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2화 합본. 불 꺼진 태양시계에서 장갑 낀 마녀의 부엌까지
21화. 불 꺼진 태양시계
저울다리 밑 차가운 강물에서 건져 올린 것은 젖은 장부만이 아니었다. 그림자도, 바늘도 없이 둥근 눈금만 새겨진 석판. 모르그가 제 살점보다 아끼는 장부 귀퉁이에 ‘불 꺼진 태양시계’라고 적어 넣었을 때, 로웬은 그것이 단순히 고장 난 시계의 이름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마을 입구에 들어선 순간, 로웬은 시간을 잃어버린 자들의 비명이 어떤 박자로 터져 나오는지 목도해야 했다.
하늘 위 태양은 분명 정수리 위에 걸려 있었다. 눈이 멀 것 같은 백색 광휘가 쏟아지고 있었지만, 마을 광장 중앙에 놓인 거대한 태양시계 위에는 그림자가 없었다. 빛은 통과하고, 사물은 존재하되, 시간의 궤적만이 증발해 버린 기묘한 정오였다.
“거짓말하지 마! 장례식은 분명 한 시라고 했잖아! 관을 내리기도 전에 해가 졌단 말이야!”
“무슨 소리야, 아직 배급 줄도 안 줄어들었는데 벌써 세금을 걷으러 오면 어떡해!”
광장은 아수라장이었다. 누군가는 아직 아침 식사도 못 했다며 빈 그릇을 두드렸고, 누군가는 이미 하루가 지났다며 밀린 이자를 독촉받고 있었다. 해가 뜨고 지는 물리적인 현상은 멀쩡한데, 사람들이 약속하고 기록하는 ‘사회적 시간’만이 제각각으로 날뛰고 있었다. 그 혼란의 중심에, 누군가 거칠게 짠 헝겊으로 태양시계를 덮으려 애쓰고 있었다.
“비켜! 이 사기꾼아! 네가 시간을 훔쳐 가서 우리 애 혼인 서약이 무효가 됐잖아!”
날카로운 돌멩이 하나가 허공을 가르고 시계지기의 머리 곁을 스쳤다. 그는 피하지 않았다. 아니, 피할 생각조차 못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오로지 제 몸보다 큰 천으로 시계판을 가리는 데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이네스가 반사적으로 방패를 들어 날아오는 돌무더기를 쳐냈다. 깡, 깡 하는 쇳소리가 광장에 울려 퍼지자 험악하던 군중의 기세가 주춤했다. 이네스의 눈이 굳게 닫힌 태양시계와 시계지기를 향했다.
“시간이 어긋난 게 아니라… 멈춘 것 같군요.”
“멈춘 게 아니야, 이네스. 청구서가 꼬인 거지.”
로웬이 품 안에서 반쯤 마른 배달 증빙 서류를 꺼내 들었다. 젖은 종이의 마른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튕기며 그는 시계지기에게 다가갔다. 돌팔매질이 멈춘 틈을 타, 시계지기가 겨우 천을 덮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는 잿더미 속에서 갓 건져 올린 듯한 검게 그을린 회색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망토의 소매 끝에는 과거에 태양 모양이었을 법한 자수가 놓여 있었으나, 불길에 닿았었는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타버려 마치 검은 구멍처럼 보였다. 손가락 끝마다 밴 그을음은 닦아내지 못한 업보처럼 눌러붙어 있었고, 그는 왼손으로 태양시계의 덮개를 움켜쥔 채 오른손으로는 날아오는 돌보다 시계판의 눈금을 먼저 보호하려는 듯 부자연스럽게 몸을 웅크렸다. 움푹 팬 눈동자는 식어버린 화로처럼 탁한 회색빛이었는데, 시계판 아래 숨겨진 작은 이름표를 힐끗거릴 때마다 그 눈동자 안에서 마른 모래가 굴러가는 듯한 서늘한 집착이 읽혔다.
“아직… 시간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입을 열자 목소리가 모래를 씹는 듯 갈라져 나왔다. 로웬은 그의 앞에 멈춰 서서, 마을 사람들이 씩씩거리며 지켜보는 가운데 자신의 장부를 펼쳤다.
“이봐요, 시계지기 양반. 내 장부엔 이 마을에 빵돌 열두 묶음이랑 식은 편자 한 상자를 ‘오후 두 시’까지 배달하기로 되어 있거든. 근데 지금 저 시계가 그림자를 안 내놓으니까, 내가 지금 배달을 일찍 온 건지 늦게 온 건지 증명을 못 하겠잖아. 배달 지연 위약금은 누가 낼 거야?”
“지금 그게 문제요? 우리 집 장례식 일정이 통째로 날아갔다니까!”
마을 사람 중 하나가 고함을 쳤다. 로웬은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성자의 자비로운 미소가 아니라, 정산서를 확인하는 깐깐한 심부름꾼의 눈빛이었다.
“아저씨, 장례식이 날아간 게 아니라 세금 청구서가 먼저 도착한 거겠죠. 모르그, 대조해 봐.”
모르그가 품 안에서 ‘죽은 태양 장부’를 꺼냈다. 저울다리 아래에서 건져 올린 그 장부였다. 모르그는 시계지기가 덮어놓은 천 사이로 손을 넣어 눈금 하나를 만져보더니, 장부의 수치와 대조하기 시작했다. 모르그의 미간이 깊게 패였다.
“로웬, 이건 시계가 아닙니다. 이건… 죽은 태양이 이 마을에 빌려준 빛의 청구 단위입니다. 태양시계의 눈금은 시간이 아니라, 이 마을이 소모한 ‘열기’와 ‘부채’를 재고 있어요.”
“무슨 소리야?”
피핀이 눈을 가늘게 뜨며 태양시계 위를 덮은 천을 살짝 들춰보았다. 시계판 표면에는 빛이 아니라 미세한 열의 잔상이 일렁이고 있었다. 왕궁식 시간 인장을 본 적 있는 피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왕궁에서 쓰던 강제 징수용 눈금표야. 이건 시간을 재는 게 아니라, 시간을 담보로 잡고 있는 거라고.”
로웬은 주저앉아 있는 시계지기의 어깨를 툭툭 쳤다.
“이름이 뭐야? 이 시계판 밑에 숨겨둔 이름표 주인 말이야.”
시계지기는 대답 대신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다 마을 사람들이 다시 돌을 집어 들려 하자, 마지못해 작게 읊조렸다.
“…린네 베일. 임시 시계지기입니다.”
“린네, 당신 동생 사망 시간이 이 시계에 묶여 있지? 그래서 천으로 덮고 있는 거잖아. 시간을 확정하면, 그 순간부터 동생의 사망 보험금이든 장례 비용이든 세금이든 ‘청구’가 시작될 테니까.”
린네 베일의 어깨가 눈에 띄게 떨렸다. 로웬의 추측은 단순했다. 이 마을의 시간은 멈춘 게 아니라, 누군가 청구서를 받지 않으려고 계산대를 막고 있는 상태였다.
“사람들은 당신이 시간을 훔쳤다고 욕하지만, 사실 당신은 시간을 붙잡고 있는 거군. 동생이 죽은 그 ‘오후 세 시’가 영원히 오지 않게 하려고. 하지만 덕분에 마을 전체의 정산이 꼬여버렸어. 배급은 안 나오고, 세금은 이중으로 매겨지고, 장례는 지낼 수가 없지.”
“하지만… 시간을 열면… 내 동생은 정말로 죽은 게 됩니다. 이 시계의 눈금이 세 시를 가리키는 순간, 장부에 기록된 대로 모든 게 소멸한다고요!”
린네의 목소리가 비명처럼 터져 나왔다. 마을 사람들은 술렁였다. 그들은 린네를 죽일 듯 노려보면서도, ‘사망 시간’이라는 말에 차마 돌을 던지지 못했다.
이네스가 검 손잡이를 쥔 채 낮게 읊조렸다.
“늦은 기사단(Late Knights)…. 우리는 항상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했지. 하지만 시간이 어긋났다고 해서 삶이 멈춰선 안 됩니다.”
로웬은 린네의 손을 거칠게 잡아끌어 시계판에서 떼어냈다. 그리고 자신이 가져온 배달 물품 중 하나인 ‘빵돌’을 시계판 정중앙, 바늘이 있어야 할 자리에 올려두었다.
“자, 계산해 보자고. 이 빵돌은 화덕에서 나온 지 정확히 네 시간 됐어. 겉면의 온도가 이 정도면, 죽은 태양의 장부에 따르면 ‘세 시간 분량의 열기 부채’가 남았다는 뜻이지.”
로웬은 기적을 부리는 대신, 주머니에서 반쯤 타다 남은 불씨 주머니를 꺼냈다. 그는 그것을 시계판의 눈금 위에 굴렸다. 불씨가 지나간 자리에 희미한 그림자가 생겼다가 사라졌다.
“린네 베일. 동생의 시간은 당신이 막는다고 멈추는 게 아니야. 이미 당신 손가락의 그을음이 말해주고 있잖아. 당신은 시계를 덮으면서 이미 동생을 보낼 준비를 끝냈어. 단지 그 영수증을 받기가 무서운 거지.”
로웬은 모르그에게 신호를 보냈다. 모르그가 장부의 한 페이지를 찢어 태양시계의 특정 눈금에 갖다 댔다.
“열의 잔상을 맞춥니다. 현재 시간, 오후 두 시 사십오 분. 청구 항목: 대기 중인 영혼의 안식 비용 및 연체된 햇빛 사용료.”
로웬이 시계판을 덮고 있던 천을 단숨에 걷어치웠다.
순간, 그림자가 없던 시계판 위로 길쭉한 검은 선이 그어졌다. 하늘의 태양이 쏜 빛 때문이 아니었다. 시계판 자체가 머금고 있던 ‘부채의 무게’가 그림자가 되어 나타난 것이었다.
그림자는 가차 없이 움직여 오후 세 시를 향해 달려갔다.
“안 돼!”
린네가 울부짖으며 시계판을 붙잡으려 했지만, 피핀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림자가 정확히 세 시의 눈금에 닿는 순간, 마을 광장의 시종소리가 아니라 거대한 장부가 닫히는 듯한 둔탁한 소리가 공명을 일으켰다.
마을 사람들의 시계가 일제히 돌기 시작했다. 멈췄던 맥박이 돌아오듯, 어긋났던 일상의 톱니바퀴가 비명을 지르며 맞물렸다. 장례를 치르지 못해 통곡하던 여인의 곡소리가 광장을 채웠고, 세금 징수원은 허둥지둥 장부를 고쳐 쓰기 시작했다.
린네 베일은 무너져 내렸다. 그의 손에 들린 천은 이제 아무것도 가릴 수 없었다.
로웬은 땀을 닦으며 린네의 앞에 배달 물품인 식은 편자 상자를 내려놓았다.
“오후 세 시. 배달 완료. 자, 여기 수령 확인 서명해.”
“…내 동생은요?”
“죽었지. 하지만 적어도 ‘부당하게 연체된 영혼’은 아니게 됐어. 이 마을 시간의 부채를 네 동생의 사망 시간으로 퉁쳤으니까. 모르그가 계산 하나는 끝내주거든.”
모르그가 안경을 고쳐 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장부에는 린네의 동생 이름 옆에 ‘완납’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로웬은 멍하게 서 있는 린네를 뒤로하고 발길을 돌렸다. 이네스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린네를 돌아보았지만, 로웬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네스, 감상에 젖을 시간 없어. 다음 배달지는 이 시계가 가리키는 ‘열기 부채’가 흘러 들어가는 곳이니까. 돈 안 되는 일은 한 번으로 족해.”
로웬은 젖은 장부의 마른 가장자리를 다시 한번 손가락으로 튕겼다. 태양은 여전히 머리 위에서 빛나고 있었지만, 이제 마을의 그림자들은 제 주인의 발밑에 올바르게 붙어 있었다. 그림자가 돌아왔다는 건, 이제 누군가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불 꺼진 태양시계는 이제 더 이상 뜨겁지 않았다. 차갑게 식은 돌덩이 위로, 린네 베일의 눈물만이 정직한 시간을 새기고 있었다.
22화. 장갑 낀 마녀의 부엌
태양시계에서 떼어낸 ‘잘못 청구된 시간’의 잔상은 끈적거렸다. 로웬의 손등과 운송표 가장자리에 달라붙은 그 열기는 비릿한 철분 냄새와 오래된 후추 향을 풍기며 앞길을 인도했다. 굴뚝이 숲처럼 빽빽하게 솟은 골목으로 들어설수록 공기는 걸쭉해졌다. 그것은 단순히 음식을 태우는 연기가 아니었다. 누군가의 비밀스러운 고해와 억눌린 신음이 기름솥에 튀겨질 때 날 법한, 역하고도 구수한 악취였다.
“이 냄새, 왕궁 연회장에서 맡아본 적 있어.”
피핀이 코를 킁킁거리다 말고 멈춰 섰다. 평소라면 ‘공짜 고기 냄새’라며 앞장섰을 녀석의 꼬리가 뒷다리 사이로 바짝 말려 들어갔다. 피핀은 털을 바짝 세운 채 덧붙였다.
“제일 비싼 향신료를 처박아서, 그 밑에 깔린 썩은 고기 냄새를 숨길 때 나는 향이야. 여긴 부엌이 아니라 쓰레기장인데?”
모르그는 품 안에서 죽은 태양의 장부를 꺼내 들었다. 장부의 여백에 배어든 잉크가 주변의 열기에 반응해 검게 번지고 있었다.
“기록의 칸이 뒤섞이고 있습니다. 여기는 지각된 시간과 지불되지 않은 채무가 맛으로 바뀌는 구역입니다. 조심하십시오, 로웬 씨. 자칫하다간 당신의 ‘배달 예정 시간’도 소스 재료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골목 끝, 거대한 가마솥 같은 건물이 나타났다. ‘장갑 낀 마녀의 부엌’이라 불리는 그곳 앞에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그들은 굶주림에 눈이 뒤집힌 폭도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오래 굶어 영혼의 심지가 타버린, 무기력한 그림자들에 가까웠다. 그들은 마녀가 내어주는 한 그릇의 수프를 받기 위해 자신의 ‘죄’나 ‘기억’을 통행료로 지불하고 있었다.
부엌 내부로 들어서자마자 화끈한 열기가 일행을 덮쳤다. 이네스가 방패를 세우며 앞장섰지만, 그녀의 표정은 평소보다 무거웠다.
“로웬, 저기 봐요.”
이네스가 가리킨 곳에는 거대한 도살용 갈고리들이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그런데 갈고리에 걸린 것은 고기가 아니었다. 누군가의 이름표, 찢어진 장부, 그리고 연기처럼 일렁이는 사람의 형상들이었다.
그 중심에 그녀가 있었다.
거대한 화덕 앞에서 냄비를 휘젓고 있는 여자의 등은 굽어 있었으나 기괴할 정도로 거대해 보였다. 그녀의 두 손은 팔꿈치까지 올라오는 두꺼운 검은 가죽 장갑에 갇혀 있었다. 장갑은 끓는 기름과 소금기가 엉겨 붙어 가죽인지 강철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그녀가 주걱을 움직일 때마다 삐걱거리는 기분 나쁜 마찰음을 냈다. 소금과 기름이 층층이 굳은 앞치마는 마치 수백 겹의 허물을 덧댄 짐승의 가죽처럼 보였으며, 화덕의 열기 때문에 일렁이는 공기 속에서 그녀의 윤곽은 끊임없이 팽창하고 수축했다. 그녀는 로웬 일행을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냄비에서 솟구치는 증기의 압력을 손가락 끝으로 미세하게 느끼며, 마치 악보를 읽듯 냄새를 맡고는 쇳소리 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신선한 게 들어왔군. 겉은 타버린 재 냄새인데, 속에는 아직 식지 않은 성스러운 열 잔상이 남아 있어. 이건 훌륭한 고명이 되겠어.”
그녀의 시선이 천천히 돌아갔다. 로웬의 얼굴을 보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로웬의 쇄골과 손목, 그리고 운송표에 맺힌 빛의 잔상을 훑으며 조리 순서를 가늠하고 있었다. 그것은 인간을 대하는 눈이 아니라, 도축장에 들어온 최상급 식재료를 분류하는 장인의 눈이었다.
“잠깐, 나는 배달원이지 식재료가 아니야.”
로웬이 운송표를 흔들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하지만 주변의 굶주린 사람들이 로웬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에는 로웬이 ‘성자’나 ‘영웅’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자신들의 허기를 채워줄, 축복받은 기름기가 흐르는 ‘성자 고기’로 보일 뿐이었다.
“성자든 뭐든 상관없어. 이 부엌에 발을 들였다는 건, 네 존재가 누군가의 허기를 채울 ‘청구서’가 되었다는 뜻이니까.”
마녀가 장갑 낀 손으로 커다란 식칼을 집어 들었다. 칼날이 바닥을 긁었다. 바닥에는 수많은 칼집이 패어 있었는데, 그것은 단순한 흠집이 아니라 액체가 흐르도록 설계된 정교한 수로였다.
“이네스, 부수지 마! 여기를 부수면 저 밖의 줄 서 있는 사람들이 전부 굶어 죽어. 그건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비용이 아니야.”
로웬이 다급하게 외치며 이네스의 방검을 제지했다. 이네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정의감이 먼저 솟았지만, 굶어 쓰러질 사람들의 얼굴이 그녀의 발을 붙잡았다.
마녀가 냄비 뚜껑을 열자, 억눌려 있던 압력이 폭발하듯 쏟아져 나왔다. 그 안에는 죄의 맛이 끓고 있었다. 로웬은 코끝을 찌르는 냄새 속에서 규칙을 찾아냈다.
“모르그, 장부 칸 확인해! 베라 할멈의 심부름표에 적힌 냄새 순서랑 저 냄비에서 나오는 향신료 투입 순서가 달라!”
로웬은 마녀의 공격을 피하며 바닥의 칼집 지형을 살폈다. 마녀는 장갑 안쪽의 화상을 숨기려는 듯 손을 부자연스럽게 놀리고 있었다. 그녀는 맨손으로 죄를 만지지 못한다. 그래서 저 두꺼운 장갑과 ‘조리 규칙’이라는 틀에 자신을 묶어둔 것이다.
로웬은 품 안에서 베라 할멈의 심부름으로 가져온 ‘오래된 향신료’ 주머니를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마녀가 휘젓던 냄비가 아니라, 바닥의 칼집 수로 중 ‘반품 구역’으로 연결된 틈새에 쏟아부었다.
“이건 청구되지 않은 부채야!”
로웬이 외쳤다.
“장갑 낀 마녀, 당신은 지금 조리표를 조작하고 있어. 저 사람들에게 먹이는 건 죄의 세척액이지 진짜 음식이 아니잖아. 베라 할멈이 보낸 이 향신료는 ‘식은 철’의 냄새를 지우기 위한 게 아니라, 장부상의 구멍을 메우기 위한 증빙 자료라고!”
마녀의 움직임이 굳었다. 삐걱거리는 가죽 소리가 멈췄다. 그녀의 시선이 로웬의 손에 들린 심부름표와 바닥으로 흘러 들어가는 향신료에 고정되었다.
“베라… 그 노인네가 아직도 이런 걸 챙기나?”
“그 할멈은 기억력이 지나치게 좋거든. 특히 남의 빚에 대해서는.”
로웬은 냄비의 압력 밸브를 발로 차서 돌렸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성자 고기니 뭐니 하며 로웬을 압박하던 기묘한 열기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냄비 안에서 끓던 ‘죄맛 요리’와 ‘진짜 식량’이 로웬이 흘려보낸 향신료의 화학 반응으로 인해 층이 나뉘며 분리되기 시작했다.
기름진 거품이 가라앉자, 사람들을 현혹하던 가짜 고기 향이 사라졌다. 대신 밋밋하지만 정직한 호밀과 물의 냄새가 올라왔다. 마녀는 한참 동안 냄비를 내려다보다가, 장갑 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조리표가… 갱신됐군.”
그녀의 목소리에서 살기가 빠져나갔다. 대신 지독한 피로감이 묻어났다. 그녀는 더 이상 로웬을 고기 부위로 보지 않았다. 대신 까다로운 검수관을 대하는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장부를 건드리는 배달원이라니. 베라의 심부름꾼답군. 하지만 조심해라. 오늘은 향신료로 넘겼지만, 다음번엔 네놈의 ‘인과율’ 자체가 육수로 우려질 테니까.”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 채 배급받은 수프를 마셨다. 아까처럼 황홀한 표정은 아니었지만, 그들의 눈에는 광기 대신 아주 작은 생기가 돌아왔다.
로웬은 등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이네스와 피핀을 바라보았다. 이네스는 칼집이 가득한 바닥을 보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 부엌은… 누군가가 죄를 먹어서 없애지 않으면 유지되지 않는 곳이었군요.”
“맞아. 그리고 저 마녀는 그 죄를 먹기 좋게 가공해 주는 요리사인 동시에, 스스로 그 죄에 익지 않으려고 장갑을 낀 죄수이기도 하지.”
로웬이 마녀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다시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다음 솥을 준비하고 있었다.
“자, 이제 입가심은 끝났어. 진짜 배달 물건을 찾으러 가야지. 베라 할멈이 말한 ‘발효된 시간’은 이 부엌 지하 창고에 있다고 했으니까.”
로웬은 운송표의 다음 항목을 체크했다. 잿불이 날리는 부엌의 열기 속에서, 그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성자가 아닌 배달원의 발걸음이 다시 어둠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