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수에서 전사로
랭킹전 2일차. 본선 8강.
메인 아레나의 관람석이 꽉 찼다.
학년 구분 없이 몰려든 학생들 사이로
웅성거림이 끊이지 않는다.
1학년 본선 8강이면 상위권 진입이고,
순위가 곧 장학금과 특수 훈련 기회에 직결되니까.
경기장 주변으로 2학년, 3학년 선배들까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본선쯤 되면 구경할 만한 실력이
올라오기 시작하는 라운드라서.
전태산 vs 쁘아카오.
대기석에서 양쪽이 동시에 일어났다.
심판이 양측의 이름을 호명하자
관람석 여기저기서 속삭임이 퍼졌다.
"체육대회 깃발전에서 붙었던 둘이야."
"전태산이 테무진 선배 앞에서
버텼다는 그 1학년?"
"쁘아카오도 무에타이로
2학년 두 명을 탈락시키고 올라왔어."
양쪽이 경기장에 올라섰다.
쁘아카오가 목을 좌우로 꺾으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무에타이 특유의 여유.
와이크루 자세를 짧게 취하며
양 팔뚝의 나노 강화 근섬유가
경기장 조명 아래서 미세하게 빛났다.
"또 만났네, 전태산."
태산이 주먹을 올렸다.
가드 자세가 예전과 달랐다.
왼팔이 하단까지 내려와 있었고,
몸의 무게중심이 반 보 뒤로 물러나 있었다.
하산이 지적한 빈틈을 의식적으로 막는 자세.
이건 방어가 아니라
상대를 유인하기 위한 자세였다.
"기다리고 있었어."
심판의 깃발이 내려왔다.
쁘아카오가 먼저 움직인다.
왼무릎이 올라왔다. 빠르다.
체육대회 때의 그 무릎.
나노 강화로 단련된 정강이뼈가
공기를 가르며 반원을 그렸다.
태산이 오른팔로 막아냈고,
금강불괴의 뼈가 둔탁하게 울렸다.
팔이 저렸지만,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았다.
같은 수순.
체육대회 깃발 쟁탈전에서의 교전과
똑같은 도입부였다.
그때도 쁘아카오는 왼무릎으로
시작했고, 태산은 정면에서 받아쳤다.
하지만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
태산은 기다리고 있었다.
두 번째 공격.
쁘아카오의 팔꿈치가 오른쪽에서 왔다.
무에타이의 기본 콤비네이션.
무릎 → 팔꿈치 → 반대쪽 무릎.
체육대회 때 같은 순서로 들어왔다.
읽었다.
오른쪽 팔꿈치 다음은 왼무릎.
그게 쁘아카오의 패턴이다.
세 번의 스파링에서 세 번 다 같았다.
태산이 한 발 왼쪽으로 빠졌다.
0.5초 일찍.
쁘아카오의 왼무릎이 빈 공간을 찼다.
바람만 일었다.
카운터.
태산의 오른주먹이
쁘아카오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금강불괴의 주먹이 나노 강화 복근을 뚫고
갈비뼈 위를 정확히 때렸다.
둥.
쁘아카오가 밀려났다. 처음으로.
반 보가 아니라 한 보.
발뒤꿈치가 경기장 바닥을 긁었다.
관람석이 들끓었다.
"전태산이 쁘아카오를 밀었어?"
"체육대회 때는 버티기만 했잖아.
지금은 읽고 치고 있어!"
"저거 카운터야. 타이밍 보고 넣었어."
운소하가 관람석에서 태블릿을 내렸다.
눈이 가늘어진다.
……읽기다.
공격 패턴을 읽고, 타이밍을 잡고,
빈틈에 꽂는다.
4개월 전의 전태산은
상대가 뭘 치든 정면에서 받아치고
힘으로 밀어붙이는 야수였어.
지금은 달라.
상대의 다음 수를 읽고
반 박자 먼저 움직이고 있다.
누가 가르친 건 아닐 텐데.
몸이 스스로 깨달은 건가.
쁘아카오가 옆구리를 만졌다.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눈동자가 좁아졌다.
"……읽었어?"
정적이 흘렀다.
쁘아카오의 눈빛이 달라졌다.
호전적인 빛이 아니라,
전사가 진검을 뽑기 직전의 빛.
장난기가 사라지고
순수한 투지만 남았다.
"좋아."
한 박자의 침묵.
"진짜를 보여줄게."
쁘아카오의 자세가 바뀌었다.
무에타이가 아니었다.
높았던 가드가 낮아지고,
양손이 원을 그리듯 천천히 돌았다.
발놀림에 춤사위 같은 리듬이 실렸다.
한 발, 한 발이
일정한 박자를 타듯 바닥을 찍었다.
무에 보란.
고대 태국 왕실 무술.
나이 카놈 톰이
미얀마 아유타야 해전에서
적국 전사 열 명을 연속으로 쓰러뜨릴 때
사용했다는 원류 무술이다.
쁘아카오의 조상이자,
무에타이의 시조가 쓴 진짜 무술.
리듬이 완전히 달라졌다.
부드러운 원 운동에서
날카로운 직선이 불규칙하게 튀어나왔다.
원인지, 직선인지 구분이 안 됐다.
부드럽게 흐르다가 갑자기 꺾이고,
느리게 돌다가 갑자기 찔렀다.
패턴이 없었다. 읽을 수가 없었다.
태산이
첫 번째 직선 공격을 맞았다. 어깨.
팔꿈치인지 주먹인지 분간도 못 했다.
원 운동 안에 숨어 있던 일격이
어깨 관절에 정확히 박혔다.
두 번째도 맞았다. 옆구리.
아까 태산이 쁘아카오에게 넣었던
같은 자리. 되갚는 듯한 일격이다.
하산 선배 말이 맞았어.
상대도 성장한다.
내가 변하면, 상대도 변해.
무에타이를 읽었다고 끝이 아니었어.
쁘아카오는 무에타이 위에
더 깊은 무술을 숨기고 있었다.
밀리기 시작했다.
쁘아카오의 원에서
직선이 튀어나오는 타이밍을
잡을 수가 없었다.
세 번째 유효타. 왼쪽 팔뚝.
네 번째. 허벅지.
다섯 번째. 다시 옆구리.
유효타가 쌓여갔다.
관람석에서 은명이
주먹을 쥐었다.
태블릿을 보고 있었지만
화면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태산……"
태산이 뒤로 밀렸다.
숨이 거칠다.
입술 끝에서 피 맛이 났다.
옆구리가 욱신거렸고,
어깨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읽어.
무에 보란의 리듬.
원에서 직선이 나온다.
그럼 직선이 나오는 타이밍은
어디인가.
쁘아카오의 손이 원을 그렸다.
부드럽게, 부드럽게, 부드럽게.
리듬을 타듯, 춤을 추듯.
올라가고, 내려가고, 다시 올라간다.
원이 커졌다가 작아지고,
작아졌다가 다시 커진다.
거기다.
원의 끝.
호의 궤적이 최하점을 지나는 순간,
반동으로 직선이 올라온다.
원이 가장 작아지는 순간에
직선이 태어난다.
이 순간이다.
태산이 왼팔로 하단을 막았다.
하산이 지적했던 빈틈.
무의식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밤마다 반복했던 수비 동작 그대로
막아냈다.
동시에 오른주먹이 나갔다.
직선이 올라오기 전에.
원이 끝나고 직선이 태어나는
그 찰나의 틈을 노렸다.
쁘아카오가 멈칫했다.
처음으로 타이밍이 겹쳤다.
태산의 주먹이
쁘아카오의 가슴 한가운데를 쳤다.
둥.
금강불괴의 주먹이
나노 강화 흉골을 직격했다.
쁘아카오의 몸이 뒤로 흔들리며
한 발짝 물러났다.
관람석에서 탄성이 터졌다.
"들어갔다!"
"무에 보란의 리듬을 읽은 거야?
저게 가능해?"
쁘아카오가 이를 악물었다.
후퇴의 관성을 이용해
팔꿈치를 회전시켰다.
무에 보란의 결정타.
숨겨뒀던 마지막 카드가
태산의 턱 아래를 향해 날아왔다.
읽었다.
같은 수는 두 번 안 통한다.
태산이 머리를 낮췄다.
쁘아카오의 팔꿈치가
머리카락을 스치며 빗나갔다.
바람이 귀 위를 찢었다.
아슬아슬하게. 종이 한 장 차이로.
그리고 태산의 왼주먹이 올라갔다.
아래에서 위로.
낮춘 자세에서 솟구치는 승천타.
금강불괴의 주먹이
쁘아카오의 턱 아래를 밀어올렸다.
둥.
쁘아카오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눈동자가 흔들렸다.
무릎이 풀렸다.
한 박자.
쁘아카오가 무릎을 꿇었다.
경기장이 정지한 것 같았다.
관람석에서 숨소리마저 멈춘 듯한 정적.
그리고 폭발했다.
"이겼어?! 전태산이 쁘아카오를 이겼어?!"
"무에 보란까지 읽고 카운터를 넣은 거야?!"
"미쳤다, 저게 1학년이야?!"
심판이 깃발을 올렸다.
"경기 종료. 유효타 집계.
상체 유효타 쁘아카오 7, 전태산 5.
다운 판정 1회 포함, 가중 적용.
총합 판정, 전태산 승리."
태산이 이겼다.
숨을 몰아쉬었다.
온몸이 욱신거렸다.
옆구리에서 열기가 올라오고,
어깨가 무거웠다.
하지만 주먹을 쥐었다.
이겼다. 진짜로.
쁘아카오가 천천히 일어섰다.
턱을 만졌다.
태산의 주먹이 닿았던 자리.
통증이 아니라 감각을 확인하는 동작이었다.
그리고 주먹을 내밀었다.
"인정해, 전태산."
한 박자.
쁘아카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장난기 섞인 미소가 아니었다.
순수한 인정.
"다음엔 각오해.
나도 더 진화하니까."
태산이 주먹을 맞부딪쳤다.
터진 입술에서 피가 약간 배었지만
씩 웃었다.
"기다리고 있을게."
우정이 아니었다.
전사의 예의였다.
서로의 주먹이 강해졌다는 것을
몸으로 확인한 자들만이 나누는 인사.
관람석에서 운소하가
태블릿을 접으며 중얼거렸다.
"전태산. 8강 통과. 4강 진출."
시선이 경기장을 떠나지 않는다.
태산이 경기장을 나가는 뒷모습.
4개월 전의 뒷모습과는 확연히 달랐다.
"야수가 전사가 됐어."
태산의 경기가 끝나고 한 시간 뒤.
오후 대련이 이어졌다.
B아레나.
올가 볼코바. 본선 8강.
상대는 A반 2학년. 공격형.
시작 휘슬이 울리자마자 돌진해왔다.
오기 차열을 모아
주먹에 열기를 실은 강타.
쉬운 상대가 아니다.
올가가 수호벽을 전개했다.
허공에 반투명한 수호의 장벽이 섰다.
체육대회 때와 같은 벽.
하지만 달라진 게 있었다.
올가가 한 발 앞으로 나갔다.
벽도 함께 움직였다. 앞으로.
그리고 밀었다.
수호 공격.
벽이 상대를 향해 전진했다.
벽으로 밀어내고.
상대가 옆으로 피하려 했지만
벽의 측면이 접혀 들어오며 가두고.
빠져나올 틈을 주지 않고
벽으로 끝냈다.
상대가 경기장 끝까지 밀려나
바닥에 주저앉았다.
일어서려 했지만
올가의 벽이 한 번 더 전진해
다시 넘어뜨렸다.
관람석이 웅성거렸다.
"수호 계열이 공격적으로 싸운다고?"
"저건 방어가 아니야.
성벽이 밀어오는 거라고."
"1학년이 2학년 공격형을
수호벽 하나로 제압했어?"
심판이 깃발을 내렸다.
장외 판정. 올가의 승.
올가 승리. 본선 4강 진출.
올가가 경기장을 나오며 말했다.
무표정.
"지키는 거야."
한 박자.
"내 랭킹을."
관람석에서 피에르 드 마르시야크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4강.
수호 계열 1학년이
전학년 본선 4강이라.
이건 율도고 역사에
기록될 일이야.
수호는 항상
'지키기만 하는 계열'이라는 편견이
있었으니까.
올가가 그 편견을 밀어냈다.
말 그대로, 벽으로.
4강전.
첫 번째 경기.
전태산 vs 올가 볼코바.
태산이 경기장에 올랐다.
8강전의 상처가 아직 남아 있었다.
옆구리에 테이핑이 감겨 있고,
오른어깨를 한 번 돌리며 감각을 확인했다.
완전한 컨디션은 아니었지만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올가가 수호벽을 전개했다.
8강전에서 보여준 공격형 수호.
이번에도 벽이 앞으로 밀고 들어왔다.
태산이 정면에서 받았다.
둥.
금강불괴의 주먹이 수호벽을 쳤다.
벽이 흔들렸다.
올가의 눈이 미세하게 떨렸다.
8강전 상대와는 타격의 무게가 달랐다.
2타.
벽에 균열이 갔다.
올가가 벽을 한 겹 더 쌓았다.
보강. 출력이 올라갔다.
이마에 땀이 맺혔다.
태산이 한 발 물러섰다.
그리고 다시 전진했다.
이번에는 주먹이 아니라 어깨였다.
몸 전체의 무게를 실은 돌진.
금강불괴의 뼈와 근육이
하나의 충각이 되어 벽에 꽂혔다.
3타.
깨졌다.
수호벽이 산산이 부서지며
파편이 허공에서 흩날렸다.
올가가 뒤로 밀려나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관람석에서 탄성이 터졌다.
"수호벽을 3타에 깼다!"
"쁘아카오한테도 이기더니
올가의 벽까지 뚫어?"
"저건 힘이 아니야.
타이밍이야. 벽이 보강되기 전에 넣었어."
올가가 고개를 들었다.
태산을 봤다.
무표정이었지만,
눈 안에 무언가가 달라져 있었다.
"……인정해."
한 박자.
"다음엔 안 깨져."
태산이 손을 내밀었다.
올가가 그 손을 잡고 일어섰다.
"다음엔 더 단단한 벽 부숴줄게."
올가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올가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웃음이라는 걸 알았을 것이다.
두 번째 4강전.
테무진 vs B반 상위권.
테무진이 경기장에 올랐다.
선도부장의 완장이 팔에 감겨 있었다.
표정은 담담하다.
경기장에 오르는 것이
일상인 사람의 표정.
시작과 동시에 끝났다.
테무진이 장을 내밀었다.
한 타.
상대의 가드가 무너졌다.
두 번째 장.
상대가 경기장 끝까지 밀려나
무릎을 꿇었다.
압도적이었다.
정확히 두 수.
관람석에서 웅성거림이 퍼졌다.
"2타 만에?"
"아까 올가의 벽도 3타에 깼는데,
테무진은 사람을 2타 만에 끝냈어."
"차원이 다르다, 역시."
저녁. 메인 아레나.
결승전.
전태산 vs 테무진.
관람석이 가득 찼다.
아니, 넘쳤다.
서 있는 학생들까지 복도를 채웠다.
1학년끼리의 결승전이지만,
2학년, 3학년까지 모여들었다.
"전태산? 쁘아카오를 이기고
올가 벽까지 깬 놈이잖아."
"테무진은 4강을 2타로 끝냈어.
상대가 될까?"
"체육대회에서
테무진 앞에 버텼던 유일한 놈이야.
이번엔 어떨까."
태산이 경기장에 올랐다.
테이핑이 감긴 옆구리.
부은 주먹.
오늘만 두 경기를 치른 몸이었다.
하지만 주먹을 올렸다.
눈빛이 흔들리지 않았다.
테무진이 반대편에 섰다.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세가 미세하게 달랐다.
4강전에서의 무심함이 사라지고,
가드가 정확히 올라와 있었다.
상대를 인식했다는 뜻이었다.
심판의 깃발이 내려왔다.
태산이 먼저 움직였다.
쁘아카오전에서 읽기를 배웠고,
올가전에서 돌파를 배웠다.
남은 건 모든 것을 쏟는 일뿐.
오른주먹이 나갔다.
금강불괴의 일격.
테무진의 장이 그것을 받았다.
둥.
소리가 울렸다.
하지만 테무진은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았다.
발끝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충격이 주먹을 타고 태산의 팔 전체로 돌아왔다.
뼈가 울렸다.
돌벽을 친 것 같았다.
한 발 더 나갔다.
왼주먹.
쁘아카오의 턱을 올렸던 바로 그 승천타.
테무진의 팔뚝이 그것을 막았다.
가볍게. 마치 예상했다는 듯이.
"읽기가 늘었다."
테무진의 목소리가 낮게 내려왔다.
"하지만 아직 부족해."
장이 나왔다.
한 타.
태산의 가드를 뚫고
가슴 한가운데를 정확히 쳤다.
태산이 두 걸음 밀렸다.
폐에서 공기가 빠져나갔다.
두 번째 장.
태산이 오른팔로 막았다.
금강불괴가 충격을 버텼다.
뼈가 비명을 질렀지만 부러지지 않았다.
체육대회 때는 한 방에 밀렸는데,
이번에는 버텼다.
막았다.
테무진의 눈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것은 어떤 감정의 움직임이었다.
놀라움인지, 인정인지, 아직 알 수 없었다.
"버텼어?"
태산이 이를 악물었다.
막은 팔에서 열기가 올라왔다.
통증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버틸 수 있다.
버텼으니까, 칠 수 있다.
카운터.
태산의 오른주먹이
테무진의 옆구리를 노렸다.
쁘아카오전에서 먹혔던 읽기 카운터.
올가전에서 썼던 타이밍.
오늘 배운 모든 것을 한 방에 담았다.
테무진이 반 보 물러나며
허공에서 태산의 주먹을 잡았다.
잡혔다.
손목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철 장갑에 물린 것 같았다.
"그 주먹."
테무진의 목소리.
"체육대회 때보다 강해졌어."
한 박자.
"인정하마."
테무진의 장이 태산의 가슴을 밀었다.
밀어낸 게 아니라 날렸다.
태산의 몸이 경기장 바닥을 미끄러지며
뒤로 3미터 밀렸다.
무릎을 꿇었다.
숨이 멈췄다.
횡격막이 얼어붙은 것처럼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시야가 흔들렸다.
귀에서 삐, 하는 소리가 났다.
일어서려고 했다.
다리가 떨렸다.
한 번.
금강불괴의 뼈가 무게를 지탱했다.
두 번째.
무릎이 바닥에서 떨어졌다.
일어섰다. 간신히.
하지만
세 번째 장이 이미 코앞에 있었다.
둥.
태산이 다시 무릎을 꿇었다.
이번에는 일어서지 못했다.
심판이 깃발을 올렸다.
"경기 종료. 다운 2회.
전태산, 경기 속행 불가 판정.
테무진 승리."
관람석이 조용했다.
환호도 있었지만,
그보다 먼저 퍼진 것은
묘한 침묵이었다.
전태산이 졌다.
하지만 아무도 약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테무진이 등을 돌렸다.
경기장을 내려가려다 멈췄다.
뒤를 돌아봤다.
태산이 무릎을 딛고
일어서려 하고 있었다.
팔이 떨렸다. 다리가 떨렸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테무진이 말했다. 낮게.
"야수는 맞으면 쓰러져.
전사는 맞아도 일어서지."
한 박자.
"너는 전사야, 전태산."
그리고 등을 돌렸다.
그것이 테무진의 방식이었다.
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는다.
승리가 곧 대답이니까.
하지만 오늘은 한 마디를 남겼다.
관람석 구석을 봤다.
카를이 서 있었다.
195cm의 장신.
백금 블론드 머리 아래
강철빛 눈동자가
경기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등 뒤에 접쇠된 십자가형 무기가
경기장 조명에 차갑게 빛났다.
미동도 없었다.
표정도 없었다.
고개 하나 끄덕이지 않았다.
카를 선배.
인정해주지 않으시는 건가.
1위에 서도, 결승에서 이겨도,
아직 부족한 건가.
내가 어디까지 올라가야
당신의 그림자를 넘을 수 있는 건가.
이자벨라가 다가왔다.
"1위야, 테무진. 축하해."
테무진이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시선은
카를에게 남아 있었다.
1위의 정상에 서면서도
전임자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카를이 등을 돌렸다.
관람석을 빠져나갔다.
아무 말도 남기지 않았다.
그 침묵이 어떤 말보다 무거웠다.
경기 종료 후. 경기장 통로.
태산이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주먹을 펴고, 접고,
다시 펴고 있었다.
결승.
1학기엔 예선 탈락이었는데.
주먹의 관절이 부어 있었다.
쁘아카오의 가슴에 꽂았던 일격,
올가의 벽을 깼던 충격,
테무진의 장을 막았던 흔적.
세 경기의 무게가 전부 손에 남아 있었다.
아프지만, 통증이 나쁘지 않았다.
오늘 하루 동안 싸운 증거니까.
은명이 다가와 옆에 앉았다.
손에 얼음 팩을 들고 있었다.
말없이 태산의 손등 위에 올려놓았다.
"결승이면 잘한 거야."
"이기고 싶었어."
은명이 벽에 등을 기댔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복도 저편에서
관람석이 비워지는 발소리가
희미하게 울려왔다.
"……그래."
한 박자.
"그 마음이 있으니까,
다음엔 될 거야."
태산이 고개를 들었다.
은명을 보며 씩 웃었다.
터진 입술이 살짝 벌어지며
피가 약간 배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야, 은명아. 너도 다음엔 좀 이겨."
"……닥쳐."
은명이 태산의 어깨를
가볍게 치며 일어섰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것은
태산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관람석 구석.
하산이 통로를 지나가다 멈췄다.
태산이 벽에 기대어
얼음 팩을 손등에 올리고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아무 말 없이.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떠났다.
발소리가 복도에 짧게 울리고 사라졌다.
태산이 그걸 봤는지 못 봤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같은 시간,
선도부실 앞 게시판에는
이미 새로운 공지가 붙어 있었다.
'비공인 단체 활동에 관한 경고 — 선도부'
바람이 한 번 불어
공지의 모서리를 덜덜 떨게 했다.
공지 하단에는
카를 아이젠하르트의 서명이
찍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