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랭킹
랭킹전 종료 다음 날.
게시판에 최종 랭킹이 올라왔다.
아침부터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1학기 랭킹과 비교하며
여기저기서 탄성과 한숨이 교차한다.
순위가 한두 개 오르내리는 건 늘 있는 일이지만,
이번엔 유독 변동 폭이 큰 이름들이 눈에 띄었다.
아르준이 태블릿으로 정리해서
은명에게 보여줬다.
"활빈당 멤버 성적입니다."
태블릿 화면에 이름이 줄줄이 떴다.
전태산, 12위에서 3위.
올가 볼코바, 18위에서 5위로
수호 계열 최고 순위를 찍었다.
아르준 자신도 25위에서 14위.
"은명 씨는 15위에서 13위.
2단계 상승이에요.
태산 씨는 결승 진출 가산으로
9단계나 뛰었어요."
은명이 태블릿을 받아 들었다.
숫자를 훑는 눈빛이 잠깐 멈췄다.
2단계.
팀전에서 아무리 활약해도,
개인전 성적이 올라가지 않으면
랭킹은 정직했다.
자기 주먹으로 증명한 게 아니면
숫자는 움직이지 않는다.
"종합하면 활빈당 평균 랭킹이
15단계 상승했습니다.
이건 유의미한 변화예요."
은명이 태블릿을 내려놨다.
시선이 복도 너머 게시판을 향했다.
"숫자가 말해주잖아.
우리가 개인으로도 성장했다는 거.
팀에 기대기만 하는 집단이
아니라는 거야."
복도에서 편입생들이 지나가다
활빈당 멤버들을 알아보고 발걸음을 멈췄다.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등 뒤로 들렸다.
"활빈당에 들어가면
이렇게 되는 거야?"
카이가 들었다.
눈이 반짝이며 돌아섰다.
"우리 인기 폭발이다!
팬클럽 만들까?"
은명이 한숨을 쉬었다.
미간이 살짝 좁혀진다.
"장난치지 마, 카이."
카이는 어깨를 으쓱했지만,
은명의 시선 끝을 따라가다
입을 다물었다.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체육대회에서
'무시 못 할 존재'가 됐다면,
랭킹전에서는
'실력으로 인정받는 존재'가 된 것이다.
복도를 지나는 동안
먼저 눈인사를 건네는 학생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석 달 전에는 상상도 못 할 풍경이었다.
저녁. 기숙사 복도.
은명이 아지트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창밖에는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고,
복도 형광등이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복도 끝에 누군가 서 있었다.
195cm의 장신.
백금 블론드 머리 아래
강철빛 눈동자가 정면을 응시한다.
카를 아이젠하르트.
벽에 기대지도 않고,
양팔을 내린 채 똑바로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은명이 발걸음을 멈췄다.
……의도적으로 기다린 거야.
이 사람이.
우연히 마주친 게 아니다.
동선을 파악하고, 시간을 맞춰 온 거지.
"활빈당. 홍은명."
카를의 목소리가 낮게 내려왔다.
감정이 없었다.
진술하듯, 사실을 읽듯.
"……네.
무슨 일이시죠?"
카를이 말했다.
"규율 위반 조직."
한 박자.
"비공인 단체의 활동은
학칙 제4조 3항에 위반이다.
지도교관의 승인 없이
조직을 운영하는 것 자체가 저촉된다."
은명이 대답했다.
목소리가 단단하게 굳었다.
"활빈당은 학생 자치 조직입니다.
자치 활동은 제7조에 보장돼 있고,
신고서는 제출 중입니다."
카를의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해석의 문제가 아니다."
한 박자.
"규율은 논의의 대상이 아니야.
실행의 대상이야."
은명의 표정이 굳었다.
등 뒤로 식은땀이 내려왔다.
이 사람에게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규율이라는 단어 하나가
이 사람의 전부이자 결론이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건지
알겠습니다."
카를이 말했다.
"경고다, 홍은명."
한 박자.
"활빈당이 규율을 넘으면
내가 개입한다.
그때는 테무진이 아니야.
내가 직접이야."
은명이 입을 다물었다.
주먹이 저도 모르게 쥐어졌다.
카를이 등을 돌렸다.
"규율을 어기면 대가가 있다.
그것만 기억해라."
발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멀어졌다.
등 뒤에 접쇠된 철 십자가가
복도 조명에 차갑게 빛나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은명이 서 있었다.
숨을 내쉬었다.
자기도 모르게 멈추고 있던 호흡이
비로소 풀렸다.
……테무진 선배와는 차원이 다르다.
테무진은 힘으로 누르고,
분노로 충돌하는 타입이었다.
읽을 수 있었고, 대응할 수 있었다.
이 사람은 다르다.
협박이 아니야.
통보야.
감정도, 분노도, 과시도 없이
결론만 전달하고 떠나는 사람.
그런 사람이 가장 무섭다.
같은 밤. 학생회실.
이자벨라가 랭킹전 결과를
정리하고 있었다.
태블릿 위에 막대그래프가 떠 있었고,
활빈당 멤버들의 이름 옆에
상승 화살표가 빼곡하게 붙어 있었다.
"활빈당 멤버들의
랭킹 상승 폭이 이례적이야.
특히 올가 볼코바,
4강 진출은 예상 밖이었어."
제갈린이 안경 너머로
태블릿 화면을 훑으며 대답했다.
"개인 전투력이 올라가면
팀전도 더 위험해집니다.
다음 대회에서는
체육대회만큼 쉽지 않을 거예요."
이자벨라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손가락이 태블릿 위에서 멈췄다.
"……카를 선배가 움직였어.
홍은명에게 경고했대."
제갈린의 태블릿 조작이 멈췄다.
안경을 밀어 올렸다.
렌즈 너머 눈빛이 날카로워진다.
"카를 선배가?"
한 박자의 침묵.
"그 분이 움직이는 건
좋은 징조가 아닙니다."
"왜?"
이자벨라가 되물었다.
"카를 선배는 경고를 두 번 하지 않거든요.
한 번 선을 긋고, 넘으면 실행합니다.
과정이 없어요. 결론만 있습니다."
이자벨라의 손가락이
태블릿 가장자리를 무의식적으로 두드렸다.
"……그럼 우리가 해야 할 건?"
"활빈당이 선을 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정리하느냐,
카를 선배가 정리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제갈린이 안경을 다시 고쳐 썼다.
목소리가 낮아졌다.
"후자가 되면 피해는 활빈당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학생회도 관리 실패로 찍힙니다."
3학년 기숙사.
빅토르가 와인잔을 기울이며
창밖을 봤다.
야경이 잔 위에 작은 점으로 비쳤다.
카를이 먼저 움직였군.
미소가 입꼬리에 걸렸다.
규율의 사나이답게 직선적이야.
경고, 기한, 실행.
예측 가능하고, 단순하고, 강력하지.
하지만 직선으로는
홍은명을 못 꺾어.
그 친구는 정면 충돌에서
살아남는 법을 이미 배운 아이야.
테무진에게 맞서면서.
빅토르가 와인잔을 내려놨다.
잔이 탁자에 닿는 소리가
조용한 방에 울렸다.
"활빈당.
흥미로운 변수야."
한 박자.
입꼬리의 미소가 깊어졌다.
"한 수 두어볼까."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와인잔 속 액체가 흔들렸다.
"출발은……
내부에서부터가 좋겠지."
어둠.
디지털 화면이 빛났다.
랭킹전 전투 데이터가
그래프와 수치로 정리되고 있었다.
음성이 흘러나왔다.
부드럽지만 어딘가 공허한 목소리.
"랭킹전.
개인전은 팀전보다
순수한 데이터를 줘요.
변수가 적고, 노이즈가 없으니까."
한 박자.
"감사해요, 학생 여러분."
화면에 전태산 성장 그래프가 떠올랐다.
'금강불괴 활성도 — 추가 1.5% 향상.
전투 IQ — 유의미한 상승.
분류: 야수형 → 전사형 전환 중.'
"전사형으로 전환 중이라……
예상보다 빠르네요."
미소를 담은 음성.
"12월 시험에서는
전사형에 맞는 시험지를
준비할게요."
화면이 전환됐다.
'교내 균열 지수 — 현재: 47%.
(산정 기준: 세력 간 충돌 빈도
+ 규율 위반 신고 건수
+ 파벌 간 적대 지표 가중합)
목표: 65% (침투 최적 조건).'
"균열이 아직 부족해요."
한 박자.
"카를과 빅토르가
움직이기 시작한 건
좋은 촉매가 될 거예요."
화면이 꺼졌다.
그리고 새 화면이 떠올랐다.
짧은 메시지 하나가 깜빡였다.
'1단계 접촉 대상 선정 완료.'
기숙사 옥상. 밤.
바람이 차가웠다.
은명이 홀로 난간에 기대어 서 있었다.
교정 너머로 기숙사 불빛들이
점점이 켜져 있었다.
카를 아이젠하르트.
테무진 선배 위의 벽.
정면에서 부딪히면
깨지는 건 이쪽이다.
그리고 그 뒤에는
빅토르가 있다고 했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줄을 잡아당기는 손.
태블릿을 꺼냈다.
카를과 빅토르의 데이터를
아르준이 정리해놓은 파일이 떠올랐다.
정면의 벽. 카를.
그림자의 손. 빅토르.
보이지 않는 눈. 천기.
세 개의 위협이 다가오고 있다.
하나라도 어긋나면 활빈당은 끝이다.
그리고 활빈당이 끝나면,
여기 모인 사람들이 흩어진다.
……틀리면 안 돼.
은명이 태블릿을 껐다.
바람이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주먹을 쥐고 내려다본 교정에는
아무도 없었다.
같은 시간.
빅토르의 방.
체스판 위에 새로운 말이 놓였다.
검은 폰 하나가 백의 진영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있었다.
빅토르가 미소를 지었다.
손가락이 폰 위를 가볍게 두드렸다.
"게임 시작."
그리고 서랍을 열었다.
안에는 봉인된 편지 한 통이 있었다.
수신인은 활빈당 멤버 중 한 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