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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씨 일러스트

불씨

11월 첫째 주. 월요일 아침.

활빈당 아지트.

멤버들이 모여 있었다.

하지만 이전의 활기가 없었다.

창밖으로 11월의 찬 바람이 불고 있었고,

아지트 안에도 보이지 않는 냉기가 돌았다.

리오가 분위기를 띄우려고 했다.

머리카락을 한 가닥 감으며

일부러 밝은 목소리를 냈다.

"다들 왜 이래? 아침부터 장례식이야?"

반응이 미온적이었다.

카이가 자판기 커피를 홀짝였다.

종이컵 위로 김이 올라왔다.

평소 같으면 커피 맛이 형편없다고

투덜거릴 시간인데, 그냥 마시고 있었다.

"……몰라. 그냥 좀 그래."

올가가 벽에 기대 앉아 있었다.

아르준과 떨어져서.

평소엔 나란히 앉았다. 지금은 아니었다.

둘 사이에 빈 의자 하나가 경계선처럼 놓여 있었다.

올가의 시선은 창밖을 향하고 있었지만,

무언가를 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르준은 태블릿에 뭔가를 정리하고 있었다.

타이핑 소리가 간헐적으로 끊겼다.

같은 문장을 쓰고 지우고를 반복하는 리듬이었다.

분석이 안 되는 게 아니라,

집중이 안 되는 거였다.

위노나가 은명에게 조용히 다가왔다.

태블릿을 품에 안은 채.

발소리가 거의 없었다.

"은명 씨."

목소리가 낮았다.

"해킹 패턴 분석 결과를 정리했어요."

위노나의 시선이 아지트 안을 한 번 훑었다.

카이의 등, 올가의 옆모습, 아르준의 손.

다른 멤버들이 듣고 있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하지만 아직은 발표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은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위노나의 태블릿 화면이 잠깐 보였다.

코드가 빼곡히 나열되어 있었다.

밤새 분석한 결과물이었다.

은명이 아지트 안을 둘러봤다.

표면은 회복. 하지만 안에 금이 갔다.

빅토르의 첫 번째 수가 만든 금.

소문은 잦아들었지만, 눈빛은 달라졌다.

예전엔 없던 거리.

예전엔 없던 침묵.

말 사이의 공백이

1초에서 3초로 늘어난 것만으로도

공기가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

태산이 옆에 앉았다.

의자를 끌어오며 쿵 소리가 났다.

아지트의 침묵 속에서 그 소리가 유난히 컸다.

은명의 얼굴을 봤다.

"야, 은명아."

은명의 어깨를 옆에서 톡 쳤다.

거칠지만 따뜻한 손이었다.

"얼굴이 어두워."

은명이 대답했다.

"……생각할 게 좀 많아서."

태산이 말했다.

"혼자 생각하지 마.

같이 다니는 놈이 있잖아."

은명이 짧게 웃었다.

입꼬리만 올라간 웃음이었지만,

이 건조한 아지트 안에서는

그것만으로도 공기가 한 결 풀렸다.

이 녀석은 진짜 변하지 않는다.

소문이 돌 때도, 의심이 번질 때도,

이 녀석의 온도만큼은 그대로다.

센 바람 속에서 안 꺼지는 불씨 같은 놈.

방과 후. 학교 건물 뒤편.

카이가 뛰고 있었다.

숨이 찼다.

넥타이가 어깨 뒤로 날렸다.

교복 단추가 하나 풀려 있었다.

뛰면서 풀린 건지, 처음부터 풀려 있었는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제발. 늦지 마.

이번엔 늦지 마.

활빈당 내부 채팅에 알림이 올린 건 3분 전이었다.

'건물 뒤편. 편입생 1명. 상급생 2명.'

보호 요청이 아니었다.

목격자가 올린 글이었다.

그 3분이 길었다.

아지트에서 건물 뒤편까지,

전력 질주로 4분.

건물 뒤편.

편입생 하나가 쓰러져 있었다.

비명문가 출신.

교복 소매가 찢어져 있었고,

태블릿이 바닥에 금 가 채 떨어져 있었다.

벽에 등을 기댄 채 무릎을 끌어안고 있었다.

상급생 둘이 편입생 위에 서 있었다.

팔짱을 끼고. 내려다보며.

그림자가 편입생 위로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활빈당이 지켜준다며?

어디 있어, 활빈당?"

웃음이 섞인 목소리.

조롱이 묻어 있었다.

카이가 도착했다.

숨을 몰아쉬며.

손을 무릎에 짚고 한 번 들이쉬었다가.

"야! 뭐 하는 거야!"

상급생들이 돌아봤다.

카이를 보고.

"왜, 이것도 활빈당이야?"

카이가 이를 악물었다.

주먹을 쥐었다. 손등에 힘줄이 섰다.

숨이 아직 차 있었지만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물러서."

상급생들이 웃었다.

"재밌네."

하지만 물러났다.

10월 랭킹전 이후 활빈당이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물러서는 발걸음에 여유가 있었다.

겁먹은 게 아니라, 오히려 즐기고 있었다.

"와봤자 늦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걸음이었다.

상급생 중 하나가 돌아서며 말했다.

입꼬리를 올리면서.

"다음에도 이렇게 올 거야?

늦게?"

카이의 주먹이 한 번 더 쥐어졌다.

하지만 입을 열지 않았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할 말이 너무 많아서 다물었다.

카이가 편입생에게 다가갔다.

무릎을 꿇었다. 눈높이를 맞추며.

"괜찮아?"

편입생이 일어나며 말했다.

교복 먼지를 털면서.

손이 떨리고 있었다.

"……괜찮아요.

활빈당이 와줬으니까……"

하지만 눈에 실망이 비쳤다.

와줬지만. 늦었으니까.

얼굴 한쪽에 타박상이 있었다.

붉은 자국이 볼 위로 번지고 있었다.

이미 맞은 뒤였다.

활빈당이 오기 전에 이미.

카이가 편입생의 태블릿을 주워 건넸다.

화면에 금이 가 있었다.

편입생이 그걸 받아 들며

화면을 한 번 쓸어봤다.

화면이 켜지지 않았다.

카이가 은명에게 보고했다.

목소리에서 평소의 장난기가 완전히 빠져 있었다.

대신 거기엔 분노가 아닌 뭔가,

자책에 더 가까운 것이 묻어 있었다.

"은명아. 늦었어.

편입생이 다쳤어."

은명이 태블릿을 내려놨다.

천천히.

화면 위에 떠 있던 '역추적 계획서' 파일이

잠금 화면으로 바뀌었다.

내부 균열 때문에 대응이 느려졌다.

서로를 의심하느라

보호해야 할 사람을 놓쳤다.

빅토르의 이간이 만든 실질적인 첫 번째 피해다.

은명이 입을 열었다.

아지트에 모인 멤버들을 돌아보며.

"우리가 서로를 의심하는 사이에

지켜야 할 사람을 놓쳤어."

아지트가 조용해졌다.

카이가 고개를 숙였다.

올가의 턱이 미세하게 굳었다.

위노나가 태블릿을 꽉 쥐었다.

태산이 옆에서 주먹을 쥐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했다.

랭킹전에서 테무진에게 맞았던 손.

아직 붕대 자국이 남아 있는 손이었다.

"……다음엔 안 늦어.

내가 달려갈게."

은명이 고개를 저었다.

"달려가는 것만으로는 안 돼, 태산아.

구조가 문제야."

태산이 입을 다물었다.

반박하지 않았다.

뭔가 반박하고 싶었지만,

은명의 말이 맞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은명이 멤버들을 둘러봤다.

"순찰 체계를 다시 짜야 해.

그리고 보호 요청 응답 시간을 줄여야 해."

아르준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구역별 순찰 스케줄과

비상 연락 체계를 재설계하겠습니다."

안경을 올렸다.

렌즈 너머 눈빛이 전보다 선명했다.

할 일이 생기면 흔들림이 줄어드는 타입이었다.

같은 날 저녁. 학생회실.

편입생 피해 사건 보고서가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사진 자료가 첨부되어 있었다.

타박상, 파손된 태블릿, 현장 상황.

보고서 오른쪽 상단에 '긴급' 스탬프가 찍혀 있었다.

이자벨라가 보고서를 읽었다.

금발이 서류 위로 늘어졌다.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활빈당의 보호가 실패했다는 건,

사실이야?"

제갈린이 보고서를 넘기며 대답했다.

"사실입니다."

안경을 올렸다.

렌즈 너머 눈빛이 정리되어 있었다.

감정이 아니라 데이터로 말하겠다는 사람의 눈이었다.

"활빈당은 약자 보호를 명분으로 하면서

실제 보호는 실패했습니다."

이자벨라의 눈이 제갈린을 향했다.

눈을 좁히며.

"구조적이라는 건?"

"활빈당은 비공인 조직입니다.

체계적인 순찰도, 지휘 구조도 불분명해요.

보호 대상 배정이 멤버 자율에 의존하고 있고,

긴급 상황 시 대응 프로토콜이 없습니다."

제갈린이 태블릿을 열었다.

데이터가 정리되어 있었다.

그래프와 표가 깔끔하게 배치되어 있었고,

색상 코딩이 구분되어 즉시 읽을 수 있었다.

이 사람은 이 순간을 위해 미리 준비해두고 있었다.

"개교 이후 접수된 약자 대상 사건 중

활빈당이 개입한 건수 기준으로 산출했습니다.

보호 성공률 72%.

최근 3개월 간, 총 29건 중 21건 성공.

높아 보이지만."

손가락이 화면의 빨간 막대를 짚었다.

"실패한 28%, 즉 8건에서

실제 피해가 발생했어요.

오늘 건이 아홉 번째입니다."

이자벨라가 손가락을 서류 위에 놓았다.

톡, 톡. 두 번 두드렸다.

"비공인 조직이라 면책이라는 거지?"

제갈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식 조직이었다면 책임을 물을 수 있습니다.

비공인이니 면책이에요.

보호를 약속했지만 책임은 지지 않는 구조.

이건 선의만으로 운영할 수 있는 범위를 넘었습니다."

이자벨라가 잠시 침묵했다.

서류를 내려놓고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천장을 한 번 올려다봤다가 내렸다.

"그래서?"

제갈린이 말했다.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공식 기율 조사를 요청합니다.

조사 범위는 활빈당의 조직 운영과 보호 활동 전반,

기간은 2주, 증거 제출은 서면으로."

이자벨라의 눈이 미세하게 좁아졌다.

"기율 조사라……"

제갈린이 계속했다.

"공정하게 하겠습니다.

감정이 아니라 사실로 판단할 거예요."

목소리는 단정했지만,

태블릿을 잡은 손끝에 미세한 힘이 들어가 있었다.

손톱이 태블릿 가장자리를 누르고 있었다.

이자벨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허가할게."

제갈린이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문손잡이를 잡았을 때.

"린."

이자벨라의 목소리.

제갈린이 멈췄다. 돌아보지 않았다.

"공정하게 한다고 했지?"

"네."

"그럼, 결과도 공정하게 받아들여."

제갈린이 문을 열고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학생회실에 울렸다.

이자벨라가 혼자 남았다.

서류를 한 번 더 봤다.

빨간 '긴급' 스탬프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가 뗐다.

이자벨라의 시선이 창밖을 향했다.

교정에 학생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 사이로 활빈당 멤버의 교복이 보였다.

카이가 편입생 옆에서 걷고 있었다.

이자벨라가 시선을 거뒀다.

입술이 한 번 굳었다가 풀렸다.

복도. 제갈린의 발소리.

규칙적이었지만

평소보다 반 박자 빨랐다.

감정이 아니라고?

정말 그런 거야, 린?

홍은명이 싫어서가 아니라?

안경을 올렸다.

렌즈에 복도의 형광등이 비쳤다.

아니야. 이건 원칙이다.

체계 없는 이념은 위험하다.

보호를 약속하고 보호하지 못하면,

그건 이념이 아니라 거짓말이다.

하지만.

발걸음이 조금 빨라졌다.

왜 이렇게 불편하지.

원칙대로 하는 건데.

원칙이라면 불편할 이유가 없는 건데.

제갈린이 복도 끝에서 멈췄다.

창밖을 봤다.

중정에 벤치가 보였다.

어제 빅토르가 앉아 있던 자리.

지금은 비어 있었다.

제갈린이 시선을 거뒀다.

다시 걸었다.

활빈당 아지트. 밤.

은명의 태블릿에 알림이 떴다.

학생회 공식 통보.

'활빈당 비공인 조직 기율 조사 통보.

담당: 학생회 부회장 제갈린.

조사 범위: 조직 운영 및 보호 활동 전반.

기간: 11월 1일~14일(2주).

초회 소환: 11월 3일(수) 16시. 학생회실.

증거 제출 기한: 11월 10일(월).

미제출 시 불출석 처리.'

은명이 화면을 봤다.

얼굴에 변화가 없었다.

이미 예상했다는 표정이었다.

제갈린. 드디어 왔구나.

빅토르가 만든 균열이 이런 식으로 돌아온 거야.

내부 붕괴가 아니라 외부 압력으로.

빅토르가 직접 칼을 들지 않아도,

다른 누군가가 칼을 들 수 있도록 판을 짠 거다.

태산이 옆에서 봤다.

화면을 기웃거리며.

"뭐라는데?"

"기율 조사.

활빈당을 공식으로 문제 삼겠다는 거야."

태산의 눈이 좁아졌다.

턱이 당겨졌다.

"제갈린이?"

"응."

태산이 말했다.

팔짱을 끼며.

"……이기면 되잖아."

은명이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화면에 '초회 소환: 11월 3일'이 남아 있었다.

이번엔 논리로 승부다.

주먹이 아니라 데이터로.

이틀 뒤. 준비할 시간이 많지 않다.

은명이 위노나를 봤다.

"위노나, 보호 활동 기록 전부 정리할 수 있어?"

위노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태블릿을 열며.

"건별 타임라인으로 5시간이면 됩니다."

"3시간으로 해."

위노나의 눈이 한 번 깜빡였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겠습니다."

은명이 아르준을 봤다.

"순찰 체계 재설계안,

그걸 조사 대응 자료에 같이 넣어."

아르준이 안경을 올렸다.

"방어만 하실 건 아니죠?"

은명이 짧게 웃었다.

이번엔 진짜 웃음이었다.

"당연하지.

'이미 개선 중입니다'가

가장 강한 방어니까."

같은 시간. 제갈린의 방.

보고서를 정리하고 있었다.

태블릿 위에 조사 항목이 나열되어 있었다.

하나하나 체크하며 순서를 정렸다.

깔끔한 글씨. 정돈된 배치.

이 사람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화면이었다.

홍은명. 이번엔 논리로 승부야.

불안은 없어야 한다.

원칙에 따르면 흔들릴 이유가 없다.

제갈린이 안경을 벗고 렌즈를 닦았다.

닦는 손이 멈추지 않았다.

이미 깨끗한데도.

태블릿 옆에 커피가 한 잔 놓여 있었다.

식어 있었다.

언제부터 식어 있었는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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