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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일러스트

토론

대강당.

전교생이 다시 모였다.

이번에는 집회가 아니라 토론이었다.

학생회 vs 활빈당. 전교생 앞에서 논리로 싸우는 자리.

무대 위 의자 두 개.

왼쪽에는 제갈린, 오른쪽에는 홍은명.

편입생 쪽은 왼편에 몰렸고 명문가 쪽은 오른편에 몰렸다.

중립파는 뒤쪽을 채웠다.

분위기는 재판 같았다.

아무도 웃지 않았고, 기침조차 눈치를 봤다.

사회가 마이크를 잡았다.

"주제 — 비공인 조직 활빈당의 정당성.

학생회 대표 제갈린, 활빈당 대표 홍은명.

참고로 이번 토론은 여론 공개 절차이며,

칙령 집행 절차와는 별개로 진행됩니다."

관중석의 숨소리가 한 박자 멈췄다.

여론전이라는 뜻은 이 토론의 승패가

칙령 그 자체를 뒤집지는 못한다는 뜻이었다.

은명이 의자에 앉아 손가락을 맞물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주먹으로 때리는 싸움이었다면 전태산을 보냈을 거다.

이건 머리 싸움이다.

은명이 제갈린을 봤다.

검은 머리. 차가운 눈. 흔들림 없는 자세.

강하다. 알고 있었다.

제갈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활빈당이 직접 지킨 사람, 몇 명이야?"

대강당이 조용해졌다.

앞줄의 누군가가 자세를 바꿨다.

"보호 3건, 예방 2건.

합계 26명. 맞지?"

은명이 끄덕였다.

"맞아."

제갈린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율도고 전교생은 480명.

26명을 위해 454명이 기대는 시스템을 흔드는 게 정의라고?"

명문가 쪽에서 낮은 동의가 번졌다.

몇몇이 고개를 끄덕이며 옆 사람에게 뭔가 속삭였다.

은명이 마른입술을 한 번 적시고 말했다.

"그 26명이 시스템 바깥에 있었으니까 우리가 간 거야.

시스템이 다 커버했으면 활빈당은 필요 없었어."

제갈린이 손바닥을 들어 말을 끊었다.

"그건 시스템의 미비지, 시스템의 부정이 아니야."

자리에서 일어나 한 발 앞으로 나왔다.

마이크도 없이 목소리가 대강당 끝까지 닿았다.

"미비는 보완하면 돼.

파괴할 이유는 없어."

은명도 일어섰다.

"보완하는 동안 누가 지켜?"

목소리에 열이 올랐다.

"시스템이 업데이트되는 동안

사각지대의 사람들은 대기 상태야?"

이번에는 편입생 쪽에서 먼저 웅성거림이 터졌다.

누군가 박수를 치려다 멈췄고, 그 어색한 정적이 오히려 더 크게 울렸다.

무대 앞줄에서 한 편입생이 손을 꽉 쥐었다가 풀었다.

제갈린의 눈이 가늘어졌다.

"비공인 조직이 치안을 대행하면

내일은 또 다른 자경단이 생겨."

한 발 더 다가와, 단어를 또렷이 눌렀다.

"좋은 의도만으로 세운 조직이

언제까지 좋은 의도를 유지할 수 있어?"

대강당이 식었다.

방금까지의 웅성거림이 거짓말처럼 꺼졌다.

은명의 입이 잠깐 닫혔다.

맞다.

보장할 수 없다.

제갈린이 그 침묵을 놓치지 않았다.

입꼬리가 올라갈 뻔했지만 참았다.

"대답이 없네."

은명이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숨을 한 번 내쉬고, 고개를 들었다.

"좋은 의도가 영원하다고는 못 해.

그건 인정해."

제갈린의 시선이 더 날카로워졌다.

은명이 태블릿을 꺼내 들어 화면을 켰다.

"하지만 좋은 의도조차 없으면

아무도 안 움직여."

제갈린이 고개를 저었다.

"감정이야, 홍은명.

네가 지금 하는 건 논리가 아니라 호소야."

은명이 태블릿 화면을 관중석으로 돌렸다.

"맞아. 호소야.

근데 — 이건 감정이 아니라 기록이야."

화면에 숫자가 떴다.

관중석의 고개가 한꺼번에 기울었다.

뒷줄까지 목을 빼는 소리가 들렸다.

"23건.

학생권익센터 월간 피해접수 보고서 기준,

올해 봄 학기 개시일부터 이번 달까지

학생회·선도부 미처리 편입생 피해 건수."

대강당에 깔렸던 웅성거림이 잠깐 사라졌다.

명문가 쪽에서도 누군가 입술을 깨물었다.

제갈린이 턱을 들었다.

"숫자는 과거야.

학생회는 개선 계획을 이미 수립했어."

은명이 고개를 저었다.

"계획은 미래고, 피해는 현재야.

현재가 비어 있는데 미래만 말하면

그건 계획이 아니라 변명이야."

순간 정적이 내리꽂혔다.

명문가 쪽 앞줄에서 아무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그 침묵이 동의보다 무거웠다.

제갈린의 표정이 처음으로 미세하게 흔들렸다.

손가락 끝이 바지 솔기를 한 번 스쳤다.

데이터까지 준비했다.

감정형이 아니다.

논리와 감정을 둘 다 쓴다.

제갈린이 천천히 숨을 골랐다.

턱의 각도를 바로잡고, 다시 목소리를 냉각시켰다.

"충분히 들었어.

결론은 하나야.

활빈당은 좋은 의도를 가진, 법적 근거 없는,

통제 불가능한 조직이야.

좋은 의도는 체제 안에서도 실현 가능해."

은명이 짧게 웃었다.

쓸쓸한 웃음이었다.

"그래, 가능할 거야.

근데 지금은 안 되고 있잖아.

그게 문제라는 거야."

둘의 눈이 정면으로 맞물렸다.

무대 조명이 둘의 그림자를 하나로 겹쳐 놓았다.

사회가 황급히 마이크를 올렸다.

"시간입니다.

양측 마무리 발언을—"

제갈린이 먼저 말했다.

"체제가 미비하다는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미비한 체제를 체제 밖에서 보완하는 건

체제를 파괴하는 일입니다.

수리는 안에서 해야 합니다."

은명이 이어받았다.

"체제가 수리되는 동안,

사각지대에 선 사람들에게 기다리라고는 못 합니다.

우리는 그 틈을 메우고 있을 뿐입니다."

끝.

박수는 없었고, 갈라진 웅성거림만 남았다.

편입생 쪽에서 손뼉을 칠 듯 말 듯 한 손이 무릎 위로 떨어졌다.

명문가 쪽에서는 슬며시 고개를 젓는 학생과 입술을 깨무는 학생이 갈렸다.

승자도 패자도 바로 선고되지 않았다.

토론 종료 직후, 대강당 밖 복도.

은명이 걷고, 전태산이 옆에서 보폭을 맞췄다.

"이긴 거야, 진 거야?"

"무승부."

"무승부면 괜찮은 거 아니야?"

은명이 고개를 저었다.

"무승부여도 칙령은 유효해.

토론은 토론이고 집행은 별개야.

우리가 논리로 못 뒤집으면 48시간 뒤 해체."

전태산이 머리를 긁었다.

"그럼 이제 뭘 해."

은명이 발을 멈추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구름 낀 하늘을 올려다봤다.

"다음 수를 찾는다.

오늘 밤 안에 해체 선언 초안이랑 저항 시나리오,

둘 다 준비해."

전태산이 한 박자 늦게 멈춰 서서 은명의 옆얼굴을 봤다.

"……초안은 네가 쓰는 거지?"

"응."

"저항 시나리오는?"

은명이 전태산을 돌아봤다.

"그건 네 몫이야."

전태산이 눈을 깜빡였다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오, 그래? 좋아. 내 전공이잖아."

은명이 돌아서며 걸음을 옮겼다.

등 뒤에서 작게 주먹을 쥐는 소리가 났다.

제갈린은 강했다.

감정이 흔들리는 순간을 정확히 읽었다.

그리고 그 질문.

좋은 의도는 언제까지 유지되나.

아직 답을 못 냈다.

그게 지금 내 약점이다.

같은 시각, 학생회실.

제갈린이 문을 닫고 들어왔다.

의자에 앉자 홀로그램 비트가 책상 위를 맴돌았다.

태블릿을 켜고 토론 기록을 열었다.

자신의 발언, 은명의 발언, 반응 타이밍을 순서대로 표시했다.

홍은명은 위험하다.

감정형이 아니라, 논리와 감정을 교차 운용한다.

제갈린의 손가락이 멈춘 문장은 하나였다.

현재가 비어 있는데 미래만 말하면 변명이다.

그 문장에서 관중이 멈췄다.

명문가 쪽까지.

——반박하지 못했다.

입술 안쪽을 짧게 씹고, 제갈린이 새 메모를 남겼다.

다음 토론 준비.

반박 자료 보강 — 개선 계획의 실행률 수치화.

집행 명분 재정렬.

제갈린이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천장을 봤다.

홀로그램 비트가 데이터를 분류하는 소리만 교실에 맴돌았다.

"다음엔 안 흔들려."

목소리가 작았다.

하지만 그 한마디를 말하는 데 숨이 한 번 걸렸다.

관중석 출구 쪽.

사람들이 빠져나가는 흐름 속에서

인티 유팡키가 조용히 일어섰다.

걸음을 옮기다 말고, 빈 객석을 한 번 돌아봤다.

체제가 중요하다는 말도 맞다.

사각지대를 그냥 두면 안 된다는 말도 맞다.

인티의 손이 난간을 짚었다.

손등 힘줄이 잠깐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규율이 사람을 못 지킬 때,

우리 조상은 규율을 깼다.

잉카가 무너졌을 때 규율을 지킨 건 침략자였고,

규율을 어긴 건 저항자였다.

저항자가 옳았다.

항상은 아니지만 — 적어도 그때는.

……그래서 더 무겁다.

출구 앞에서 인티가 은명 옆을 스쳐 지났다.

시선은 끝까지 정면을 보며, 작은 목소리만 던졌다.

"……잘 싸웠다."

은명이 고개를 돌렸을 때 인티는 이미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넓은 등이 햇빛 속으로 사라졌다.

"지금 뭐라 했어?"

전태산이 웃었다.

"인티 선배가 잘 싸웠대."

은명이 멀어지는 등을 봤다.

2학년 B반 에이스가 저 말을 했다는 사실이

자꾸 늦게 실감났다.

"……왜?"

전태산이 팔을 뒤로 꺾으며 느긋하게 말했다.

"모르겠지? 나도 모르겠어.

근데 기분은 나쁘진 않잖아."

은명이 대답 대신 작게 숨을 내쉬었다.

기분은 —— 나쁘지 않았다.

관중석 반대편.

피에르 보몽은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텅 비어 가는 대강당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펜던트를 쥐었다.

차가운 금속이 손바닥에 눌렸다.

체제를 지키는 것도 기사도.

약자를 보호하는 것도 기사도.

두 칼끝이 서로를 겨누는 날엔

내 검을 어느 쪽으로 세워야 하지.

대강당의 조명이 하나씩 꺼지고 있었다.

피에르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피에르가 고개를 숙여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Pardon..."

무대 위 의자 두 개가 아직 그대로 있었다.

아무도 치우지 않은 채.

논리로도 결론은 나지 않았다.

칙령은 유효하고, 시간은 계속 줄어든다.

남은 시간은 12시간.

날이 밝으면 활빈당은 해체되거나, 저항하거나.

은명의 방 책상 위에는 이미 두 개의 파일이 열려 있었다.

왼쪽 — 해체 선언 초안.

오른쪽 — 저항 시나리오.

어느 쪽이든, 밤이 끝나기 전에 고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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