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위의 무게
A반 교실. 10월 셋째 주.
아침 햇살이 창을 타고 교단까지 내려와 있었다.
운소하가 교단에 섰다.
교탁 위에 태블릿을 내려놓는 소리가 짧게 울렸다.
"랭킹전을 공지한다."
교실이 조용해졌다.
연필을 굴리던 손이 멈추고,
속삭이던 입들이 닫혔다.
'랭킹전'이라는 세 글자가
교실 공기를 한 박자 무겁게 만들었다.
"체육대회와 다르다.
팀전이 아니야. 개인전이다."
화면이 떴다.
학년별 대진 구조와 일정표가 정렬돼 있었다.
토너먼트 도식 아래로
경기 일정이 줄줄이 내려갔다.
"전 학년 참가. 학년별 개인 랭킹전.
각 학년 상위 8명 한정으로 학년 간 교류전.
교류전 결과까지 합산해서 최종 순위가 결정된다."
한 박자.
운소하의 시선이 천천히 교실을 훑었다.
"순위는 성적에 반영된다.
장학금, 특수 훈련 기회, 교관 사사 우선권,
전부 순위에 연동돼.
순위가 곧 자원이야."
앞줄에서 누군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체육대회에선 팀이 널 가려줬어.
못 싸워도 옆에서 커버해 주는 놈이 있었지."
한 박자.
"랭킹전에선 혼자야.
커버 없어. 변명도 없어."
운소하의 눈이 차가웠다.
그 눈 안에 '각오해라'가 들어 있었다.
뒤쪽에서 연필을 내려놓는 소리가 났다.
은명이 팔짱을 끼고 화면을 보고 있었다.
화면 속 대진 구조를 읽는 눈이 좁아졌다.
개인전.
도술 지원형은 개인전에서 불리해.
팀이 있어야 내 전술이 의미가 있는데.
옆에서 아르준이 고개를 기울이며 소곤거렸다.
"은명 씨, 랭킹전은 데이터 분석으로
상대를 예측하면 충분히 보완 가능합니다.
상대의 전투 패턴과 습관만 읽으면
선공 루트를 설계할 수 있어요."
은명이 돌아봤다.
"그건 네가 더 잘하잖아, 아르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칭찬인지 떠넘기기인지 알 수 없는 웃음이었다.
반대편.
제갈린이 태블릿을 조용히 정리하고 있었다.
손끝이 평소보다 빨랐다.
화면을 닫는 동작 하나하나에 힘이 실려 있었다.
랭킹전은 정석이 통하는 무대야.
준비한 자에게 유리한 싸움이다.
나에게 유리해.
점심시간. 훈련장으로 가는 복도.
전태산과 리오가 나란히 걷고 있었다.
창밖으로 10월의 하늘이 높았다.
바람이 복도 끝에서 불어와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체육대회 끝나자마자 또 시험이라니.
학교가 군대야? 아니, 군대가 더 쉬는 시간 줄걸."
리오가 가방을 질질 끌며 투덜거렸다.
가방 바닥이 복도를 긁는 소리가 달그락거렸다.
태산이 웃었다.
"그래도 싸우는 건 나쁘지 않아."
리오가 얼굴을 찌푸렸다.
"너는 싸우는 게 생일 파티야? 매번 좋다고."
"맞는 것도 재밌거든."
"……그건 좀 걱정되는 취미인데."
그때, 복도 분위기가 바뀌었다.
앞쪽 학생들이 양쪽 벽으로 비켜나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군중이 갈라지듯.
아무도 신호를 주지 않았는데
모든 몸이 동시에 움직였다.
누군가 걸어오고 있었다.
195cm. 백금 블론드. 강철빛 눈동자.
등에 접쇠된 십자가형 무기가
걸음에 맞춰 미세하게 흔들렸다.
교복은 한 치의 구김 없이 정돈돼 있었다.
걸음이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았다.
정확했다. 기계처럼 정확했다.
모든 학생이 길을 내줬다.
아무도 부딪치지 않았다.
부딪칠 생각조차 하지 않는 얼굴들이었다.
리오가 태산의 팔을 쥐며 소곤거렸다.
"야……저 사람 누구야? 왜 다들 비켜?"
태산이 대답하려다 멈췄다.
표정이 굳었다. 등줄기로 뭔가 차가운 게 흘렀다.
……뭐야, 이 압박감.
걸어온 것뿐이다.
시선을 준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 존재가 복도를 지나가는 것만으로
공기가 눌렸다.
카를이 지나가면서 전태산을 봤다.
0.5초.
강철빛 눈동자가 태산의 자세를 훑었다.
발끝부터 주먹까지. 품평하듯.
아무 말 없이 지나갔다.
태산이 서 있었다.
주먹 안에 땀이 맺혀 있었다.
심장이 한 번 크게 울린 뒤 돌아왔다.
테무진 선배와는 다르다.
하산 선배와도 다르다.
테무진은 강압이었다. 위에서 짓누르는 힘.
하산은 무게였다. 전장에서 살아남은 자의 밀도.
이건 뭐라고 해야 하지.
성벽이다. 부딪치기 전에 이미 막혀 있는 벽.
부딪칠 수 있을지조차 모르겠다.
지나가던 2학년이 걸음을 늦췄다.
인티 유팡키.
언제나처럼 여유로운 표정이었지만
카를이 지나간 뒤에야 발걸음을 옮겼다.
"카를 아이젠하르트.
전직 선도부장. 테무진의 전임이야."
태산이 물었다.
"전직이면 3학년?"
"응. 3학년 최상위.
선도부장 재임 시절에 지금의 규율 체계를 전부 만들었어.
테무진이 지키고 있는 규칙,
전부 카를이 짠 거야."
리오가 눈을 떴다.
"전직? 그럼 은퇴한 거 아냐?
은퇴하면 보통 편해지잖아."
인티가 어깨를 으쓱했다.
입꼬리에 쓴웃음이 걸렸다.
"은퇴해도 선도부가 아직
그 사람 의지 아래서 움직여.
규율위원 자문이라는 직함이
남아 있거든. 형식상 자문이지만
테무진이 중대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카를에게 보고하러 간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야."
한 박자.
"규율의 원조가 저 사람이야.
은퇴가 아니라 승격인 거지."
태산이 카를이 사라진 복도 끝을 봤다.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에 박혔다.
이기려면, 저런 사람도 넘어야 하는 거구나.
주먹만으로 될까?
하산 선배의 말이 떠올랐다.
강한 것과 살아남는 것은 다르다.
방과 후. 활빈당 아지트.
7인 전원이 둘러앉았다.
좁은 공간에 7명이 들어차니
숨소리가 서로 섞였다.
은명이 벽에 기대 팔짱을 꼈다.
"랭킹전은 개인전이야.
이번엔 내가 전략을 짜줄 수 없어.
각자 알아서 싸워야 해."
한 박자. 7인의 얼굴을 둘러봤다.
"각자 목표를 정해.
순위가 아니라 이번 랭킹전에서
뭘 증명할 건지."
태산이 먼저 입을 열었다.
"테무진 선배한테
한 대 더 맞추고 싶다."
한 박자.
눈이 진지해졌다. 장난기가 빠져 있었다.
"아니. 밀리지 않고 싶다."
올가가 말했다. 무표정.
하지만 목소리에 힘이 실려 있었다.
"수호 계열로 상위권에 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거야.
방패도 검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줄게."
아르준이 고개를 숙였다.
안경 너머로 데이터시트가 비쳤다.
"데이터로 싸우는 방식이
개인전에서도 유효하다는 것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분석은 팀전만의 것이 아닙니다."
리오가 기지개를 켰다.
뼈가 우두둑 소리를 냈다.
"순위는 모르겠고,
재밌는 상대랑 싸우고 싶어~
심심한 놈이랑 붙으면 난 졸아."
카이가 손바닥으로 바닥을 철썩 쳤다.
"바닥은 내 거니까,
실내든 야외든 상관없어!"
태산이 카이를 봤다.
눈썹이 올라갔다.
"야, 아까부터 바닥바닥 하는데
그거 자랑이야?"
카이가 눈을 빛냈다.
앉은 자리에서 바닥을 두드리자
타일이 미세하게 출렁였다.
"형, 나 지반조작 봤잖아!
상대가 서 있는 땅이 내 거면
이미 반은 이긴 거라고!"
올가가 출렁이는 바닥을 내려다봤다.
"아지트 바닥 부수면
수리비 네가 내."
카이가 손을 뗐다. 바닥이 멈췄다.
위노나가 한숨을 쉬었다.
노트북 화면의 불빛이 얼굴을 반쯤 비추고 있었다.
"개인전에선 해킹보다 직접 싸워야 하는데……
좀 불리해.
시스템이 없으면 내 장점의 반이 사라져."
은명이 마지막에 덧붙였다.
목소리가 차분했다. 하지만 무게가 있었다.
"나도 불리해.
도술 지원형은 혼자서 화력이 부족해."
한 박자.
"하지만 포기하진 않아."
태산이 끼어들었다.
"은명이가 약하다고?
ㅋㅋ 장난하냐.
모의전에서 내 작전 실시간으로 수정한 놈이.
그걸 혼자서 했잖아."
은명이 태산을 봤다.
시선이 잠깐 부드러워졌다가 돌아왔다.
"그건 팀전이니까 가능한 거야.
개인전은 다르다고."
태산이 어깨를 으쓱했다.
"달라도 은명이는 은명이야."
은명이 고개를 돌렸다.
입꼬리가 아주 살짝 올라갔다.
본인은 그걸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랭킹전에서 보여줘야 해.
활빈당의 모든 멤버가
제 몫을 할 수 있다는 걸.
그게 리더의 의무다.
밤. 훈련장.
달빛이 훈련장 바닥에 긴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10월의 밤공기가 차가웠다.
숨을 내쉴 때마다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태산이 혼자 수련하고 있었다.
타격봉 앞에 서서 자세를 잡았다.
한 대 치고. 자세를 확인하고. 다시 잡고.
평소의 그가 아니었다.
평소라면 연달아 쳤을 타격봉을.
한 대씩, 되짚고 있었다.
하산의 말이 떠올랐다.
살아남는 법을 배워라.
태산이 전투 자세를 바꿔봤다.
왼쪽 하단. 빈틈을 의식적으로 막는 자세.
익숙하지 않았다.
오른주먹을 뻗으려는 습관이 자꾸 왼팔을 당겼다.
방어 자세를 유지하려면 공격을 참아야 했다.
참는다는 건 태산에게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주먹을 내렸다.
숨을 골랐다.
앞만 보지 말라는 거겠지.
정면만 뚫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뒤가 빈 채로 나가면 죽는 거구나.
카를 선배. 그 사람은 빈틈이 없었다.
지나가는 것만으로 막혀 있었다.
그런 상대를 만나면 나는 어떻게 싸우지.
타격봉을 한 번 더 쳤다.
이번엔 치고 난 뒤 왼손을 열지 않았다.
작은 변화였다.
하지만 처음으로 '치는 것' 이후를 생각한 주먹이었다.
같은 시간. 선도부실 앞.
복도가 비어 있었다.
야간 자율학습이 끝난 뒤라 인적이 없었다.
형광등 하나가 깜빡이며 복도를 불안하게 비추고 있었다.
카를이 지나가고 있었다.
발소리가 일정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메트로놈이었다.
테무진이 맞은편에서 걸어오다 마주쳤다.
멈췄다.
허리가 자동으로 15도 숙여졌다.
카를이 말했다.
"랭킹전."
한 박자.
강철빛 눈동자가 테무진을 봤다.
"규율대로."
두 단어. 그게 전부였다.
카를에게는 그 두 단어면 충분했다.
테무진이 고개를 숙였다.
"네. 선배."
카를이 지나갔다.
발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멀어졌다.
한 번도 빨라지지 않았고, 느려지지도 않았다.
테무진이 서 있었다.
주먹을 쥐었다. 이를 악물었다.
턱 근육이 볼록 솟아올랐다.
규율대로.
카를 선배의 말은 항상 두 글자면 충분하다.
명령이 아니다. 확인이다.
'너는 알고 있지?'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 두 글자가 어깨를 짓누른다.
선도부장이라는 직함을 물려받았지만,
그 무게까지 물려받은 건 아니었다.
카를 선배처럼 되고 싶다.
하지만 카를 선배처럼은 될 수 없다.
그 틈이 이를 악물게 했다.
같은 시간.
기숙사 관리 시스템에
미승인 접속 로그가 하나 찍혔다.
접속 시간: 3초.
접근 대상: 랭킹전 대진표 원본 파일.
접속 경로: 우회. 3중 프록시.
흔적 삭제 시도: 감지됨. 복원 불가.
아무도 확인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