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84화 합본. 첫 증인 호출실에서 진실 독점 반납소까지
82화. 첫 증인 호출실
불투명한 유리로 된 문을 열자 싸늘하고 공허한 기운이 먼저 로웬의 뺨을 스쳤다. 마치 방금까지 누군가 있었던 것처럼, 온기가 채 가시지 않은 냉기였다. 길게 늘어선 회색 돌 복도 끝, 낮은 단상 위에 놓인 네 개의 나무 의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 의자들은 하나같이 낡고 투박했으며, 등받이에는 각각 '봤다', '들었다', '믿었다', '말했다'라는 꼬리표가 매달려 있었다. 증언이 사람을 묶는다는 진실을 이토록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은 처음이었다.
로웬은 잠시 굳어진 표정으로 네 의자를 응시했다. '성자의 행적'에 대한 증언은 어떠한 형태로든 사람을 얽어매고 죄를 묻는 도구가 될 터였다. 이대로 첫 증인을 처벌받게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즉시 머릿속으로 수많은 서류와 규정을 훑었다. 성자 행적 증언은 너무나 모호하고 위험했다. 로웬은 그것을 배달 경로 착오 신고로 재분류할 계획을 세웠다. 배달 과정에서 발생한 단순한 실수로 둔갑시키면, 자동 배정되어 벌어질 수 있는 끔찍한 연쇄 작용을 상당 부분 약화시킬 수 있었다.
모르그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단상 중앙에 놓인, 아무 꼬리표도 없는 커다란 나무 탁자로 향했다. 탁자 위에는 방금 뽑혀 나온 듯한 증언 원본이 놓여 있었다. 그는 그것을 집어 들려는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로웬의 왼쪽 손목에 붉은색 글씨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첫 증인: 율리아 카이딘』. 모르그의 손이 허공에서 멈칫했다. 이름이 새겨졌다는 것은, 증인이 이미 로웬에게 배정되었음을 의미했다. 그의 눈빛에 독점하려던 욕망과 놓쳐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이 교차했다.
피핀은 '봤다' 꼬리표가 달린 의자 앞에 섰다. 그 낡은 나무 의자는 마치 억압된 진실을 토해내라고 다그치는 듯했다. 왕궁 학살의 증인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공포가 그의 유쾌함을 집어삼켰다. 그는 늘 그렇듯 농담으로 분위기를 전환하려 입을 열었지만,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헛웃음만 흘렸다. 그를 스쳐 지나간 과거의 그림자가 너무나도 선연했다.
이네스는 고요하게 '믿었다' 의자를 바라보았다. 첫 증인이 성자에 대해 가졌던 오해, 그리고 그 오해가 만들어낸 증언이 마치 자기 자신의 지난날과 닮아 있음을 그녀는 짧은 한숨과 침묵으로 인정했다. 복잡한 설명을 덧붙이는 대신, 그저 가만히 서서 의자를 응시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때, 방 안으로 그림자처럼 한 남자가 들어섰다. 낡은 법복을 걸쳤지만 기개는 사뭇 달랐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빈 의자들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첫 증인을 호출한다.” 그의 목소리는 나이보다 마른 기침 섞인 소리였지만, 공간을 가득 채우는 낮은 울림이 있었다. “위증의 처벌은… 알겠지?” 남자는 로웬과 모르그, 피핀, 이네스를 차례로 훑어본 후, 다시 의자 등받이를 먼저 보는 시선으로 돌아갔다. 그제야 그는 낮은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과 직함을 밝혔다. “아르넨 숄. 첫 증인 호출관이다.”
그의 낡은 법복 소매 끝에서는 희미하게 증인 꼬리표를 문질러 생긴 듯한 종이 냄새가 났다. 마른 몸은 빈 의자들 사이를 지나며 낮게 접혔고, 나무를 두드리는 손가락은 일정한 리듬으로 불안감을 조성했다. 그는 사람의 눈을 직접 맞추기보다는 의자 등받이를 먼저 훑어보는 습관이 있었다. 기침 섞인 마른 목소리는 권위적이라기보다는 실무에 지친 이의 덧없는 무게감을 담고 있었다.
“율리아 카이딘의 증언은 성자 행적 증언이 아닌 배달 경로 착오 신고로 분류되었다.” 로웬은 서류를 내밀었다. 아르넨 숄은 서류를 받아 들고 잠시 읽어 내려갔다. 그의 미간이 미묘하게 찌푸려졌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처리 방식은 규정 내에 있으니 따르겠다.”
호출실의 싸늘한 공기가 조금은 누그러지는 듯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로웬의 시선은 본능적으로 방 한구석, 그림자에 가려진 거대한 벽면 서가를 향했다. 그곳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서류 뭉치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틀림없었다. 저곳이 바로 증언 사본 보관소일 터였다.
83화. 증언 사본 보관소
먼지는 빛보다 먼저 눈에 들어왔다. 선반마다 빼곡하게 들어찬 종이 뭉치 위로 희뿌연 입자들이 안개처럼 내려앉아 있었다. 이곳은 기록의 성소가 아니라, 누군가의 입술을 떠난 말이 상품으로 가공되어 유통을 기다리는 창고였다.
로웬은 선반 가장자리에 붙은 꼬리표를 훑었다. ‘남부 교구 배포용 — 성자 출현 증언 3종 세트’, ‘동부 상단가 열람용 — 기적의 실체 및 목격담’. 같은 내용의 증언이 종이 질과 인장 두께에 따라 가격표를 달고 복제되어 있었다.
“이게 다 팔린다는 거야?”
피핀이 코끝을 찡그리며 물었다. 그는 평소처럼 농담을 던지려 입술을 달싹였으나, 곧 말을 멈췄다. 자신의 눈앞에 쌓인 종이 더미 중 하나가 누군가의 ‘기억’을 조각내어 판다는 사실이 피부로 느껴진 탓이다. 내가 본 것이 누군가에게 사본으로 팔릴 수 있다는 공포가 그의 장난기를 억눌렀다.
이네스는 기사단 증언 양식과 성자 소문 사본 양식을 번갈아 보며 짧게 읊조렸다.
“닮았군.”
그녀의 침묵은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질서를 수호한다는 기사단의 기록과, 소문을 팔아먹는 보관소의 서류가 같은 규격의 칸과 선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 주는 기묘한 불쾌감이 감돌았다.
“잠깐, 여긴 건드리지 마.”
모르그가 사본 유통 경로가 그려진 커다란 지도를 펼치려다 손을 멈췄다. 지도의 한 구석, ‘피핀 기억 보관료’라고 적힌 칸이 다른 사본들의 유통망과 얽혀 있었다. 지도를 통째로 챙기려던 모르그의 손가락이 떨렸다. 지도를 찢거나 가져가는 순간, 피핀의 기억마저 어떤 보관료 청구의 근거가 되어 영영 이 시스템 속에 박제될 것 같다는 예감이 그를 붙잡았다.
로웬은 품 안에서 미리 준비해 온 띠지들을 꺼냈다. 불태우는 건 하책이다. 기록이 사라지면 이들은 기록을 잃어버린 것에 대한 보상 청구서를 다시 발행할 텐데, 그건 일이 더 복잡해지는 길이었다.
“불태우지 않고 뭐 하는 거야?”
“더 귀찮게 만들어야지.”
로웬은 사본들 사이에 ‘원본 분류 정정 대기’라고 적힌 붉은 띠지를 끼워 넣었다. 이 띠지가 붙는 순간, 해당 사본은 확정 증언으로 인정받지 못해 청구 권리가 일시 정지된다. 실무자들만이 아는, 합법적인 지연 전술이었다.
그때, 어둠 속에서 마른 기침 소리가 들렸다.
“열람료는 선불입니다. 이미 팔려 나간 사본의 정정료는 대납하셔야 하고요.”
선반 뒤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그는 로웬 일행의 얼굴을 보는 대신, 로웬이 띠지를 끼워 넣은 사본의 일련번호부터 훑었다.
“누가 마음대로 정정 띠지를 붙이는 거지?”
“사본 관리인인가?”
로웬의 물음에 남자는 대답 대신 장부를 소리 나게 덮었다. 로웬이 통행증과 심부름꾼 인장을 내밀자, 그제야 남자는 잉크 얼룩이 묻은 손가락으로 안경을 추스르며 이름을 밝혔다.
“증언 사본 관리인, 테린 보르입니다. 업무를 방해하시면 곤란합니다.”
그는 낡고 얇은 회색 조끼를 걸치고 있었는데, 양쪽 팔꿈치에는 오래된 잉크 얼룩이 짙게 배어 있었다. 속눈썹 위에는 종이 더미에서 떨어진 사본 먼지가 하얗게 앉아 있었고, 어깨는 마치 좁은 선반 모서리에 끼워 맞춘 듯 납작하게 안쪽으로 굽어 있었다. 그가 장부를 넘길 때마다 바싹 마른 손톱이 종이 결을 긁으며 서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테린의 시선은 로웬의 눈을 맞추기보다 그의 가슴팍에 달린 심부름꾼 번호를 먼저 훑고 지나갔으며, 입을 열 때마다 목 안에서 잉크가 딱딱하게 굳었다가 갈라지는 듯한 쇳소리가 새어 나왔다.
“심부름꾼이라도 예외는 없습니다. 여기 있는 사본 하나하나가 다 누군가의 채권이고, 누군가의 신앙이니까요.”
테린 보르가 마른 손가락으로 로웬이 끼워 넣은 띠지를 가리켰다.
“이거 한 장으로 증언 하나가 죽습니다. 그 값을 치르실 수 있겠습니까?”
“죽는 게 아니라 잠시 멈추는 거지.”
로웬이 차갑게 응수했다.
“우리는 이 증언들의 뿌리를 찾으러 왔다. 사본이 어디서 복제되기 시작했는지, 원본의 행방을 말해.”
테린 보르는 잠시 로웬을 응시하다가, 길고 마른 손가락으로 보관소 안쪽의 가장 어두운 구석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분류되지 못한 채 검은 잉크가 번진 서류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원본은 이미 오염되었습니다. 여기서 걸러지지 못한 ‘반송된 증언’들은 모두 한곳으로 모이죠.”
테린의 손끝이 가리킨 곳에는 낡은 표지판 하나가 비스듬히 세워져 있었다.
“검은 우물 반송 센터. 거기로 가 보십시오. 당신들이 찾는 그 ‘성자’의 첫 목소리도 아마 거기서 썩어가고 있을 테니까.”
84화. 진실 독점 반납소
검은 우물 반송 센터의 공기는 폐허가 된 성소보다 축축하고 비릿했다. 사방에서 뚝, 뚝 떨어지는 물소리가 일정하게 고막을 두드렸다. 우물 밑바닥으로 가라앉은 온갖 잡동사니들이 반송을 기다리며 쌓여 있는 풍경은 기괴했다. 깨진 도자기 조각부터 누군가의 낡은 신발, 그리고 형태를 알 수 없는 눅눅한 종이 뭉치들.
그 산더미 같은 쓰레기들 사이로 검은 옷을 입은 접수인이 불쑥 손을 내밀었다.
“수취인 확인 바랍니다.”
접수인이 내민 것은 ‘검은 열람권’이라 불리는 두꺼운 양피지였다. 그 종이가 펼쳐지자 수천 개의 가는 실선들이 허공에 떠올랐다. 그것은 지금까지 유통된 모든 증언 사본의 경로였다. 누가 이네스의 목소리를 가졌는지, 누가 피핀의 실수를 기록해 팔아넘겼는지, 그 추악한 유통망이 한눈에 들어왔다.
모르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토록 갈구하던 진실의 지도였다. 이 열람권만 손에 넣으면 성왕의 죽음을 둘러싼 모든 거짓을 발라내고 장부에 기록할 수 있다. 하지만 대가는 가혹했다.
열람권 하단에는 작은 글씨로 계약 조건이 적혀 있었다. ‘피핀의 기억과 이네스의 증언을 모르그의 장부 아래 귀속시킴.’
즉, 모르그가 진실을 독점하는 순간, 피핀과 이네스는 더 이상 자기 기억의 주인이 아니게 된다. 그들의 삶은 모르그가 관리하는 장부의 부속물이 될 터였다.
모르그의 손끝이 양피지에 닿을 듯 다가갔다. 진실을 향한 그의 집념이 공기를 차갑게 얼렸다. 그러나 그는 손을 뻗는 대신, 제 허리춤에 매달린 장부를 꺼내 펼쳤다.
“……내 장부는 타인의 영혼을 가두는 감옥이 아니다.”
모르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했다. 그는 깃펜을 들어 장부의 빈 칸에 꾹꾹 눌러 적었다.
[미열람.]
그가 열람권을 거부하자 허공의 실선들이 비명을 지르듯 뒤틀렸다. 접수인이 무미건조한 눈으로 우리를 보았다.
“소유권 이전을 거부하면 이 모든 증언은 파기되지 않고 영원히 우물을 떠돌게 됩니다. 감당하시겠습니까?”
이네스는 그 광경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 앞에 놓인 증언 양식은 그 자체로 폭력이었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어떻게 굴복했는가’를 묻는 칸들이 빈틈없이 그녀를 압박했다. 이네스는 해설하지 않았다. 다만 떨리는 손으로 빈 종이를 움켜쥐었을 뿐이다. 그녀의 침묵이 텅 빈 양식보다 더 무겁게 내려앉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품 안에서 낡은 도장을 꺼냈다. 이런 식의 행정 절차는 질색이다. 진실이니 독점이니 하는 거창한 말들 속에 숨겨진 비효율을 처리하는 건 결국 내 몫이었다.
“거 참, 말이 많네. 우리는 이걸 가지러 온 게 아니야. 돌려주러 온 거지.”
나는 접수인이 내민 열람권을 찢지도, 불태우지도 않았다. 대신 내가 가져온 반송용 서류 위에 그 열람권을 겹쳐 올리고는, 미리 준비해 온 도장을 사정없이 찍어 눌렀다.
[수취인 불일치 / 소유권 반납]
붉은 인영이 양피지 위를 짓눌렀다. 접수인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원칙주의자에게 절차로 들이받는 것만큼 확실한 방법은 없다.
“이건 소유권 이전 대상이 아니라, 처음부터 잘못 배송된 물건이야. 주인이 거부했으니 반송 처리해.”
내 억울한 실무자의 항변에 접수인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손을 거두었다. 그제야 그의 가려진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그는 진실 독점 반납소 접수인, 세안 르크였다.
세안의 검은 제복 솔기에서는 차가운 물방울이 끊임없이 배어 나와 바닥을 적셨다. 우물물에 퉁퉁 불어버린 소매 끝은 무거운 추처럼 늘어져 그의 움직임을 둔탁하게 만들었다. 물때가 검게 낀 그의 손가락은 오직 도판 위에서 손목만 기계적으로 움직였고, 그는 상대의 얼굴을 보는 대신 서명란의 빈칸을 먼저 훑는 기이한 시선을 지니고 있었다. 무언가를 말할 때마다 그의 목소리는 우물 벽에 부딪혀 한 박자 늦게 돌아왔는데, 그 잔향은 마치 죽은 자의 메아리처럼 공허했다.
세안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반납 절차 확인되었습니다. 하지만 소유권을 포기한 대가는 직접 치르셔야 합니다.”
그가 손가락으로 우물 깊숙한 곳을 가리켰다. 그곳에서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징— 징—
금속이 울리는 소리 같기도 하고, 수천 명의 사람이 한꺼번에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 같기도 했다. 그 소리가 들리는 순간, 평소라면 싱거운 농담을 던졌을 피핀의 안색이 종잇장처럼 하얗게 질렸다.
“어……?”
피핀이 입을 벌렸지만, 농담은커녕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허공을 헤맸다. 그의 머릿속에서 잠들어 있던 왕궁의 기억들이 강제로 호출당하고 있었다. 화려했던 연회장, 차가운 대리석 복도, 그리고 누군가의 비릿한 웃음소리.
“피핀!”
내가 그의 어깨를 붙잡았지만, 피핀은 마치 물속에 가라앉은 사람처럼 허우적거렸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필사적으로 붙잡으려 했지만, 반송 센터의 체계는 자비가 없었다.
세안 르크가 고개를 까닥였다.
“다음 구역으로 가십시오. 보관된 기억의 주인이 호출되었습니다.”
그의 시선이 가리킨 곳에는 어둡고 축축한 철문이 있었다. 문 위에는 낡은 팻말이 매달려 흔들리고 있었다.
[피핀 기억 호출실]
피핀은 농담을 시작하지 못했다. 아니, 그는 이제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그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장부가 닫히는 소리와 함께, 피핀의 감춰진 시간이 삐걱거리며 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