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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81화 합본. 성자 사칭 원본 접수대에서 성자 이름 임시 배정소까지

78화. 성자 사칭 원본 접수대

심야의 공기는 눅눅한 잉크 냄새와 오래된 종이가 썩어가는 악취로 뒤섞여 있었다. 굳게 닫혀 있던 접수창구의 나무 셔터가 비명을 지르며 위로 말려 올라갔다. 창구 안쪽은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으나, 단 하나, ‘성자 사칭 원본 접수대’라는 글자만이 희미한 마력의 잔광을 내뿜으며 떠올라 있었다.

로웬은 품 안에서 구겨진 고발장을 꺼내어 차가운 대리석 선반 위에 올려두었다. 억울하다는 호소도, 결백하다는 증명도 덧붙이지 않았다. 그는 그저 심부름꾼의 무미건조한 어조로 입을 열었을 뿐이다.

“수취인 불명에 따른 오배송 반송 절차를 요청한다.”

창구 너머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보통의 피고발인이라면 자신이 왜 성자가 맞는지, 혹은 왜 사칭범이 아닌지 구구절절 늘어놓았을 터였다. 하지만 로웬은 이 거대한 행정의 오류를 ‘배송 사고’로 정의했다.

옆에 서 있던 모르그의 눈동자가 갈게 떨렸다. 그의 시선은 창구 안쪽, 어둠 속에서 슬며시 모습을 드러낸 두꺼운 장부의 옆면에 고정되어 있었다. 저 장부 속에 누가 로웬을 고발했는지, 그 배후에 어떤 이름들이 적혀 있는지 알 수만 있다면. 모르그는 장부 전체를 통째로 훔쳐내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에 휩싸였다.

‘저걸 손에 넣으면 이 도시의 권력 지형을 바꿀 수 있어.’

그러나 욕망은 금세 서늘한 공포에 가로막혔다. 장부를 움켜쥐려던 그의 손가락 끝이 허공에서 멈췄다. 접수대의 마력이 수취인 보호 마법을 발동시키며 모르그의 시야를 차단했기 때문이다. 신고자의 이름을 엿보려는 대가는 목숨일지도 몰랐다. 결국 모르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타협안을 찾아냈다.

“……이름은 필요 없다. 대신, 이 서류가 어떤 경로를 타고 흘러들어왔는지, 그 배송 경로의 단서만이라도 확인해.”

선택의 비용은 비쌌지만, 그것이 그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정보였다. 그때, 가만히 로웬의 소매를 붙잡고 있던 피핀이 까치발을 들며 창구 안쪽을 가리켰다.

“아저씨, 저기 빈칸 말이야.”

피핀의 작은 손가락이 가리킨 곳은 수취인란이었다. 아이의 눈은 어른들이 보지 못하는 구조적인 기괴함을 꿰뚫고 있었다.

“저번에 봤던 ‘웃음 증빙란’이랑 모양이 똑같아. 아무것도 없는데, 뭔가 있어야만 하는 자리인 것처럼.”

피핀의 말대로였다. 서류상의 공백은 단순한 비어 있음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의도적인 삭제 혹은 ‘존재하지 않는 존재’를 위한 자리였다.

그 순간, 어둠 속에서 희고 마른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뼈마디가 도드라진 손가락이 로웬이 내민 서류를 거칠게 낚아챘다. 이어서 폐병 환자처럼 깊고 마른 기침 소리가 창구 안쪽에서 울려 퍼졌다.

검토는 짧았다. 탁, 소리와 함께 서류 뭉치가 다시 선반 위로 되밀려왔다. 서류의 갈피마다 붉은색 낙인이 찍혀 있었다. 그리고 서류를 밀어낸 손 주인의 목소리가 날카로운 금속음처럼 고요를 깼다.

“성자 사칭 고발은 반송 불가 항목입니다. 다만, ‘원형의 부재’에 따른 보관 처리는 가능하겠군요.”

창구 안쪽의 그림자가 서서히 일어섰다. 가스등의 불빛이 비스듬히 안쪽을 비추자, 비로소 그 주인의 정체가 드러났다.

“성계청 직속 기록관리국, 아벨린 노트입니다.”

이름이 공개됨과 동시에 그녀의 전신이 빛 속으로 걸어 나왔다. 아벨린 노트는 마치 빳빳하게 풀을 먹인 관제 서류 그 자체를 인간화한 것 같은 인상이었다. 목 끝까지 단추를 채운 짙은 감색의 제복은 단 한 치의 구김도 허용하지 않았고, 어깨 위에 걸친 짧은 망토는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마치 딱딱한 종이가 스치는 듯한 소리를 냈다. 창백하다 못해 푸른 빛이 도는 피부 위로는 가느다란 혈관들이 지도처럼 뻗어 있었으며, 콧등 위에 걸린 외알 안경 너머의 눈동자는 감정이라고는 소거된 채 오로지 규정의 잣대만을 들이대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건조한 모래알이 구르는 듯했고,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은 쉼 없이 펜촉을 매만지며 눈앞의 이방인들을 마치 분류해야 할 서류 더미처럼 응시했다.

아벨린은 로웬을 빤히 바라보며 덧붙였다.

“당신이 누구인지, 혹은 누구를 사칭하는지는 내 소관이 아닙니다. 나는 오로지 이 서류가 갈 곳을 잃었다는 사실만을 기록할 뿐이죠.”

그녀는 책상 아래에서 작은 열쇠 뭉치를 꺼내 로웬에게 던졌다. 쇳조각이 바닥에 떨어지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오배송된 마음을 되찾고 싶다면, 직접 가서 열어보시길.”

로웬이 열쇠를 집어 들었다. 열쇠 머리에는 핏빛으로 물든 성인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아벨린은 이미 흥미를 잃었다는 듯 다시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기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가서 확인하십시오. 당신의 이름이 적혀 있어야 했을, ‘붉은 성인의 분실물 보관함’을.”

79화. 붉은 성인의 분실물 보관함

낡고 거대한 금고 문이 거친 쇳소리를 내며 열리자, 안에서는 예상치 못한 풍경이 드러났다. 삐걱이는 경첩 소리가 먼지 쌓인 공기를 가르며, 내부의 진득한 어둠 속에서 온갖 형태의 물건들이 낯선 존재감을 뿜어냈다. 붉은 성인의 분실물 보관함. 그 이름이 주는 신성함과는 거리가 먼, 마치 세상의 모든 잡동사니를 끌어모아 뒤섞어 놓은 듯한 혼돈 그 자체였다.

로웬은 희미하게 깜빡이는 손전등을 들어 내부를 비췄다. 그의 눈은 익숙한 이름표나 소유주의 흔적 대신, 물건 자체에 스며든 사용의 흔적을 쫓았다. 낡은 도시락통, 한쪽만 남은 장갑, 빛바랜 일기장, 깨진 거울 조각. 모두 한때 누군가의 손때가 묻었을 물건들이었지만, 그 어떤 것에서도 분명한 소유주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름은 없군." 로웬의 낮은 중얼거림에 모르그가 답했다. "젠장, 설마 이름까지 지워놓았을 줄이야. 이런 식으로 흔적을 지운다고 도망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모르그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목록표를 찾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이름이 알아볼 수 없게 긁히거나 검게 지워진 표찰들만이 희미하게 걸려 있을 뿐이었다. 그는 분실물 목록 전체를 독점하고 단숨에 정보를 파악하려던 욕망이 좌절되자, 거친 숨을 내쉬며 뒤로 물러섰다. "결국, 물건 자체의 이동 경로를 쫓아야 한다는 건가. 골치 아프게 됐군."

그때, 피핀이 바닥에 놓인 낡은 도시락통과 그 옆에 떨어진 빈 표찰을 가리켰다. 그의 짧은 손가락이 빈 표찰 위를 훑자, 그는 키득거리는 웃음소리와 함께 몸짓으로 어떤 구조를 짚어 보였다. "이거, 웃음 증빙란이랑 비슷하네요." 피핀의 말은 짧았지만, 그 의미는 명확했다. 이름 대신 사용의 흔적, 경험의 축적을 통해 그 주인을 유추하거나 분류하는 시스템. 직접적인 소유주가 아닌, 물건이 거쳐온 손길과 시간을 통해 반송 경로를 파악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로웬이 허리를 숙여 도시락통을 집어 들려는 찰나, 시야를 가로막는 붉은 섬광이 스쳐 지나갔다. 붉은색 가죽 장갑을 낀 손이 로웬의 손등을 막아서며 움직임을 제지했다. 차갑고 낮은 경고가 공간을 울렸다.

"함부로 만지지 마십시오."

세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어둠 속에서 한 인물이 걸어 나왔다. 붉은 장갑을 낀 손은 로웬이 집으려던 도시락통 옆의 표찰을 뒤집어 버렸다. 이제 완전히 빈 백지 상태가 된 표찰 위에서, 인물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붉은 성인의 분실물 보관소 관리인, 에란 시울입니다."

붉은 장갑 너머로 드러난 가느다란 손목은 얼핏 연약해 보였으나, 그 움직임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마치 낡은 태엽 인형처럼 정확하고 절제된 걸음걸이로 그는 이 공간의 모든 공기를 자신의 통제 아래 두는 듯했고, 붉은색 제복 아래로 감춰진 윤곽은 마치 조각처럼 단단한 인상을 풍겼다. 시선은 날카로우면서도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연못 같아, 마주하는 이의 내면까지 꿰뚫어 보는 듯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지만, 그 속에는 이 보관함이 가진 비밀만큼이나 깊은 피로감이 배어 있었다.

에란 시울은 세 사람을 차례로 훑어본 뒤, 이내 시선을 로웬에게 고정했다. "이곳의 물건들은 단순한 분실물이 아닙니다. 주인이 스스로 버리거나, 혹은 더 이상 되찾기를 바라지 않는 것들. 때로는 주인의 일부를 담고 있기도 하죠. 그래서 함부로 손대서는 안 됩니다." 그의 설명은 이 보관함이 단순한 창고가 아닌, 무언가 더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암시했다.

모르그는 에란 시울의 등장에 불쾌함을 감추지 못했다. "관리인이라? 이런 더러운 곳을 관리한다니, 당신도 별 볼 일 없는 작자군. 그래서, 이 물건들의 주인은 누구고, 어디로 보내져야 하는지 알고 있나?"

에란 시울은 모르그의 무례함에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이름이 지워진 물건들은 주인에게 직접 반환되지 않습니다. 그럴 자격이 없는 이들에게는 더더욱." 그는 다시 표찰을 뒤집어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이제 그곳에는 '주인 없음'이라는 글자와 함께 작은 표식이 나타났다. "이곳의 모든 물건은, 오직 한 곳으로만 돌아갑니다. 그것이 이곳의 규칙입니다."

로웬은 에란 시울의 말과 표찰의 표식을 주의 깊게 살폈다. '주인 없음'이라는 글자 아래, 작은 그림으로 그려진 검은색 우물 형태의 표식. 그것은 단순한 장식처럼 보였지만, 로웬은 직감적으로 그것이 다음 단서임을 깨달았다.

"그곳이 어디입니까?" 로웬이 물었다.

에란 시울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곳은... 검은 우물 반송 센터입니다."

80화. 검은 우물 반송 센터

모르그는 턱 끝까지 차오른 역겨움을 애써 억눌렀다. 짙은 어둠 속에서 끈적한 물이 찰랑이는 소리, 그 아래로 가라앉은 실패한 물건들의 잔해. 이곳이 바로 ‘검은 우물 반송 센터’였다. 79화의 마지막 순간, 로웬의 작은 손에 들렸던 명찰이 바닥에 떨어지며 드러난 단서였다. 물 냄새와 함께 썩어가는 기록물들의 퀴퀴한 악취가 코를 찔렀다.모르그의 눈은 본능적으로 우물 아래를 탐색했다. 실패 목록 전체를 독점하고 싶다는 탐욕이 끓어올랐다. 그러나 검은 물에 번져 알아볼 수 없게 된 서류의 잔해 앞에서 그의 욕망은 좌절의 쓴맛을 보았다. 기록은 이미 흔적도 없이 뭉개져 있었다.

피핀은 우물 가장자리에 바싹 붙어 귀를 기울였다. 찰랑이는 물소리가 귓가에 스며들자, 익숙하면서도 낯선 불쾌감이 심장을 파고들었다. 마치 수많은 비웃음이 빈 공간을 채우는 듯한 기시감. 혹은 그 모든 소리마저 사라진 텅 빈 공포가 목구멍을 틀어막는 것 같았다. 피핀은 저도 모르게 손으로 귀를 막았다. 그에게 우물은 웃음과 빈칸의 경계가 모호한 지옥이었다.

로웬은 고요히 서 있었다. 실패 사유를 고백할 생각은 없었다. 대신 그녀의 시선은 허공에 매달린 도르래와 그 아래 늘어진 쇠사슬에 닿았다. 물건이 떨어지기 직전 들렸던 불분명한 소리, 그리고 손에 전해졌던 미묘한 무게 어긋남. 그것은 단순한 실수 이상의 무언가였다. "낙하 전 정정 신청합니다." 로웬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단호했다. 명확하지 않은 실패 이유 대신, 물건이 떨어지기 직전 일어난 미세한 이상을 근거로 재심사를 요청하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도르래가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멈춰 섰다. 쇠사슬의 움직임을 가로막은 것은 기다란 쇠고리였다. 이어서 어둠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검은 집게가 로웬의 신청 서류를 낚아챘다. 그리고 기계적인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신청인 로웬. 물품 관리 번호, 삼백삼십칠. 실패 사유 명확성 부족. 경고."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제껏 어둠에 가려져 있던 형상이었다. 검은 집게를 든 채 나타난 인물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마침내 희미한 불빛 아래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나크 렌. 반송 센터 관리인." 스스로를 소개하는 목소리는 쇳소리처럼 거칠었다.

나크 렌은 실로 기묘한 인물이었다. 낡은 작업복 위로 두꺼운 가죽 앞치마를 둘렀는데, 곳곳에 알 수 없는 얼룩이 말라붙어 있었다. 그의 얼굴은 길고 주름져 있었으며, 움푹 들어간 눈은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났다. 움직일 때마다 삐걱이는 관절 소리가 들리는 듯했고, 굳게 다문 입술은 마치 무언가를 오랫동안 씹다 뱉은 흔적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그의 시선은 언제나 비스듬히 아래를 향해 있었고, 마치 모든 사물과 인물을 평가하듯 응시하는 그 시선은 상대방의 내면을 꿰뚫어 보는 듯한 섬뜩함을 안겨주었다.

나크 렌은 로웬에게 다시 서류를 내밀었다. "실패 사유를 명확히 기재하지 않으면, 반송은 불가합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떠한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로웬은 서류를 받아 들었다. 그녀의 시선은 서류의 빈칸이 아닌, 반송 센터의 벽 한쪽에 붙어있는 낡은 게시판으로 향했다. 게시판에는 희미하게 지워진 글자들이 적혀 있었다. '성자 이름 임시 배정소'.

81화. 성자 이름 임시 배정소

"성자 이름 임시 배정소……."

피핀의 목소리가 떨렸다. 텅 빈 공백을 품은 이름표들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마치 살아있는 존재처럼 희미하게 빛나는 그것들은 아무것도 새겨지지 않았음에도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로웬은 손을 뻗어 한 이름표를 집었다. 표면은 차갑고 매끄러웠으나, 닿는 순간 알 수 없는 고양감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그의 이름이 명멸하는 곳. 시스템은 묻고 있었다. 이 짐을 짊어질 것인가, 혹은 타인에게 넘길 것인가.

로웬은 잠시 숨을 골랐다. 성자? 한 번도 원한 적 없는 역할. 애초에 그는 그런 거창한 칭호와는 어울리지 않는 삶을 살아왔다. 이 이름을 다른 이에게 전가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그의 손은 제동이 걸렸다. 잿불 속에서 스스로를 지키고자 발버둥 쳐온 세월이 그에게 가르쳐준 것이 있다면, 남의 몫까지 짊어지는 어리석음은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책임하게 남에게 떠넘기는 것 또한 결국 자신에게 돌아오는 칼날이 될 것임을 직감했다.

"수취인 불명 임시 보류."

로웬은 망설임 없이 빈칸에 그 문구를 새겨 넣었다. 이름표는 희미하게 한 번 깜빡이더니, 그 내용을 고스란히 품은 채 조용히 제자리로 돌아갔다. 홀가분함과 함께 미미한 불안감이 뒤따랐다. 이 결정이 어떤 파장을 불러올지는 알 수 없었다.

"저 빌어먹을 시스템이 또!"

모르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의 눈은 탐욕스러운 빛으로 번들거렸다. 그는 로웬과는 다르게 모든 이름표를 독점하고 싶었다. 성자의 이름. 그것은 곧 권력이자 지배였다. 그는 성급하게 여러 개의 이름표를 동시에 움켜쥐려 했다. 그 순간, 차가운 전율이 손아귀를 타고 올라왔다. 이름표 하나하나가 핏줄처럼 연결되어 있음을, 단순한 표식이 아니라 살아있는 존재와 직접적인 계약 관계임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젠장!”

그는 손을 황급히 거두었다. 손끝이 타들어 가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이름표들이 그의 손길을 거부하며 섬뜩한 경고를 보내왔다. 탐욕스러운 욕망이 한순간에 싸늘한 공포로 변했다. 이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던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다. 그의 눈동자는 동굴 속 그림자처럼 흔들렸다.

피핀은 이 모든 광경을 얼어붙은 채 지켜보고 있었다. 그에게는 이름표들의 미약한 발광조차 공포였다. 그는 로웬과 모르그가 만졌던 이름표들을 피해 뒤로 물러났다. 그러다 우연히 눈에 띈, 완전히 비어 있는 이름표 하나. 다른 것들보다 유난히 반짝이는 그것은 마치 거울처럼 피핀의 모습을 희미하게 비추는 듯했다. 불안한 마음에 손을 뻗으려는 순간, 비어있던 표면에 그의 이름이 마치 먹물이 번지듯 스며들어 나타났다.

"히, 힉! 안 돼! 내, 내가…."

피핀은 경악하며 손을 거두었다. 몸을 뒤로 획 던지다시피 물러섰다. 그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고,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다. 그저 이름이 나타났을 뿐인데, 그는 마치 제 영혼이 빨려 들어갈 것이라는 듯한 극도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싸늘한 기운이 홀을 채웠다. 미약한 진동과 함께 공간이 일렁였다. 세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한 곳으로 향했다. 여인의 실루엣이 어둠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성큼성큼 다가와 로웬의 눈앞에 섰다. 그리고는 얇은 금속 자를 꺼내 들어 그의 손목을 꾹 눌렀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소름 돋게 느껴졌다.

"임시 보류라. 편리한 단어 선택이군. 하지만 빈칸은 결국 빈칸일 뿐. 다음 대안을 내놓지 못하면, 그 빈자리는 그대의 몫이 될 것이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으나, 단호함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경고가 담긴 날카로운 시선이 로웬을 꿰뚫었다. 그녀는 잠시 로웬을 응시하더니, 모르그와 피핀에게도 똑같이 시선을 던졌다.

"이름은 주어지는 것이 아닌, 책임의 표식이다. 그대들은 대체 이름을 제출해야 한다. 아니면…."

그녀는 말을 잇지 않고, 손목을 누르던 자를 이름표가 있는 방향으로 툭 던졌다. 쨍하는 금속음이 울렸다. 그리고 그제야, 그녀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나는 세라핀 도르. 성자의 대변인이자, 심판관이다."

세라핀 도르는 그야말로 얼음처럼 차가운 아름다움을 지녔다. 은회색 머리카락은 어깨 아래로 흐트러짐 없이 곧게 뻗어 있었고, 검은 제복은 그녀의 마른 몸매를 빈틈없이 감싸고 있었다. 움직일 때마다 차가운 금속 장신구들이 미세하게 흔들리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고, 눈빛은 마치 깊은 심해의 바닥처럼 어둡고 꿰뚫어 보는 듯했다. 그녀의 동작 하나하나에는 군더더기 없는 절제와 함께 어떤 불가항력적인 위압감이 서려 있었으며, 목소리는 고요한 수면 아래 감춰진 거대한 빙산처럼 단단하고 서늘했다.

세라핀 도르는 다시 로웬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빈칸은 채워져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첫 증인 호출실에서 그 책임을 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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