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와 질서
오후. 학생회실.
문이 열려 있었다.
양쪽으로. 활짝.
복도까지 학생들이 서 있었다.
공개 심의 공지가 교내 방송을 탄 직후부터
대기 줄이 복도 끝까지 늘어졌다.
학생회실 안 의자는 40석.
나머지 60명은 벽에 기대거나 서서 봐야 했다.
창가에 매달리듯 선 학생도 있었다.
중앙에 두 사람.
왼쪽. 홍은명. 교복 넥타이가 단정하게 매여 있었다.
오른쪽. 제갈린. 안경이 형광등 빛을 받아 차갑게 빛났다.
두 사람 사이 거리는 3미터.
그 3미터가 전장이었다.
이자벨라가 진행석에 섰다.
금발을 귀 뒤로 넘기며.
"활빈당 기율 심의를 시작합니다."
시선이 양쪽을 번갈아 봤다.
100명의 관중 위를 한 번 훑고.
"학생회 부회장 제갈린이
조사 결과를 발표합니다."
제갈린이 태블릿을 들었다.
안경 너머 눈. 차가웠다.
하지만 태블릿을 잡은 손끝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손톱이 태블릿 가장자리를 누르고 있었다.
"활빈당. 비공인 학생 조직.
자칭 '약자 보호'."
데이터를 띄웠다.
프로젝터 화면에 그래프가 올라왔다.
막대그래프. 파란색과 빨간색.
파란색이 72. 빨간색이 28.
"보호 성공률 72%."
관중의 시선이 화면에 모였다.
뒤에서 서서 보는 학생들도 목을 빼고 화면을 봤다.
"나머지 28%에서
실제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관중이 술렁였다.
뒤쪽에서 속삭임이 번졌다.
"28%면 거의 3명 중 1명 아냐?"
"생각보다 많네."
제갈린이 계속했다.
한 발 앞으로 나오며.
"비공인 조직이 자체적으로 보호를 자처하면서,
실패의 책임은 누가 지나요?"
시선이 은명에게 향했다.
"홍은명."
목소리가 단단해졌다.
안경을 한 번 올렸다.
"네 자유는 혼돈이야.
체제 없이 누가 지킨다는 거야."
침묵.
관중이 조용해졌다.
숨소리만 들렸다.
누군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앞줄에서 났다.
은명이 입을 열었다.
"맞아."
제갈린의 눈이 미세하게 떨렸다.
예상하지 못한 답이었다.
준비한 반론의 순서가 1초 동안 흔들렸다.
관중도 멈칫했다.
인정? 처음부터?
은명이 계속했다.
"72%야. 완벽하지 않아."
은명이 제갈린을 봤다.
눈을 피하지 않았다.
3미터 너머의 눈과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학생회가 보호한 건 몇 %야?"
침묵.
제갈린의 입이 닫혔다.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은명이 계속했다.
"교칙 제7조.
'살상 아닌 한 개입 불가.'"
관중 사이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학생이 보였다.
직접 당한 적 있는 학생들이었다.
편입생들. 비명문가 출신들.
교복 소매를 무의식적으로 움켜쥐는 학생이 있었다.
"그 규칙 때문에 학생회가
눈 앞에서 괴롭힘을 봐도 못 움직였잖아."
관중이 술렁였다.
왼쪽에서 목소리가 터졌다.
편입생이었다. 1학년.
손이 떨리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또렷했다.
"맞아, 나도 당했는데 학생회는 안 왔어!"
옆에 있던 학생이 그 학생의 어깨를 잡았다.
진정시키려는 건지, 동의하는 건지.
이자벨라의 눈이 미세하게 좁아졌다.
진행석에서 손을 올려 정숙을 시켰다.
표정에 감정이 스쳤지만 금방 지워졌다.
은명이 말했다.
"그 빈자리를 채운 게 우리야."
목소리가 올라갔다.
심의장 전체에 울렸다.
"네 질서는 감옥이야.
규칙 뒤에 숨어서 못 본 척하는 게 정의냐?"
관중이 양분됐다.
왼쪽. 고개를 끄덕이는 학생.
오른쪽. 제갈린 쪽을 보는 학생.
공기가 갈라졌다.
같은 교실에서 함께 앉는 학생들이
이 순간만큼은 서로 다른 쪽에 서 있었다.
제갈린이 받았다.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갔다.
"규칙이 완벽하지 않은 건 인정해."
안경을 한 번 올렸다.
손가락이 빨랐다. 습관적인 동작.
하지만 이번에는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하지만 규칙을 무시하는 순간,
누구나 자기 정의를 내세울 수 있어."
목소리가 높아졌다.
제갈린의 눈에서 차가움이 깨지고 열기가 올라왔다.
이 사람이 감정을 보이는 건 드문 일이었다.
관중 사이에서 눈이 커진 학생이 있었다.
"그게 혼돈이야!"
은명이 받아쳤다.
한 발 앞으로 나왔다.
3미터가 2미터가 됐다.
"그 혼돈 속에서 우리가 72%를 지켰어!"
관중 뒤쪽에서 박수가 터졌다.
한 명. 두 명. 세 명.
활빈당에게 도움받은 학생들이었다.
이자벨라가 다시 정숙을 시켰다.
하지만 박수가 멈추기까지 3초가 걸렸다.
은명의 목소리가 더 올라갔다.
"네 완벽한 규칙은 0%를 지켰고!"
관중이 웅성거렸다.
파도처럼 소리가 밀려왔다가 빠졌다.
체제파 학생 몇 명의 얼굴이 굳어졌다.
제갈린의 차분함이 깨졌다.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태블릿을 쥔 손이 떨렸다.
"그래서 실패한 28%는?!"
제갈린이 한 발 더 앞으로 나왔다.
2미터가 1미터가 됐다.
"그 아이들은 누가 책임져?!"
눈이 붉어졌다.
목소리에 균열이 갔다.
원칙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비집고 나왔다.
"네가?!"
침묵.
은명이 멈췄다.
1초. 2초.
관중이 숨을 죽었다.
100명의 숨소리가 사라진 학생회실.
프로젝터의 팬 소리만 낮게 돌아갔다.
은명이 입을 열었다.
낮게. 심의장이 아니라 제갈린 한 사람에게 말하듯.
"……네 말이 맞아."
관중 사이에서 숨 들이쉬는 소리가 났다.
"28%는 내 책임이야.
활빈당의 리더로서."
관중이 조용해졌다.
제갈린의 표정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예상하지 못했다. 인정할 줄은.
준비한 다음 논점이 의미를 잃었다.
상대가 먼저 인정하면 공격의 칼이 무뎌진다.
은명이 제갈린을 똑바로 봤다.
1미터. 손을 뻗으면 닿는 거리.
"하지만."
은명의 목소리가 단단해졌다.
낮지만 학생회실 구석구석까지 닿는 목소리였다.
"실패했다고 그만둘 거면,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았어."
관중 사이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학생이 늘었다.
앞줄의 편입생이 눈을 문질렀다.
"완벽하지 않아도
손을 내밀어야 하는 순간이 있어."
은명이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
관중의 시선이 전부 이쪽에 있었다.
"그게 활빈당이야."
침묵.
관중 사이로 숨소리만 들렸다.
제갈린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안경 너머에서, 원칙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움직였다.
심의가 끝났다.
학생들이 빠져나갔다.
웅성거림이 복도를 따라 번졌다.
무리 지어 걸으며 이야기하는 학생들.
"은명 말도 맞지 않아?"
"근데 제갈린 말도 틀리지 않았어."
"어느 쪽이 맞는 거야?"
"둘 다 맞는 거 아니야?"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대답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은명이 학생회실을 나왔다.
혼자.
복도의 웅성거리는 학생들 사이를 지나갔다.
몇 명이 은명을 봤지만 말을 걸지 않았다.
표정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으니까.
뒷산으로 걸었다.
다리가 무거웠다.
계단을 오를 때마다 허벅지가 욱신거렸다.
긴장이 풀리면서 몸이 알려주고 있었다.
뒷산 벤치에 앉았다.
석양이 비추고 있었다.
11월의 하늘. 단풍이 붉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잎이 한 장씩 떨어졌다.
벤치 위에 낙엽이 하나 놓여 있었다.
은명이 그걸 집어 들지 않았다.
28%.
제갈린 말이 맞았다.
활빈당은 완벽하지 않다.
내가 완벽하지 않으니까.
은명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홍길동. 활빈당.
약한 자를 살리는 사람.
500년 전의 홍길동도 완벽하지 않았을 것이다.
왕을 바꾸지 못했다.
세상을 뒤집지도 못했다.
섬에 들어가 나라를 만들었지만,
그 나라도 오래가지 못했다.
하지만 약한 사람 앞에서 돌아서지 않았다.
그게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이유다.
은명이 손을 내려다봤다.
태블릿을 쥐었던 손.
심의장에서 떨리지 않았던 손.
지금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긴장이 풀린 뒤에야 몸이 솔직해지는 것이다.
홍길동의 이름은 결과가 아니라 태도다.
완벽하지 않아도 돌아서지 않는 것.
그게 이 이름의 무게다.
바람이 불었다.
석양이 은명의 얼굴을 비췄다.
그림자가 벤치 위로 길게 늘어졌다.
은명이 일어섰다.
28%를 줄이자. 체계도 만들자.
하지만 손을 내미는 건 멈추지 않을 거다.
발소리.
거친 발소리. 한 걸음이 크고 빠른.
은명이 돌아봤다.
태산.
음료 두 개를 들고 올라오고 있었다.
숨이 약간 찬 게 뛰어 올라온 것 같았다.
교복 넥타이가 풀려 어깨에 걸쳐져 있었다.
"여기 있을 줄 알았어."
은명이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태산이 씩 웃었다.
이가 드러나는 웃음.
"너 힘들면 항상 높은 데 올라가잖아."
옆에 앉았다.
벤치가 삐걱 소리를 냈다.
음료를 건넸다. 말없이.
은명이 받아 한 모금 마셨다.
차가웠다. 사이다였다.
목이 말라 있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태산이 말했다.
"심의 봤어."
은명의 옆모습을 보며.
"제갈린 말도 맞고. 네 말도 맞더라."
은명이 물었다.
"그래서 어쩌라고?"
태산이 대답했다. 단순하게.
"둘 다 맞으면
둘 다 하면 되잖아."
은명이 태산을 봤다.
"뭐?"
"체계도 만들고. 손도 내밀고.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어."
은명이 짧게 웃었다.
이번에는 진짜 웃음이었다.
"너 진짜 단순하다, 알지?"
태산이 웃었다.
"단순한 게 최고야."
침묵.
석양. 바람.
두 사람의 그림자가 벤치 위로 길게 늘어졌다.
낙엽이 바람에 날려 발 앞에 모였다.
은명이 말했다.
"고마워. 같이 다니는 놈."
태산이 웃었다.
"또 그 말이야."
밤. 제갈린의 방.
심의 녹취를 다시 듣고 있었다.
이어폰을 끼고. 불을 끄고.
태블릿 화면의 푸른 빛만 얼굴을 비췄다.
은명의 목소리만 방 안에 울렸다.
'28%는 내 책임이야.
하지만 실패했다고 그만둘 거면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았어.'
제갈린이 녹음을 멈췄다.
이어폰을 빼지 않았다.
정적이 이어폰 안에서 울렸다.
왜 그 말이 마음에 남는 거지.
원칙으로 이겼는데.
데이터로 증명했는데.
왜 이긴 것 같지가 않다.
제갈린이 책상 위를 봤다.
제갈공명 병법서.
책갈피가 끼워진 페이지.
'선승후전(先勝後戰)'.
이기고 나서 싸워라.
이겼다. 논리로. 데이터로.
그런데.
제갈린이 심의장에서의 1미터를 떠올렸다.
은명이 한 발 다가왔을 때.
그 거리에서 본 은명의 눈.
원망도, 분노도, 변명도 없었다.
그냥 인정했다.
인정하고도 물러서지 않았다.
안경을 벗었다.
눈을 감았다.
은명의 목소리가 다시 떠올랐다.
'완벽하지 않아도
손을 내밀어야 하는 순간이 있어.'
나는.
손을 내민 적이 있었나.
제갈린이 눈을 떴다.
천장을 봤다.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