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59화 합본. 로웬 초상 금지령에서 성자 목소리 녹음 성가대까지
57화. 로웬 초상 금지령
검은 잉크 냄새가 시장통의 비릿한 생선 내음과 뒤섞여 역한 악취를 풍겼다. 광장 벽면에 붙어 있던 어설픈 성자의 초상화 위로 굵직한 가로줄이 그어졌다. 아니, 그것은 단순한 낙서가 아니라 집행이었다.
"성스러운 형상을 사칭하여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는 모든 모조품을 압수한다!"
북소리에 맞춰 포고꾼이 소리쳤다. 그 옆에는 가죽 앞치마를 두른 장정들이 커다란 궤짝을 든 채 화공들의 좌판을 뒤엎고 있었다. 정교하게 그려진 유화부터 아이들이 바닥에 분필로 끄적거린 낙서까지, '로웬'의 낡은 배달가방과 성자 흉터를 흉내 낸 모든 흔적이 검은 먹물 세례를 받았다.
"자, 박자 맞춰서! 하나, 둘! 그리지 마라, 보지 마라, 팔지 마라!"
피핀이 광대 특유의 과장된 몸짓으로 포고꾼의 발치에서 스텝을 꼬았다. 평소라면 구경꾼들의 폭소를 자아냈을 우스꽝스러운 몸짓이었지만, 포고꾼의 외침 사이를 파고드는 피핀의 웃음소리는 예리하게 벼려진 유리 조각처럼 날카롭게 끊겼다. 어제 겪은 일의 여진이 가시지 않은 듯, 그의 입꼬리는 경련하듯 실룩이다가 이내 서늘하게 닫혔다. 웃음이 머물러야 할 자리에 서늘한 기시감만이 맴돌았다.
"이건 그냥 아이가 그린 거예요. 이것까지 가져갈 필요는 없잖아요."
이네스가 검은 잉크 붓을 든 사내의 손목을 붙잡았다. 사내는 감정 없는 눈으로 이네스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에는 이미 수십 장의 초상화가 구겨진 채 들려 있었고, 그중에는 성자의 얼굴이라기보다 그저 노란 꽃을 닮은 무언가에 가까운 그림도 섞여 있었다.
"성자의 형상을 왜곡하는 모든 시각적 매체는 죄표(罪標)다. 예외는 없다."
"서기장님, 이쪽 압수 목록 정리되었습니다."
보조 필경사의 부름에 사내가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그의 가슴팍에 달린 은제 호루라기와 잉크병 모양의 인장이 햇빛에 반사되어 번뜩였다.
그는 아르문 벨이었다. 성하청 소속의 포고관이자, 거룩한 질서를 어지럽히는 불순물을 걸러내는 인간 여과기라 불리는 사내.
아르문 벨은 마치 살아있는 삭제선 그 자체와 같은 인상을 풍기는 사내였는데, 그의 좁고 긴 눈매는 마주하는 상대의 생동감을 읽기보다 그 얼굴 위로 그어질 검은 묵선(墨線)의 궤적을 먼저 계산하는 듯한 서늘한 정지 상태를 유지했다. 빳빳하게 풀을 먹인 검은 코트 위로는 단 한 점의 얼룩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강박이 흐르고 있었으나, 정작 그의 손끝은 만년필에서 배어 나온 듯한 진한 잉크 자국으로 점철되어 있어 그가 집행해 온 무수한 '지우기'의 역사를 증명하는 기묘한 훈장처럼 보였다. 움직임 하나하나가 자로 잰 듯이 각진 그는 목소리마저 건조한 종이가 쓸리는 듯한 마찰음을 냈고, 그가 광장을 가로질러 걸을 때마다 사람들은 그를 살아있는 인간이라기보다 법전에서 튀어나와 부정한 기록을 찾아 헤매는 거대한 잉크병으로 인식하며 본능적인 소름을 느꼈다.
"잠시 실례하지요, 아르문 서기장."
모르그가 군중 사이를 헤치고 나와 아르문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손에는 이미 갈취당한 상인들에게서 확보한 몇 장의 종이가 들려 있었다.
"압수 목록 수령인 성명이 공란이군요. 포고문 발행 관인은 성하청의 것이 맞지만, 이 얼굴 삭제용 붓을 공급한 곳은 시중의 일반 공방입니다. 게다가 방금 징수하신 '신성 모독 정화금'의 납부처가 교구 금고가 아닌 별도의 가납소로 지정되어 있더군요. 절차상의 불일치가 꽤 많습니다만?"
아르문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이것은 성하청의 긴급 명령이다. 절차보다 우선하는 것은 성자의 이미지가 오염되는 것을 막는 일이지."
"그 명령서를 전부 찢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엘드가 차분하게, 그러나 묵직한 경고를 담아 덧붙였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이 화공들이 압수당한 물건에 대한 증거도 함께 사라지겠지. 당신들이 가져간 것이 단순한 종이인지, 아니면 정당한 재산인지 증명할 길이 없어진다는 뜻이다. 그 비용은 누가 감당할 건가?"
아르문은 대답 대신 다시 붓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그의 붓끝은 로웬에게 닿지 못했다. 로웬이 그의 팔을 가볍게 밀쳐내며 한 장의 영수증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이 '금지령' 말입니다. 아르문 서기장님."
로웬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화를 내지도, 성자답게 자애롭지도 않은, 지극히 사무적인 어조였다.
"이 포고문 자체가 유료 배포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성하청에서는 '성자의 얼굴을 그리지 않을 권리'를 보증한다는 명목으로, 각 상점에 이 검은 잉크 벽보를 강매하고 있더군요. 압수 행렬이 지나가는 길목마다 벽보를 팔고, 그 벽보가 붙어 있지 않은 곳은 신성 모독으로 간주해 초상을 압수한다... 이건 종교적 정화가 아니라, 독점 상품의 강매 행위 아닙니까?"
주변의 수군거림이 커졌다. 로웬은 아르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성자의 얼굴을 지우는 붓값과 잉크값까지 상인들에게 청구하셨더군요. 여기 이 영수증과 서기장님이 가진 압수 명부의 금액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누군가 중간에서 '성자의 이름'으로 사익을 취하고 있다는 증거죠. 이 조사가 끝날 때까지 압수 절차를 중지해 주셔야겠습니다. 행정적 오류가 해결되지 않은 집행은... 그저 약탈일 뿐이니까요."
아르문 벨의 서늘한 눈동자에 균열이 일었다. 그는 로웬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삭제선을 그어야 할 대상이 오히려 법과 절차를 들이대며 자신의 손목을 묶고 있었다.
결국 아르문은 잉크 묻은 손을 거두었다.
"일시 중단한다. 하지만 잊지 마라. 성자의 얼굴은 인간의 손끝에서 노리개처럼 굴러다녀선 안 되는 것이다."
집행자들이 물러나고 광장에 소란스러운 안도가 찾아왔을 때, 검은 옷을 입은 한 아이가 로웬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아이의 손에는 화려한 금박이 박힌 봉투 하나가 들려 있었다.
로웬이 봉투를 뜯자, 묵직한 양질의 종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성자의 유해(遺骸) — 일반 공개 전 특별 전시회 초대장]
이네스와 모르그의 안색이 동시에 굳어졌다. 살아있는 성자를 사칭하는 자들 앞에, 죽은 성자의 뼈가 도착했다는 선전포고였다.
58화. 가짜 유해 사전 전시회
초대장은 죽은 자의 방으로 들어가는 통행증이었다.
중앙 연회장으로 들어서자마자 코끝을 찌른 것은 화려한 백합 향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오래된 무덤에서나 날 법한 퀴퀴한 향취와, 그 불쾌함을 덮기 위해 억지로 뿌려댄 고농도의 방부제 냄새였다. 천장에는 검은 비단이 파도처럼 일렁였고, 그 아래로 은은한 가스등 불빛을 받는 유리 진열장들이 제단처럼 줄지어 서 있었다.
[성자 로웬의 세 번째 마디 손가락뼈 — 제4기적의 증거]
[순교 당시 흘린 혈흔이 스며든 아마포 조각 — 한정 수량 분양]
로웬은 자신의 이름이 적힌 라벨들 앞에서 발을 멈췄다. 멀쩡히 붙어 있는 자신의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가, 벨벳 쿠션 위에 놓인 누런 뼛조각을 보았다. 기괴한 감각이었다. 아직 심장이 뛰고 있는 몸을 앞에 두고, 세상은 이미 그의 죽음을 조각내어 상품으로 진열하고 있었다.
"이게 다... 나라고?"
로웬이 홀린 듯 진열장으로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차갑고 딱딱한 감촉이 그의 손목을 낚아챘다.
"함부로 만지지 마십시오. 공증 절차가 끝난 유물입니다."
로웬의 손목을 잡은 남자는 로웬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대신 로웬의 소맷자락에 묻은 먼지와, 유리장에 지문이 남을 뻔한 각도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그는 몸에 빈틈 하나 허용하지 않는 짙은 회색 예복을 입고 있었는데, 칼날처럼 세워진 깃 위로 은색 감식용 핀들이 훈장처럼 줄지어 꽂혀 있었다. 안경 너머의 눈동자는 생명체의 온기보다는 광석의 굴절률을 측정하는 렌즈에 가까웠고, 손가락 마디마디에는 미세한 약품 냄새가 배어 있어 마치 그 자신도 방부 처리된 박제처럼 보였다. 남자가 움직일 때마다 옷감끼리 스치는 소리는 메마른 종이가 바스라지는 소리를 냈으며, 그가 내뱉는 숨결조차 습기 하나 없이 건조해 곁에 선 사람의 피부마저 갈라지게 만드는 기묘한 압박감을 풍겼다.
로웬에게 그는 살아 있는 사람을 대하는 인간이 아니었다. 생명력을 가진 육체보다, 그 위에 붙은 죽은 자의 라벨과 공증 인장을 더 신뢰하는 기록의 괴물이었다.
"올브란 리쉬 경, 실례했습니다. 제 동행이 워낙 신심이 깊어서 그만."
뒤따라온 엘드가 부드럽게 개입하며 로웬의 손목을 남자의 손아귀에서 빼냈다. 올브란 리쉬라고 불린 남자는 그제야 무미건조한 시선을 엘드에게 돌렸다.
이름이 붙고 나서야, 로웬은 그 감식관의 몸이 얼마나 전시장의 물건처럼 관리되고 있는지 더 뚜렷하게 보았다. 올브란의 장갑은 밀랍을 얇게 펴 바른 듯 희고 빳빳했으며, 손목을 꺾을 때마다 손등의 주름이 사람 살보다 봉인용 종이에 가까운 소리를 냈다. 회색 감식복에는 향과 방부제가 함께 배어 있어, 가까이 선 로웬의 목 안쪽에 마른 재가 달라붙는 느낌을 남겼다. 목에 겹겹이 걸린 확대렌즈들은 후원자의 얼굴이나 울고 있는 순례자의 눈물이 아니라, 라벨의 잉크 번짐과 뼛조각의 균열을 먼저 찾는 작은 눈들처럼 흔들렸다. 그가 낮게 말을 이을 때도 목소리는 기도문과 경매가를 같은 높낮이로 읽었고, 로웬은 그 순간 이 사람이 죽은 물건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을 죽은 물건의 질서 안에 밀어 넣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엘드 사제님. 신심은 기도가 아니라 후원금과 보험 번호로 증명하는 겁니다. 이 전시는 이미 왕실 감식관들의 공인을 마쳤습니다."
주변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이 유리장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들은 진열장 안의 가짜 뼛조각을 보며 오열했다. 실종된 아들의 유품이라도 찾은 듯, 혹은 성자의 가호가 자신들의 비참한 삶을 구원해 줄 마지막 동아줄이라도 되는 듯 간절하게 바닥을 긁었다.
피핀이 그 광경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림자 극장의 밤 이후, 그는 타인의 비극이 정교하게 가공되어 누군가의 주머니를 채우는 구조에 유독 민감해져 있었다.
"죽지도 않은 사람 장례식을 치르면서 돈까지 뜯어내다니... 이거 진짜 사악한 농담이네요."
피핀이 낮게 중얼거리자, 옆에 서 있던 이네스가 차가운 눈으로 군중을 훑었다. 한 귀족 청년이 울고 있는 노인을 보며 "저런 가짜에 속다니 미개하군"이라며 비웃음을 흘리려던 참이었다. 이네스가 그 청년의 발등을 구두 굽으로 지그시 밟으며 앞을 막아섰다.
"비웃지 마. 저 사람들은 가짜를 믿는 게 아니라, 믿어야만 살 수 있는 슬픔을 견디고 있는 거니까. 그 슬픔까지 네 유흥거리로 삼지 마라."
그 사이 모르그는 전시회 벽면에 붙은 기증자 명부와 보험 공증 번호를 빠르게 훑고 있었다. 그는 품 안에서 로웬의 최근 배달 기록지를 꺼내 대조하기 시작했다.
"기록이 맞지 않습니다. 이 손가락뼈가 발굴되었다고 주장하는 날짜에, 로웬은 북부 외곽에서 잿불 심부름을 수행 중이었습니다. 여기 반품 표에 적힌 보험 등록 번호 역시 유령 계좌군요. 기증자로 적힌 가문들은 이미 반년 전에 파산했습니다."
"그럼 저 유리를 깨버리면 끝나는 거 아니에요?"
피핀의 물음에 엘드가 고개를 저었다.
"유리장을 깨는 건 쉽지. 하지만 피핀, 저 유리가 깨지는 순간 저기 무릎 꿇은 사람들의 마지막 기대도 함께 박살 난단다. 진실이 언제나 구원인 것은 아니야. 때로는 잔인한 학살이 되기도 하지."
로웬은 올브란 리쉬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았다. 올브란은 로웬이 성자 본인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그에게 로웬은 그저 '전시품의 가치를 떨어뜨릴 수 있는 불확실한 변수'일 뿐이었다.
"올브란 경."
로웬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전시장의 기괴한 찬송가 소리를 뚫고 명확하게 울렸다.
"감식관으로서, 살아 있는 생체의 반응이 기록된 서류보다 우선한다는 원칙은 여전합니까?"
올브란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건 당연한 원칙입니다만, 이곳에 살아 있는 성자는 없습니다."
로웬은 대답 대신 올브란의 가슴에 꽂힌 은색 감식 핀 하나를 뽑아 들었다. 올브란이 제지하기도 전, 로웬은 자신의 손가락 끝을 망설임 없이 찔렀다. 붉은 혈흔 한 방울이 투명한 은쟁반 위로 떨어졌다.
"이건 기증자의 피가 아닙니다. 이 물건의 '원소유주'가 직접 신청하는 반품 신청서죠."
모르그가 기다렸다는 듯 서류 뭉치를 올브란의 코앞에 들이밀었다.
"날짜를 보시죠. 이 유해들이 '수습'되었다는 시각에, 성자 로웬의 생존을 증명하는 왕실 우체국 배달 완료 인장이 찍혀 있습니다. 죽은 자의 보험금은 생존자가 나타나는 순간 사기죄로 전환됩니다. 감식관님, 당신의 공증이 가짜를 보증했다는 기록을 남기고 싶으십니까?"
올브란 리쉬의 얼굴이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그는 로웬의 피와 서류상의 날짜를 번갈아 보았다. 기록의 무결성을 신봉하는 그에게, 생존자의 기록과 유해의 공증이 충돌하는 상황은 시스템의 붕괴를 의미했다.
"전시를... 중단한다."
올브란의 선언에 객석이 술렁였다. 유리가 깨지는 소란도, 성자의 연설도 없었다. 그저 차가운 서류와 한 방울의 피가 만들어낸 행정적 정지였다.
전시장을 빠져나오는 로웬의 등 뒤로 안내원들이 급하게 다음 일정을 알리는 전단지를 돌리기 시작했다. 피핀이 바닥에 떨어진 종이 한 장을 주워 올렸다.
[특별 예고: 성자의 목소리 녹음 성가대 — 부정문(否定文) 초연]
로웬의 미간이 좁아졌다. 얼굴과 유해 다음은 목소리였다. 성자가 스스로를 부정하는 목소리가 노래가 되어 울려 퍼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59화. 성자 목소리 녹음 성가대
유리 병들이 부딪히며 내는 서늘한 마찰음이 대성당 별관의 복도를 메웠다. 성가의 선율 대신 공기를 채운 것은 정교하게 세공된 ‘목소리 병’들이었다. 성자의 숨결 한 자락, 기침 한 번까지도 성스러운 유물로 박제하려는 열망이 거대한 기계 장치처럼 돌아가고 있었다.
로웬은 복도 벽에 붙은 안내지를 가만히 응시했다.
[성자 목소리 녹음 성가대 — 부정문(否定文) 초연]
이미 시장에는 로웬의 웃음소리와 축복의 말이 담긴 병들이 고가에 거래되고 있었다. 이제 사람들은 그가 ‘아니’라고 말할 때의 단호함, 고통을 거부하는 침묵, 심지어는 병색이 완연한 기침 소리조차 음악의 일부로 소유하고 싶어 했다. 그건 구원이 아니라 값을 붙인 수집품에 가까웠다.
“성자님, 자리에 앉아 주십시오. 긴 말씀은 필요 없습니다.”
단상 위, 지휘봉을 든 남자가 로웬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는 지휘봉이라기보다 정교한 해부용 메스를 든 의사처럼 보였다. 남자는 악보 대신 소리의 파동이 그려진 양피지를 넘기며 무심하게 덧붙였다.
“그저 가장 깊은 혐오를 담아, ‘아니오’라고 한 번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나머지는 저희 성가대가 그 음절을 가장 아름다운 화음으로 감쌀 테니까요.”
“클레마 노트 경, 성자님께 무례한 요구입니다!”
뒤늦게 달려온 성가대원의 외침에 남자의 이름이 비로소 허공에 걸렸다. 클레마 노트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그 목소리의 음정을 정확히 짚어내듯 손가락을 튕겼다.
그는 빳빳하게 풀을 먹인 검은 코트 깃을 턱끝까지 세워 올린 채, 마치 자신의 척추조대조차 자로 잰 듯한 직선의 자세를 유지했다. 가늘고 긴 손가락은 공중에서 허무를 움켜쥐는 듯 섬세하게 떨렸고, 빛이 투과되지 않는 탁한 회색 눈동자는 상대의 눈이 아닌 목구멍의 떨림을 집요하게 쫓았다. 그는 타인의 언어를 문맥으로 이해하는 대신, 소리의 질량과 파형만을 채집하여 유리병 입구에 맞춰 사람의 말을 가차 없이 잘라내는 박제사였다. 그에게서 풍기는 서늘한 침엽수 향기는 그가 방금까지 얼마나 많은 목소리를 얼리고 도려냈는지를 증명하는 듯했다.
“상품의 가치는 희소성에서 나옵니다, 성가대원. 성자의 긍정은 이미 흔해졌지요. 지금 대중이 원하는 건 죄악을 부정하는 그 차가운 목소리입니다.”
피핀은 옆에서 성가대원들이 챙강거리며 옮기는 목소리 병들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 웃음소리를 병에 담아 팔 수가 있어요? 저 사람들은 지금 소리가 아니라 성자님의 숨을 뺏어가는 거라고요!”
피핀의 분노와 달리, 이네스는 관객석에서 눈물을 흘리며 ‘부정문’을 기다리는 순례자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로웬이 ‘아니’라고 말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한마디가 자신들의 불행과 가난, 질병을 부정해 줄 주문이라도 되는 양 간절했다.
“비웃지 마, 피핀. 저들에겐 저 가짜 목소리라도 매달릴 수밖에 없는 절박함이 있으니까. 조롱받아야 할 건 저들의 간절함이 아니라, 그걸 병에 담아 파는 자들이야.”
그사이 모르그는 분주하게 움직이며 바닥에 쌓인 서류 뭉치를 대조하기 시작했다. 녹음 동의서의 날인과 음정 장부의 일련번호, 그리고 수익 분배표에 적힌 수령인들의 성명을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짚어 내려갔다. 그녀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엘드는 로웬의 곁으로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성자님, 선택하십시오. 소리를 높여 화를 내시면 아주 비싼 ‘진노의 성가’가 되어 팔릴 것이고, 입을 닫으시면 ‘신성한 침묵의 소품집’이 되어 유통될 겁니다. 당신의 모든 반응이 비용으로 환산되는 중입니다.”
클레마 노트가 지휘봉을 높이 들었다. 메아리 관이 로웬의 입가를 향해 입을 벌렸고, 성가대원들이 일제히 숨을 들이켰다. 가장 고결한 부정의 목소리가 박제되기 직전의 정적이었다.
로웬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니…….”
기대감이 고조된 순간, 로웬은 말을 멈추고 거칠게 기침을 쏟아냈다.
“콜록! 쿨럭, 102번…… 반품 번호…… 48-나…….”
클레마 노트의 지휘봉이 멈칫했다. 로웬은 멈추지 않고, 모르그가 옆에서 흘린 장부의 내용을 무미건조하게 읊조리기 시작했다.
“수령인 한스, 주소 불명…… 금액 오기입…… 기침, 다시 기침…….”
성가대원들의 화음이 엉망으로 깨졌다. 메아리 관을 통해 증폭된 것은 성스러운 부정의 목소리가 아니라, 행정적인 오류와 지저분한 기침 소리, 그리고 정체불명의 숫자 뭉텅이였다. 소리를 병에 담던 기술자들이 당황하며 기계를 멈추려 했으나, 이미 녹음용 수정구에는 ‘불순물’이 가득 찼다.
“이게 무슨……! 성자님, 지금 뭘 하시는 겁니까!”
클레마 노트가 처음으로 평정을 잃고 외쳤다. 로웬은 무심하게 목을 가다듬으며 모르그를 바라보았다. 모르그가 기다렸다는 듯 장부를 높이 쳐들었다.
“클레마 경, 지금 녹음된 모든 판본은 판매 불가입니다. 장부상의 수령인 이름과 실제 서명이 일치하지 않는 건이 전체의 40%가 넘는군요. 회계 부정과 음정 조작 혐의로 이 녹음 건에 대한 모든 판매 허가를 잠정 중단합니다.”
수정구 속에서 빛나던 소리들이 탁하게 흐려졌다. 가장 듣고 싶은 목소리를 소유하려 했던 사람들의 기대는 짜증 섞인 웅성거림으로 변했다. 상품 가치를 상실한 ‘부정문’은 더 이상 신성한 유물이 아니었다.
클레마 노는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지휘봉을 움켜쥐었으나, 로웬은 이미 단상을 내려간 뒤였다.
그날 저녁, 성당 광장에는 녹음된 목소리보다 더 자극적인 벽보가 붙었다.
[긴급 공지: 순례자용 ‘말하는 성자 인형’ 태엽 결함으로 인한 전량 리콜 안내]
이미 팔려 나간 성자의 형상들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뒤틀리기 시작했다는 흉흉한 소문이 노을보다 먼저 도시를 덮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