심부름꾼일 뿐입니다. 이 가루들은 이제 압수예요.”
모르그가 재빨리 다가와 코르빈 렌의 책상 위에 있던 장부와 계약서들을 가로챘다.
“불멸왕의 인장이 찍힌 군수 기록물입니다. 이건 공식적인 증거로 확보하겠습니다.”
이네스는 문 입구를 막아서며 밖으로 쏟아지려는 군중의 기세를 억눌렀다. 기사의 위압감에 사람들은 주춤거렸지만, 그들의 원망 섞인 시선은 로웬의 등에 화살처럼 꽂혔다.
“로웬 님, 서둘러야 합니다. 이들이 언제까지 참아줄지 모르겠습니다.”
로웬은 대답 대신 바닥에 흩어진 검은 사과 씨앗 하나를 집어 들었다. 단단하고 차가운 씨앗. 이것이 갈려 들어가 사람들의 속을 채우고, 결국 그들을 성자의 꼭두각시로 만들었을 것이다.
장치를 멈추는 것은 쉬웠다. 분진 폭발을 막는 것도 기술적인 문제였다. 하지만 방앗간이 멈춘 뒤 남겨진 저 굶주린 눈동자들은 기술로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로웬은 품 안에서 도장 하나를 꺼냈다. 그림자 극장에서 훔친, 성자의 가짜 직인이었다. 그는 코르빈 렌이 내밀었던 미결제 운송장 위에 거칠게 도장을 찍었다.
쾅.
“운송료는 이걸로 퉁칩시다. 당신 목숨값 치고는 싸죠?”
로웬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앗간 뒷문으로 향했다. 피핀이 그의 뒤를 따르며 낮게 중얼거렸다.
“저 사람들, 내일이면 우리를 원망할 거야. 저주를 멈춘 영웅이 아니라, 빵을 뺏어간 악당으로 기억하겠지.”
“알아.”
로웬의 대답은 짧았다.
방앗간 밖으로 나오자 여전히 회색 가루 눈이 내리고 있었다. 사람들의 비명과 통곡 소리가 등 뒤에서 파도처럼 밀려왔다. 로웬은 손목에 묶인 장부 주머니를 꽉 쥐었다.
저주를 멈추는 대가는 항상 누군가의 끼니를 앗아가는 방식으로 지불되었다. 성자가 아니기에 할 수 있는 선택이었고, 성자가 아니기에 짊어져야 할 무게였다.
“다음 장소는 어디입니까, 로웬 님?”
이네스의 물음에 로웬은 텁텁한 입안의 침을 뱉어내며 답했다.
“먼저 씻고 싶네요. 이 망할 뼛가루 냄새 때문에 코가 마비될 지경이라.”
그의 발걸음은 무거웠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용의 이빨 방앗간의 거대한 그림자가 그들의 뒤로 길게 늘어졌다. 톱니는 멈췄으나, 이 도시의 굶주림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18화. 흰 사슴의 장례행렬
방앗간에서 뺏다시피 챙겨온 장부의 다음 칸은 비어 있었다. 하지만 종이 위에 남은 압인(壓印)의 흔적은 길을 정직하게 가리켰다. 도시 외곽, 눅눅한 안개가 폐허가 된 보루 유적을 핥고 지나가는 서쪽 샛길이었다.
“이거 기분이 영 더러운데요. 보통 이런 안개 속에서는 보물을 든 요정이나 예쁜 귀신이 나와야 하는 거 아닙니까? 왜 쇠 비린내랑 썩은 짚 냄새만 나는 거죠?”
피핀이 코를 훌쩍이며 투덜거렸다. 평소라면 로웬이 적당히 맞장구를 쳤겠지만, 지금 로웬은 손바닥에 놓인 운송표의 도장 순서를 복기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무기 보급’, ‘성수 수령’, ‘영혼 위탁’ 그리고 다음은 비어 있는 ‘회수’.
갑자기 멀리서 일정한 박자의 소리가 들려왔다.
둥, 둥, 둥.
낮게 깔리는 북소리 뒤로 쇳소리가 섞인 종소리가 규칙적으로 따라붙었다. 피핀의 어깨가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농담을 던지려던 입술이 굳고, 그는 마치 왕궁의 엄격한 의식이라도 지켜보는 것처럼 걸음걸이를 죽였다.
“로웬 님, 저 소리…… 장례곡입니다. 그것도 아주 격식이 높은 전사자를 위한 곡조예요. 그런데 박자가 지나치게 느려요. 죽은 자를 보내려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붙잡아두려는 것처럼.”
안개를 헤치고 나타난 것은 기이한 행렬이었다.
행렬의 선두에는 거대한 흰 사슴 한 마리가 서 있었다. 사슴의 뿔은 기괴할 정도로 거대하게 자라나 있었는데, 그 가지마다 수십 개의 이름표와 녹슨 방패 조각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사슴이 고개를 흔들 때마다 금속 파편들이 부딪히며 처연한 소리를 냈다. 그 뒤를 따르는 마을 사람들은 모두 흰 소복을 걸치고 넋이 나간 눈으로 북을 두드렸다.
“멈춰라. 이 길은 아직 열리지 않았다.”
행렬의 앞을 막아서는 남자가 있었다. 로웬이 운송표를 흔들며 다가갔다.
“운송표 도장 찍으러 왔습니다. 여기 ‘회수’ 칸이 비어 있어서요. 길 좀 비켜주시죠. 갈 길이 멉니다.”
남자는 대답 대신 손에 든 작은 종을 흔들었다. 챙그랑, 날카로운 금속음이 공기를 찢었다.
“제사가 끝나지 않았다. 기사님들이 우리를 지켜주고 계셔. 사슴의 뿔에 달린 이름표가 다 떨어질 때까지, 우리는 이 장례를 멈출 수 없다. 그것이 이 마을의 계약이다.”
“계약치고는 효율이 너무 꽝인데요. 이네스, 저 사슴 뿔에 달린 거, 네 동료들 것 맞지?”
로웬의 물음에 이네스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사슴의 왼쪽 뿔 끝, 핏자국이 눌어붙은 은색 이름표에는 그녀가 잘 아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제3기사단, 보급대 소속들의 이름입니다. 전사한 위치를 찾지 못해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했던 이들이 왜 여기에.”
이네스가 검 손잡이를 꽉 쥐자, 남자가 창백한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안 돼! 이 행렬이 멈추면 기사님들의 가호가 사라진다! 그러면 저 안개 속의 괴물들이 마을을 덮칠 거야! 우리는 죽음을 기리는 게 아니라, 그분들을 살아있는 방벽으로 부리고 있는 거란 말이다!”
로웬은 그제야 남자의 모습을 제대로 훑어보았다.
그는 태워 바친 제물의 흰 재가 눅눅하게 달라붙은 장례용 망토를 걸치고 있었는데, 옷깃마다 거친 사슴 털로 만든 목끈이 흉측하게 덧대어져 있었다. 제문을 쓰느라 검은 장례용 먹물이 손가락 마디마디에 문신처럼 배어 있었고, 종을 쥐고 있는 손목은 뼈가 도드라질 만큼 앙상했다. 며칠을 자지 못한 것인지 붉게 충혈된 눈은 초점을 잃은 채 흐릿했지만, 조문객들을 달래고 행렬을 이끄느라 낮게 갈라진 목소리만큼은 기이한 마력을 담고 있었다. 그는 악의에 가득 찬 사제라기보다는,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산 자들의 억지에 등 떠밀려 영원히 끝나지 않을 장례식에 갇혀버린 가련한 포로처럼 보였다.
모르그가 기계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분석 완료. 저 흰 사슴은 생명체가 아님. 기사단의 잔류 사념과 군수 물자의 마력이 엉킨 일종의 ‘이정표 에테르’. 장례가 반복될수록 기사단의 실제 전사 좌표는 왜곡되고, 기록은 지워짐. 남는 것은 영원히 반복되는 보급로 수호령뿐.”
로웬이 혀를 찼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을 성불시키는 게 아니라 보초를 세우고 있는 거네. 그것도 아주 악질적인 잔업으로.”
“로웬 님, 저건 모독입니다.”
이네스의 목소리에 살기가 어렸다. 마을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뒤로 물러나면서도 북채를 놓지 않았다. 그들에게 이 기괴한 장례는 생존을 위한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로웬이 한숨을 내쉬며 마을 사람들과 장례지기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남자가 종을 휘두르며 제지하려 했지만, 로웬은 가볍게 그 손목을 낚아챘다.
“이봐요, 장례 관리자 양반. 장례도 결국은 물자 정리예요. 보낼 건 보내고 남길 건 남겨야 장부가 맞지. 당신들 지금 도장 순서를 완전히 틀려먹었어.”
“무슨……!”
“북소리가 너무 빨라. 그리고 종은 세 번이 아니라 두 번만 쳐야지. 이 이름표들은 사슴 뿔에 다는 게 아니라, 땅에 묻었어야 하는 물건이고.”
로웬은 장부에서 뜯어낸 운송표를 사슴의 이마에 들이밀었다.
“군수 보급 체계에서 ‘회수’는 마지막 단계야. 사용된 화살촉 하나, 부러진 칼날 하나까지 제자리로 돌려놓는 거. 그런데 당신들이 이걸 장례랍시고 붙들고 있으니 보급로가 안 열리잖아. 내 퇴근 시간이 늦어지고 있다고.”
로웬이 북 치는 노인의 북채를 뺏어 들었다. 그리고는 전혀 다른 박자로 북면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둥, 두둥. 둥.
피핀이 눈을 크게 떴다. 그것은 왕실의 위령곡이 아니었다. 보급 부대가 임무를 마치고 귀환할 때 부는, 지극히 실무적이고 건조한 ‘귀환 점호’의 박자였다.
로웬은 사슴 뿔에 엉망으로 엉킨 이름표들을 하나씩 떼어내기 시작했다.
“이건 이네스네 동료 거니까 반납. 이건 녹슬었으니까 폐기. 이건 주인 찾아줘야 하니까 보관.”
“그만둬! 그러면 기사님들이 떠나간단 말이야!”
장례지기 남자가 울부짖으며 매달렸다. 로웬은 차가운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떠나는 게 아냐. 이제야 퇴근하는 거지. 죽어서까지 당신들 밭기 지키느라 야근하는 게 가호라고 생각하나? 그건 저주야.”
마지막 이름표가 로웬의 손에 떨어지자, 흰 사슴의 몸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거대했던 사슴의 형체가 모래알처럼 흩어지며, 그 안에 갇혀 있던 기사들의 잔상이 잠시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들은 공포에 질린 마을 사람들을 원망하는 대신, 마침내 짐을 내려놓은 보급병들처럼 홀가분한 표정으로 허공에 흩어졌다.
안개가 걷혔다. 그리고 그 뒤에 숨어 있던, 이름표가 가리키던 진짜 비극의 현장이 드러났다. 수십 명의 기사가 한데 엉켜 전사한, 옥좌로 향하는 길목의 참혹한 잔해들이었다.
장례 행렬은 멈췄다. 북소리도 종소리도 사라진 고요 속에서, 마을 사람들은 주저앉아 오열했다. 이제 그들을 지켜줄 유령 기사단은 없었다. 안개 너머에서 들려오는 괴물들의 울음소리가 전보다 가깝게 들렸다.
로웬은 운송표의 마지막 칸에 붉은 인장을 꾹 눌러 찍었다.
[회수 완료 : 제3기사단 유품 42점 및 보급로 좌표 확보]
남자가 바닥을 긁으며 중얼거렸다.
“이제…… 우리는 어떡하지? 안개가 들이닥칠 텐데. 당신이 우리를 다 죽인 거야.”
로웬은 장부를 챙기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죽인 게 아니라, 살 기회를 준 거지. 유령 뒤에 숨어서 벌벌 떠는 것보다 담을 쌓고 창을 드는 게 훨씬 생존 확률이 높거든. 아, 그리고 이름이나 좀 압시다. 장부에 인수자 이름은 적어야 하니까.”
남자가 초점 없는 눈으로 로웬을 올려다보았다.
“……마렌. 마렌 오르트다. 이 저주받은 장례의 마지막 파수꾼이지.”
마렌은 자신의 손에 남은 검은 먹물을 내려다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로웬은 그에게 시선을 떼고 이네스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방금 회수한 이름표 하나를 손바닥이 피가 날 정도로 꽉 쥐고 있었다.
“이네스, 가자. 다음 배달지가 멀어.”
“……예, 성자…… 아니, 로웬 님.”
일행이 다시 길을 떠날 때, 피핀은 평소처럼 농담을 던지지 않았다. 그는 마렌 오르트가 버려두고 간 종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무겁게 발걸음을 옮겼다.
로웬의 뒤편으로, 신화가 무너진 마을의 절규가 안개 속으로 잦아들었다. 로웬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보급관에게 중요한 것은 죽은 자의 영광이 아니라, 남겨진 장부의 정확성이었으니까.
하지만 그의 품 안에서, 방금 찍은 붉은 인장이 기분 나쁠 정도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의 마지막 체온이라도 옮겨붙은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