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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2화 합본. 납골당의 웃는 문에서 백랍 성의 밀랍왕자까지 일러스트

11-12화 합본. 납골당의 웃는 문에서 백랍 성의 밀랍왕자까지

11화. 납골당의 웃는 문

축축하게 젖은 화강암 벽면 사이로 오래된 향 냄새와 눅눅한 종이 먼지가 뒤섞인 비릿한 공기가 흘러나왔다. 이곳은 죽은 자들의 안식처라기보다, 폐기된 공문서가 산더미처럼 쌓인 거대한 서고에 가까웠다.

로웬은 손에 든 경매장 영수증과 청구 항목을 보며 신음했다. ‘피 수수료 및 응급 처치비 청구 건: 납골당 출입증 확인 도장 필수.’

“단순히 도장 하나 찍는 게 이렇게까지 멀어야 할 일인가.”

로웬이 투덜거리며 도착한 곳은 ‘납골당 제1행정지구’의 입구였다. 그곳엔 거대한 석문이 버티고 있었다. 문 상단의 얼굴 조각은 입을 찢어지게 벌린 채, 처음부터 웃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걸 ‘웃는 석문’이라 불렀다.

“멈춰라, 가련한 영혼아.”

석문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입을 열었다. 돌이 갈리는 비명 같은 웃음이 먼저 터졌다.

“이곳은 이름표를 잃은 자, 날짜를 잊은 자들이 들어오는 곳. 네놈의 사망일과 유골함 번호를 대라. 그러면 네 안식처의 위치를 인덱스에서 찾아주마.”

로웬은 미간을 찌푸리며 답했다.

“난 아직 안 죽었어. 출입증에 도장 받으러 온 거야.”

순간, 석문의 웃음소리가 멈췄다. 곧 전보다 큰 웃음이 납골당 전체를 울렸다.

“하하하! 농담이 수준급이구나! 살아있는 자가 제 발로 행정 구역에 들어와 도장을 찾는단 말이냐? 기록관! 기록관을 불러라! 이 유쾌한 망자의 이름을 장부에서 찾아라!”

석문의 부름에 어둠 속에서 먼지투성이의 사제복을 입은 기록관들이 기어 나왔다. 그들은 살아있는 인간이라기보다, 수천 년간 종이 더미에 파묻혀 지내다 종이의 일부가 되어버린 괴생명체 같았다. 가장 앞에 선 수석 기록관은 눈꺼풀이 거의 사라져 눈알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는 손에 든 거대한 ‘이름 없는 장부’를 넘기기 시작했다.

“이름은?”

“로웬.”

“사망 통지서 발급지는?”

“안 죽었다니까.”

기록관들의 깃펜이 바쁘게 움직였다. 침묵 속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만이 서걱거렸다. 한참이 지나자, 수석 기록관의 눈알이 경련하며 로웬을 올려다보았다.

“없어…… 이름이 없어. 사망 장부에도, 연옥 대기 명단에도, 심지어 지옥 미납자 명단에도 네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뒤편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기록관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로웬을 중심 제단으로 데려가야 한다고 중얼거렸고, 다른 기록관은 이미 새 색인 끈을 풀고 있었다.

“저를 증거로 쓰려면 증거 보관료부터 내셔야죠.”

로웬이 한 발 물러서자 이네스의 방패가 조용히 앞으로 나왔다. 그녀는 성자라는 말을 끝내 꺼내지 않았다.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로웬은 사람이 아니라 보관물로 분류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기록관들은 결국 로웬의 발치에 엎드리며 경건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죽음에 기록되지 않는 자…….”

“시간의 바깥에서 걸어온 성자이시여.”

이네스는 그 광경을 보며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녀의 눈동자엔 로웬을 향한 경외심이 일렁였다.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고 ‘이분이 바로 우리가 기다리던 성자다’라고 외치고 싶은 충동이 그녀의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간신히 그 말을 삼켰다. 성자라는 선언이 떨어지는 순간, 교단과 왕국은 이 남자를 제단 위에 올리려 할 것이다. 그녀는 로웬이 제물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반면, 모르그는 기록관들이 들고 있는 장부의 양식을 유심히 살폈다.

“흥미롭군. 저 장부의 여백 처리와 날짜 표기 방식…… 우편국에서 본 사망 통지서, 그리고 우리가 찾던 ‘죽은 태양의 장부’와 문법이 일치해. 행정의 뿌리가 같다는 뜻이지.”

피핀은 옆에서 낄낄거리며 벽면의 빈 이름표들을 툭툭 건드렸다.

“왕궁에서도 가끔 저런 일이 있었지. 왕의 심기를 거스르면 이름이 지워지거든. 그럼 다음 날부터 아무도 그 사람을 못 본 척해. 죽은 것보다 더 확실하게 사라지는 방법이지. 로웬, 너 혹시 높으신 분한테 찍힌 거 아냐?”

그때였다. 납골당 내부의 평형이 깨졌다. 로웬의 이름이 장부에 없다는 사실이 증명되자, 주변에 배치되어 있던 유골함들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름이…… 필요해…….”

“내 이름표가 잘못됐어! 나는 3번 함인데 5번에 꽂혀있어!”

잘못 꽂힌 이름표와 행정 착오로 인해 안식을 얻지 못한 유골 병사들이 관을 부수고 일어났다. 그들은 산 사람의 이름을 빼앗아 자신들의 빈칸을 채우려 로웬에게 달려들었다.

“이거 봐, 또 귀찮게!”

로웬은 칼을 뽑는 대신, 기록관의 책상 위에 놓인 ‘반송 도장’과 석회가루 주머니를 낚아챘다. 달려드는 유골 병사의 이마에 로웬이 도장을 쾅 찍었다.

[반송: 수취인 불명]

“야! 너는 골반 뼈 구조 보니까 4번 구역 사람이잖아! 왜 7번 구역에서 행패야? 가서 네 위치나 찾아!”

로웬은 유골함의 번호표를 뜯어내어 엉뚱한 위치에 서 있는 해골들에게 던졌다.

“너는 이름표 교정 대상! 너는 유골함 위치 오류! 전원 임시 접수처로 돌아가서 대기해!”

성스러운 빛도, 신성한 기적도 없었다. 그래도 로웬이 찍어내는 ‘행정 오류’는 죽은 자들에게 이상할 만큼 잘 먹혔다. 자신의 위치가 틀렸다는 사실을 자각한 유골들은 당황하며 스스로의 뼈마디를 분해해 관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이네스는 방패를 앞세워 로웬의 옆을 지켰다. 그녀는 몰려드는 해골들을 밀쳐내며 로웬이 도장을 찍고 서류를 정리할 수 있도록 공간을 확보했다. 그녀의 방패는 성자의 길을 여는 성물이 아니라, 민원 처리를 돕는 가림막처럼 쓰였다.

마침내 로웬은 도장실의 육중한 책상 앞에 도달했다. 담당관은 졸린 눈으로 로웬이 내민 서류를 살폈다.

“출입 확인 도장? 그건 정식 사망자만 받을 수 있는 거야. 넌 살아있으니까 안 돼.”

“그럼 난 여기 어떻게 들어온 건데? 들어왔으니까 나가는 도장을 찍어줘야 할 거 아냐!”

로웬의 항의에 담당관은 귀찮은 듯 서랍을 뒤적거리더니, 누런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정식 도장은 안 되고, 이건 줄 수 있어. ‘임시 접수증’이야. 이 서류를 들고 ‘백랍 성’에 가서 귀족 인장을 받아오면, 그때 정식으로 출입증에 도장을 찍어주지.”

로웬은 건네받은 종이를 한참 내려다보았다.

[임시 접수증: 귀족 보증 필요. 본 서류는 환불 및 청구의 증빙 자료로 사용할 수 없음.]

“……도장을 못 받은 거잖아.”

로웬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피 수수료와 치료비를 청구하기 위해 여기까지 왔건만, 손에 쥐어진 것은 ‘다음 민원’을 예고하는 종이 쪼가리뿐이었다.

“백랍 성이라…… 거기 성주가 좀 까다롭기로 유명한데.”

피핀의 실없는 소리를 뒤로하며, 로웬은 먼지 섞인 납골당의 공기를 깊게 들이켰다. 돈을 받으려면 아직 한참 더 굴러야 했다.

납골당의 웃는 문은 퇴장하는 로웬의 뒤통수를 향해, 마치 다음 방문을 예약이라도 하듯 다시 한번 기괴한 웃음을 터뜨렸다.

12화. 백랍 성의 밀랍왕자

“이게 다 행정 절차 때문이라니까요. 사람이 죽었으면 장부에 이름을 적고 끝내야지, 무슨 귀족 인장까지 받아오라는 건지 모르겠네.”

로웬은 손에 든 눅눅한 접수증을 팔팔 흔들며 투덜거렸다. 납골당의 ‘웃는 문’이 뱉어낸 그 종이에는 백랍 성(白蠟 城)의 공증이 있으면 임시 보증이 가능하다는 문구가 조잡한 글씨로 적혀 있었다. 배달부 인생 십수 년, 죽음보다 무서운 건 언제나 꼬여버린 서류와 그 뒤에 붙는 추가 체류비였다.

“성자님, 이곳은 단순한 성이 아닙니다. 백랍의 가문은 죽음 이후의 육신을 보존하는 비술로 왕실의 신임을 얻었던 자들이지요. 그들의 인장은 곧 ‘존재의 영속’을 의미합니다.”

이네스가 성경을 품에 꼭 안은 채 나직이 설명했다. 그녀의 눈은 로웬의 등 뒤, 정확히는 그가 짊어진 잿불 주머니를 향해 있었다. 마치 그 안의 존재가 불경한 행정 절차에 휘말린 것에 대해 대신 사죄라도 하려는 기색이었다.

“영속이고 뭐고, 통행료 깎아주는 도장이면 충분합니다.”

로웬이 성문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백랍 성의 정문은 거대한 촛대 두 개가 교차한 형상이었다. 성문지기는 갑옷 사이로 기괴하게 흘러나온 촛농을 닦아내며 로웬의 접수증을 건네받았다. 그는 서류와 로웬의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옆에 놓인 수정구에 로웬의 손을 억지로 가져다 댔다.

순간, 수정구 내부에서 금빛 성유가 소용돌이치며 맑은 종소리를 냈다.

“……미확인 성자 후보?”

성문지기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그는 허둥지둥 서류판을 뒤지더니 ‘성자 후보군(미확인)’이라는 붉은 직인을 로웬의 접수증에 쾅 찍어버렸다.

“이봐요, 난 그냥 배달부라니까!”

“죄송합니다! 성유 반응이 이 정도로 강하면 절차상 후보군 등록이 필수입니다. 왕자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서 들어가시지요, ‘후보’님.”

로웬의 항변은 성문이 열리는 육중한 소리에 파묻혔다.

성 내부 복도는 기괴했다. 벽에 걸린 역대 성주들의 초상화는 테두리부터 조금씩 흘러내리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뒤에서 열을 가하는 것처럼, 물감은 촛농처럼 끈적하게 바닥을 향해 늘어져 있었다. 복도 구석구석에는 실물 크기의 밀랍 인형들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눈동자는 하나같이 생기 없는 유리구슬이었는데, 로웬 일행이 지나갈 때마다 아주 조금씩 따라 도는 것처럼 보였다.

“이거 기분 나쁘게 정교하네.”

피핀이 인형 중 하나에게 다가가 손가락으로 뺨을 찔러보려다 멈췄다. 그는 평소처럼 가벼운 미소를 지었지만, 눈가에는 묘한 균열이 가 있었다.

“옛날 궁정에서도 이런 인형을 만드는 기술자가 있었지. 마음에 안 드는 첩보원이나 시종을 ‘지워버린’ 뒤에, 딱 그 자리에 이런 인형을 세워두곤 했거든. 그러면 아무도 실종됐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니까.”

피핀은 어깨를 으쓱하며 덧붙였다.

“물론 농담이야. 저건 그냥 비싼 장식품이겠지.”

“문장이 일치하는군.”

모르그가 초상화 아래 새겨진 문장을 장갑 낀 손가락으로 훑었다.

“납골당 장부에서 본 ‘사망 불능자’의 낙인과 백랍 성의 문장이 연결되어 있다. 이 성은 죽음을 기록하는 곳이 아니라, 죽지 못한 자들을 박제하는 전시장이야.”

복도 끝, 연회장의 육중한 문이 열렸다. 그곳의 상석에는 이 성의 주인, ‘밀랍왕자’ 발레리우스가 앉아 있었다.

그는 인간이라기보다 정교하게 빚어진 도자기 예술품에 가까웠다. 창백하다 못해 투명한 피부는 촛불 아래에서 은은한 광택을 냈고, 빳빳하게 풀을 먹인 검은 예복은 주름 하나 없이 몸에 밀착되어 있었다. 그의 손가락은 지나치게 길고 마디가 없었으며, 무릎 위에 놓인 손은 마치 한 번도 움직인 적 없는 것처럼 정적이었다. 발레리우스가 천천히 고개를 들자, 타오르는 촛불의 불꽃이 그의 유리구슬 같은 눈동자에 맺혔다. 그의 입술이 움직일 때마다 은은한 꿀 향기와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섞인 기묘한 악취가 번져 나왔다.

“성자 후보라. 우리 성에 발을 들인 생명체치고는 꽤나 불순한 냄새를 풍기는군.”

발레리우스의 목소리는 긁히는 듯한 금속음이었다. 그는 로웬이 내민 접수증을 보지도 않고 바닥에 던졌다.

“인장을 원한다면 증명하라. 네 피가 썩지 않았는지, 네 이름이 장부에서 지워지지 않았는지, 그리고 네 몸에 성자의 흉터가 있는지. 무엇보다…… 네가 언제 죽었는지 말이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연회장 벽면에 서 있던 네 구의 밀랍 기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검을 휘두르는 대신, 몸에서 뜨거운 촛농을 뿜어내며 바닥을 적셨다.

“잠깐, 난 그냥 통행권 검수를 받으러……!”

로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밀랍 기사의 거대한 철퇴가 바닥을 내리찍었다. 콰앙! 대리석 바닥이 깨지며 뜨거운 액체 밀랍이 분수처럼 솟구쳤다.

“로웬 님, 뒤로!”

이네스가 성경을 펼치며 로웬의 앞을 가로막으려 했지만, 로웬이 먼저 움직였다. 그는 싸우러 온 게 아니었다. 이건 ‘민원 해결’의 연장선이었다.

로웬은 연회장 천장에 매달린 대형 샹들리에의 도르래 줄을 발견했다. 그는 바닥에 깔린 촛농 배수로를 훑어보았다.

“이네스, 저기 난로 위에 있는 기름통을 배수로로 밀어버려요! 피핀, 샹들리에 줄 끊어!”

로웬은 달려드는 밀랍 기사의 다리 사이로 미끄러지듯 파고들었다. 기사가 몸을 돌리려 했지만, 이미 바닥은 로웬이 터뜨린 기름과 뜨거운 촛농이 섞여 빙판처럼 미끄러운 상태였다. 기사가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자, 로웬은 연회장 한구석에 놓인 거대한 도장판—귀족들의 문장을 찍을 때 쓰는 강철 틀—을 발로 걷어차 기사의 발등 위에 떨어뜨렸다.

“크윽!”

밀랍 기사의 발이 강철 틀에 찍히며 그대로 바닥에 고정되었다. 그 순간, 피핀이 단검을 던져 샹들리에의 줄을 끊었다.

수백 개의 촛불이 담긴 거대한 샹들리에가 밀랍 기사들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굉음과 함께 불길이 치솟았다. 밀랍으로 이루어진 기사들의 몸이 열기에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형체가 뭉개진 기사들이 늪처럼 변한 바닥으로 침몰해갔다.

“감히 내 성에서……!”

발레리우스가 분노하며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그의 피부가 분노로 인해 미세하게 갈라지며 속살의 하얀 밀랍이 드러났다.

그때, 이네스가 제단 위 좌석을 밟고 올라서며 발레리우스의 앞을 막아섰다. 귀족의 예법상 결코 허용되지 않는 오만한 행동이었으나, 그녀의 손에 들린 성경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이 왕자의 움직임을 묶었다.

“무례하군요.”

이네스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분은 당신의 유희를 위해 온 것이 아닙니다. 서류에 서명하십시오. 아니면 당신의 그 ‘영원한 젊음’이 재가 되는 꼴을 보게 될 것입니다.”

발레리우스는 이네스의 눈 뒤에 도사린 순수한 폭력성을 읽어낸 듯 멈칫했다. 그는 녹아내린 기사들의 잔해와, 엉망이 된 연회장 한복판에서 숨을 몰아쉬는 로웬을 번갈아 보았다.

“……좋다. 하지만 정식 보증은 해줄 수 없다.”

발레리우스는 떨리는 손으로 품속에서 인장을 꺼냈다. 그는 로웬이 가져온 접수증 대신, 품 안의 양피지 한 장을 꺼내 거칠게 인장을 찍었다.

“이것은 ‘순례강 통행 보증 초안’이다. 정식 보증서는 강 건너 검문소에서 다시 심사받아야 할 것이다. 그곳에서도 네가 ‘성자’로 불릴 수 있을지 두고 보지.”

로웬은 건네받은 양피지를 챙기며 혀를 찼다.

“결국 또 다른 데로 가라는 소리네. 이놈의 행정 서비스는 전국 어디나 똑같구먼.”

성 밖으로 나오는 길, 모르그가 로웬의 곁으로 다가와 속삭였다.

“그 초안에 찍힌 문장, 아까 본 초상화의 것과 미세하게 다르다. 이건 ‘통행’을 허가하는 게 아니라, 너를 ‘추적’하겠다는 표식이야.”

“뭐라고요?”

“걱정 마라. 내가 수정했으니까.”

모르그는 피 묻은 깃펜을 갈무리하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로웬은 품 안의 서류를 다독였다. 비록 완벽한 보증서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다음 단계로 갈 명분은 생겼다. 순례강을 건너면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심부름의 끝이 보일지도 몰랐다.

“자, 갑시다. 수수료 받으러 가야지.”

로웬의 투덜거림을 뒤로하고, 백랍 성의 촛불들이 하나둘 꺼지며 어둠 속으로 잠겨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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