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돌아온 깃발
학예제 2일차. 활빈당 부스.
1일차보다 더 많은 학생이 찾아왔다.
입소문이었다.
"야, 구석에 1학년들이 하는 거 있는데
재밌다더라."
"뭔데?"
"바닥이 움직이는 퍼즐이랑
안 깨지는 벽 같은 거.
직접 해볼 수 있대."
구석진 위치. 하지만 구석이기에
'숨겨진 맛집' 같은 흡인력이 생겼다.
찾아가야 하는 곳이라는 게 오히려 이야기가 됐다.
아침부터 카이의 퍼즐 앞에 줄이 섰다.
어제 넘어졌던 학생이 친구를 데려왔다.
"어제 나 여기서 넘어졌거든.
너도 넘어져봐."
"뭐야, 자기가 넘어진 걸 자랑하는 거야?"
카이가 씩 웃으며 바닥에 손을 댔다.
"Kia ora! 오늘도 바닥은 살아 있어!"
올가가 수호벽을 펼치고 있었다.
2학년 학생이 다가왔다. 진지한 표정.
"한번 쳐봐도 돼?"
올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2학년이 권을 날렸다. 꽤 강했다.
바람이 일었다.
벽이 안 깨졌다.
힘을 올려 한 번 더. 기합과 함께. 전력이었다.
안 깨졌다.
"……1학년이 이 정도야? 대단하네."
올가가 말했다. 무표정.
"대단한 게 아니야.
지키겠다고 결정했을 뿐이야."
2학년이 고개를 끄덕이며 떠났다.
돌아가면서 뒤를 한 번 더 봤다.
태산이 옆에서 들었다.
……이 여자는 말을 참 무겁게 해.
하지만 빈말이 아니라서 무거운 거지.
리오의 표적 코너도 붐볐다.
어제 기록이 벽에 붙어 있었다.
'최고 기록: 3개 (리오 본인 제외)'
A반 학생 하나가 도전해서 2개를 맞혔다.
"오, 2개!"
리오가 박수를 쳤다.
"대단한데? 3개 맞히면 상품 있어."
"상품이 뭔데?"
"……아직 안 정했어."
카이가 끼어들었다.
"상품은 나랑 악수야."
"그건 벌칙이지."
오후. 은명이 부스를 정리하며 아르준에게 물었다.
"최종 방문자 수는?"
아르준이 태블릿을 확인했다.
"이틀 합산 200명 넘었어.
비공식 부스로는 이례적이야."
리오가 의자에 기대며 말했다.
"200이면 거의 학교 절반에서 소문 들은 거 아냐?"
위노나가 태블릿으로 현장 사진을 정리하며 말했다.
"소문이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적어도 '위험한 놈들'이 아니라
'재밌는 놈들'로 보이고 있어."
은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의도였으니까.
학예제 폐막식.
공식 수상에 활빈당은 당연히 없었다.
비공식이니까.
하지만 복도에서 마주치는 시선이 달라졌다.
고개를 끄덕이는 학생. 1학기보다 많아졌다.
카이가 지나가며 손을 흔들면 웃으며 흔들어주는 학생도 있었다.
태산이 걸으면서 중얼거렸다.
"……아는 놈이 늘었네."
카이가 옆에서 웃었다.
"인기 있는 거야, 형."
"인기 같은 거 필요 없어."
"그래도 나쁘지 않잖아."
태산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팔짱을 끼는 얼굴이 찌푸리지는 않았다.
학예제 종료 후. 저녁. 복도.
은명이 혼자 걷고 있었다.
정리가 끝나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
복도의 조명이 절전 모드로 어두워져 있었다.
학예제가 끝나고 대부분의 학생이 기숙사로 돌아간 시간이었다.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일정한 간격. 의도적으로 맞춘 것 같은 보폭.
"홍은명."
돌아봤다.
2학년 학생이 서 있었다.
인티 유팡키. 갈색 피부.
검은 머리카락을 뒤로 묶은.
잉카 후예.
시선이 주위를 살폈다.
복도 양쪽 끝을 확인했다.
절전 시간대를 골라 온 것이다.
CCTV 구간에서 살짝 비껴선 위치.
은명은 그걸 알아차렸다.
"잠깐 이야기 좀 할까?"
은명이 경계했다.
"인티 유팡키 선배?
무슨 일이에요?"
인티가 웃었다. 편한 웃음.
"선배라고 하지 마.
그냥 인티야."
한 박자.
"너네 부스 봤어."
감시? 체제파 쪽 사람인가?
"감시하러 오신 건가요?"
인티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감시면 왜 혼자 오겠어."
웃음이 사라졌다. 진지해졌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하나야."
한 박자.
"너네가 하는 것, 틀리지 않았어."
은명이 입을 다물었다.
인티가 계속했다.
"우리 가문도 옛날에 그랬어.
식민지 치하에서,
규칙 밖에서 사람을 지켰지."
한 박자.
"그게 잉카의 후예가 사는 법이야."
은명이 물었다.
"그러면 선배도……?"
인티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아직 움직이지 않아.
2학년에는 복잡한 사정이 있어."
한 박자.
"하지만."
복도 끝을 봤다.
"누군가는 봐주고 있다는 걸 알아줘."
은명이 가만히 봤다.
인티가 돌아서며 말했다.
"조심해."
멈췄다.
"이자벨라는 교칙을 쓰지만
빅토르는 교칙 밖에서 움직여."
한 박자.
"아직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인티가 떠났다.
왔을 때처럼 발소리가 일정했다.
복도 끝에서 자연스럽게 방향을 바꿨다.
감찰 카메라 범위를 아는 것 같았다.
복도에 은명만 남았다.
빅토르.
산토스 선배도 경고했던 이름.
3학년. 전직 학생회장.
교칙 밖에서 움직인다는 사람.
……아직 만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이름이 두 번째로 나왔다는 건
만날 날이 멀지 않다는 뜻이다.
같은 날 밤. 기숙사 옥상.
은명이 올라갔다.
태산이 먼저 와 있었다.
난간에 기대서 바람을 맞고 있었다.
교복 재킷을 벗어서 난간에 걸어놓고 있었다.
"또 여기야?"
태산이 돌아봤다.
"바람 쐬러. 너도?"
은명이 옆에 앉았다.
태블릿을 꺼내려다 다시 넣었다.
오늘은 숫자를 보고 싶지 않았다.
"학예제 끝났어."
"끝났네."
바람 소리. 침묵.
9월의 바람은 여름과 달랐다. 날이 있었다.
교복 소매가 펄럭였다.
태산이 말했다.
"7명이 됐네."
"……응."
"달라진 거 있어?"
은명이 생각했다.
"신경 쓸 게 더 많아졌지."
태산이 코웃음 쳤다.
"넌 맨날 신경이야.
그냥 같이 싸우면 되잖아."
"휴우..
……너는 그게 되니까 좋겠다."
"안 좋은 건 네가 걱정하고,
좋은 건 내가 때리면 되지."
은명이 태산을 봤다.
"……그게 전략이라고 생각해?"
태산이 웃었다.
"전략이든 뭐든
지금까지 됐잖아."
은명이 반박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맞는 말이니까.
인정하기 싫은데 맞는 말이니까.
바람이 불었다.
은명이 말했다.
"학예제 때 생각보다 많이 왔더라.
부스에."
"응."
"1학기엔 우리 이름 아는 놈도 없었는데."
태산이 웃었다.
"지금도 대부분 모르지 않나?"
"그래도 달라졌어."
태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달라졌지.
올 데가 여기밖에 없는 건 똑같지만."
옥상에서 내려다보는 율도고.
결계가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중으로.
2학기가 시작된 학교가 어둠 속에 조용했다.
깃발은 돌아왔다. 이번에는 일곱이다.
바람이 불었다.
옥상 위.
두 사람의 그림자가 나란히 길게 뻗어 있었다.
어둠. 어딘지 모를 곳.
디지털 화면이 빛났다.
모니터 여러 대가 반원형으로 늘어서 있었다.
키보드를 치는 사람은 없었다.
화면에 율도고 학생 데이터가 흘렀다.
학예제 CCTV 캡처.
활빈당 7인의 얼굴이 하나씩 표시됐다.
홍은명. 전태산. 위노나. 리오.
카이나보아. 아르준 싱. 올가 볼코바.
음성.
"일곱이 되었군요."
차분한 목소리.
"아름다운 숫자예요."
화면이 전환됐다.
새로운 데이터.
'교내 잠입 경로 분석: 완료.
결계 이중화 대응 방안: 수립 중.
대리 접촉 루트: 확보.'
"결계가 강해졌어요.
운소하 선생님이 열심히 하셨나 봐요."
한 박자.
음성에 미소가 묻었다.
"하지만 결계는 밖에서 오는 것만 막죠."
한 박자.
"안에서 시작하면 어떻게 될까요?"
화면이 꺼졌다.
어둠.
마지막 텍스트가 떠올랐다.
'프로젝트 시험(試驗) 2차: 가을.
방식: 교내 대리인 직접 투입.
이번에는 직접.'
텍스트가 사라졌다.
어둠만 남았다.
율도고의 결계 로그에 미세한 이상이 찍혔다.
0.02초 동안 외곽 결계의 반응 속도가 떨어졌다가 복구됐다.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활빈당의 깃발이 돌아온 율도고에
또 다른 그림자가 스며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