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회의 날
체육대회 종합 결산. 폐막식.
교장 레오나르도가 단상에서 결과를 발표했다.
전광판에 종합 순위가 떴다.
종목 배점은 깃발 쟁탈전 50%,
개인 대련과 장애물 돌파가 각 25%.
종합 1위. 체제파 연합.
종합 2위. 2학년 연합.
종합 3위. A반 혼성.
종합 4위. 활빈당.
관람석이 웅성거렸다.
4위라는 숫자 위로 수군거림이 깔렸지만
그 안에는 놀라움이 섞여 있었다.
교실.
아르준이 태블릿을 은명에게 보여줬다.
화면에 종목별 세부 결과가 정리돼 있었다.
"종합 4위.
숫자로 보면 중위권이에요."
한 박자. 화면을 넘겼다.
"하지만 깃발 쟁탈전에서 체제파와 근소한 차이.
장애물 돌파 상위 3위.
개인 대련에서 전태산 4강, 올가 8강.
1학기 기록이 전무했던 것에 비하면 도약이에요."
은명이 태블릿을 내려놨다.
"이제 아무도 활빈당을 무시 못 해."
복도에서 다른 반 동기들이 다가왔다.
"깃발전 진짜 잘 싸웠다."
"활빈당 들어가려면 어떡해야 돼?"
태산이 봤다. 어깨를 으쓱했다.
"어. 뭐, 생각해봐."
카이가 뒤에서 흥분했다.
"오 사람이 더 들어오는 거야?
대장! 우리 커지고 있어!"
은명이 창밖을 봤다.
4위.
하지만 1학기에 0이었던 것에서 여기까지 왔다.
학생회실. 결산 회의.
이자벨라가 보고서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겼어. 종합 1위."
한 박자. 보고서를 테이블에 내려놨다.
"하지만 기분이 좋지만은 않군."
테무진이 말했다.
"활빈당이 선전한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결과는 결과입니다.
학생회가 이겼습니다."
이자벨라가 테무진을 봤다.
"결과만으로 안심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한 박자.
"전태산이 너를 버텼어, 테무진."
테무진이 잠시 침묵했다.
주먹을 쥐었다.
"다음엔 버티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이자벨라가 제갈린을 봤다.
"제갈린. 홍은명이 신경 쓰여?"
제갈린이 무표정하게 답했다.
"전략적으로 경계해야 할 대상일 뿐입니다."
이자벨라가 미소를 지었다.
"그래. 전략적으로."
홍은명. 변수의 변수를 썼어.
내 시뮬레이션 밖에서 움직였어.
인정은 안 해.
하지만 다음엔 시뮬레이션의 범위를 넓혀야 해.
테무진이 일어섰다.
"활빈당은 힘으로 부수면 됩니다."
제갈린이 고개를 돌렸다.
"분석을 심화해야 합니다."
같은 결론을 향한 말이었다.
하지만 접근이 달랐다.
테무진은 정면. 제갈린은 측면.
같은 팀인데 시선이 엇갈렸다.
이자벨라가 둘을 봤다. 눈을 가늘게 떴다.
균열은 아직 아냐.
하지만 빗금이 생겼어.
저녁. 학교 뒷마당.
전태산이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몸이 아팠다.
테무진에게 맞은 가슴이 아직 울렸다.
발소리가 들렸다.
하산이 지나가다 멈췄다.
"깃발 쟁탈전 봤다."
태산이 일어섰다. 허리가 뻑 소리를 냈다.
"어떻게 보셨어요?"
하산이 말했다.
"테무진을 버텼다."
한 박자.
"인상적이야."
태산이 살짝 웃었다.
"인정을 해주시는 건가요?"
하산의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아니.
인상적이라는 건
네가 살아남았다는 뜻일 뿐이야.
강했다는 뜻은 아니야."
태산의 웃음이 사라졌다.
하산이 계속했다. 목소리가 낮아졌다.
"전장에서 선전했다고
기분 좋은 놈은
다음 전장에서 죽어."
한 박자. 눈이 진지했다.
"교만이 아니라,
안심이 더 무서운 거야."
태산이 입을 다물었다.
하산이 태산을 봤다.
"살아남는 법을 배워라, 전태산."
한 박자.
"지금의 너는 강해지고 있지만,
죽지 않는 법은 모른다.
그게 차이야."
하산이 등을 돌렸다.
걸어가며 말했다.
"불사대의 격언이 있어."
멈추지 않았다.
"죽을 자리에서 웃는 자가
영웅이 아니야."
한 박자.
"죽을 자리를 피하는 자가 영웅이야."
하산이 떠났다.
태산이 서 있었다. 어둠 속에서.
죽을 자리를 피하는 자가 영웅.
나는 그 반대만 해왔다.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만.
주먹을 봤다.
이 주먹으로 앞으로만 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앞이 아닌 방향이 있다는 걸
처음으로 생각했다.
바람이 불었다. 차가웠다.
10월의 바람이었다.
어둠.
디지털 화면이 빛났다.
체육대회 CCTV 데이터가 정리되고 있었다.
활빈당 7인의 전투 데이터가
하나씩 분석됐다.
음성. 차분한 목소리.
"체육대회.
아름다운 데이터예요."
한 박자.
"활빈당과 체제파, 모두 열심히 싸워주셨네요."
화면에 전태산의 전투 데이터가 떠올랐다.
금강불괴 활성도 변화, 율도국 체술 효율.
성장 곡선이 가파르게 올라가는 그래프.
"전태산 군.
성장 속도가 예상보다 빠르네요."
미소를 담은 음성.
"다음 시험에서는 좀 더 재미있는 과제를
드려야겠어요."
화면이 전환됐다.
'교내 잠입 2차 시뮬레이션.
갈등 데이터 반영 완료.
최적 시점: 12월.
사유: 랭킹전 직후, 내부 파벌 갈등 누적 최고치 예상.'
"분열은 아직 부족해요."
한 박자.
"하지만 종목 경쟁이 만들어주는 균열은
나쁘지 않아요."
화면이 꺼졌다.
기숙사 옥상. 밤.
은명과 태산이 나란히 서 있었다.
바람이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체육대회 끝났네."
은명이 말했다.
"응. 졌지만."
태산이 대답했다.
"졌지."
침묵. 바람 소리만 흘렀다.
은명이 물었다.
"근데 다음엔 어떡할 거야?"
태산이 주먹을 쥐었다.
"살아남는 법을 배워야 한대."
은명이 의아하게 봤다.
"누가 그래?"
"어떤 무서운 선배가."
은명이 웃지 않았다.
"무서운 선배라."
한 박자.
"그 말이 네한테 남았으면
좋은 선배겠네."
태산이 봤다.
"그런 건가?"
"그런 거야."
옥상에서 내려다보는 율도고.
10월의 밤이 학교를 감싸고 있었다.
같은 시간.
어둠 속 디지털 화면에
마지막 텍스트가 떠올랐다.
'랭킹전 시뮬레이션. 시작.'
화면이 꺼졌다.
체육대회는 끝났다.
하지만 다음 시험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그 아래, 관리자 로그에
미승인 접속 기록이 하나 찍혀 있었다.
아무도 확인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