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칙의 칼
다음 날. 학생회실.
제갈린이 태블릿을 열었다.
활빈당 활동 기록.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데이터를 기반으로.
그래프 색상은 통일되어 있었고,
항목별 라벨이 정확하게 붙어 있었다.
밤새 정리한 흔적이었다.
보호 성공률 72%.
높아 보인다.
하지만 실패한 28%에서 실제 피해가 발생.
9건의 부상. 3건의 기물 파손.
공식 조직이었다면 책임을 물을 수 있다.
비공인이라 면책.
제갈린이 그래프를 넘겼다.
손가락이 화면 위를 정확하게 짚었다.
이건 의도가 나빠서가 아니다.
체계가 없어서 생기는 구조적 한계다.
홍은명, 너의 이념은 아름답지만,
이념만으로 사람을 지킬 수는 없어.
이자벨라가 옆에서 물었다.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어.
"조사 결과를 공식 발표할 거야?"
제갈린이 대답했다.
"공정하게요.
하지만 사실은 사실이에요."
이자벨라가 제갈린을 봤다.
시선이 몇 초 머물렀다.
"그래. 공개 심의로 하자."
창밖을 한 번 보고 다시 제갈린에게.
"양쪽 모두에게 발언 기회를 주고. 공정하게."
제갈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활빈당 아지트.
은명이 반론을 준비하고 있었다.
태블릿 위에 숫자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보호 성공 건수, 응답 시간, 구역별 배치도.
위노나가 3시간 만에 정리한 데이터였다.
"숫자만 보면 제갈린 말이 맞아."
은명이 말했다.
태블릿을 돌려 멤버들에게 보여주며.
아르준이 옆에서 반박했다.
안경을 올리며.
"하지만 우리가 없었다면
그 72%도 0%였습니다."
은명이 고개를 저었다.
"맞아. 하지만 그 말로는 안 통해."
제갈린은 '실패한 28%의 피해자'를 물을 거다.
그리고 그게 맞는 질문이다.
우리가 72%를 지킨 건 사실.
하지만 28%를 놓친 것도 사실.
은명이 태블릿을 닫았다.
멤버들을 둘러보며.
"변명하지 말자.
사실을 인정하고 앞으로를 말하자."
위노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순찰 체계 재설계안은
아르준과 완성했어요.
구역 3분할, 비상 연락 단축 경로,
응답 목표 시간 3분 이내."
은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반론의 핵심으로 써."
태산이 물었다.
팔짱을 낀 채. 벽에 등을 기대고.
"이길 수 있어?"
은명이 대답하지 못했다.
"……모르겠어.
이기는 게 목적이 아닐 수도 있어."
태산의 눈썹이 올라갔다.
"그럼 뭐가 목적이야?"
"제갈린에게 보여주는 거야.
우리가 무책임한 집단이 아니라는 걸.
체계가 부족했다면 만들겠다는 걸."
태산이 입을 다물었다.
3초.
"……맘에 안 들어.
그래도 네 판이니까."
기숙사 복도. 오후.
기율 조사 소문이 퍼졌다.
활빈당 소속 학생들에게 압박이 가해지기 시작했다.
체제파 학생이 복도에서 올가를 보며 말했다.
둘이서. 나란히 서서.
"무책임한 자경단.
보호한다면서 못 지켰잖아."
올가가 멈췄다.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무표정. 하지만 주먹이 떨렸다.
손등의 핏줄이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수호벽을 전개하기 직전의 근육 긴장이
무의식적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보호할 가치가 있으면
끼어준다고 했어."
"가치가 있었는데 못 지켰잖아?
그게 더 나쁜 거지."
올가의 눈이 차가워졌다.
기감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수호의 잔상이 손끝에서 반투명하게 번졌다가 사라졌다.
한 발만 더 옮기면
이 복도가 훈련장이 될 수 있었다.
발을 옮기려는 순간.
슬리퍼 끄는 소리.
"아, 뭐야 뭐야? 재밌는 거 해?"
마리아.
밝은 웃음.
슬리퍼를 끌며 나타났다.
작은 체구가 두 학생 사이에 끼어들었다.
체제파 학생이 굳었다.
3학년. 수중 전투 역대 1위.
물속에서 기감으로 해류를 만드는 사람.
"아, 아닙니다. 그냥."
마리아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냥? 내 눈엔 좀
재밌어 보였는데?"
학생이 물러났다. 빠르게.
마리아가 올가를 봤다.
웃음이 한 순간 꺼졌다.
"넌 싸우지 마.
지금은 참을 때야, anak."
올가가 마리아를 봤다.
"……선배님은 왜 저를 도와주시는 거예요?"
마리아가 웃었다. 가볍게.
"약한 애를 괴롭히는 건 싫어해서."
웃음이 사라졌다.
동그란 눈 안에서 빛이 바뀌었다.
"그리고 너희 선배들이 했던 거랑 같거든."
올가의 눈이 떨렸다.
마리아가 말했다.
"산토스 오빠가 빅토르한테 당했을 때도 이랬어.
먼저 소문을 퍼뜨리고,
다음엔 규율을 칼로 써서 목을 조르는 거."
올가의 손에서 수호의 기감이 완전히 사라졌다.
대신 다른 것이 올라왔다.
분노가 아니라 확신.
빅토르. 역시 빅토르인 거다.
이간질뿐만 아니라
제도 공격까지 연동하고 있다.
마리아가 등을 돌렸다.
슬리퍼를 끌며 걸어갔다.
"참아. 지금은. 때가 와."
올가가 마리아의 등을 봤다.
빨간 슬리퍼. 느긋한 걸음.
때. 언제?
하지만 이 사람이 '때가 온다'고 말한다면,
그건 희망이 아니라 경험에서 나온 말이다.
밤. 도서관. 구석 열람석.
은명이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다.
태블릿 두 개를 나란히 놓고,
한쪽에는 반론 자료, 한쪽에는 순찰 재설계안.
형광등 아래서 화면의 푸른 빛이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맞은편 끝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같은 테이블.
안경 너머 날카로운 눈.
제갈린.
둘 다 뒤늦게 인지했다.
은명이 먼저 봤다.
제갈린이 시선을 돌렸다.
돌리려다가, 멈췄다.
침묵.
도서관의 시계 소리가 들렸다.
초침이 세 번 움질일 때까지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제갈린이 입을 열었다.
"……내일 기율 심의. 준비는 됐어?"
은명이 대답했다.
"질문이 아니라 경고지, 제갈린."
제갈린이 고개를 기울였다.
안경 너머 눈이 움직이지 않았다.
"경고 아니야."
손가락이 태블릿 위에서 멈춰 있었다.
"진심으로 궁금해서.
네가 뭐라고 답할지."
은명이 제갈린을 봤다.
이 사람의 눈을 읽으려 했다.
적의인가. 호기심인가.
둘 다인 것 같았다.
"……너는 왜 이러는 거야, 제갈린?"
은명의 목소리가 조용했다.
도서관의 정적 안에서 또렷하게 울렸다.
"진짜 원칙 때문이야?
아니면, 내가 싫어서?"
제갈린의 표정이 굳었다.
1초. 침묵.
안경 너머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원칙이야."
손가락이 태블릿 가장자리를 한 번 쥐었다.
"너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
네 방식이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은명이 일어섰다.
태블릿을 닫으며.
"……그래. 내일 보자."
걸어갔다.
발소리가 도서관 바닥에 울렸다.
제갈린이 은명의 등을 봤다.
은명의 뒷모습이 서가 사이로 사라질 때까지.
위험하다고만 했어야 했는데.
왜 '싫어하는 게 아니라'라고 덧붙인 거지.
안경을 벗었다.
이마를 짚었다.
손가락 사이로 형광등 빛이 새어 들었다.
은명이 도서관을 나왔다.
복도를 걸으며.
원칙이라고 했다.
제갈린의 눈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원칙만으로 사람의 목소리가
저렇게 떨리지는 않는다.
은명이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대답을 들었는데도 모르겠다.
이 사람이 적인지, 아닌지.
교내 방송. 이자벨라의 목소리.
'내일 오후 4시,
활빈당 기율 심의를 공개 진행합니다.
관련 학생은 학생회실로.'
방송이 교실과 복도에 울렸다.
학생들이 고개를 돌렸다.
속삭임이 번졌다.
은명이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화면에 반론 자료의 마지막 페이지가 떠 있었다.
공개 심의.
제갈린이 공개를 선택한 건 자신감이다.
논리로 이긴다는 확신.
하지만 공개는 양날의 칼이다.
제갈린의 논리가 통하면 활빈당은 무너지지만,
활빈당의 반론이 통하면 제갈린이 무너진다.
같은 시간. 제갈린의 방.
거울 앞.
교복을 정리하고 있었다.
넥타이를 풀었다가 다시 맸다.
한 번. 두 번.
매듭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논리로 이길 수 있다.
이겨야 한다.
원칙이 원칙을 증명하는 자리.
제갈린이 거울을 봤다.
거울 속의 자신이 돌아보고 있었다.
안경 너머의 눈.
왜 이렇게 불안한 거지.
원칙대로 하는 건데.
거울에서 시선을 뗐다.
넥타이를 세 번째 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