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93화 합본. 검은 접시 보증서에서 빈 의자 번호표까지
91화. 검은 접시 보증서
먼지 쌓인 탁자 위에서 발견된 가죽지는 무척이나 뻣뻣했다. 수백 년의 세월을 견딘 것치고는 보존 상태가 지나치게 좋았다. 마치 어제 누군가가 서명을 마치고 조심스레 내려놓은 것처럼, 가죽지 끝단에는 말라붙은 잉크의 질감까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로웬은 미간을 찌푸린 채 그 문서를 내려다보았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 기대하는 것은 고대의 예언이나 끔찍한 저주의 문구, 혹은 보물로 향하는 비밀 지도 같은 것들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로웬의 눈에 들어온 글자들은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었다.
“……파손 보증 계약서?”
로웬의 입에서 나온 건조한 목소리에 피핀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네? 저주가 아니고요? 그, 막 만지면 손이 검게 타서 재가 된다거나, 영혼을 저당 잡히는 그런 무시무시한 게 아니라요?”
“글쎄. 내 눈엔 그냥 지독하게 깐깐한 상단에서 발행한 품질 보증서로만 보이는데.”
로웬은 장갑을 낀 손가락으로 가죽지 상단을 짚었다. 거기에는 ‘검은 접시의 무결성과 복원력에 대한 증명’이라는 제목이 당당하게 박혀 있었다.
모르그는 옆에서 안달이 난 듯 지팡이를 만지작거렸다. 그는 이미 품속에서 두꺼운 기록용 노트를 꺼내 든 상태였다.
“로웬, 방심하지 마라. 고대의 존재들은 종종 가장 일상적인 형태에 가장 지독한 마력을 숨겨두곤 하니까. 이건 분명 분류되지 않은 유형의 저주일 게야. ‘계약’이라는 형식을 빌려 침입자의 생명력을 갉아먹는…….”
“모르그, 제발 그 학구적인 상상력 좀 접어두지 그래. 여기 적힌 조항들을 봐. ‘사용자의 부주의로 인한 균열 발생 시 보증 효력 상실’, ‘고의적인 타격에 의한 파괴는 보증 범위 제외’. 이건 저주라기보다 차라리 악질적인 중고 거래 사기에 가깝다고.”
로웬의 어조는 단호했다. 그는 이 상황을 신비로운 마법적 현상이 아니라, 아주 피곤한 실무적 분쟁으로 해석하고 있었다. 누군가 물건을 망가뜨렸고, 그에 대한 책임 소재를 따지는 서류가 존재한다. 로웬에게 있어 이것은 처리해야 할 ‘업무’의 영역이었다.
피핀은 여전히 바닥에 흩어진 검은 파편들을 보며 입술을 달달 떨었다. 이네스는 그런 피핀의 곁에 그림자처럼 서서, 혹시라도 아이가 무너질까 봐 조용히 어깨를 감싸 쥐었다. 이네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시선은 로웬이 들고 있는 보증서와 바닥의 파편을 끊임없이 오갔다.
“저기, 로웬 님…….”
피핀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왜, 또 어디가 무서운데?”
“그게 아니라요. 저 접시 말이에요. 제가 실수로 떨어뜨려서 깨진 건 맞는데요…….”
피핀은 침을 꿀꺽 삼키며 바닥을 가리켰다.
“제가 손을 놓기도 전에, 그러니까 저 접시가 바닥에 닿기도 전부터 이미 검었어요.”
로웬의 손길이 멈췄다. 모르그의 펜촉도 허공에서 멈춰 섰다.
“바닥에 닿기 전부터 검었다고?”
“네. 그러니까…… 원래 투명한 유리 접시인 줄 알고 잡으려고 했는데, 제 손가락 끝이 닿는 순간 물감이 퍼지는 것처럼 확 검게 변했거든요. 그러고 나서 바닥에 떨어졌는데, 꼭 얼음이 깨지는 것처럼 소리도 안 나고 저렇게…….”
피핀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자신이 무언가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다는 공포가 아이를 짓누르고 있었다.
로웬은 다시 보증서로 시선을 돌렸다. 피핀의 증언이 사실이라면, 이 보증서는 단순한 사후 처리를 위한 것이 아니다. 접시가 파손되는 ‘과정’ 자체가 이미 계약의 일부였다는 뜻이다.
“모르그. 저주 분류는 포기해. 이건 외부에서 걸린 마법이 아니야.”
“그게 무슨 소린가? 저렇게 불길한 기운을 내뿜는데!”
“이 보증서 자체가 접시의 상태를 강제하고 있어. 봐, 여기 보증 조건 칸이 비어 있지? 접시가 깨진 순간부터 이 문서가 활성화된 거야. 파손된 물건의 가치를 증명할 ‘보증인’을 찾으라고 말이지.”
로웬은 문서 하단에 길게 비어 있는 공란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보증인의 이름을 적는 칸이 있었지만, 그 어떤 잉크로도 채워지지 않은 백지 상태였다. 로웬은 직감했다. 누군가의 이름을 여기에 적어 넣는 순간, 그 사람은 이 깨진 접시에 담긴 무거운 책임을 고스란히 떠안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그는 투덜대면서도 로웬의 해석을 받아들여 노트를 수정하기 시작했다. ‘저주’라는 항목을 박박 긋고, 그 자리에 ‘강제적 보증 계약’이라는 생소한 단어를 써넣었다. 그의 눈에는 기록되지 않은 고대의 계약 양식에 대한 탐욕스러운 호기심이 번뜩였다.
“이네스, 피핀 데리고 뒤로 물러나 있어.”
로웬이 나지막이 지시했다. 이네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피핀을 이끌고 서재 안쪽으로 이동했다. 피핀은 여전히 미련이 남은 듯 검은 조각들을 돌아보았지만, 로웬의 서늘한 눈빛을 마주하고는 서둘러 발을 옮겼다.
로웬은 탁자 위에 놓인 보증서를 챙겨 들었다. 이제 남은 것은 이 접시가 원래 놓여 있던 자리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단순히 장식장 위에 올려져 있던 것이라면 이런 복잡한 보증 절차가 필요했을 리 없다.
그는 접시가 떨어졌던 궤적을 역으로 추적했다. 피핀이 건드렸다는 위치, 그리고 먼지가 닦여 나간 자국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장식장 가장 높은 칸, 다른 유물들과는 격리된 채 홀로 놓여 있던 자리가 보였다. 로웬은 까치발을 들고 그곳을 살폈다. 단순히 평평한 선반이 아니었다.
그곳에는 정교하게 세공된 금속 장치가 바닥에 박혀 있었다. 양옆으로 미세한 눈금이 새겨져 있고, 가운데가 오목하게 파인 형태였다. 그것은 무언가를 올려두는 단순한 받침대가 아니었다.
“……저울이군.”
로웬의 말대로였다. 그것은 놓여 있는 물건의 아주 미세한 무게 변화까지 측정할 수 있도록 설계된, 극도로 예민한 저울의 한쪽 접시 받침이었다.
보증서에 적힌 ‘무결성’이라는 단어가 로웬의 머릿속을 스쳤다. 접시가 검게 변하고 깨진 것은, 어쩌면 무게의 균형이 깨졌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로웬은 천천히 손을 뻗어 그 빈 받침대를 건드려 보았다. 손가락 끝에 차가운 금속의 질감과 함께,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미세한 진동이 전해졌다.
무게를 재는 접시 받침이, 주인을 잃은 채 허공에서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92화. 무게를 재는 접시 받침
달각, 하고 정적이 깨졌다.
바닥에서 솟아오른 거대한 접시 받침은 기괴한 소리를 내며 수평을 맞추려 들었다. 눈에 보이는 무게추는 없었다. 하지만 공기는 서늘하게 내려앉았고, 보이지 않는 압력이 일행의 어깨를 짓눌렀다.
“이거, 분위기가 영 안 좋은데요.”
피핀이 제 팔둑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소름이 돋은 모양이었다. 그의 말대로였다. 받침대 위에 놓인 빈 접시는 마치 누군가의 영혼이라도 기다리는 것처럼 비어 있었지만, 그 무게감만큼은 광장을 가득 채울 정도로 비대했다.
[보증인을 제시하라.]
기계적인 음성이 아니었다. 낡은 금속이 서로 맞물리며 비명을 지르는 듯한 소리가 환청처럼 뇌를 긁었다. 로웬은 미간을 찌푸렸다. 유적의 방어 기제인지, 아니면 이곳에 남은 사념의 찌꺼기인지 알 수 없었으나 요구하는 바는 명확했다. 이 저울의 균형을 맞출 ‘무엇’인가가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보증인이라니, 무슨 물건도 아니고…….”
모르그가 안경을 고쳐 쓰며 흥미로운 듯 다가갔다. 하지만 그가 기록용 깃펜을 꺼내기도 전에, 접시 받침이 거세게 진동했다. 차가운 냉기가 피핀을 향해 화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히익!”
피핀의 발등 앞에 깊은 금이 갔다. 그는 겁에 질려 뒷걸음질 쳤지만, 이내 멈춰 섰다. 그의 눈동자가 갈피를 못 잡고 흔들렸다.
“……저 때문인가요? 제가 그때, 그 그림자를 놓쳐서?”
피핀의 목소리가 떨렸다. 지난 구역에서 벌어졌던 작은 실수, 혹은 그가 스스로 ‘실수’라고 정의 내린 사건이 그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그는 자기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제가 올라가야 할 것 같아요. 제가 보증을 서야 이 저울이 멈출 것 같습니다. 아니면 우리 다 여기서 못 나갈지도 몰라요.”
피핀이 홀린 듯 접시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그의 눈에는 이미 스스로를 희생해서라도 이 상황을 모면해야 한다는 강박이 서려 있었다. 죄책감은 사람을 용감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때로는 가장 먼저 자신을 제물로 바치게 하는 법이었다.
그때, 묵직한 손길이 피핀의 어깨를 꽉 눌러 멈춰 세웠다. 이네스였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피핀의 앞을 가로막으며 그가 한 걸음도 더 나가지 못하게 벽이 되어 주었다.
“피핀, 진정해.”
로웬이 건조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네 몸무게로 이 저울을 만족시키려면 넌 여기서 뼈도 못 추려. 그리고 네가 올라가면 내 짐은 누가 드나? 난 무거운 건 딱 질색인데.”
“하지만 로웬 님, 저게 저를 부르는 것 같아서…….”
“기분 탓이야. 장치가 원래 좀 요사스러운 법이지.”
로웬은 피핀을 뒤로 밀어내고 품 안에서 낡은 서류 뭉치와 이전 방에서 회수한 금속 파편을 꺼냈다. 그는 접시 받침 앞에 서서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빈 접시를 응시했다.
“사람의 죄책감을 무게로 재겠다고? 효율성 떨어지는 짓이군.”
로웬은 망설임 없이 금속 파편과 증거품들을 접시 위에 툭 던져 넣었다.
“물증이 있는데 왜 굳이 심증을 올리나. 이 사건의 ‘무게’를 증명하는 건 죄책감이 아니라 결과물이다.”
금속 파편이 접시에 닿는 순간, 굉음이 울려 퍼졌다. 접시 받침은 예상치 못한 ‘물리적인 무게’에 당황한 듯 요동쳤다. 로웬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주머니에 있던 동전 몇 닢까지 추가로 던졌다.
“보증은 돈으로 하는 게 제일 확실하지. 안 그래?”
비아냥거리는 로웬의 말과 함께, 요동치던 저울이 서서히 수평을 찾기 시작했다. 추상적인 죄의 무게를 요구하던 장치가 로웬이 제시한 ‘실질적인 단서’들에 의해 강제로 계량 기준을 수정당한 것이다.
주변을 감돌던 서늘한 압박감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피핀은 그제야 참고 있던 숨을 크게 내뱉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살았다.”
“정말 대단하군요. 주관적인 관념의 함정을 객관적인 물증으로 정면 돌파하다니.”
모르그가 눈을 빛내며 수첩에 무언가를 마구 적어 내려갔다.
“이 현상을 뭐라고 명명할까요? ‘죄책감 계량 현상’? 아니면 ‘사념적 평형의 강제 붕괴’? 이건 분명 역사에 남을 기록이 될 겁니다.”
“그만둬.”
로웬이 단칼에 잘랐다.
“그냥 고장 난 저울을 힘으로 누른 것뿐이야. 그런 거창한 이름 붙여서 보고서 늘릴 생각 마. 읽기 귀찮으니까.”
“하지만 이건 마법 공학적으로도 아주 희귀한…….”
“모르그, 자네가 그 이름을 붙이는 순간 이 저울이 다시 작동해서 자네를 보증인으로 세울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하겠나?”
로웬의 무심한 농담에 모르그의 펜촉이 멈췄다. 그는 흠칫 놀라 저울 눈치를 보더니 슬그머니 수첩을 닫았다.
일행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저울이 멈춘 뒤 열린 통로는 이전보다 훨씬 서늘하고 정적에 잠겨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넓은 홀 중앙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단 하나, 낡은 의자가 놓여 있었다.
화려하지도, 그렇다고 초라하지도 않은 기묘한 형태의 의자였다. 하지만 그 의자에는 아무도 앉아 있지 않았다. 주인 없는 자리가 내뿜는 공허함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빈 의자로군요.”
모르그가 속삭였다.
“이곳의 주인이 앉아 있어야 할 자리인데…….”
피핀은 여전히 겁을 먹은 채 이네스의 뒤에 숨어 의자를 살폈다.
“누가 앉아 있었던 흔적 같은 건 없나요?”
로웬은 대답 대신 의자 가까이 다가갔다. 의자 등받이에는 먼지가 쌓여 있었지만, 팔걸이 쪽은 누군가의 손길이 닿았던 듯 미세하게 마모되어 있었다.
그는 의자 다리 옆으로 시선을 내렸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작은 조각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로웬이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것은 평범한 장식품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이름 대신 번호가 새겨진, 낡은 금속판이었다.
“이건…….”
로웬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의자 주인은 없었지만, 그가 남긴 것은 명확했다. 로웬은 손바닥 위에 놓인 물건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것은 ‘빈 의자’의 차례를 기다리던, 혹은 그 자리를 배정받았던 이의 번호표였다.
93화. 빈 의자 번호표
14번.
등받이 가죽 뒤편에 조잡하게 붙은 숫자판을 보며 피핀은 마른침을 삼켰다. 연회장 구석, 화려한 샹들리에 빛이 채 닿지 않는 그림자 속에 놓인 그 의자는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관처럼 보였다.
“순교자의 자리라기엔 번호표가 너무... 노골적이군요.”
모르그가 돋보기를 고쳐 쓰며 중얼거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성스러운 공석(空席)에 대한 신학적 고찰을 늘어놓으려던 그는, 의자 다리 옆에 떨어진 얼룩을 발견하고는 흥미를 잃은 듯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에게 있어 이것은 더 이상 거룩한 상징이 아니라, 해결해야 할 지저분한 행정 오류 혹은 범죄의 흔적에 불과했다.
피핀은 의자 앞에서 걸음을 멈춘 채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머릿속에서는 아까부터 같은 소리가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딸깍.
아주 작고 날카로운 금속음. 무거운 외투를 걸친 사람이 자세를 고칠 때나 날 법한, 혹은 구두의 버클이 의자 프레임에 부딪힐 때 나는 소리.
“...있었어요.”
“뭐라고 했나, 피핀?”
로웬이 다가오며 물었다. 그는 이미 장갑을 낀 손으로 의자의 시트 아래쪽을 더듬고 있었다.
“누군가 여기 있었어요. 귀신 같은 게 아니라, 진짜 사람이요. 발이 보였거든요. 아주 잠깐이었지만, 이 의자 아래로 삐져나온 구두 끝이랑... 버클 소리를 들었어요.”
피핀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겁에 질린 와중에도 그는 자신의 기억이 틀리지 않았음을 강조하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평소라면 ‘네가 헛것을 본 거겠지’라고 농담이라도 던졌을 로웬이었지만, 지금 그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버클 소리라. 귀신은 금속 장신구를 애용하지 않으니 다행이군요. 적어도 물리적인 타격이 통하는 상대라는 뜻이니까.”
로웬이 무심하게 던진 실무적인 농담에도 피핀은 웃지 못했다. 대신 옆에 서 있던 이네스가 조용히 피핀의 어깨를 짚어 주었다. 재촉하지도, 의심하지도 않는 묵직한 손길이었다. 그 온기에 피핀은 겨우 숨을 크게 내쉬며 말을 이었다.
“이 자리는 비워둔 게 아니에요. 누군가 앉아 있다가, 우리가 오기 직전에 숨거나 도망친 거예요. 그런데 왜 하필 번호표가 붙어 있는 거죠? 다른 의자들엔 이런 거 없잖아요.”
로웬은 대답 대신 의자를 옆으로 살짝 밀어냈다. 그러자 바닥 카펫의 이음새가 미세하게 벌어져 있는 것이 드러났다. 그는 망설임 없이 그 틈새에 단검 끝을 밀어 넣고 지렛대 원리를 이용해 카펫 아래의 나무판을 들어 올렸다.
그곳은 성스러운 순교자를 위한 안식처가 아니었다.
나무판 아래에는 작은 수취함이 숨겨져 있었다. 누군가 앉아 있는 동안, 발치 아래로 물건을 떨어뜨리거나 집어 가기 딱 좋은 구조였다. 14번이라는 번호표는 이 자리가 거룩한 장소임을 뜻하는 게 아니라, 정보를 주고받는 ‘사서함 번호’였던 셈이다.
“정교하군요. 연회장 한복판에서 가장 눈에 띄지 않는 방법으로 배달을 받다니. 관리인들 눈을 피해서 이런 조작을 하려면 상당한 공을 들였을 겁니다.”
로웬의 말에 모르그가 혀를 찼다.
“결국 신비주의를 이용한 기만이었군. 순교자의 빈자리라는 소문을 퍼뜨려 사람들이 이 근처에 접근하기 꺼리게 만들고, 그 틈을 타서 연락책으로 활용했다는 말인가? 아주 질 낮은 연극이야.”
모르그는 수첩에 무언가를 빠르게 휘갈겼다. 신학적 경외심은 사라졌지만, 대신 이 ‘조작된 신비’가 어떻게 권력을 보조하는지에 대한 비판적인 기록 욕구가 불타오르는 모양이었다.
피핀은 빈 의자와 그 아래의 구멍을 번갈아 보았다. 아까 느꼈던 서늘한 감각은 이제 공포보다는 기괴함으로 변해 있었다. 누군가 이곳에 웅크리고 앉아, 화려한 파티의 소음을 들으며 어둠 속에서 오가는 은밀한 봉투들을 챙겼을 광경을 상상하자니 속이 울렁거렸다.
“그럼 아까 그 사람은 어디로 갔을까요? 제가 소리를 들었을 땐 분명 근처였는데.”
이네스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녀의 시선은 의자가 있던 자리에서 벽면 끝, 하인들이 오가는 작은 문 쪽으로 향해 있었다.
“이 통로는 연회장 메인 홀과 연결되지 않아. 오직 준비실과 뒷마당으로 통하는 길이지.”
이네스의 말에 로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수취함 안이 비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판자를 덮었다.
“공무원 연봉으로는 이런 기믹을 설치할 엄두도 못 내겠는데 말이죠. 누군지 몰라도 퇴직금 정산은 확실히 해야겠군요. 피핀, 네 귀가 이번에 큰일을 했다.”
로웬의 건조한 칭찬에 피핀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여전히 귀가 먹먹했다. 아까 들었던 그 ‘딸깍’ 소리가 단순한 버클 소리가 아니라, 누군가 자신들을 지켜보며 내뱉은 비웃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일행은 이네스를 선두로 벽면의 작은 문을 향해 움직였다. 화려한 연회장의 조명이 등 뒤로 멀어지고, 좁고 어두운 복도가 나타났다. 기름 냄새와 먼지 냄새가 뒤섞인, 성(城)의 화려함 뒤에 숨겨진 민낯 같은 공간이었다.
피핀은 앞서가는 로웬의 코트 자락을 붙잡으려다 그만두었다. 대신 발밑을 조심하며 한 걸음씩 내디뎠다. 바닥은 딱딱한 돌판으로 되어 있어 발자국이 잘 남지 않는 구조였다.
하지만 그들이 하인용 통로의 꺾인 모퉁이에 다다랐을 때, 이네스가 멈춰 섰다.
그녀가 들고 있는 등불의 희미한 빛이 바닥의 한 지점을 비추었다. 먼지가 뽀얗게 쌓인 구석, 평범한 발자국과는 결이 다른 기묘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누군가 신발을 벗고 발가락을 굽혀 걸은 듯한, 혹은 젖은 천으로 바닥을 다급히 훔쳐낸 듯한 기괴한 문양.
“이건...”
피핀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로웬이 낮게 읊조렸다.
“발자국을 숨기려 했군. 하지만 너무 서둘렀어.”
하인 통로의 접힌 발자국.
마치 걸음걸이 자체를 접어 숨기려 한 듯한 그 비정상적인 흔적은, 아직 온기가 가시지 않은 채 복도 끝 어둠 속으로 이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