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축제
학예제. 율도고 연례 행사.
9월의 바람이 교정을 훑고 지나갔다.
나뭇잎이 아직 초록이었지만
끝이 살짝 노란 것이 가을을 예고하고 있었다.
교정에 부스가 늘어서 있었다.
1학년 A반은 전통 다과 체험.
차를 우리는 향이 안쪽 부스까지 번졌다.
2학년 B반은 무공 시범 공연.
타격봉을 돌리는 묵직한 소리가 리듬처럼 울렸다.
검도부는 모의 대결장.
학교가 떠들썩했다.
활빈당의 부스는 구석이었다.
야외 구역. 나무 그늘 아래. 교정 끝자락.
중앙 광장에서 두 번 꺾어야 보이는 위치.
안내판도 없었다.
위노나가 주위를 둘러봤다.
나무 그늘이 부스 반을 덮고 있었다.
햇빛이 드는 쪽에만 천막을 폈다.
"……이거 허가 받은 거야?"
은명이 부스 천막 기둥을 잡으며 대답했다.
"개인 참가 항목에 부스 형태 제한이 없어.
교칙 13조 4항."
위노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교칙 조항을 외우고 있는 거야?"
"필요한 것만."
아르준이 안경을 올렸다.
"교칙을 교칙으로 이기는 건가. 논리적이네."
부스 콘셉트는 '무공 체험 부스.'
각자의 무공을 안전한 형태로 체험시키는 이벤트.
단, 출력은 훈련용 수준으로 제한.
운소하가 사전에 안전 프로토콜을 승인한 조건이었다.
카이가 바닥에 손을 대고 지형 변화 미니 퍼즐을 만들었다.
콘크리트 바닥이 미세하게 울퉁불퉁해졌다.
3미터 구간을 넘어지지 않고 걸어가면 성공.
카이가 시작점에 분필로 'START'라고 적었다.
끝점에는 'GLORY'라고 적었다. 철자가 틀려 있었다.
리오가 움직이는 표적을 만들었다.
나무 인형 3개를 와이어에 연결해서 불규칙하게 흔들리게 했다.
제한 시간 안에 맞히면 성공.
리오가 직접 시범을 보이며 3개를 순식간에 맞혔다.
"이렇게 하면 돼."
카이가 손을 들었다.
"그건 네가 설치한 거잖아.
위치를 아니까 당연히 맞히지."
"……그건 그래."
올가가 수호벽을 펼쳤다.
투명한 방어벽이 반원 형태로 서 있었다.
공격을 날려보는 체험.
올가 옆에 '주의: 출력 제한 적용 중' 이라는 팻말이 있었다.
팻말이 정자체였다.
올가가 직접 쓴 것 같았다.
태산이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나는 뭐 해?"
은명이 리스트를 봤다.
"안내. 서 있어."
"……그게 역할이야?"
"큰 놈이 서 있으면 사람들이 찾아오거든."
태산이 자기 키를 내려다봤다.
……간판이라는 거냐.
리오가 낄낄 웃었다.
"인간 간판. 나쁘지 않은데?"
"닥쳐."
오전에는 한산했다.
구석이라 눈에 안 띄었다.
지나가는 학생 몇 명이 호기심에 들르는 정도.
대부분 중앙 광장의 대형 부스 쪽으로 몰려갔다.
카이가 바닥에 드러누웠다.
"아, 심심해.
퍼즐 만들어 놨는데 도전자가 없으면 허무하잖아."
올가가 팔짱을 끼고 벽 앞에 서 있었다.
미동도 없었다.
자기가 만든 벽이랑 같이 전시물이 되어 있었다.
아르준이 태블릿을 확인하며 말했다.
"오전 방문자 열두 명. 예상 범위 내."
리오가 의자에 기대며 말했다.
"열두 명. 망한 거 아냐?"
카이가 딴짓하며 말했다.
"오후에 폭발하는 거야.
입소문이란 건 원래 점심 이후에 퍼지거든."
은명이 태블릿에 뭔가를 적고 있었다.
표정이 바뀌지 않았다.
12명이든 120명이든 이 표정일 것 같았다.
카이의 말이 맞았다.
점심이 지나자 사람이 늘기 시작했다.
편입생. 비명문가 학생.
소문을 듣고 하나둘 찾아왔다.
같은 1학년 하나가 다가왔다.
B반 학생이었다. 얼굴은 알지만 이름은 모르는.
"활빈당 맞죠?
1학기 때 저희 반 친구 도와주신……"
태산이 봤다.
"어. 뭐, 별거 아니었어."
그 학생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저도 체험해봐도 되나요?"
"서. 카이한테 가. 바닥 놈."
카이가 손을 흔들었다.
"Kia ora! 이리 와!
발이 자신 있으면 도전해봐!"
그 학생이 카이의 퍼즐에 들어갔다.
울퉁불퉁한 바닥.
자신 있게 첫 발을 내딛었다.
두 번째 발이 비틀렸다.
세 번째에 넘어졌다.
주변에서 구경하던 학생 서넛이 웃었다.
카이가 클로버처럼 웃었다.
"ㅋㅋㅋ
바닥을 믿으면 안 되는 거야!"
넘어진 학생이 일어나며 바닥을 만져봤다.
"이거 평평해 보이는데 발 딛으면 바뀌는 거야?"
"응. 마나 시프트.
네가 발을 딛는 순간에 바닥이 움직여.
예측이 안 되지?"
"한 번 더 해볼게."
다시 들어갔다.
이번에는 다섯 걸음 갔다.
역시 넘어졌다.
주변 학생이 또 웃었다.
분위기가 풀렸다.
리오의 표적 코너에도 사람이 모이기 시작했다.
A반 학생 둘이 나란히 도전했다.
첫 번째 학생이 인형 하나를 맞혔다.
"오, 하나!"
"나머지 두 개는 못 맞히지 않나?"
리오가 팔짱을 끼며 웃었다.
"하나 맞힌 것도 대단한 거야.
걔네 진짜 빨리 움직여."
두 번째 학생이 도전했다.
하나도 못 맞혔다.
"……움직임이 너무 불규칙해."
리오가 어깨를 으쓱했다.
"실전이 그런 거지. 적이 예측 가능하면 그건 끝이야."
오후 중반.
사람이 더 몰리기 시작할 무렵, 분위기가 살짝 바뀌었다.
명문가 2학년 하나가 올가의 수호벽 코너에 섰다.
팔을 풀고, 어깨를 돌리고, 자세를 잡았다.
진지했다.
권을 날렸다. 꽤 강한 공격.
바람이 일었다. 주변 학생 몇 명이 머리카락을 넘겼다.
벽이 안 깨졌다.
표면에 빛이 번쩍였을 뿐이었다.
2학년의 눈이 좁아졌다.
힘을 올려 한 번 더.
기합과 함께.
안 깨졌다.
올가의 표정도 바뀌지 않았다.
벽을 유지하는 데 힘이 드는 것 같지도 않았다.
"……1학년이 이 정도야?"
올가가 무표정하게 말했다.
"약하면 깨져.
안 깨진다는 건 약하지 않다는 뜻이야."
2학년의 얼굴이 붉어졌다.
주변에서 구경하던 학생들이 조용해졌다.
뒤에 있던 같은 반 친구가 팔을 잡아끌었다.
"야, 됐어. 가자."
"……1학년 주제에."
올가는 듣고도 표정이 바뀌지 않았다.
태산이 슬쩍 옆에 섰다. 팔짱을 풀면서.
"괜찮아?"
"깨질 이유가 없었으니까."
태산이 피식 웃었다.
이 표정이 올가의 대답 방식이라는 걸 알기 시작했다.
그 뒤로 올가의 벽에 도전하는 학생이 늘었다.
2학년이 못 깬 벽이라는 소문이 퍼진 것이다.
대부분 주먹 한 방 날리고 손목을 흔들며 돌아갔다.
"미쳤다 이거 진짜 안 깨져."
"1학년이라고?"
올가는 도전자가 올 때마다 같은 자세로 서 있었다.
팔짱. 무표정. 미동 없음.
아르준이 태블릿을 정리하며 말했다.
"오후 기준 방문자가 눈에 띄게 늘었어.
비공식치고는 의미 있는 수치야."
은명이 옆에서 들었다.
1학기 초에는 이 이름조차 없었다.
지금은 구석의 부스 앞에 줄이 서 있다.
위노나가 태블릿으로 현장 사진을 찍고 있었다.
부스에 모인 학생들, 카이의 퍼즐에서 넘어지는 학생,
올가의 벽 앞에서 손목을 잡은 학생.
"기록해두는 거야?"
은명이 물었다. 위노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뭘 했는지 남겨두는 게 좋으니까."
리오가 표적 맞히기를 운영하면서 소리 질렀다.
"다음 도전자!
현재 최고 기록 3개!
깰 수 있는 사람?!"
명문가 학생 몇 명이 멀리서 봤다.
"비공인 조직이 대놓고 홍보하는 거 아냐?"
"학생회가 허락한 거야?"
속삭임이었다.
하지만 속삭임은 부스의 활기를 못 이겼다.
카이의 퍼즐에서 또 누가 넘어지는 소리.
웃음소리.
학예제의 구석에서 활빈당이 살아 있었다.
저녁. 학생회 VIP 라운지.
창밖으로 학예제의 조명이 보였다.
색색의 전구가 교정을 수놓고 있었다.
안에서는 그 빛이 닿지 않았다.
이자벨라가 앉아 있었다.
다리를 꼬고 보고서를 보고 있었다.
커피잔이 옆에 있었지만 식어 있었다.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것 같았다.
선도부 리포트.
'활빈당 비공식 부스.
개인 참가 형식.
교칙 위반 사항: 없음.
방문자 수: 증가 추세.
특이 사항: 2학년 학생과의 소규모 마찰 1건. 물리 충돌 없음.'
이자벨라가 보고서를 내려놓았다.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 번 두드렸다.
"……교칙으로 막을 수 없게 만들었군."
한 박자.
"홍은명다워."
테무진이 옆에 섰다.
자세가 바르다. 항상 그렇다.
"내일 부스를 폐쇄할까요?"
이자벨라가 고개를 저었다.
"근거가 없어.
교칙 위반이 아닌 걸 막으면
우리가 부당해지는 거야."
한 박자.
"내버려 둬. 대신 지켜봐."
미소가 아닌 표정.
"인기가 오르면 실수도 늘어.
그때 움직여."
테무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시각. 학예제 회장.
조명이 켜진 교정을 피에르 드 마르시야크가 혼자 걷고 있었다.
기사도의 후예. 금발. 격식 있는 걸음.
손에 다과 체험 부스에서 받은 차가 하나 들려 있었다.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활빈당 부스 앞을 지나갔다.
멈추지 않았다.
축제가 끝나가는 시간이라 사람은 줄었지만
천막은 아직 서 있었다.
하지만 눈은 움직였다.
올가의 수호벽 시연 흔적을 봤다.
바닥에 발자국이 여럿 남아 있었다.
도전했던 학생들의 것이다.
수호. 보호.
기사의 본분과 다르지 않잖아.
카이의 퍼즐 구간을 봤다.
분필로 적힌 'START'와 'GLORY'가 희미해져 있었다.
많은 발이 밟고 지나간 흔적이었다.
즐거움. 연결.
이것도 기사도의 일부인가.
피에르가 걸음을 멈췄다.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식어 있었다.
체제를 지키는 것이 옳다고 배웠다.
하지만 저들이 지키는 것도,
결국 같은 것 아닌가.
결론은 내리지 않았다.
걸음을 옮겼다. 혼자.
멀리서 제갈린이 부스를 흘깃 봤다.
은명과 눈이 마주쳤다.
시선을 돌렸다. 먼저.
은명은 그 시선을 기억해두었다.
제갈린. 제갈세가.
뭘 보고 있는 건지는 아직 모르겠다.
이자벨라가 VIP 라운지에서 테무진에게 말했다.
"2학기 선도부 특별 감찰 대상 목록을 갱신해."
한 박자.
"활빈당 전원.
사유는 비공인 조직의 급속 확장 및
교내 영향력 변동."
테무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확실히 합니다."
테무진이 돌아서며 태블릿을 열었다.
화면에 감찰 로그가 떴다.
'[선도부 감찰 시스템]
대상: 활빈당 7인.
감찰 개시: 금일부터.
우선 추적 대상: 홍은명.'
라운지의 불이 꺼졌다.
학예제 1일차가 끝났다.
축제의 불빛 아래에서
그림자가 하나 더 길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