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6화 합본. 검은 사과 과수원에서 성자의 그림자 극장까지
15화. 검은 사과 과수원
오스테 마을 입구는 안개보다 눅진한 굶주림으로 막혀 있었다. 로웬은 빈 바구니 끈을 어깨에 고쳐 걸며 코를 찡그렸다. 전날 여관 주인이 숙박비 환불 대신 내민 것은 은화가 아니라 검은 사과 배달장이었다. 과수원에서 사과 한 바구니를 받아 마을 창고까지 옮기면 은화 세 닢, 그리고 운이 좋으면 아침에 물린 빵값을 깎아주겠다는 조건이었다.
“이거 분위기가 영 구린데요. 사과 향기보다는 시체 썩는 냄새가 더 진동을 하네.”
피핀이 코를 킁킁거리며 투덜거렸다. 평소라면 그 말 뒤에 농담 두 개쯤 더 붙였을 녀석이, 오늘은 입술만 깨물었다. 과수원 쪽에서 단내가 넘어올 때마다 그의 목울대가 불편하게 움직였다.
로웬이 말했다.
“배고픈 놈들한테는 그게 향수보다 달콤하겠지. 저 사람들 눈을 봐. 사과가 아니라 금덩이를 기다리는 눈빛이잖아.”
마을 사람들은 빈 그릇을 들고 서 있었다. 얼굴은 밀가루를 뒤집어쓴 것처럼 창백했고, 눈가에는 밤새 잠을 놓친 검은 그늘이 내려앉아 있었다. 검은 사과는 껍질이 숯처럼 까맣고 속살은 핏물처럼 붉은 열매였다. 먹고 나면 이상한 꿈을 꾼다느니, 아이가 사흘 동안 웃기만 했다느니 하는 말이 돌았지만, 굶주림 앞에서는 그런 소문도 값싼 양념에 지나지 않았다.
과수원 울타리에 다다르자 안쪽에서 흙 묻은 손 하나가 먼저 나왔다. 손은 로웬의 얼굴이 아니라 빈 바구니 바닥을 확인했고, 그다음에야 구겨진 배달장을 낚아챘다.
“여관 빚 대신 온 심부름꾼?”
여자가 짧게 물었다. 로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종이를 꼼꼼히 훑다가 로웬의 장화 끝과 바구니 가장자리를 오래 보았다. 고용주인지, 경비인지, 아니면 여기서 같이 굶어 죽을 사람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무릎 아래까지 내려온 가죽 앞치마는 검은 사과즙에 절어 누더기처럼 굳어 있었고, 진흙과 마른 잎사귀가 그 위에 말라붙어 낡은 지도 같은 얼룩을 만들고 있었다. 사과를 솎아내는 전정 가위를 쥔 손등에는 핏줄이 굵게 올라와 있었으며, 손톱 밑에 낀 검은 과육 찌꺼기는 씻어도 빠지지 않는 멍처럼 보였다. 가지가 서로 긁히는 소리만 나도 그녀의 어깨가 먼저 움츠러들었고, 그 반응은 겁이라기보다 오래 맞은 사람이 매질의 각도를 먼저 읽는 버릇에 가까웠다. 쉰 목소리는 로웬을 반기는 쪽과는 거리가 멀었고, 굶주린 군중을 향해 돌아가는 시선에는 혐오와 연민이 얇은 칼날처럼 함께 걸려 있었다.
“따라와. 가지에 손대지 말고.”
과수원 안쪽은 낮인데도 어두웠다. 검은 가지들이 머리 위를 얽어매고, 땅에는 떨어진 사과들이 짓물러 단내를 올렸다. 이네스가 길을 막은 가지 하나를 검집 끝으로 밀어내자, 잘린 곳도 아닌데 냄새가 한층 진해졌다. 마을 사람 몇이 울타리 밖에서 동시에 비틀거렸다.
“베면 더 풍기는군요.” 이네스가 낮게 말했다.
로웬은 대답 대신 바구니 바닥에 남아 있던 재를 손끝으로 찍어 바람에 흩뿌렸다. 재는 곧장 가라앉지 않고, 가지 사이의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 얇게 밀려갔다. 그는 그 방향만 보고 발을 옮겼다.
“사과나무가 길 안내까지 해주네. 아주 친절해서 눈물이 난다.”
“그 말투로 길 잃으면 유언도 싸구려가 됩니다.” 피핀이 웃으려다 말끝을 삼켰다. “이 냄새, 그때도 났어. 왕궁 지하에서… 아니, 아닙니다. 제가 헛소리를 했네요.”
로웬은 못 들은 척했다. 심부름꾼의 미덕 중 하나는 동료가 스스로 덮은 뚜껑을 굳이 열지 않는 것이다.
그때 울타리 틈으로 아이 하나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아이는 떨어진 사과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안 돼!”
여자가 외쳤지만 늦었다. 사과나무 가지가 채찍처럼 휘어졌고, 위쪽에 매달린 열매 몇 개가 터지며 딱딱한 씨앗을 쏟아냈다. 씨앗은 빗방울이 아니라 자갈처럼 날아왔다.
로웬은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는 바구니를 방패처럼 들어 아이 앞을 막았고, 여자는 전정 가위 손잡이로 아이의 목덜미를 걸어 뒤로 끌어냈다.
텅! 텅!
바구니 바닥에 씨앗이 박혔다. 팔이 저릿했다. 아이는 울지도 못하고 입만 벌린 채 떨었다.
“죽고 싶어 환장했어?” 여자가 아이의 등을 때렸다. “나가. 다시 들어오면 네 손보다 먼저 내 가위가 간다.”
아이는 울타리 밖으로 달아났다. 여자는 거친 숨을 삼키고 나서야 로웬을 다시 보았다.
“니바 로스크. 이 과수원의 관리인이다.”
“로웬입니다. 직업은 심부름꾼이고, 방금 건 봉사활동 아니고 사고 방지입니다. 추가 수당 있습니까?”
니바는 웃지 않았다. 대신 창고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창고에는 검은 사과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로웬은 바구니를 내려놓고 사과를 하나씩 골랐다. 너무 물렁한 것, 구멍이 난 것, 단내가 혀끝까지 들러붙는 것, 껍질 아래에서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따로 밀어냈다. 그가 좋은 사과를 안다는 뜻은 아니었다. 빵 배달을 오래 하다 보면 상한 밀가루 냄새와 아직 먹을 수 있는 곰팡이 냄새를 구분하게 되는 것처럼, 손이 먼저 싫어하는 물건을 피했을 뿐이다.
하지만 밖에서 보는 사람들의 얼굴은 달랐다. 로웬이 고른 사과는 검은 윤기가 조금 가라앉았고, 밀어낸 사과들은 서로 부딪힐 때마다 더 탁한 냄새를 냈다. 누군가 숨을 삼켰다.
“보여? 성자님 손이 닿은 것만 얌전해졌어.”
“저건 축복이야. 우리를 위해 골라주시는 거야.”
“아니, 그냥 냄새가 덜한 걸 고르는 겁니다.” 로웬은 바구니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성자라면 은화 세 닢짜리 배달장을 들고 여기까지 안 와요.”
해명은 씨앗보다 힘이 없었다. 한 노인이 무릎을 꿇었고, 그 뒤에 있던 사람들도 빈 그릇을 가슴에 붙인 채 고개를 숙였다. 니바마저 전정 가위를 내려놓고 로웬의 손을 보았다. 그 눈빛에는 의심보다 더 곤란한 것, 희망이 섞여 있었다.
모르그가 창고 구석에서 장부 하나를 꺼냈다. 먼지를 털자 낡은 표식이 드러났다. 제국 기사단 군수 물자 표식이었다. 이네스의 손이 망토 안쪽에서 멎었다. 전날 여관에서 챙긴 문장 조각을 쥔 모양이었다.
모르그는 장부를 넘기다 손을 멈췄다.
[7월 14일. 수확량 부족. 토양 오염 가속.]
[8월 3일. 그분의 지시대로 정화 공정 생략.]
[죽은 태양에 바친 첫 수확. 마을 전체 배포 완료.]
“죽은 태양…?”
그의 목소리가 드물게 흔들렸다. 로웬은 중요한 줄 위에 사과즙이 번지는 것을 보고 소매로 닦으려 했다. 모르그가 거의 소리치듯 그의 손목을 잡았다.
“문지르지 마십시오. 기록이 죽습니다.”
“사람은요?” 로웬이 물었다. “사과 때문에 먼저 죽게 생겼는데.”
모르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장부를 품에 넣었다.
배달을 마친 뒤 로웬은 광장 구석에서 숨을 몰아쉬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가 고른 사과가 담긴 상자 앞에만 줄을 섰다. 다른 상자 앞의 줄은 눈에 띄게 짧았다.
“이놈의 동네는 사과 하나 옮기는 것도 목숨을 걸어야 해. 은화 세 닢에 이게 무슨 고생이야.”
“그래도 덕분에 마을 사람들은 오늘 밤 배를 채우겠군요. 성자님?” 피핀이 억지로 웃었다.
로웬은 주머니에서 배달 확인서를 꺼내려다 사과 향이 밴 종이 한 장을 함께 끌어냈다. 창고 바닥에서 묻어 온 전단이었다.
[당신의 죄를 씻어줄 유일한 무대.]
[성자의 그림자를 파는 극장 — 이번 주말, 오스테 인근 공터에서 개막.]
그림 속 광대는 성자 옷을 입고 사람들의 그림자를 가위로 잘라 팔고 있었다. 피핀의 웃음이 아주 잠깐 멈췄다.
로웬은 전단을 구겨 쥐었다.
“성자의 그림자까지 팔아? 이제는 별걸 다 파는군.”
“성자님, 본인 재산 관리부터 하셔야겠는데요.” 피핀이 다시 농담을 붙였다. 목소리는 가벼웠지만, 눈은 전단의 그림자 가위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과수원 쪽에서 검은 단내가 다시 불어왔다. 구원의 냄새는 아니었다. 값싼 빵을 태워 제단에 올렸을 때 날 법한, 조금 달고 조금 역한 냄새였다.
16화. 성자의 그림자를 파는 극장
검은 사과 과수원에서 주운 전단지는 눅눅한 습기와 곰팡이 냄새를 머금고 있었다. [성자의 그림자가 당신의 죄를 먹어 치우리라. 단돈 5리알에 영혼의 세탁을.] 로웬은 손가락 끝에 묻어나는 검은 잉크를 보며 혀를 찼다. 자기 초상권이 단돈 5리알에 팔리고 있다는 사실보다, 그 헐값에 줄까지 선 사람들 숫자가 더 기가 막혔다.
“초상권 침해로 고소라도 하고 싶네. 아니면 인센티브라도 떼어주든가.”
로웬의 투덜거림을 무시한 채, 이네스는 거대한 천막 앞에 늘어선 줄을 매서운 눈초리로 훑었다. 천막은 군용 규격보다 훨씬 거대했고, 덧댄 가죽마다 기이한 문양의 낙인이 찍혀 있었다. 구원을 갈구하는 이들의 줄은 뱀처럼 길게 늘어져 잿빛 공기 속으로 잦아들었다.
“분위기가 좋지 않습니다, 로웬. 저들은 연극을 보러 온 얼굴이 아닙니다. 고해성사도 못 견딘 사람들이, 천막 안의 가짜 신에게 무릎을 빌리러 온 겁니다.”
이네스의 말대로였다. 줄을 선 이들의 눈은 하나같이 초점이 풀려 있었고, 손에는 제각각 제물처럼 든 은화나 빵 봉투가 들려 있었다. 그들 사이를 파고들며 모르그가 수첩을 펼쳤다.
“천막 입구의 문장, 저건 북부 군수 사령부에서 폐기한 인장입니다. 그리고 저기 수레에 쌓인 밀가루 자루들 보이죠? 단순한 극단이라기엔 물자 흐름이 너무 반듯합니다. 장부를 확인해야겠습니다.”
피핀은 로웬의 옷자락을 꽉 쥔 채 천막 안에서 새어 나오는 푸르스름한 빛을 응시했다. 아이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로웬…… 저 안에서 소리가 나. 가위질하는 소리. 슥삭, 슥삭하고…….”
“가위질? 그냥 연극 소품 만드는 소리겠지. 너무 겁먹지 마, 피핀.”
하지만 천막 안으로 발을 들이는 순간, 로웬도 목 뒤가 눌리는 느낌을 받았다. 내부는 외부의 낮보다 더 어두웠고, 수십 개의 기름 등잔이 뿜어내는 열기가 폐를 찔렀다. 무대 위에는 거대한 반투명 막이 쳐져 있었다. 막 너머로 강렬한 빛이 투사되자, 집채만 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누더기를 걸치고 지팡이를 든 사내의 실루엣. 사람들이 떠드는 ‘잿불 성자’ 그림과 지나치게 닮아 있었다.
“보라!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어둠이 물러가고, 죄의 무게가 가벼워지리니!”
변성기를 지난 사내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극장을 울렸다. 관객석 여기저기서 윽윽거리는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그림자가 손을 뻗자, 막 위로 검은 가루가 뿌려졌다. 병든 자의 고름을 성자가 닦아내는 장면처럼 보이도록 만든 연출이었다.
“말도 안 돼. 저거 군용 신호용 반사판이잖아요.”
이네스가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녀의 시선은 무대 뒤편, 빛이 꺾이는 각도를 정확히 겨냥하고 있었다.
“빛을 굴절시켜서 특정 형상만 도드라지게 만드는 장치예요. 각도 조절용 나사까지 기사단 규격이군요. 군수 물자가 이 천막까지 흘러든 겁니다.”
그때였다. 무대 앞쪽, 성자의 그림자를 더 가까이서 보려던 어린아이 하나가 통제선을 넘어 무대 장치 안쪽으로 몸을 내밀었다.
“아!”
비명은 짧았다. 아이의 몸이 무대 가림막과 연결된 도르래 줄에 걸려 공중으로 붕 떴다. 평범한 발 헛디딤은 아니었다. 그림자 인형을 조종하는 낚싯줄 같은 얇은 철사들이 아이의 옷가지와 그림자를 엉키게 만들며 장치 안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비켜!”
로웬이 본능적으로 몸을 날렸다. 이네스가 검을 뽑으려 했지만, 사람들의 밀도가 너무 높아 휘두를 공간이 없었다. 로웬은 인파를 헤치고 무대 옆면의 천막 줄을 움켜쥐었다.
그때, 어둠 속에서 한 남자가 로웬의 앞을 가로막았다.
“영업 방해다, 이방인. 기적의 장막을 건드리지 마라.”
그는 무대 장치를 지키는 파수꾼이자, 이 극의 연출가처럼 보였다. 로웬은 그를 밀쳐내려 했지만, 남자의 힘은 의외로 단단했다. 로웬은 아이가 철사에 목이 감기기 직전이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옆에 있던 재 바구니를 발로 찼다.
“비키라고 했지! 저 애 죽는 꼴 보고 싶어?”
로웬의 어깨를 밀치며 드러난 남자의 정체는 단순한 광대가 아니었다.
그는 몸에 딱 붙는 검은 벨벳 조끼를 입고 있었는데, 옷깃마다 은빛 분필 가루가 서리처럼 내려앉아 있었다. 조명 기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열 때문인지 입술은 바싹 말라 하얗게 터 있었고, 그 사이로 비죽 새어 나오는 숨결에는 기름 냄새가 섞여 있었다. 무엇보다 로웬을 소름 끼치게 만든 것은 그의 눈이었다. 수백 명의 관객이 환호하고 통곡하는 난장판 속에서도 그의 눈동자만큼은 한 방울의 감정도 담지 않은 채, 오직 무대 위 줄의 긴장도와 조명의 각도만을 계산하는 차갑게 빛났다. 인형을 다루느라 굳은살이 박인 얇고 긴 손목은 기괴할 정도로 유연하게 움직이며 로웬의 접근을 차단했다.
그가 바로 이 기만적인 극장을 총괄하는 흥행 책임자이자 그림자 조련사, 마테오 벨이었다.
“성자의 그림자는 완벽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생기는 작은 소음은 신성한 희생일 뿐이야.”
마테오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그는 로웬의 가슴팍을 정교하게 밀어내며 다른 손으로 아이가 걸린 줄을 더 세게 잡아당기려 했다. 사고를 ‘성자에게 흡수되는 기적’으로 포장하려는 속셈이었다.
“희생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로웬은 허리춤에 매달린 수건을 꺼내 근처 화로의 재를 듬뿍 묻혔다. 그리고는 마테오가 조절하고 있던 주 반사판의 중심부를 향해 정확히 던졌다.
챙그랑!
재 뭉치가 반사판에 달라붙으며 빛의 경로를 비틀었다. 동시에 로웬은 천막 지지용 밧줄의 매듭을 빵 수레 덮개를 묶고 풀며 익힌 손버릇으로 매듭을 단번에 풀어젖혔다.
“이네스, 지금!”
이네스가 군화 발로 무대 하단의 지지대를 걷어찼다. 콰르릉, 소리와 함께 거대한 거울 장치들이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강렬한 빛이 사방으로 산란하며 관객들의 눈을 멀게 했다.
“아악! 내 눈!”
“성자님이 노하셨다! 불길이 솟는다!”
관객들은 비명을 질렀지만, 로웬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무대 밑으로 기어 들어가 철사에 감긴 아이를 낚아채듯 빼냈다. 아이의 그림자가 줄과 도르래에서 풀려나는 순간, 무대 뒤편의 모든 조명이 퍽 소리를 내며 꺼졌다.
정적이 찾아왔다. 먼지가 자욱한 무대 위로 한 줄기 자연광이 스며들었다. 사람들은 보았다. 성자의 위엄 있는 그림자가 아니라, 조잡하게 깎인 나무 인형과 찌그러진 군용 반사판, 그리고 재투성이가 된 채 아이를 안고 있는 로웬을.
“이게…… 이게 기적의 실체였어?”
군중 속에서 배신감에 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마테오 벨은 쓰러진 장치들 사이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벨벳 조끼는 엉망이 되었고, 은빛 분필 가루는 땀과 섞여 지저분하게 얼룩져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로웬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입가에 얇은 미소를 지었다.
“폭로라니. 당신은 관객을 너무 얕보는군.”
마테오의 말대로였다. 누군가 무대 위 로웬의 발치에 떨어진 잿가루를 보며 외쳤다.
“잿불이다! 성자께서 직접 강림하셔서 가짜를 심판하시고 재를 내리셨다!”
“오오, 잿불 성자시여!”
사람들은 장치가 망가진 무대를 향해 오히려 더 열광적으로 무릎을 꿇었다. 로웬이 아이를 안고 무대를 내려오려 했지만, 사람들은 그의 발치에 동전을 던지며 옷자락을 붙잡았다.
“아니, 저기요! 이거 그냥 제가 던진 재거든요? 기적 아니라고요!”
로웬의 항변은 환호성에 묻혔다. 모르그는 그 혼란을 틈타 무대 뒤편에 숨겨져 있던 두툼한 장부와 인장을 챙겨 로웬에게 다가왔다.
“로웬, 일단 여기서 빠져나가야 합니다. 이 장부, 보통 장부가 아닙니다. ‘용의 이빨 방앗간’이라는 곳으로 막대한 양의 가루 자루가 정기적으로 배달되고 있어요.”
이네스가 로웬의 앞을 가로막으며 길을 텄다. 로웬은 품 안의 아이를 아이의 어머니에게 밀어 넣어주고는 도망치듯 천막 밖으로 뛰쳐나왔다.
뒤를 돌아보자, 무너진 천막 입구에서 마테오 벨이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로웬을 배웅하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은 습관처럼 새로운 분필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마치 다음 무대의 주인공으로 누구를 세울지 이미 결정했다는 듯이.
극장 앞마당에는 아직 실리지 못한 수레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중 하나가 로웬의 발에 치였다. 자루가 터지며 하얀 가루가 쏟아졌다. 밀가루가 아니었다. 그것은 뼛가루처럼 차갑고 거친, 정체 모를 잿빛 가루였다.
자루 겉면에는 붉은 페인트로 거칠게 적혀 있었다.
[용의 이빨 방앗간 - 귀중품 엄금]
로웬은 자신의 손에 묻은 가루를 털어내며 인상을 찌푸렸다. 심부름의 냄새가 났다. 아주 지독하고, 돈도 안 될 것 같은 불길한 냄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