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53화 합본. 흰 사슴 장례행렬의 길막에서 잿불길 임시 휴게소까지
51화. 흰 사슴 장례행렬의 길막
딸랑, 딸랑.
서늘한 종소리가 안개 너머에서 배어 나왔다. 로웬의 품 안에서 흰 사슴뿔로 깎아 만든 장례 통행증이 미친 듯이 진동했다. 그것은 길을 비키라는 신호이자, 산 자의 영역을 침범하겠다는 선전포고와 같았다.
자욱한 안개를 헤치고 나타난 것은 순백의 천으로 몸을 감싼 행렬이었다. 그들은 죽은 순례자의 영혼을 안식으로 인도하는 장례 행렬을 자처했으나, 그 행위는 경건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행렬의 선두에 선 인부들은 길가에 웅크린 채 숨을 죽이고 있던 생존자들의 가슴팍에서 이름표를 낚아채 관 속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잠깐, 나는 아직 숨을 쉬고 있소! 내 이름표를 왜 가져가는 거요!”
한 여행자가 비명을 질렀지만, 행렬은 멈추지 않았다. 관 뚜껑이 덜컥거리며 열릴 때마다 그 안에 담긴 이름표들이 산 사람의 생기를 빨아들이듯 서늘한 안개를 뿜어냈다. 죽은 자를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산 사람의 서류상 존재를 지워 관 속에 처박는 행정적 살인이 길 위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 혼란의 중심에서, 한 남자가 무심하게 깃펜을 놀리며 걸어 나왔다. 먼지 하나 묻지 않은 회색 장부를 든 그는 길을 막아선 채 로웬의 일행을 훑었다.
“이름표를 분실한 자, 혹은 기한 내에 죽지 못한 자들이군.”
남자는 감정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로웬의 코앞으로 장부를 들이밀었다. 장부에는 방금 끌려간 여행자의 이름 위에 붉은 선이 그어져 있었다.
“이곳의 법은 명확하다. 관에 들어갈 이름이 부족하면 행렬은 멈추지 않지. 자, 당신들의 이름도 이 장부에 옮겨 적어야겠다. 이 공란에 도장을 찍어. 당신이 성자든 누구든, 이 절차를 건너뛸 수는 없다.”
그는 로웬의 권위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오직 장부의 빈칸과 줄 간격에만 집착하고 있었다. 그때, 뒤를 따르던 장례 인부 중 하나가 허리를 굽히며 그를 불렀다.
“라엔 티르 기록수님, 이쪽 관의 봉인이 부족합니다. 확인해 주십시오.”
기록수, 라엔 티르. 이름과 직함이 불리는 순간, 남자의 주변을 감싸던 사무적인 공기가 기묘한 압박감으로 변해 로웬의 감각을 자극했다.
그는 살아있는 인간이라기보다 서고의 곰팡이 핀 서류더미가 의인화된 듯한 인상을 풍겼다. 잉크 얼룩이 굳어 딱딱해진 소맷단은 그가 평생 타인의 생애를 글자로 박제해 온 세월을 증명했고, 촛농처럼 창백한 피부 위로 돋아난 핏줄은 마치 복잡한 계보도처럼 얽혀 있었다. 그의 시선은 로웬의 눈을 마주하는 대신 옷깃에 묻은 보풀이나 장부의 여백을 훑으며, 대화 상대가 아닌 수정해야 할 오탈자를 보는 듯한 불쾌한 정교함을 띠었다. 숨소리보다 장부의 줄 간격이 어긋나는 것을 더 견디지 못할 것 같은 이 실무자의 손가락은, 펜대를 쥐는 관절 마디마디가 기괴할 정도로 각져 있어 움직일 때마다 서걱거리는 종이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라엔 티르라고 했나? 당신, 지금 산 사람을 억지로 죽은 자의 명단에 끼워 넣고 있잖아.”
이네스가 검 손잡이를 꽉 쥐며 앞을 가로막았다. 금방이라도 행렬을 베어버릴 기세였으나, 엘드가 그녀의 어깨를 짚으며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이네스. 이 행렬 속에는 진짜 안식이 필요한 죽은 자들의 관도 섞여 있다. 행렬을 통째로 뒤엎으면 그들의 마지막 절차까지 모독하게 돼. 산 자를 구하되, 죽은 자의 길을 짓밟지 말아야 한다.”
그 사이, 피핀은 길바닥에 떨어진 통행증 조각들을 주워 들고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와, 이것 좀 봐요. ‘통행 완료’, ‘생애 종료’, ‘앞당겨 도착’. 심지어 이건 ‘늦은 사망 확인’이라네? 죽는 것도 배송 일자 맞추듯 행정적으로 처리하고 있잖아. 이 사람들은 죽은 게 아니라 서류상으로 ‘배달 사고’가 난 거라고요!”
피핀의 말대로였다. 장례 행렬은 종교적 의식이 아니라, 거대한 관료 조직의 물류 처리 과정과 닮아 있었다.
모르그는 라엔 티르가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그의 장부 한쪽을 예리하게 훑었다. 그곳에는 소름 끼치는 단서가 숨겨져 있었다.
“성자님, 이것 좀 보십시오. 신들의 성물을 회수하는 목록과 인간 사망자의 명단이 똑같은 서식으로 묶여 있습니다. 이들에게 인간의 목숨은 회수해야 할 교회의 자산일 뿐입니다.”
상황은 급박했다. 인부들이 다시 여행자들을 관으로 끌고 가려 하자, 로웬이 라엔 티르의 장부를 붙잡았다. 라엔 티르의 눈썹이 불쾌하게 꿈틀거렸다.
“방해하지 마라. 성자라 해도 행정 절차를 어길 권리는 없다.”
“행정 절차를 지키려는 건 나도 마찬가지다, 기록수.”
로웬은 성자의 권능으로 행렬을 억누르는 대신, 그들이 신성시하는 그 ‘장부’를 공략하기로 했다. 로웬은 깃펜을 빼앗아 장부의 비어 있는 칸에 거침없이 글자를 휘갈겼다.
“수취인 살아 있음. 사망 확인자 없음. 결정적으로, 배송지 불일치.”
로웬이 장부의 특정 구절을 가리켰다.
“이 관들의 목적지는 안식의 땅이라고 되어 있지만, 지금 당신들이 가고 있는 방향은 교회 직할령의 폐기소다. 죽은 자의 영혼이 아니라 산 자의 육신을 수거해가려는 기록 오류지. 이 서류는 무효다.”
라엔 티르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그는 완벽주의자였다. 자신의 장부에 ‘오류’가 있다는 지적은 그 어떤 신성 모독보다 그에게 치명적이었다. 그는 미친 듯이 장부의 대조표를 확인하기 시작했고, 로웬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통행증의 칸을 분리해 냈다.
산 자들의 이름표가 관 밖으로 튕겨져 나왔다. 억지로 끌려가던 사람들이 숨을 몰아쉬며 뒤로 물러났다. 행렬은 일시적으로 기능 정지에 빠진 기계처럼 멈춰 섰다.
라엔 티르는 분노와 당혹감이 뒤섞인 표정으로 로웬을 쏘아보았지만, 이미 서류상의 명분은 깨진 뒤였다.
그때, 행렬이 멈춰 선 길 오른쪽의 진흙탕 속에서 육중한 석판 하나가 서서히 솟아올랐다. 안개를 뚫고 드러난 그 표지판에는 화려한 귀족 가문의 문장과 엄숙한 교회의 인장이 깊게 새겨져 있었다.
금박이 벗겨진 낡은 표지판이었으나, 그 위에 새겨진 문구는 명확했다.
‘성자 전용 우회로. 허가받지 않은 산 자와 부정한 죽은 자의 출입을 금함.’
길막을 당했던 장례 행렬 옆으로, 오직 성자만이 걸을 수 있다는 기만적인 지름길이 열리고 있었다. 로웬은 차가운 눈으로 그 표지판을 응시했다. 그것은 구원이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격리였다.
52화. 성자 전용 우회로
낡은 나무 표지판이 기괴하게 비틀리며 몸집을 불렸다. 허공을 긁는 불쾌한 마찰음과 함께 옹이가 진 나뭇결이 매끄러운 대리석 질감으로 변모했고, 이내 화려한 금박이 수놓인 아치형 문과 정갈한 접수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방금까지 진흙탕 속에서 발을 구르던 순례자들의 비명 섞인 통곡이 먼지처럼 가라앉았다. 그들의 앞에는 여전히 무너진 바윗덩어리와 끝을 알 수 없는 대기열이 가로막혀 있었으나, 로웬의 발치에는 단 한 점의 흙먼지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결벽적으로 깨끗한 지름길이 뻗어 나갔다.
접수대 뒤에 앉아 있던 남자가 무심한 손길로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그는 곁에서 오열하며 번호표를 붙들고 있던 한 노파의 손을 가차 없이 쳐내더니, 그녀의 번호표 위로 붉은 낙인을 찍어 무효화했다. 노파가 바닥에 쓰러지건 말건, 그는 로웬을 향해 은색 우회권을 내밀며 기계적인 목소리를 뱉었다.
“성자 예하와 그 일행을 위한 전용 우회로입니다. 일반 대기선과는 격이 다른 안전을 보장합니다.”
그때 뒤늦게 달려온 귀족 복장의 수행원이 숨을 헐떡이며 남자의 옆에 섰다. “세릴 무트 행정관님! 성자 일행의 도착이 예정보다 빠릅니다!”
그제야 남자의 이름이 세릴 무트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는 빳빳하게 풀을 먹인 셔츠 깃 위로 미동도 하지 않는 창백한 목목선을 드러냈는데, 그 기묘할 정도로 정적인 신체는 살아있는 인간이라기보다 정교하게 깎아낸 기록 보관용 석상에 가까웠다. 얇은 입술은 마치 숫자를 세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틈새처럼 차갑게 벌어졌고, 안경 너머로 번뜩이는 눈동자는 눈앞의 사람을 생명이 아닌 처리해야 할 서류 뭉치로 분류하는 오만함을 담고 있었다. 그는 사람의 목숨보다 번호표의 일련번호를 더 소중히 여기는 실무자의 냉혹함을 온몸으로 풍기며, 로웬이 내미는 모든 감정적 동요를 서류철 밑으로 짓눌러버릴 듯한 압도적인 불쾌감을 발산했다.
“예하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입니다.”
세릴 무트가 덧붙인 그 말에 이네스가 가장 먼저 검 자루를 움켜쥐었다. 그녀의 눈이 분노로 가늘게 떨렸다.
“보호라고 했나? 이 사람들을 진흙 구덩이에 버려두고 우리만 대리석 길로 가는 것이 당신들이 말하는 성교의 보호인가? 약자를 등 뒤로 숨기는 게 아니라 발밑으로 짓밟는 꼴이군.”
“배려, 보호, 인가 외 동행 금지, 그리고 성자 전용….”
피핀이 접수대 옆에 붙은 문구들을 하나하나 소리 내어 읽었다. 아이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참 친절하기도 해라. 이 예쁜 단어들을 다 합치면 결국 ‘너희는 들어오지 마’라는 뜻이 되잖아. 배려라는 말이 이렇게 차갑게 들릴 수도 있구나.”
모르그는 전용문 안쪽, 대리석 기둥에 새겨진 미세한 문양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그의 안광이 기괴하게 번뜩였다.
“이거 재미있군. 이 문양, 과거 불멸왕의 지휘관들이 전열이 무너졌을 때 자기들끼리만 빠져나가던 대피로나 비밀 성물을 이송하던 은닉로에 새기던 식별 기호와 완벽하게 일치해. 성자 전용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지만, 본질은 도망자들의 구멍이었단 소리지.”
엘드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철퇴를 휘둘러 이 기만적인 문을 부숴버리고 싶어 하는 이네스의 어깨를 눌러 세웠다.
“참게나. 이 전용로를 지금 완전히 부수면, 저기 쓰러진 노약자들이나 당장 숨이 넘어가는 환자들을 옮길 수 있는 유일한 안전 통로마저 영영 사라지게 되네. 분노보다는 길이 필요한 시점이야.”
로웬은 세릴 무트가 내민 은색 우회권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우회권에는 ‘성자 예하 및 그 직속 수행원’이라는 전용 대상 칸이 박박하게 적혀 있었다. 로웬은 펜을 들어 그 칸을 가로질러 그어버렸다.
“성자로서 이 길을 통과하지 않겠습니다.”
세릴 무트의 눈썹이 처음으로 움츠러들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규정에 어긋납니다. 성자 예하가 아니시면 이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나는 성자가 아니라, 아직 배달을 마치지 못한 ‘미배달 심부름꾼’으로 나를 등록하겠소.”
로웬이 우회권을 뒤집어 뒷면에 거칠게 휘갈겼다.
“이 우회권의 전용 대상 칸을 수정한다. 대상: 배송물 및 수취인 분리 불가. 이 길 위에 있는 모든 순례자와 난민은 내가 목적지까지 운반해야 할 ‘배송물’이며, 동시에 이 길의 끝에서 구원을 기다리는 ‘수취인’이기도 하다. 물건과 주인이 한 몸인데, 어떻게 일부만 떼어놓고 문을 열 수 있겠나.”
“그건… 말장난입니다! 물류 체계상 그런 오류는 있을 수…!”
“오류가 맞지. 그러니까 이 문을 일반 통행 모드로 개방해라. 배송 사고를 내고 싶지 않다면.”
로웬이 잿빛 마력을 우회권에 주입하자, 전용문의 마법 회로가 비명을 지르며 과부하를 일으켰다. ‘성자’라는 단일 좌표만을 인식하던 문이, 로웬이 정의한 수천 명의 ‘배송물’을 한꺼번에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시스템이 감당할 수 없는 데이터 폭주에 화려한 금박 문이 굉음을 내며 활짝 열렸다.
세릴 무트가 경악하며 뒤로 물러나는 사이, 로웬은 멍하니 서 있는 노파의 손을 잡아끌었다.
“심부름이 좀 무거워졌네요. 같이 갑시다.”
막혔던 댐이 터지듯 순례자들이 대리석 길로 쏟아져 들어왔다. 화려한 복도의 결벽증적인 깨끗함은 순식간에 진흙 묻은 신발 자국과 땀 냄새로 뒤덮였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것을 더럽다고 말하지 않았다.
길이 열린 뒤, 사람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이름 모를 생존자들이 남긴 흔적들이 점처럼 박혔다. ‘여기 물 있음’이라고 삐뚤빼뚤하게 적힌 종이 표지판, 반쯤 비어있지만 누군가에겐 생명줄이었을 찌그러진 물통, 그리고 닳아해진 밑창을 정성껏 꿰매어 다음 사람을 위해 놓아둔 낡은 신발 한 켤레까지.
그 온기 서린 흔적들은 이제 막 조성되기 시작한 임시 휴게소의 초입을 향해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53화. 잿불길 임시 휴게소
잿가루가 폐부 깊숙이 박히는 길 위에서, 누군가 남긴 물 한 모금은 기적보다 절실했다.
성벽 너머로 이어진 메마른 길목에 야트막한 천막이 들어섰다. 누군가 쓰다 버린 누더기 천을 기워 만든 차양 아래, 밑바닥이 보일 듯 말 듯 한 물통 몇 개와 가죽을 덧대어 수선한 낡은 신발 세 켤레가 놓였다. 그 옆에는 비바람에 번진 서툰 손글씨가 적힌 나무판자가 세워져 있었다.
[성자의 가호가 머무는 곳. 쉬어 가십시오.]
피폐한 행색의 피난민들이 그 문구 앞에서 주춤거리며 멈춰 섰다. 갈라진 입술로 물을 축이고, 해진 신발을 갈아 신는 이들의 눈에는 안도보다 먼저 의구심이 스쳤다. 거저 주어지는 선의는 이 거친 시대에 가장 비싼 대가를 요구하는 함정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마셨으면 적어야 합니다. 여기, 당신의 이름과 마신 양을 쓰세요.”
물통 옆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사내가 뻣뻣하게 굳은 종이 뭉치를 내밀었다. 그는 방금 물을 마신 여인의 손목을 붙잡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저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장부의 빈칸을 가리킬 뿐이었다.
“성자께서 허락하신 휴게소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왜 이름을 적으라는 거야?”
“성자의 선의는 무한할지 모르나, 여기 놓인 물통은 바닥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사내의 목소리는 갈라진 논바닥처럼 건조했다. 그는 당황하는 여인을 대신해 깃펜을 움직였다.
“당신이 마신 한 바가지의 물은 다음 사람의 갈증이 됩니다. 그러니 당신도 다음 마을에 도착하면 무엇이든 남겨야 합니다. 마신 만큼, 혹은 그보다 조금 더. 그것이 성자의 이름을 빌려 이 휴게소를 유지하는 규칙입니다.”
선의는 어느새 기록이라는 굴레를 쓰고 있었다. ‘쉬어 가라’는 안내문은 장부를 거치는 순간 ‘쉬었으면 갚으라’는 채무의 목록으로 변질되었다. 이네스는 쓰러진 노인의 등을 두드려주다 그 광경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고, 피핀은 혀를 차며 로웬의 옆구리를 찔렀다.
“저것 봐요, 형씨. 형씨 이름이 붙으니까 사람들이 아주 눈에 불을 켜고 빚쟁이 노릇을 하네. 저러면 누가 편히 쉬겠어? 체하겠네.”
로웬은 묵묵히 사내에게 다가갔다. 사내는 잉크 자국이 깊게 배인 손가락으로 장부의 숫자를 맞추는 데 여념이 없었다. 곁에 있던 생존자 하나가 조심스럽게 그를 호명했다.
“토마 렐 서기님, 여기 신발 한 켤레가 더 들어왔습니다. 장부에 올려야지요?”
토마 렐. 그 이름이 불리자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잿빛 먼지가 내려앉아 본래의 색을 잃어버린 코트를 입고 있었으나, 목 끝까지 채워진 단추들은 숨이 막힐 정도로 정교하게 정렬되어 있어 일말의 흐트러짐도 용납하지 않는 그의 성미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보랏빛 잉크가 손톱 밑까지 파고든 그의 손가락은 해진 장부의 책장을 넘길 때마다 시계 부속처럼 일정하고 기계적인 궤적을 그렸으며, 안경 너머로 번뜩이는 눈동자는 상대를 향한 연민 대신 소모된 물자의 열량과 가치를 산출하는 계산기처럼 서늘하게 빛났다. 로웬의 시선에 비친 그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기보다 그 고통을 수치화하여 기록함으로써만 안심하는 부류였고, 성자의 선의가 허공으로 흩어지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것을 채무라는 사슬로 엮어 지상에 고착시키려는 답답하리만치 성실한 실무자의 표본이었다. 종이 뭉치가 바스락거리는 소리조차 그에게는 사람의 숨소리보다 엄중한 명령처럼 들리는 듯했다.
“성자님을 뵙습니다.”
토마 렐이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그러나 손에서 장부를 놓지는 않았다.
“이곳의 모든 물자는 성자님의 이름으로 관리되고 있습니다. 누군가 베풀고, 누군가 빚을 집니다. 그래야만 이 휴게소가 무너지지 않고 다음 길목까지 이어질 수 있습니다.”
옆에서 지켜보던 모르그가 낮게 읊조렸다.
“장부에 기운이 서려 있군. 자동 서술 장부인가. ‘성자’라는 이름이 기록되는 순간, 이 종이 뭉치는 단순한 메모가 아니라 강제력을 띤 명령서로 작동하고 있어. 이들이 느끼는 부채감은 심리적인 게 아니라, 실제로 영혼에 새겨지는 계약에 가깝네.”
“그럼 저 장부를 없애버리면 되잖아?”
피핀이 손을 뻗으려 하자 엘드가 앞을 가로막으며 고개를 저었다.
“장부를 없애면 빚도 사라지겠지만, 동시에 저 물통을 누가 채워야 하는지에 대한 기억도 사라지네. 관리되지 않는 선의는 금세 바닥나고, 결국 이 휴게소는 빈 껍데기만 남겠지. 공유의 기억을 보존하면서 채무의 고통을 덜어내는 건 종이 한 장 차이네만, 그게 가장 어렵지.”
로웬은 토마 렐이 들고 있는 장부를 내려다보았다. ‘반납 예정자’라고 적힌 칸에는 수많은 이름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그들은 성자의 은혜를 입었다는 안도감 대신, 언젠가 이 갈증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압박감을 등에 지고 다시 잿불길로 나설 터였다.
로웬이 토마 렐의 손에서 깃펜을 가져갔다.
“성자님?”
토마 렐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로웬은 대답 대신 장부의 가장 윗줄, ‘반납 및 채무’라고 적힌 열에 굵은 줄을 그어 지워버렸다. 그리고 그 위에 정갈한 글씨로 새로운 제목을 적어 넣었다.
[남겨 둔 것 목록]
로웬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휴게소 안의 모두에게 명확히 전달되었다.
“누구도 빚을 지고 떠나지 마십시오. 당신들이 마신 물과 신은 앞서 지나간 이들이 당신들을 위해 ‘남겨 둔 것’이지, 당신들이 ‘빌린 것’이 아닙니다.”
토마 렐이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하, 하지만 그렇게 되면 다음 물자를 보충할 강제성이 사라집니다. 선의에만 기대면 이 체계는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강제하지 않아도 남기게 될 겁니다. 빚을 갚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받은 것이 누군가의 배려였다는 걸 알게 된다면 말입니다.”
로웬은 장부의 '반납' 칸을 '나눔'으로 바꾸고, 억지로 적어 넣었던 이름들 옆에 '반려'라는 문구를 써넣었다. 빚이라는 족쇄가 풀리자 사람들의 얼굴에 서려 있던 묘한 경직이 풀려나갔다. 물 한 모금을 마시고 눈치를 보던 여인이 품 안에서 며칠 전 주운 마른 육포 한 조각을 슬며시 선반 위에 올려두었다. 강요된 채무가 아니라, 자발적인 남김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토마 렐은 허탈한 듯 자신의 장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내, 채무 칸이 비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선반 위에 물건들이 하나둘 쌓이는 것을 보며 깃펜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는 여전히 고집스러운 표정이었지만, 더 이상 사람들의 손목을 붙들고 이름을 쓰라고 닦달하지 않았다.
평화로운 온기가 휴게소를 감돌 무렵, 멀리 길 끝에서 붉은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전령의 실루엣이 보였다.
전령은 휴게소 입구에서 말의 고삐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그의 손에는 선명한 핏빛 밀랍으로 봉인된 서신 한 통이 들려 있었다.
“성도교회 감사국에서 나왔습니다! ‘자칭’ 성자의 행보에 대한 긴급 감사 통지서입니다!”
차갑게 식은 공기가 휴게소를 덮쳤다. 로웬의 시선이 붉은 봉인 위로 떨어졌다. 겨우 만들어낸 작은 안식처 위로, 거대한 제도의 칼날이 날아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