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87화 합본. 피핀 기억 호출실에서 식은 수프 운반로까지
85화. 피핀 기억 호출실
철문이 닫히는 소리는 무거웠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성국이나 공화국의 문과는 달랐다. 기름칠을 게을리한 경첩이 비명을 지르고, 육중한 석재가 맞물리며 외부의 빛을 완전히 차단하는 소리. 이곳은 왕궁의 가장 깊은 곳, 타인의 기억을 공적으로 해체하는 ‘호출실’이었다.
“……와, 여기 분위기 진짜 끝내주네. 꼭 장례식장 식당 같지 않아?”
피핀이 평소처럼 너스레를 떨며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뒤를 잇는 웃음소리가 없었다. 늘 경박할 정도로 시원하게 터지던 그의 웃음이, 이번에는 입가 근처에서 파들거리다 맥없이 흩어졌다. 피핀은 제 입술을 손가락으로 꾹 누르며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로웬은 그 뒷모습을 보며 주먹을 쥐었다. 심부름꾼으로서 수많은 의뢰인을 봐왔지만, 지금 피핀의 등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마른 나뭇가지 같았다.
방 한가운데에는 덩그러니 놓인 책상 하나와 의자 두 개가 전부였다. 그 뒤편, 그림자 속에 웅크리고 있던 그림자가 스르륵 움직이며 앞으로 나왔다.
“증언자 피핀. 웃음 순서표 4번을 이행하십시오.”
목소리는 변성기도 지나지 않은 소년의 것이었다. 서류 뭉치를 든 ‘소년 서기관’이 무표정한 얼굴로 피핀의 앞에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무슨 순서표?”
로웬이 앞을 가로막으며 물었다. 소년 서기관은 로웬을 올려다보지도 않은 채, 기계적으로 말을 뱉었다.
“기억의 복원을 위한 표준 절차입니다. 증언자의 정서적 상태를 사건 당시와 동기화하기 위해, 피핀 님은 먼저 정해진 규격의 미소를 지어야 합니다. ‘연회장의 광대’로서 가졌던 가장 완벽한 입꼬리 각도를 유지하십시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이네스의 손이 검 손잡이로 향했다. 그녀의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이 절차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기사단의 심문실이나 왕궁의 본인확인 양식에서 흔히 벌어지는, 인간을 서류상의 숫자로 환원시키기 위한 폭력이었다. 그녀는 해설하는 대신, 피핀의 옆으로 한 걸음 다가서며 방패처럼 몸을 비스듬히 세웠다.
모르그는 품 안의 만년필을 만지작거렸다. 평소라면 이 기괴한 광경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기록하려 들었을 테지만, 그는 펜 뚜껑을 열지 않았다. 지난밤, ‘미열람’으로 남겨두기로 했던 약속이 그의 손가락 끝에 무거운 추가 되어 매달려 있었다. 기록하고 싶은 욕망보다, 동료의 무너지는 표정을 보지 않겠다는 의지가 간신히 앞섰다.
“못 하겠다면요?”
로웬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소년 서기관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절차를 거부하시면 증언의 공신력은 폐기됩니다. 피핀 님은 ‘가짜 광대’로 분류되어 추방될 것입니다. 자, 시작하시죠.”
피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려 애썼다. 하지만 경련하듯 떨리는 근육은 웃음 모양을 만들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은접시가 바닥을 구르는 소리와, 닫히는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오던 비명,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웃으라’고 명령하던 그날의 서늘한 목소리들이 조각나 흩어지고 있었다.
로웬은 참을 수 없었다. 대신 서명해주고 싶었다. 아니, 차라리 내가 저 소년의 멱살을 잡고 증언을 쏟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로웬은 멈춰 섰다. 여기서 대신 말해주는 것은 피핀을 구하는 게 아니었다. 그의 고통을 빼앗는 것은, 그가 지키려 했던 마지막 존재 증명을 지우는 일임을 로웬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피핀.”
로웬이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웃지 마.”
“……로웬?”
“웃지 말고 말해. 네가 본 게 뭔지. 딱 한 문장이라도 좋으니까, 네 목소리로 말해.”
피핀은 로웬의 손길에서 전해지는 묵직한 온기에 숨을 들이켰다. 소년 서기관이 짜증스럽다는 듯 펜을 딸깍거렸다.
“이름과 직함을 밝혀라. 그리고 절차를 방해하는 이유를 기록하겠다.”
소년은 차갑게 쏘아붙이며 서류판을 고쳐 잡았다.
“호출실 소년 서기관, 아벨 리트입니다.”
아벨 리트. 이름이 공개되는 순간, 로웬의 눈에 소년의 기이한 생색이 들어왔다.
소년의 손톱은 온통 잿빛 잉크가 배어 있어 마치 썩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제 팔보다 커 보이는 무거운 서류판을 가슴에 안고 버티는 마른 어깨는 비정상적으로 경직되어 있었다. 무대 의상처럼 화려하고 반짝이는 검은 조끼를 입고 있었으나, 자세히 보니 소매 끝단은 실밥이 터져 너덜너덜하게 닳아 있었다. 누군가 억지로 웃음소리를 낼 때마다 소년의 뒷덜미가 미세하게 움찔거렸고, 그의 시선은 상대의 눈이 아니라 오로지 입꼬리가 얼마나 올라갔는지 그 각도만을 기계적으로 재고 있었다. 어린아이의 목소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끝은 낡은 극장 천장에서 떨어지는 먼지처럼 로웬의 귀가에 텁텁하게 내려앉았다.
아벨이 다시 입을 열려던 찰나, 피핀이 바닥을 보며 입을 뗐다. 웃음기 하나 없는, 쩍쩍 갈라진 목소리였다.
“……문이 닫혔어요.”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은접시가 바닥에 떨어졌는데, 아무도 줍지 않았어. 왕궁 사람들은 다들 바닥을 보고 있었고…… 광대장이 내 등을 떠밀었어. 웃으라고. 안 웃으면 네 차례가 될 거라고.”
피핀의 손등에 핏줄이 돋았다.
“그게 내가 기억하는 첫 번째 조각이야. 연회장에 피 냄새가 진동하는데, 나는 웃으면서 서빙을 해야 했어.”
아벨 리트는 무표정하게 피핀의 말을 받아 적었다. 사각거리는 깃펜 소리가 비명처럼 방을 채웠다. 아벨은 기록을 마치고는 고개를 들어 다음 장을 넘겼다.
“제1조각 확인 완료. 다음 장소로 이동합니다.”
아벨이 가리킨 문 너머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그곳에서는 환청처럼 수많은 사람의 가짜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다음 장소는 ‘연회장 웃음 검표소’입니다. 그곳에서 당신의 웃음이 진짜였는지 검증하겠습니다.”
로웬은 피핀의 떨리는 손을 꽉 잡았다. 이제 겨우 문 하나를 열었을 뿐이었다.
86화. 연회장 웃음 검표소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무겁게 울렸다. 연회장으로 이어지는 복도는 화려한 촛대들이 늘어서 있었지만, 그 빛은 바닥의 대리석조차 제대로 밝히지 못할 만큼 침침했다.
그 길목을 가로막은 것은 거대한 철제 데스크였다. 책상 위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유리병들과 잉크통, 그리고 벼려진 가위들이 놓여 있었다.
"멈추십시오. 검표 구역입니다."
책상 뒤에 앉아 있던 인물이 고개를 들었다. 얼굴의 절반을 가리는 기괴한 안경을 쓴 검표관이었다. 검표관은 무표정한 얼굴로 로웬 일행을 훑더니, 짧고 건조한 어조로 명령했다.
"웃음을 제시하십시오. 연회장 입장을 위한 티켓입니다."
로웬은 잠시 멈춰 섰다. 성자로서의 권위나 분노를 내보이는 대신, 그는 습관적으로 품 안의 장부를 확인하듯 가슴팍을 툭툭 쳤다. 곁에 선 이네스의 손등 위로 힘줄이 돋아났다. 그녀는 이 풍경을 알고 있었다. 누군가의 충성심을 증명하기 위해 강제로 표정을 만들어내야 했던 그 지독한 검열의 현장들을. 하지만 이네스는 검 손잡이를 쥔 채 침묵했다. 지금은 칼을 뽑을 때가 아니었다.
모르그는 기록을 위해 펜을 들려다가 피핀을 보았다. 피핀의 눈동자가 평소와 다르게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모르그는 피핀이 허락하지 않은 것은 단 한 줄도 적지 않겠다는 듯, 소리 나게 만년필 뚜껑을 닫아 주머니에 넣었다.
피핀의 기억 속에서 조각난 이미지들이 떠올랐다.
화려한 금실로 수놓아진 커튼 뒤, 아이들은 웃어야 했다. 웃음은 곧 생존을 허가하는 티켓이었고, 동시에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본 증인들의 입을 막는 삭제 도장이었다. 웃지 않는 자는 불량품이었으며, 불량품은 연회가 끝나기 전 소리 없이 치워졌다.
"웃음이... 없으면?"
피핀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검표관은 대답 대신 책상 위의 은색 가위를 들어 올렸다.
"웃지 않는 입술은 필요 없습니다. 규격에 맞지 않는 표정은 반납하셔야 합니다."
검표관의 시선이 피핀의 메마른 입술에 머물렀다. 피핀은 웃지 않았다.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지도, 겁에 질린 표정을 짓지도 않았다. 대신 피핀은 기억의 심연에서 끌어올린 단 한 문장을 명확하게 내뱉었다.
"폐하께서 아직 웃고 계신다."
그것은 명령이자, 이 기괴한 연회장의 질서를 단번에 뒤흔드는 균열이었다. 검표관의 손에 들린 가위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 문장은 피핀에게 있어 왕궁의 어둠을 버티게 했던 저주이자, 지금 이 순간 검표소의 논리를 무너뜨리는 방패였다.
로웬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앞으로 나섰다. 그는 성자라는 거창한 수식어 대신, 물건을 배달하고 수령하는 심부름꾼의 건조한 목소리를 냈다.
"이건 반품 사유서입니다."
로웬이 검표소 책상 위에 빈 종이 한 장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우리가 가져온 건 '웃음'이라는 규격품이 아닙니다. 배달표를 확인해 보시죠. 이 의뢰인들은 웃음을 지불하러 온 게 아니라, 잘못된 검표 방식을 반품 처리하러 온 겁니다. 도장은 내가 찍습니다."
검표관의 안경 너머로 당혹감이 스쳤다. 논리와 규정에 묶인 자일수록, 규정 밖의 논리에는 취약한 법이다. 검표관은 가위를 내려놓고 서류를 살피는 척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직함과 이름을 밝혀라."
이네스가 낮게 으르렁거리자, 검표관은 그제야 빳빳하게 세운 깃을 매만지며 답했다.
"마르타 퀸. 연회장 웃음 검표관입니다."
이름이 공개됨과 동시에 마르타 퀸의 기괴한 존재감이 복도의 공기를 압도했다.
그녀의 손에 들린 은색 검표 가위 날 끝에는 미처 닦아내지 못한 마른 핏조각이 검붉게 엉겨 붙어 있었다. 목 끝까지 단추를 하나도 빠짐없이 채운 진홍색 검표복은 숨이 막힐 듯 빳빳하게 날이 서 있었고, 웃음의 높이를 재느라 비틀어진 그녀의 손목은 기괴한 각도로 꺾여 있었다. 사람의 눈을 마주하기보다 치아의 배열과 입꼬리의 각도를 먼저 훑는 시선은 불쾌하리만큼 집요했다. 예의 바르지만 칼날처럼 얇게 갈린 목소리에서는 고급 향수 냄새와 오래된 식은 고깃국 냄새가 뒤섞인 비릿한 숨이 배어 나왔다.
마르타 퀸은 피핀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폐하께서 웃고 계신다'는 문장의 무게를 가늠하는 듯했다.
"폐하의 웃음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면... 제 검표는 무의미하겠군요."
마르타가 가위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녀는 기계적인 동작으로 책상 옆의 차단봉을 치웠다. 로웬은 피핀의 어깨를 가볍게 짚으며 걸음을 옮겼다.
연회장 안쪽으로 이어지는 길은 여전히 어두웠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어디로 가야 할지 알고 있었다. 마르타 퀸의 옷에서 풍기던 그 비릿한 고깃국 냄새. 그것은 화려한 식탁 위로 올라가는 요리의 냄새가 아니었다.
"저쪽입니다."
로웬이 복도 구석, 가려진 커튼 뒤를 가리켰다. 화려한 대리석 바닥 대신 거칠고 습한 냉기가 뿜어져 나오는 좁은 통로였다.
그곳은 귀한 손님들이 드나드는 정문이 아니었다. 주방에서 버려진 찌꺼기와, 누군가의 입맛을 맞추기 위해 준비된 것들이 소리 없이 이동하는 길.
식은 수프 운반로였다.
87화. 식은 수프 운반로
커튼을 젖히고 들어선 통로는 사람의 어깨 너비보다 조금 넓을 뿐이었다. 연회장의 화려한 촛불 대신, 벽면 곳곳에 박힌 구리 램프가 그을린 기름 냄새를 뱉어내고 있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바닥의 젖은 돌벽에서 눅눅한 한기가 올라왔다. 로웬은 코끝을 찌르는 냄새에 미간을 찌푸렸다. 단순한 습기가 아니었다. 오래된 고기 지방이 타다 남은 냄새, 그리고 차갑게 식어 굳어버린 수프의 비릿한 잔향이 벽면의 기름때 사이에 층층이 쌓여 있었다.
피핀의 어깨가 눈에 띄게 떨렸다. 그는 제 몸집보다 큰 냄비를 짊어진 것처럼 상체를 숙인 채,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왼쪽…… 손님상부터.”
그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정적뿐이던 통로 저편에서 톱니바퀴가 맞물리는 쇳소리가 들려왔다. 벽면의 선반들이 덜컹거리며 돌출되었고, 천장에 매달린 도르래가 낡은 밧줄을 긁어대며 녹슨 은접시들을 아래로 내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식은 수프가 담긴 냄비들이 선반 위를 미끄러져 내려왔다. 피핀의 앞으로 거대한 철제 바구니가 다가왔다.
“순서가…… 틀리면 안 돼. 그럼 다시 돌아가야 해. 주방장이…….”
피핀이 허공을 더듬으며 한 걸음을 떼려 할 때, 허공에서 커다란 활자판이 내려왔다. 붉은 잉크가 뚝뚝 떨어지는 판에는 ‘주방 잡역의 착오’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피핀의 증언을 통째로 부정하고 그를 무능한 심부름꾼으로 낙인찍으려는 장치였다.
로웬이 피핀의 앞을 가로막으며 활자판을 밀쳐냈다.
“이건 기억을 되살리는 재판이 아니야. 오배송을 바로잡는 업무지.”
로웬이 품 안에서 낡은 종이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성자의 경전도, 기사의 맹세문도 아닌, 심부름꾼들이 흔히 쓰는 배달 확인표였다.
“수취지가 틀렸으면 반송지로 돌려보내면 그만이다. 피핀, 네 보폭과 순서가 틀린 게 아냐. 이 통로의 배달표가 엉킨 거지. 수취지 대조해. 오배송 정정 신청 들어간다.”
이네스가 피핀의 옆에 바짝 붙어 서며, 그의 흔들리는 시선을 가렸다. 그녀는 검을 뽑는 대신 피핀의 어깨를 단단히 감싸 쥐었다. 모르그는 펜을 들어 피핀이 내뱉는 짧은 단어들, 그가 허락한 냄새의 방향만을 종이에 옮기기 시작했다.
통로 깊은 곳, 그림자 속에 웅크리고 있던 형체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식은 수프가 가득 담긴 커다란 솥 뒤에서 배달표 뭉치를 뒤적이고 있었다.
“착오는 기록되어야 한다. 잘못 배달된 수프는 손님의 상에 오를 수 없지. 이건 폐기물이다.”
그림자 속의 인물이 차가운 목소리를 뱉었다. 피핀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외쳤다.
“아냐. 그 수프는…… 손님상에 가지 않았어. 다른 곳으로 갔단 말이야!”
로웬이 오배송 정정표를 그림자 앞에 내밀었다.
“들었지? 수취지가 애초에 연회장이 아니었다. 장부지기, 네가 적어둔 목적지가 틀린 거야.”
그제야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램프 불빛 아래로 그의 이름과 직함이 새겨진 동판이 희미하게 빛났다.
오르도 렌. 식은 수프 운반로의 장부지기.
그는 물에 퉁퉁 불어버린 손등을 갈무리하며 기름때가 새까맣게 낀 흰 주방장갑을 다시 고쳐 끼었다. 겹겹이 겹쳐 입은 앞치마에서는 오래된 수프의 비릿한 악취가 뼛속까지 배어 나올 듯 진동했고, 장부의 모서리를 넘길 때마다 혀로 손가락을 핥는 그의 움직임은 기괴할 정도로 축축하고 집요했다. 퀭한 눈등 아래 자리 잡은 탁한 시선은 로웬 일행을 살아있는 사람으로 보지 않고, 오직 배달되어야 할 물건이나 폐기해야 할 찌꺼기 정도로만 분류하고 있었다. 그는 달궈지지 않은 무거운 냄비 바닥이 돌바닥을 긁는 것 같은 둔탁하고 메마른 목소리로 장부를 소리 내어 읽었다.
“수취지 변경 확인. 은접시 하나, 수프 두 그릇. 배달 경로 수정한다.”
오르도 렌이 장부의 한 페이지를 거칠게 찢어내자, 통로 끝을 가로막고 있던 육중한 철문이 비명 같은 소리를 내며 옆으로 밀려났다.
문패에는 녹슨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은접시 추락 계단]
피핀의 눈동자가 그 글자를 보는 순간, 공포와 확신이 뒤섞인 채 가늘게 떨렸다. 그곳은 연회장으로 향하는 화려한 계단 밑, 아무도 보지 않는 어둠의 나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