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자의 게임
다음 날. 방과 후. 도서관.
은명이 자리에 앉았다.
태블릿을 열었다.
검색어: '빅토르 드라쿨레스쿠.'
가설을 세웠으면 검증해야 한다.
학생회 이임 기록을 불러왔다.
화면에 연도별 조직 개편 내역이 떴다.
2학년 시절 학생회 규율 개정 이력.
1학년 때 학생회를 3개월 만에 장악.
2학년 때 학생회장에 취임.
3학년 현재, 공식 은퇴.
하지만 이자벨라가 학생회장이 된 것.
우연인가?
은명이 기록을 넘겼다.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멈췄다.
학생회장 선거 기록.
이자벨라 단독 출마.
대립 후보가 없었다.
선거 2주 전 기록을 확인했다.
후보 등록 마감 이틀 전에
두 명의 후보가 동시에 사퇴서를 제출했다.
사유는 둘 다 '개인 사정'.
같은 날, 같은 시간대.
우연이라 하기엔 너무 깔끔했다.
누가 대립 후보를 출마 못 하게 했을까.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은명이 태블릿을 닫았다.
빅토르 드라쿨레스쿠.
전직 학생회장.
은퇴 후에도 그림자 권력.
이자벨라가 학생회장이 된 것도
이 사람의 설계라면,
학생회는 아직도 그의 체스판 위에 있다.
은명이 일어섰다.
복도를 걸었다.
학생회실 앞을 지나가는데.
"홍은명?"
은명이 멈췄다.
이자벨라.
학생회실 문 앞에 서 있었다.
서류를 들고. 날카로운 시선.
금발이 형광등 아래서 차갑게 빛났다.
"도서관에서 뭘 찾고 있었어?"
은명이 대답했다.
"공부요. 역사 과목."
이자벨라가 은명을 봤다.
서류를 든 손가락이 미세하게 조여졌다.
의미심장한 미소.
"역사를 파는 건 좋은 습관이야."
눈이 좁아졌다.
"하지만 어떤 역사는
파면 팔수록 위험해지거든."
은명이 이자벨라를 봤다.
경고인가. 협박인가.
아니면, 같은 것을 보고 있다는 신호인가.
은명이 입을 열었다.
"조언 감사합니다, 회장님."
이자벨라가 돌아섰다.
학생회실 문이 닫혔다.
이자벨라도 빅토르를 의식하고 있다.
그리고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체제파 내부도 단일하지 않다.
은명이 복도를 걷는 동안
태블릿에서 알림이 울렸다.
교내 열람 권한 알림.
'요청하신 문서 열람 권한이 거부되었습니다.
사유: 학생회 운영 기록(3학년 이상 열람 제한).'
은명의 눈이 좁아졌다.
아까 검색한 빅토르 관련 기록 중
깊숙한 항목이 막혀 있었다.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
내가 검색한 걸 누군가 감지한 걸 수도 있다.
같은 날 저녁. 학교 중정.
벤치에 누가 앉아 있었다.
185cm. 창백한 피부. 칠흑의 머리카락. 검은 롱코트.
차를 마시고 있었다.
찻잔에서 가느다란 김이 올라왔다.
빅토르 드라쿨레스쿠.
은명의 머리가 차가워졌다.
자연스럽게 보이지만, 이것도 설계다.
이 사람이 여기 앉아 있는 것 자체가
만남이 아니라 배치다.
빅토르가 먼저 말을 걸었다.
"홍은명 군."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음악을 듣는 것 같은 톤.
"앉지 않을래? 차 한 잔 할까?"
은명이 멈췄다.
거절하면 적의를 드러내는 꼴이다.
앉았다.
빅토르가 차를 건넸다.
은명이 받았다. 입에 대지 않았다.
찻잔의 온기만 손끝에 머물렀다.
빅토르가 웃었다.
"경계심이 강하네. 좋은 습관이야."
적갈색 눈동자가 은명을 비추었다.
"랭킹전 결과, 인상 깊었어."
은명이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활빈당이라. 흥미로운 조직이야."
빅토르가 차를 마셨다.
입술에 찻잔을 댄 채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약자를 보호한다는 이념."
찻잔을 내렸다.
"아름답지."
은명이 빅토르를 봤다.
칭찬이 아니다. 관찰이다.
먹잇감의 크기를 재는 눈빛이었다.
빅토르가 말했다.
"칭찬이 아니야. 관찰이야."
은명의 눈이 미세하게 떨렸다.
내 생각을 그대로 말했다.
이 사람은 상대의 머릿속을 읽고
한 발 먼저 꺼내는 것으로 주도권을 잡는다.
빅토르가 계속했다.
"아름다운 이념은
대부분 내부에서 무너지거든."
은명이 물었다.
"경험에서 나온 말씀이신가요?"
빅토르가 미소를 지었다.
입꼬리만 올라갔고, 눈은 웃지 않았다.
"경험이라기보다, 역사야."
석양이 중정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빅토르의 그림자가 벤치 위로 길게 늘어졌다.
"모든 혁명은 내부의 배신으로 끝났으니까."
은명이 차를 벤치에 내려놨다.
조용히. 잔이 나무에 닿는 소리가 작았다.
이 사람은 대화를 하는 게 아니다.
시험하고 있다.
내 반응을, 내 한계를, 내 약점을.
빅토르가 말했다.
"조언을 하나 하자면."
적갈색 눈동자가 은명을 정면으로 비추었다.
"동료를 너무 믿지 마, 홍은명."
침묵.
바람이 불었다.
중정의 나무가 흔들리며 잎 하나가 떨어졌다.
두 사람 사이 벤치 위에 내려앉았다.
"신뢰는 가장 맛있는 독이거든."
해가 지고 있었다.
빅토르의 얼굴 절반이 그림자에 묻혔다.
은명이 입을 열었다.
"선배님은 게임을 좋아하시나 봐요."
빅토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게임?"
"체스 같은 거요.
상대가 모르는 사이에 수를 두는."
빅토르가 은명을 봤다.
3초.
적갈색 눈동자 안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흥미롭군."
미소.
"좋아. 한 수 더 두지."
은명이 일어섰다.
차를 벤치에 놓으며 말했다.
"저도 게임을 좋아해요, 선배님."
은명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다만 저는 체스보다 바둑을 좋아하거든요."
빅토르가 고개를 기울였다.
은명이 말했다.
"바둑은, 한 수 한 수가 다 보여요."
빅토르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좁아졌다.
그리고 진심으로 웃었다.
'통제 불능한 변수'를 만났을 때의 웃음.
"재밌는 아이야."
은명이 걸어갔다.
등을 돌린 채.
선전포고.
빅토르가 체스판이라고 생각하는 한,
나는 바둑으로 둔다.
체스는 말을 죽이는 게임이지만,
바둑은 거점을 짓는 게임이다.
같은 밤. 어둠.
디지털 화면이 빛났다.
교내 데이터가 흐르고 있었다.
부드럽지만 어딘가 공허한 음성.
"교내 균열 지수."
화면에 수치가 떠올랐다.
"현재: 52%. 5%p 상승.
빅토르의 개입 이후 가속화."
화면이 전환됐다.
홍은명과 빅토르의 대화 기록이 표시됐다.
중정 벤치 주변 센서 로그에서
추출된 음성 패턴이 파형으로 나열되어 있었다.
"두 사람의 대화 패턴. 흥미롭네요."
미소를 담은 음성.
"체스와 바둑이라."
"빅토르는 분열을 만들고.
홍은명은 분열을 막으려 하고."
화면의 차트가 갱신됐다.
"어느 쪽이 이기든, 제게는 좋은 데이터예요."
차트 하단에 수식이 갱신되었다.
'균열 목표: 65%.
현 추세 유지 시 도달 예정: 11월 셋째 주.
침투 최적 조건 달성까지 약 4주.'
"감사해요, 학생 여러분."
"열심히 싸워주세요."
화면이 전환됐다.
새 항목이 깜빡였다.
'1단계 접촉 대상 반응 분석: 진행 중.
2단계 접촉 준비: 대기.'
기숙사 옥상. 밤.
은명이 홀로 서 있었다.
밤하늘에 별이 드물었다.
도시의 빛이 하늘을 삼키고 있었다.
태블릿을 열었다.
바람이 화면을 스쳤다.
적었다.
'세 개의 전선.
1. 빅토르. 그림자의 손.
증거를 잡아야 한다.
2. 카를. 정면의 벽.
규율을 어기면 개입한다.
3. 천기. 보이지 않는 눈.
우리 모두를 관찰하고 있다.'
은명이 태블릿을 내려다봤다.
화면의 푸른 빛이 얼굴의 반쪽만 비추었다.
세 전선.
빅토르를 잡으면서,
카를의 규율을 넘지 않고,
천기의 시야에서 벗어나야 한다.
할 수 있을까.
바람이 불었다.
교복 깃이 흔들렸다.
은명이 태블릿을 닫았다.
같은 시간. 빅토르의 방.
체스판. 새로운 말이 놓였다.
빅토르가 와인잔을 돌렸다.
촛불이 와인의 표면에서 흔들렸다.
"홍은명."
잔을 입에 댔다가 내렸다.
"바둑이라고?"
미소.
"재밌는 아이야."
체스 말을 집었다. 흰색 폰.
빅토르의 손가락 사이에서
말이 가볍게 돌았다.
"하지만."
폰을 체스판 위에 눕혔다.
"바둑에도 사석(捨石)은 있지."
탁.
"버리는 돌이 없으면,
이길 수 없는 게임도 있거든."
와인잔을 입에 댔다.
적갈색 눈동자가 촛불에 빛났다.
체스판 위, 눕혀진 흰색 폰 옆에
봉인된 편지 한 통이 놓여 있었다.
수신인이 적혀 있었다.
활빈당 멤버 중 한 명의 이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