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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56화 합본. 순례 인프라 붕괴 감사에서 성자의 그림자를 파는 극장까지

54화. 순례 인프라 붕괴 감사

붉은 밀랍으로 봉인된 감사 통지서가 예고한 현장은, 신성이라는 이름 아래 방치된 거대한 공동묘지나 다름없었다. 계곡을 가로지르던 순례용 돌다리는 허리가 끊긴 채 급류 속으로 처박혀 있었고, 흩어진 석재 위로는 마르지 않은 이끼와 비명이 뒤섞여 눌러붙어 있었다.

로웬이 일행을 이끌고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치료를 바라는 부상자들의 줄이 아니었다. 무너진 교각 옆, 급하게 가설된 천막 앞에는 거친 나무 탁자와 두꺼운 양피지 장부가 놓인 서명대가 있었다.

"성자님의 가호로 목숨을 건졌음을 증언하십시오. 그래야 다음 구호 물자가 배정됩니다."

서기들의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부러진 다리 아래서 신음하는 이들의 귓가를 때렸다. 다리가 무너진 것은 노후화와 관리 소홀 때문이었으나, 그 지옥 같은 추락에서 살아남은 것은 '기적'으로 기록되어야만 했다. 장부의 '성자 기적 회계' 칸은 그렇게 사고의 책임을 은혜의 기록으로 세탁하고 있었다.

서명대 뒤편, 깃펜을 놀리던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아직 그의 이름도, 직함도 불리지 않았다. 그는 눈앞의 피 흘리는 노인이 휘두르는 절박한 손짓보다, 그 손이 장부의 선을 침범하지 않는지에 더 신경을 쓰는 듯 보였다.

"다음. 성자란은 비워 두십시오. 사후 검증 후에 채울 예정이니, 귀하께서는 구조 당시 느꼈던 온기만 서술하면 됩니다."

그의 목소리가 들린 순간, 곁에 서 있던 하급 서기가 허리를 숙이며 잉크병을 받쳐 들었다.

"오드렌 베일 감사관님, 교구에서 보낸 추가 인장입니다."

오드렌 베일. 이름이 불림과 동시에 사내의 존재감이 로웬의 시야에 박혔다. 그는 마치 잘 갈린 종이 날에 베인 듯한 인상을 주는 사내였다. 빛바랜 양피지 색을 닮은 외투는 먼지 하나 없이 빳빳하게 각이 잡혀 있었고, 가느다란 손가락 끝은 잉크가 옅게 배어 있었으나 결코 더럽다는 느낌을 주지 않았다. 사람의 감정이나 고통을 읽어내기보다는 오로지 칸과 숫자의 배열에서만 질서를 찾는 듯한 건조한 눈빛은, 그가 마주하는 세상을 살아있는 생태계가 아닌 거대한 결산서로 보고 있음을 증명했다. 펜대를 쥔 손등에 솟은 힘줄조차 규칙적인 박자로 움직이며, 그는 눈앞의 비극을 오직 행정적 수치로 환산해내는 철저한 실무자의 풍모를 전신으로 뿜어내고 있었다.

"성자라……."

피핀이 혀를 차며 장부 옆면을 훑었다.

"다리가 무너져서 사람이 죽었는데, 살아서 나가는 건 기적이라니. 그럼 죽은 사람들은 기적 회계에서 손실 처리되는 건가? 교회의 장부치고는 참 편리하네."

이네스는 이미 감사관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녀의 커다란 체구가 부상자들을 억지로 줄 세우던 서기들의 앞을 차단하며 서늘한 위압감을 뿌렸다. 보호선이 그어지자 비명 섞인 재촉이 잠시 잦아들었다.

모르그는 오드렌의 어깨너머로 비어 있는 장부의 칸들을 읽어 내렸다.

"비어 있는 성자란이라. 로웬, 저건 함정이야. 당신의 최근 잿불길 기록과 이 사고를 하나로 묶으려 하고 있어. 저 칸에 당신의 이름이 들어가는 순간, 이 붕괴 사고는 '성자의 강림을 위한 시련'으로 둔갑하겠지."

옆에 서 있던 엘드가 낮게 읊조렸다.

"장부를 찢어버리면 당신은 빠져나갈 수 있겠지.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이 사람들의 피해 보상 근거도 사라져. 교회는 '기록되지 않은 사고'에 대해서는 단 한 닢의 은화도 내놓지 않을 테니까."

로웬은 천천히 서명대로 다가갔다. 오드렌 베일은 고개를 들어 로웬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경외도, 불신도 없었다. 오직 처리해야 할 거대한 항목 하나가 제 발로 걸어 들어왔다는 사무적인 계산만이 감돌았다.

"이름을 기입하시겠습니까, 자칭 성자님?"

오드렌이 깃펜을 내밀었다. 로웬은 펜을 받지 않았다. 대신 장부 위에 놓인 오드렌의 손을 지그시 눌렀다.

"감사관, 당신의 장부는 분류가 잘못되었군."

로웬의 손끝이 '기적'이라고 적힌 열을 짚었다.

"이 사고로 다리가 끊겼고, 통행이 마비되었으며,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건 신의 섭리가 아니라 관리 부실에 따른 행정적 결함이다. 따라서 이 칸은 '기적'이 아니라 '미확인 책임'으로 반려되어야 한다."

"……반려라고 하셨습니까?"

오드렌의 눈썹이 처음으로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기적 칸을 공란으로 두는 것은 성무 거부입니다."

"아니, 공란으로 두라는 게 아니다."

로웬은 오드렌의 손에서 깃펜을 빼앗듯 가져왔다. 그리고 성자란이 아닌, 장부 하단의 비고란에 거침없이 글자를 써 내려갔다. 성자가 행한 기적이 아니라, 현장의 실무자가 작성해야 할 서류의 문구였다.

[현장 실무 기록: 교각 내부 부식 확인. 보수 예산 집행 지연에 따른 구조적 붕괴. 기적 회계 항목 부합 판정 불가. 해당 건을 '미확인 책임' 항목으로 분리하여 본청 법무팀으로 이관함. 현 시점부로 해당 구역 임시 통행 금지 및 구호 물자 강제 집행 근거 마련.]

로웬이 펜을 놓았다. 장부에는 성자의 이름 대신 차갑고 딱딱한 실무 문구만이 남았다.

"성자의 기적으로 처리하면 당신은 편하겠지. 하지만 '미확인 책임'으로 남겨두면, 당신은 이 사고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상부에 보고서를 다시 올려야 할 거다. 실무자로서의 질서를 믿는다면, 어느 쪽이 옳은 기록인지 알 텐데."

오드렌 베일은 로웬이 써 내려간 문구를 오랫동안 응시했다. 그것은 신앙의 언어가 아니라, 시스템의 허점을 찌르는 행정의 언어였다. 사내의 건조한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그는 로웬을 '성자 후보'가 아닌, 자신의 장부를 어지럽히는 '위험한 변수'로 재정의하는 듯했다.

"……흥미롭군요. 기적을 부정하면서 기적보다 더 강력한 강제 집행권을 만들어내다니."

오드렌은 로웬이 쓴 페이지를 넘기지 않은 채, 붉은 인장을 꺼내 그 옆에 찍었다. 그것은 승인이 아닌, 정밀 조사를 의미하는 표식이었다.

"하지만 이 문서가 상부에 도달하면, 당신은 단순히 사칭범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교단의 질서를 교란한 죄인으로 다뤄질 겁니다."

오드렌이 품 안에서 다른 서류 한 장을 꺼내 로웬에게 내밀었다. 그 서류 상단에는 굵은 인쇄체로 서늘한 문구가 박혀 있었다.

[공식 성자 심문 출석장 초안 - 사건 번호: 제114-B호]

"다음번엔 장부가 아니라 심문실에서 뵙게 되겠군요."

오드렌 베일이 장부를 덮으며 짧게 목례했다. 무너진 다리 너머로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고, 로웬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거대한 종교적 관료주의의 그림자를 직시했다. 이제 단순한 도망은 끝났다. 성자라는 이름의 감옥 속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갈 시간이 머지않았다.

55화. 성자 초상 허가소

공식 성자 심문 출석장 초안이 배달되기도 전이었다. 문틈으로 밀어 넣어진 것은 두꺼운 양증지에 붉은 납랍이 찍힌 봉투였다. ‘성자 초상 허가소 안내장’. 세간의 열기보다 한발 앞서 도착한 행정의 속도는 로웬의 예상을 아득히 추월하고 있었다.

거리에는 이미 얼굴 없는 성자가 범람했다. 화공들의 가방에는 공인된 인장이 찍혔고, 사람들은 재가 묻은 흉터 선이 대충 그려진 종이 조각을 부적처럼 품었다. 심지어 로웬이 질리도록 내걸었던 ‘나는 성자가 아니다’라는 부정문조차, 초상화 하단을 장식하는 화려한 광고 띠지로 전락해 있었다.

허가소 내부로 들어서자 잉크 냄새와 종이 먼지가 코를 찔렀다. 입구에는 허가 도장대가 굉음을 내며 종이를 찍어 눌렀고, 그 옆으로 성자 초상 상세 징수함이 입을 벌린 채 은화를 삼키고 있었다.

“원본 오셨습니까?”

책상 너머의 여자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물었다. 그녀는 로웬의 눈을 보는 대신, 그의 목 옆에 남은 흉터의 각도와 머리카락의 잿빛 채도를 서류상의 도표와 대조하고 있었다.

“잠시만요, 칸트 행정관님! 여기 화공 조합에서 보낸 추가 도안입니다!”

조합원의 외침에 응답하며 비로소 깃펜을 내려놓은 그녀, 메리엘 칸트의 전신이 비릿한 램프 불빛 아래 드러났다. 그녀는 인간의 얼굴을 마주하기보다 서류의 빈칸과 인증 표식을 먼저 탐닉하는 종류의 실무자였다. 단추를 목 끝까지 채운 감청색 행정복은 칼날처럼 다듬어져 조금의 구김도 허용하지 않았으며, 안경 너머의 눈동자는 생명체의 생기보다는 차갑게 식은 잉크의 농도를 측정하는 정밀 계측기처럼 번뜩였다. 그녀의 움직임은 마른 종이가 바스라지는 소리를 닮아 건조하고 절제되어 있었고, 목소리는 감정이 배제된 채 오직 규격에 맞는 단어만을 골라내어 허공에 각인하는 인장과도 같았다.

“실물 원본의 흉터 선이 도안보다 2밀리미터 짧군요. 수정이 필요합니다. 성자의 이미지는 오차 없는 질서 안에서만 유효하니까요.”

메리엘은 로웬을 살아있는 인간이 아닌, 대량 복제될 이미지의 ‘기준 시료’ 정도로 취급했다.

“이런 걸 들고 성지 근처로 가는 사람들이 늘고 있어요.”

이네스가 구석에 쌓인 초상화 뭉치를 가리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짜 얼굴을 이정표 삼아 험한 길로 뛰어들죠. 이게 행정의 질서인가요, 아니면 절벽으로 떠미는 등 떠밀기인가요?”

옆에서 빈 얼굴의 초상화를 요리조리 뜯어보던 피핀이 낄낄거리며 끼어들었다.

“야, 이거 끝내주는데? 얼굴이 없으니까 아무나 자기 얼굴을 대입할 수 있잖아. 초상권이 아니라 ‘초상 공유권’ 아니야? 성자님은 이제 만인의 거울이라니까.”

모르그는 그 광경을 놓치지 않고 수첩에 휘갈겼다. 빈 얼굴이라는 공백이 오히려 수많은 증언과 기대를 흡수하여 거대한 신화를 완성해가는 구조. 그것은 기록자에게 있어 가장 섬뜩하고도 매혹적인 변이였다.

“저것들을 다 태워버려야 해.”

엘드가 허가 도장대를 노려보며 읊조렸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자신의 말에 담긴 무게를 견디지 못한 듯 덧붙였다.

“……하지만 저 종이 한 장을 임시 안전 표지로 믿고 밤을 버티는 사람들도 있지. 태워버리는 순간, 그들이 기댈 마지막 선마저 사라지는 거야. 그 선택의 비용을 누가 감당하지?”

메리엘 칸트가 완성된 허가증을 로웬에게 내밀었다. ‘성자 본인 확인란’에 도장을 찍으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그녀에게 있어 이것은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규격화된 이미지를 유통하기 위한 마지막 절차였다.

로웬은 깃펜을 잡는 대신 허가증의 수령인 칸과 배달물의 명칭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이 서류의 수령인은 ‘성자’로 되어 있군요.”

“그렇습니다. 당신이죠.”

메리엘의 사무적인 대답에 로웬이 차갑게 미소 지었다.

“틀렸습니다. 나는 성자가 아니라 잿불 심부름꾼 로웬입니다. 배달물 명칭인 ‘성자 초상’과 수령인 ‘로웬’의 신원이 불일치합니다. 또한, 이 허가증에 찍힌 화공 조합의 도장 권한은 민간 영역이지만, 원본 확인란은 교구 행정법을 따르고 있군요. 서로 다른 법체계의 도장이 혼용된 문서는 효력이 없습니다.”

메리엘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이것은 행정적 편의를 위해…….”

“행정은 규격 아닙니까? 수령인 미확인, 그리고 배달물 명칭 부적합으로 인해 이 서류는 반려 처리하겠습니다. ‘원본’이 확인을 거부했으니, 지금 유통되는 모든 초상은 무허가 불법 복제물이 되겠군요.”

로웬은 허가증을 메리엘의 책상 위로 밀어 놓았다. 이미지 전쟁의 첫 공방은 그렇게 서류상의 불일치라는 허무하고도 완벽한 장벽에 부딪혔다.

“와, 우리 성자님 진짜 깐깐하시네.”

피핀이 기지개를 켜며 밖으로 나갔다.

“이러다 얼굴만 안 파는 게 아니라, 성자님 그림자까지 팔아먹는 놈들이 나오겠어. 야, ‘성자의 그림자를 파는 극장’ 같은 거 하면 대박 나지 않겠냐?”

피핀의 농담은 허공으로 흩어지는 듯했으나, 허가소 밖 게시판에는 이미 새로운 전단이 붙고 있었다.

[특별 공연: 성자의 그림자를 파는 극장 — 오늘 밤 개막]

인쇄된 활자가 아직 마르지 않은 잉크 냄새를 풍기며 로웬의 시야에 박혔다. 전쟁은 이제 종이 위에서 무대 위로 옮겨가고 있었다.

56화. 성자의 그림자를 파는 극장

구겨진 전단지는 축축한 밤공기를 머금어 눅눅했다. 손안에서 뭉쳐진 종이 위로 ‘성자의 그림자를 파는 극장’이라는 문구만은 형광처럼 번뜩였다. 로웬은 발치를 구르는 전단지 조각들을 지나쳐, 도시의 가장 어두운 혈관 끝에 매달린 화려한 가설 극장으로 향했다.

막사 입구에서는 은화 한 뼘 크기의 유리병들이 거래되고 있었다. 병 안에는 성자의 형상을 본뜬 그림자 조각들이 잉크처럼 일렁였다. 사람들은 그것을 마치 죄를 씻어줄 면죄부라도 되는 양 가슴팍에 품거나, 입술을 맞대며 기도를 올렸다.

“이것 보십시오, 그림자 제공자님. 당신의 그늘은 아주 훌륭한 상품이 될 겁니다.”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기름지고 매끄러웠다. 로웬이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목소리의 주인은 피핀의 어깨를 툭 치며 덧붙였다.

“그리고 이쪽은 대사 원작자로서 소질이 있겠군. 아까 길거리에서 하던 그 농담, 방금 우리 배우에게 넘겼네. 박자만 조금 비극적으로 비틀면 관객들이 아주 자지러질 거야.”

피핀의 얼굴에서 장난스러운 기색이 사라졌다. 로웬이 차가운 눈으로 그를 응시하자,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온 남자가 화려한 조명 아래 정체를 드러냈다.

사벨 렌트. 극단의 단장이자 이 기괴한 축제의 설계자인 그는, 겹겹이 쌓인 벨벳 코트의 칼날 같은 주름만큼이나 날카롭고 예민한 미적 감각을 온몸으로 뿜어냈다. 그의 눈동자는 관객의 얼굴을 보는 대신 그들이 흘리는 눈물의 양과 박수의 진동을 계산하는 정교한 저울처럼 쉴 새 없이 굴러갔고, 가느다란 손가락은 공중에 흩어지는 금화 소리를 지휘하듯 리드미컬하게 까닥였다. 보라색 실크 타이를 고정시킨 보석 핀이 그가 숨을 쉴 때마다 탐욕스러운 빛을 내뿜었으며, 매끄럽게 빗어 넘긴 머리카락 한 올조차 흥행을 위해 철저히 계산된 연출처럼 보였다. 사벨은 자신을 향한 로웬의 경멸을 마치 찬사라도 되는 양 우아한 반동으로 받아내며 입가를 비틀었다.

“공연 시작입니다. 나의 위대한 기적극이!”

무대 위, 하얀 천 뒤로 촛불이 일렁이며 거대한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성자의 형상을 한 배우가 손을 뻗자, 관객석에서는 비명이 섞인 찬탄이 터져 나왔다. 그들이 내뱉는 대사는 피핀이 낮에 던졌던 가벼운 농담들이었다. 하지만 그 말들은 교묘하게 뒤섞여, 과거 왕궁의 참상을 연상시키는 비극의 운율로 변질되어 있었다.

피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자신의 상처를 핥아 만든 웃음이 타인의 오락을 위한 비명으로 치환되는 순간, 그는 박수 소리에 섞인 기괴한 리듬을 들었다. 그것은 환희가 아니라, 누군가의 고통을 소비하며 얻는 일그러진 카타르시스였다.

“그림자 조각을 사면 지옥의 불길이 비껴갑니다!”

한 관객이 절규하며 그림자 조각을 흔들자, 이네스가 무거운 걸음으로 그 앞을 막아섰다. 그녀의 성검은 칼집에 꽂힌 채였지만, 서슬 퍼런 눈빛만으로도 광기 어린 추종자들을 주춤하게 만들었다. 그 틈을 타 모르그는 무대 뒤편으로 스며들어 적치된 문서들을 훑었다. 눈물병에 붙은 조잡한 라벨과, 그림자 제공자로 명기된 유령 같은 이름들, 그리고 계약서 수령인란의 공백을 그녀의 손끝이 훑고 지나갔다.

“성자님, 이건 기만입니다.”

엘드가 낮게 읊조렸다. 그는 무대 위의 가짜 성자를 바라보며, 마치 저울질하듯 말을 이었다.

“하지만 보십시오. 저들은 가짜 그림자를 품고서야 비로소 평온한 얼굴을 합니다. 누군가에게는 이 사기극이 삶을 버티게 하는 마지막 위로일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이 무대를 부순다면, 저들의 위로 비용은 누가 지불하겠습니까?”

로웬은 대답 대신 사벨 렌트에게 다가갔다. 사벨은 여전히 승리감에 젖어 박수 계량기를 확인하고 있었다. 로웬이 내민 것은 주먹이 아니라, 모르그가 건네준 한 장의 서류였다.

“기적극 검수 도장이 불일치하는군.”

사벨의 눈썹이 꿈틀했다. 로웬이 서류의 항목들을 하나하나 짚었다.

“그림자 제공자의 친필 서명 부재. 대사 원작자의 저작권 미승인. 무엇보다, 이 눈물 보관함의 수령인이 교단 법무국의 승인을 받지 않은 가명이다. 행정적 절차를 무시한 기적의 상업화는 이 도시의 임시 포교령 위반이지.”

“무슨……! 이건 예술이고 구원이다!”

“아니, 이건 정지된 공연이다. 지금 이 순간부로 공연료 지급과 다음 회차 허가를 정지한다. 그림자 제공자가 여기 직접 와서 거부권을 행사하고 있으니까.”

사벨이 당황하여 배우들에게 신호를 보내려던 찰나, 피핀이 무대 위로 불쑥 끼어들었다.

“잠깐, 마지막 농담 하나만 더 들어봐요!”

피핀은 평소의 유려한 박자를 고의로 엇박자로 비틀며, 가장 끔찍한 순간에 터져 나와야 할 농담을 가장 지루한 어조로 던졌다. 무대 위의 조명과 관객의 박수 리듬이 단숨에 깨졌다. 팽팽하게 조여졌던 극적 긴장감이 허무하게 무너지는 그 찰나의 공백을 틈타, 로웬은 사벨의 손에서 원본 계약서를 낚아채 불꽃 속으로 던져 넣었다.

재가 되어 흩어지는 계약서를 보며 사벨 렌트는 처음으로 장사꾼의 미소를 잃었다.

극장 밖으로 나오자 새벽의 찬 공기가 폐부를 찔렀다. 소동이 가라앉은 극장 외벽 위로, 방금 전까지 없던 새로운 공고문이 붙고 있었다.

[긴급 공고: 도시 내 로웬의 초상 및 형상화 일체 금지령 — 대리인 초안]

로웬은 자신의 이름이 적힌 그 종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림자를 파는 극장은 닫혔지만, 성자의 이미지를 둘러싼 전쟁은 이제 막 전면전으로 치닫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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