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화 합본. 뼈 풍차에서 황금 개구리의 성찬까지
6화. 뼈 풍차와 풍장 기사
로웬은 눈가로 파고드는 하얀 먼지를 털어내며 품 안의 운송장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성자의 검은 빵’이라는 해괴한 이름으로 팔려 나갔던 제 빵의 대가는 고작 밀가루 반품 라벨과 풍차 마을로 향하는 종이 한 장이었다. 떼인 돈과 보증금, 그리고 무단 도용에 대한 정신적 피해보상까지 청구하려면 이 뼛가루 날리는 언덕 너머의 관리인을 반드시 만나야만 했다.
“저기 보이는군요. 뼈 풍차… 이 일대의 유해를 가루 내어 바람에 날려 보내는 풍장의 성지 말입니다.”
이네스가 성스러운 기도를 올리듯 검 손잡이를 꽉 쥐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눈에는 이 먼지 구덩이가 거룩한 안식처로 보이겠지만, 로웬의 코에는 그저 환불받아야 할 악성 재고의 냄새만 가득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로웬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하얀 가루를 뒤집어쓴 채 굳어버린 사람들의 행렬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로웬이 그토록 찾아 헤맨 보증금의 열쇠이자 이 기괴한 물류의 책임자가 서 있었다.
마을 관리인 헨릭은 로웬이 받아내야 할 보증금과 반품 도장을 쥐고 있는 유일한 인물로, 족히 수십 년은 정비하지 않은 풍차 톱니바퀴처럼 삐걱거리며 일행을 맞이했다. 평생을 석회와 뼛가루 속에서 살아온 탓인지 그의 수염과 눈썹은 원래 색을 잃고 딱딱하게 굳은 회반죽처럼 뭉쳐 있었으며,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낡은 가죽 장화 틈새에서 고운 흰 가루가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그는 툭 튀어나온 광대뼈 위로 핏발 선 눈을 부라리며 로웬을 살폈는데, 그 시선은 마치 불량품 포대를 검수하는 관리자의 그것처럼 집요하고도 신경질적인 구석이 있었다. 잔기침을 내뱉을 때마다 목구멍에서 모래알이 굴러가는 듯한 거친 소리가 새어 나왔고, 먼지가 찌든 앞치마에 연신 마른손질을 해대는 그의 손가락은 마디마디가 뒤틀려 기괴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반품하러 왔습니다.”
로웬이 품에서 구겨진 라벨을 꺼내며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헨릭의 눈에 비친 로웬의 모습은 전혀 다르게 해석된 모양이었다. 가루 바람에 휘날리는 잿빛 망토, 무심한 듯 서늘한 눈빛, 그리고 죽은 자들의 성지에서 당당하게 ‘반품’을 외치는 기색.
“오오, 성자시여! 결국 이 지옥 같은 정체를 끝내러 오셨구려! 안 그래도 며칠 전부터 풍차가 멈추고 유해 포대들이 산처럼 쌓여 마을이 망령의 한숨으로 가득 찼거늘!”
헨릭이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주변의 마을 사람들도 로웬의 말을 ‘이승으로 돌아가지 못한 영혼들을 거두러 왔다’는 선언으로 알아들은 듯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이 밀가루 포대에 찍힌 보증금 낙인을 보라고요. 내용물이 섞였잖아요.”
로웬이 답답한 듯 포대 하나를 발로 툭 찼다. 터진 틈새로 하얀 가루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훅 끼쳐오는 매캐한 석회 냄새와 뼛가루의 비린내에 로웬은 참지 못하고 재채기를 내뱉었다. 에취, 소리와 함께 눈물이 찔끔 솟았다.
그 광경을 본 이네스가 비장한 표정으로 방패를 고쳐 잡았다.
“성자님께서 죽은 이들의 비참한 처우에 눈물을 흘리고 계신다…! 기사들의 유해를 이토록 허술하게 관리하다니, 기사단의 일원으로서 참을 수 없는 모욕이군.”
“이건 슬퍼서 우는 게 아니라 알레르기 때문이라니까요!”
로웬의 항변은 거센 바람 소리에 묻혔다. 그때였다. 마을 광장 구석에 전시하듯 세워져 있던 낡은 갑옷들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풍장에서 떨어진 뼛가루와 석회 가루가 바람을 타고 빈 갑옷 안으로 스며들어, 마치 보이지 않는 거인이 갑옷을 입고 일어나는 듯한 착시를 일으켰다.
끼이익, 기괴한 금속 마찰음과 함께 ‘풍장 기사’들이 한 걸음씩 내디뎠다.
“망령이다! 풍장 기사들이 노하셨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하지만 로웬은 도망치는 대신 눈을 가늘게 뜨고 갑옷들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그는 허리춤에서 펜과 장부를 꺼내 무언가를 빠르게 대조하기 시작했다.
“피핀, 저 갑옷들에 묻은 가루 입자 보여? 저건 장례용 뼛가루가 아니야. 입자가 너무 거칠고 무거워. 이건 하수도 보수용 석회랑 하급 밀가루가 7대 3 비율로 섞인 거야.”
피핀이 갑옷 사이를 능숙하게 피해 다니며 낄낄거렸다.
“역시 짠돌이 성자님답네. 근데 저 갑옷 가슴팍에 찍힌 인장 좀 봐. 이거 불멸왕의 군수 인장이잖아? 왕실 창고에 처박혀 있어야 할 것들이 왜 이런 시골 풍차 마을에서 춤을 추고 있을까? 누군가 유해 운송비를 빼돌리고 가짜 가루로 무게만 맞춘 모양인데.”
로웬의 미간이 좁아졌다.
“어쩐지 내 검은 빵 반죽이 안 나오더라니. 이놈들이 내 신성한 제빵용 밀가루를 이런 가짜 장례식에 섞어 쓴 거야? 내 보증금!”
상황은 급박해졌다. 풍차의 거대한 날개 중 하나가 부러지기 직전이었고, 그 균형이 깨지자 와류가 형성되어 가루 바람이 토네이도처럼 마을을 덮쳤다. 가루를 뒤집어쓴 빈 갑옷들이 바람의 압력에 떠밀려 마치 원형 행진을 하는 군대처럼 보였다. 패닉에 빠진 군중이 이네스의 발치를 파고들었다.
“성자님! 저들을 잠재워 주십시오!”
이네스가 가루 바람을 방패로 막아내며 소리쳤다. 로웬은 짜증스럽게 머리를 헝클어뜨리더니 풍차 내부의 톱니방으로 뛰어 올라갔다.
“신성력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이건 그냥 기계 결함이야!”
로웬은 풍차 날개에 엉겨 붙은 포대 끈들과 엉망으로 꼬인 종 끈들을 발견했다. 분류 홈에 이물질이 끼어 유해 포대가 톱니 사이에 씹힌 것이 원인이었다. 그는 거칠게 칼을 휘둘러 꼬인 끈들을 끊어내고, 부러진 날개 축을 포대 끈과 종 끈으로 칭칭 감아 임시로 고정했다.
“이 포대 끈은 보증금 반환 대상이니까 나중에 다 청구할 겁니다!”
로웬이 도르래를 힘껏 잡아당기자, 멈췄던 풍차가 육중한 소리를 내며 다시 돌기 시작했다. 날개가 회전하며 역풍을 만들어내자 마을을 짓누르던 가루 토네이도가 순식간에 흩어졌다. 바람의 힘을 잃은 빈 갑옷들은 그대로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마을에는 정적이 찾아왔다. 흩어지는 하얀 먼지 사이로 지는 해의 잔광이 비치자, 사람들은 로웬이 신성한 권능으로 망령들을 성불시켰다고 굳게 믿으며 통곡하기 시작했다.
“오오… 기사들의 영혼이 드디어 안식을 찾았어.”
이네스는 감격에 젖어 고개를 숙였고, 로웬은 가루 범벅이 된 옷을 털어내며 헨릭에게 다가갔다.
“자, 상황 종료됐으니 도장 찍으세요. 반품 도장이랑 수리비, 그리고 정신적 손해배상금까지 합쳐서 현찰로.”
헨릭은 덜덜 떠는 손으로 장부에 도장을 찍었다. 하지만 그는 품을 뒤적거리더니 빈 지갑을 보여주며 울상을 지었다.
“성자시여… 보시다시피 마을 금고가 비었습니다. 대신 이 운송장을 가져가시지요. 이건 왕궁 물류 창고로 직송되는 특별 요청서입니다.”
로웬이 낚아채듯 받은 종이에는 불멸왕의 군수 인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특수 화물: 울지 않는 아기무덤의 묘비 - 운송 요청서]
“돈 대신 이딴 종이 쪼가리를?”
로웬이 뒷목을 잡았지만, 피핀이 그 종이를 슬쩍 보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형씨, 그거 꽤 비싼 도장인데? 왕실 직속 운송장은 통행세가 면제거든. 다음 마을로 가려면 어차피 그 길을 지나야 해.”
로웬은 한숨을 내쉬며 뼛가루 묻은 라벨과 새 운송장을 챙겨 넣었다. 성자로 추앙받으며 마을을 떠나는 그의 등 뒤로 풍차가 다시금 한가롭게 돌아가고 있었다.
돈은 한 푼도 받지 못했지만, 잿불 심부름꾼의 가방에는 또 다른 골칫거리와 사건의 냄새가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었다. 다음 목적지인 ‘울지 않는 아기무덤’에는 제발 제값 주는 의뢰인이 있기를 바라며, 로웬은 하얀 먼지가 내려앉은 길을 다시 걷기 시작했다.
7화. 울지 않는 아기무덤
“그러니까, 이 ‘미처리 배송 건’만 해결하면 된다는 거지?”
로웬은 구겨진 운송 요청서를 흔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뼛가루 밀가루 소동 끝에 손에 넣은 건 금화 주머니가 아니라, 잉크가 번진 종이 한 장이었다.
[운송 목적물: 울지 않는 아기무덤 묘비 12기]
[수령지: 침묵 마을]
[비고: 운송비 후불. 배송 완료 도장 필수.]
“후불이라니.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단어인데.”
로웬의 투덜거림 뒤로 거대한 방패를 짊어진 이네스가 비장한 표정으로 따라붙었다.
“역시 성자님이십니다. 그곳은 한 번 들어가면 누구도 소리를 내어선 안 된다는 저주받은 땅…. 아이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직접 묘비를 운반하시다니요.”
“아니, 영혼은 모르겠고 내 일당이 거기 묶여 있어서 가는 거야.”
“기록에 따르면, 침묵 마을은 불멸왕의 치세 당시 ‘효율적인 슬픔’을 강요받았던 곳이지요.”
모르그가 품 안에서 낡은 장부를 꺼내며 덧붙였다.
“울음소리가 노동 생산성을 저하시킨다는 이유로 아기들의 울음마저 금지당했습니다. 그 기록의 공백을 메우러 가시는 성자님의 뒷모습… 실로 경이롭군요.”
“그냥 짐꾼이라니까….”
로웬은 대답을 포기한 채 수레를 끌었다. 옆에서 피핀이 낄낄거리며 수레 바퀴에 기름을 쳤다.
“성자님, 거기 가면 입 조심해야 해요. 소리를 내면 발가락부터 돌이 된다는 소문이 있거든요. 불멸왕의 행정관들은 아기 울음소리 데시벨까지 세금으로 매겼다나 뭐라나.”
마을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일행은 기괴한 광경에 멈춰 섰다.
마을의 모든 종, 문고리, 심지어 가축들의 목방울까지 낡은 천으로 칭칭 감겨 있었다. 발소리를 죽이기 위해 길바닥에도 거적때기가 깔려 있었다.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마을 원로들이 유령처럼 다가와 입술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로웬은 그들의 눈에 서린 공포와 죄책감을 읽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수레를 멈추고 묘비 하나를 내려놓으며 작게 속삭였다.
“배송 왔습니다. 여기 도장만 찍어주시면….”
하지만 원로들은 로웬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들은 로웬이 내린 작은 석판을 보더니 바들바들 떨며 바닥에 엎드렸다.
“오셨군요… 마침내 아기들의 장례를 끝내주실 성자께서….”
“아니, 장례가 아니라 배송이라니까요.”
그때였다. 짐꾼 하나가 수레에서 묘비를 내리다 모서리를 바닥에 툭, 하고 부딪혔다.
작은 마찰음이 고요한 마을을 갈랐다.
동시에 마을 뒤편 숲에서 기괴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바람 소리 같기도 했고, 수천 명의 아기가 동시에 자지러지게 우는 소리 같기도 했다.
“히익!”
비명을 지른 짐꾼의 손끝이 순식간에 잿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딱딱하게 굳어가는 석화 현상이었다.
“울음이 시작됐다! 모두 엎드려!”
원로들이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숲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이 사람들의 발목을 훑고 지나갈 때마다, 옷자락 밑의 살결이 서서히 돌처럼 딱딱해졌다.
“성자님! 아이들의 원혼이…!”
이네스가 방패를 치켜들었다. 그녀의 눈에 과거 피난길에서 지키지 못한 아이들의 환영이 스쳤다. 이네스는 울먹이며 살아 있는 아이를 안고 떨고 있는 한 여인을 방패 뒤로 거칠게 밀어 넣었다.
“내 뒤에 서시오! 이 방패는 부서질지언정, 당신은 돌이 되게 두지 않겠소!”
혼란 속에서 로웬만은 눈을 가늘게 떴다.
‘원혼? 저주?’
그의 귀에는 다른 게 들렸다. 바람이 일정한 간격으로 울리는 소리. 그리고 묘비가 바닥에 부딪힐 때 났던 기묘한 공명.
“모르그, 아까 그 장부 줘봐.”
로웬은 다급하게 장부를 뺏어 들었다.
“묘비 번호 1번부터 12번. 그런데 사망 장부 순서랑 안 맞잖아? 4번 묘비가 있어야 할 자리에 왜 7번이 가 있어?”
“그건… 당시 행정관들이 죽은 순서가 아니라 세금 체납 순으로 묘비를 배치했기 때문입니다.”
모르그의 대답에 로웬은 혀를 찼다. 그는 곧바로 마을 중앙의 공동 화덕으로 달려갔다. 화덕 안의 재를 한 움큼 집어 바람에 날려 보았다.
재가 일정하게 흐르다 특정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피핀! 빵 굽는 시간표 확인해! 그리고 젖병 파편들, 어디에 제일 많이 버려졌는지 찾아!”
“네? 이 와중에 빵을 굽게요?”
“아니! 바람 구멍을 찾는 거야!”
로웬은 묘비 배치도와 마을의 환기 구조를 대조했다. 이 마을은 지형 자체가 거대한 울림통이었다. 불멸왕의 설계자들은 아이들의 울음소리를 증폭시켜 부모들을 고문하기 위해 마을 전체에 ‘울림관’을 심어두었다.
세월이 흘러 울림관이 막히고 묘비가 엉뚱한 위치에 세워지자, 특정 주파수의 바람이 불 때마다 사람의 신경을 긁고 석화를 유도하는 ‘소리 감옥’이 완성된 것이다.
해질녘이 되자 묘역 전체가 비명을 지르는 듯한 굉음을 냈다. 마을 사람들의 발목은 이미 절반 이상 돌로 변해 있었다.
“성자님! 자장가를! 저 아이들을 달래줄 신성한 노래를 불러주십시오!”
이네스가 절규했다.
하지만 로웬이 든 것은 성경이 아니라 삽과 빵칼, 그리고 수레를 묶었던 포대 끈이었다.
“자장가는 무슨…. 야, 피핀! 거기 3번 묘비 밑에 이 포대끈 밀어 넣어! 모르그는 8번 묘비 각도 15도만 틀어!”
로웬은 자장가 대신 숫자를 읇조렸다.
“하나, 둘, 셋… 여기서 꺾이고. 넷, 다섯… 여기서 막히고.”
그는 삽으로 묘비 주변의 흙을 파헤쳐 바람길을 내고, 빵칼로 울림관 입구를 막고 있던 해묵은 젖병 조각과 잿더미를 긁어냈다.
마지막으로 가장 큰 12번 묘비를 지렛대로 들어 올려 정중앙의 홈에 끼워 맞췄다.
철컥.
톱니바퀴가 맞물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마을을 휘감던 날카로운 비명이 잦아들었다.
아기 울음소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그것은 공포스러운 비명에서, 낮고 부드러운 바람의 음미(音味)로 변했다. 마치 누군가 아주 먼 곳에서 불러주는 낮은 콧노래처럼.
사람들의 몸을 옥죄던 석화 현상이 멈췄다. 잿빛으로 변했던 피부에 다시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조용해졌어.”
원로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마을을 짓누르던 그 끔찍한 울음이, 이제는 그저 평범한 바람 소리로 들렸다.
“아이들이… 드디어 잠든 것인가.”
이네스는 방패를 내리고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성자님, 당신의 지혜가 가련한 영혼들을 구원하셨습니다.”
로웬은 땀을 닦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구원은 무슨…. 묘비가 규격대로 안 박혀 있어서 소리가 난 것뿐이야. 자, 이제 다 끝났으니까 도장 찍어주세요. 아, 연체료도 붙는 거 아시죠?”
마을 원로는 경건한 표정으로 운송장에 도장을 쾅 찍었다. 로웬의 눈이 번뜩였다. 드디어 돈이다!
하지만 원로가 건넨 것은 돈주머니가 아니라 정성스럽게 쓴 한 통의 편지였다.
“성자님의 고결한 애도 봉사에 깊은 감사를 표합니다. 저희 마을은 가난하여 금전 대신, 성자님의 성스러운 행적을 기록하여 교단에 보고하겠습니다. 당신의 이름은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네?”
로웬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봉사? 기록? 아니, 내 돈은?”
“성자께서 어찌 속세의 은전 따위를 탐하시겠습니까. 저희는 믿습니다!”
주민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로웬은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다시 석화 바람이 불어올까 봐 입만 벙긋거렸다.
옆에서 피핀이 배를 잡고 굴렀다.
“푸하하! 성자님, 역시 ‘무소유’의 화신이시라니까!”
로웬은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으로 수레를 챙겼다.
떠나기 전, 그는 자신이 바로잡은 12번 묘비 뒷면에서 이끼에 가려져 있던 문장을 발견했다.
[잿불 성자는 아이를 구하지 못했다.]
그 밑에는 익숙한 ‘베라’ 계열의 표식과 함께, 불멸왕의 ‘죽은 태양’ 장부 조각이 박혀 있었다.
로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잿불 성자? 나 말고 다른 놈이 있었다는 거야? 그리고 구하지 못했다니?’
심부름의 끝에는 항상 돈 대신 기분 나쁜 수수께끼만 남았다. 로웬은 묘비를 걷어차려다 발가락이 아플 것 같아 그만두었다.
“젠장, 다음 배송지는 무조건 선불로 받는다. 진짜로!”
잿불 심부름꾼의 분노 섞인 외침이, 이제는 울지 않는 마을의 고요한 바람 속에 흩어졌다.
8화. 황금 개구리의 성찬
“성자님, 정말 이 습지로 가시는 겁니까? 여긴 귀족들이 은밀하게 ‘성배의 은총’을 나누는 별장이라던데, 분위기가 영 구립니다.”
피핀이 코를 쥐며 투덜거렸다. 늪 위로 세워진 화려한 별장은 겉보기에는 금박을 입힌 화려한 건축물이었으나, 그 기둥 아래로는 썩은 물이 고여 비릿한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 성배 파편의 영향인지, 수면 위로는 기묘한 황금빛 안개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별장 연회장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로웬의 앞을 막아선 것은 이번 성찬의 호스트이자, 묘비 운송을 의뢰한 실질적 물주인 바르톨로메오 자작이었다.
그는 로웬의 남루한 차림새를 훑으며 입가에 비열한 미소를 띠었는데, 비단으로 겹겹이 두른 육중한 몸은 마치 잘 살찌운 가축처럼 보였으나 눈매만큼은 탐욕스러운 고리대금업자의 그것을 닮아 있었다. 자작은 금실로 수놓은 화려한 예복이 터져 나갈 듯한 배를 내밀며 한 걸음 다가왔고, 그가 움직일 때마다 몸에 뿌린 값비싼 향수 냄새와 눅눅한 늪의 곰팡이내가 뒤섞여 역겨운 감각을 자극했다. 기름진 머리카락을 억지로 뒤로 넘겨 고정한 채, 그는 보석이 박힌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로웬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는데, 그 오만한 시선은 마치 로웬을 성자가 아니라 구걸하러 온 광대 쯤으로 여기는 듯했다. 자작이 입을 열 때마다 금니가 번뜩이며 쇳소리 섞인 가느다란 목소리가 흘러나왔고, 그것은 축복을 논하는 귀족의 품위보다는 시장바닥에서 불량 유지를 파는 장사꾼의 집요함에 가까운 압박감을 주었다.
“오오, 잿불의 성자께서 이 누추한 성찬장에 발을 들여주시다니. 침묵 마을의 묘비는 잘 받았습니다. 덕분에 우리 가문의 ‘성배 투자’가 정당성을 얻었지요.”
“도장부터 찍어주시죠. 그리고 약초 미수금은 이 주소로 청구하면 됩니까?”
로웬이 서류를 내밀었지만, 자작은 그것을 가볍게 무시하며 중앙의 긴 식탁으로 그를 안내했다. 식탁 아래로는 수로가 연결되어 물이 흐르고 있었고, 그 위로 작은 목재 배들이 음식을 싣고 떠다녔다. 귀족들은 이미 취해 있었다.
“성자님, 저길 보십시오. 저것이 바로 성배가 내린 축복의 사자, ‘황금 개구리’입니다!”
자작의 외침과 함께 수로 속에서 번뜩이는 황금색 피부를 가진 개구리들이 튀어 올랐다. 귀족들은 환호하며 은잔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모르그의 눈은 냉철하게 빛났다. 그는 품 안에서 ‘죽은 태양 장부’의 필사본을 꺼내 로웬에게 속삭였다.
“로웬 님, 조심하십시오. 장부에 기록된 ‘축복세’의 단위가 비정상적으로 높습니다. 이건 신성한 기적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증폭된 무언가입니다. 저 황금색은 생명의 빛이 아니라 농축된 금속 독성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때였다. 자작이 성배 파편이 박힌 은잔을 로웬에게 건네며 ‘성자의 첫 잔’을 요구했다. 파편이 은잔의 테두리에 닿는 순간, 수로 속의 황금 개구리들이 발작하듯 날뛰기 시작했다.
쉬익!
개구리들의 긴 혀가 번개처럼 튀어나와 식탁 위의 은색 촛대와 컵, 심지어 귀족들의 비단 장갑을 낚아챘다. 놈들은 금속 성분에 반응하고 있었다. 동시에 개구리들의 피부에서 황금빛 독 안개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와 연회장을 가득 채웠다.
“커헉! 이, 이게 무슨… 축복이 아니냐?”
“성배의 시험이다! 믿음이 부족한 자들을 가려내는 것이다!”
귀족들은 얼굴이 파랗게 질려가면서도 체면 때문에 자리를 뜨지 못했다. 가문의 투자금이 걸린 ‘성배 사업’이 실패했음을 인정하기보다, 차라리 독을 들이마시며 기적이라 우기는 쪽을 택한 것이다.
그 와중에 한 귀족이 이네스를 조롱했다.
“저기 보게, 몰락한 기사단의 패잔병 아니신가? 예법도 모르는 천한 것이 감히 성자의 곁을 지키다니. 방패나 들고 구석에서 떨고나 있지 그러나?”
이네스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하지만 독 안개가 기둥을 부식시키고 수로의 배수구가 막히며 물이 차오르기 시작하자, 그녀는 망설임 없이 귀족들의 예법을 짓밟았다.
“예법 따위는 무덤에서나 지키십시오!”
이네스가 거대한 방패를 휘둘러 아수라장이 된 식탁을 엎어버렸다. 그녀는 방패를 디딤돌 삼아 사람들을 비상구로 밀어 넣으며 탈출로를 확보했다.
로웬은 이 상황이 지독하게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독 안개는 금속의 산화 반응과 닮아 있었고, 개구리들은 특정 냄새와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는 허리춤에 매달린 약초 주머니를 풀었다.
“피핀, 식초랑 소금 다 가져와! 모르그, 수로 끝에 있는 배수구 마개 열어!”
로웬은 식탁 위에 놓인 식초 병을 깨뜨려 수로에 들이부었다. 산성 성분이 황금 개구리들의 피부 점막을 자극하자 놈들이 괴성을 지르며 물러났다. 이어 그는 가져온 약초 묶음을 촛대에 매달아 불을 붙였다. 독성 안개를 중화시키는 매캐한 연기가 퍼지자, 로웬은 은수저로 접시 뚜껑을 요란하게 두드렸다.
챙! 챙! 챙!
규칙적인 금속음에 홀린 개구리들이 혀를 내두르며 로웬이 유도하는 방향, 즉 열린 배수구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로웬이 거대한 촛대를 지렛대 삼아 물속에 박힌 기둥의 균형을 맞추자, 역류하던 물이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독 안개가 걷히고 상황이 정리되자, 살아남은 귀족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뻔뻔하게 소리쳤다.
“보았는가! 성자께서 황금 독을 땅의 정수로 돌려보내시는 기적을!”
“과연 성찬의 완성이다! 이 성스러운 정화 의식을 기록하라!”
로웬은 헛웃음을 삼키며 자작에게 다가갔다.
“기적은 됐고, 여기 도장 찍으시죠. 그리고 미수금 입금은….”
자작은 감격에 젖은 표정으로 서류에 도장을 꽝 찍었다. 그리고는 로웬의 손에 화려한 금박 봉투를 쥐여주었다.
“성자님, 대금은 걱정 마십시오. 방금 귀하의 성스러운 헌신을 기리기 위해, 미수금 전액을 ‘성자 후원 재단’에 기부 처리했습니다. 여기 기부 영수증입니다!”
로웬의 눈꺼풀이 떨렸다. 약초 값 대신 돌아온 것은 쓸모없는 종이 쪼가리뿐이었다. 분노로 인해 등 뒤에 맨 성검의 자루를 꽉 쥐었을 때, 로웬은 기묘한 감각을 느꼈다.
성배 파편이 든 은잔이 근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평소 오만하게 굴던 성검은 아무런 빛도 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두려움에 떠는 짐승처럼 차갑게 식어 있었다. 로웬의 손바닥에 닿는 검의 감촉은 마치 썩어가는 얼음덩어리를 만지는 듯 서늘했다.
“…이건 또 왜 이래.”
돈은 못 받았고, 검은 고장 난 것 같으며, 귀족들은 여전히 미쳐 있다. 로웬은 영수증을 구겨 넣으며 늪지의 별장을 나섰다. 잿불 심부름꾼의 하루는 오늘도 적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