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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의 무게 일러스트

이름의 무게

다음 날. 활빈당 아지트.

은명이 멤버들을 모았다.

전원 출석.

평소와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은명이 화이트보드를 가져와 아지트 중앙에 세워두었다.

처음이었다.

은명이 입을 열었다.

"제갈린 말이 틀리지 않았어."

카이가 불만을 터뜨렸다.

의자에서 몸을 앞으로 숙이며.

"에이, 그건 빅토르 때문이잖아!"

은명이 고개를 저었다.

"빅토르 탓만 할 수 없어."

멤버들을 둘러보며.

"우리 내부에 문제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야."

침묵.

올가가 팔짱을 풀었다.

위노나가 고개를 숙였다.

아르준이 안경을 올렸다.

각자의 방식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은명이 말했다.

"그래서 활빈당을 재정의하려고 해."

태산이 벽에 기대 서서 듣고 있었다.

팔짱을 낀 채. 눈만 은명을 따라가고 있었다.

은명이 태블릿을 열었다.

동시에 화이트보드에 마커로 세 줄을 그었다.

"세 가지."

"하나. 위노나 중심의 정보 체계 강화."

위노나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커졌다.

"실시간 위협 감지.

소문이 아니라 데이터로 움직여."

위노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태블릿을 열며.

"……가능합니다.

사실, 이미 초안이 있어요."

화면을 돌려 보여줬다.

교내 구역별 위험도 매핑.

색상 코딩과 알림 로직이 이미 설계되어 있었다.

밤새 만든 게 아니라,

며칠 전부터 조금씩 준비해두고 있었던 것이었다.

미세한 미소가 위노나의 입가에 떠올랐다.

은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걸 기반으로 확장하자."

화이트보드에 '정보 체계'를 적으며.

"둘. 아르준의 데이터 기반 우선순위 시스템."

아르준이 눈을 떴다.

안경 너머 눈이 선명해졌다.

"위협도와 긴급도를 수치화해서

효율적으로 대응해."

아르준이 태블릿을 두드렸다.

"즉시 설계하겠습니다.

위노나 씨의 매핑 데이터와 연동하면

응답 시간을 절반으로 줄일 수 있습니다."

위노나가 아르준을 봤다.

고개를 끄덕였다.

둘 사이에서 무언가가 연결됐다.

데이터를 매개로 한 신뢰.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셋. 올가와 태산 중심의 즉응팀."

은명이 화이트보드에 마지막 줄을 적었다.

"현장 대응 속도 개선.

호출이 오면 3분 안에 도착하는 팀."

태산이 씩 웃었다.

벽에서 등을 뗐다.

"3분? 1분이면 되지."

올가가 조용히 말했다.

"보호할 가치가 있으면

끼어준다고 했어."

창밖을 한 번 보고 다시 은명에게.

"더 잘 끼어줄 방법이 있다면 좋지."

은명이 멤버들을 봤다.

하나하나 눈을 맞추며.

"완벽하지 않아도 돌아서지 않는 것.

그게 활빈당이야."

은명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심의장에서 100명 앞에 섰을 때의 목소리.

"하지만 완벽에 가까워지려는 노력은

멈추지 않을 거야."

그 순간 위노나의 태블릿에서 알림이 울렸다.

교내 위협 감지 초안 시스템의 첫 알림이었다.

'B동 뒤편. 편입생 1명. 상급생 접근 감지.'

아지트가 멈췄다.

모두가 태블릿을 봤다.

은명이 말했다.

"즉응팀. 첫 출동이다."

태산이 이미 일어서 있었다.

올가도.

태산이 문을 열며 말했다.

"1분."

두 사람이 나갔다.

발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아지트에 남은 멤버들이 숨을 내쉬었다.

리오가 주먹을 들었다.

"나도 뭐 할 거야! 뭐든 시켜!"

카이가 웃었다.

"너 뭘 할 수 있는데?"

"분위기 메이커!"

아지트가 웃음으로 찼다.

완전하지 않았다.

균열은 남아 있었다.

하지만 방향이 생겼다.

그리고 방향이 생기면 사람은 움직인다.

같은 날 오후. 학생회실.

이자벨라가 기율 심의 결과를 발표했다.

서류를 책상 위에 놓으며.

"활빈당에 공식 경고 처분."

제갈린과 은명을 번갈아 보며.

"해체 명령은 내리지 않습니다.

존속하되, 감시 대상으로."

제갈린이 옆에 서 있었다.

표정이 평탄했다.

"……그거면 됩니다."

이자벨라가 제갈린을 봤다.

"만족해?"

"공정한 결과예요."

이자벨라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갔다.

문이 닫혔다.

제갈린이 혼자 남았다.

잠시 서 있었다.

빈 학생회실.

프로젝터가 꺼진 화면.

어제 심의 때 72/28 그래프가 떠 있던 자리.

지금은 아무것도 없었다.

복도로 나왔다.

발걸음이 느려졌다.

복도 끝에서 멈춘다.

체제파 상급생이

편입생 하나를 밀치고 있었다.

"반 배정 불만이라고?

그냥 참아. 원래 그런 거야."

편입생이 쓰러졌다.

교복에 먼지가 묻었다.

주변 학생 두 명이 보고 있었지만

시선을 돌려 지나갔다.

제갈린이 봤다.

발걸음이 더 무거워진다.

지금 저 상황.

활빈당이었다면 개입했을 거다.

카이가 뛰어왔을 거다.

태산이 1분 안에 도착했을 거다.

학생회는.

교칙 제7조. '살상 아닌 한 개입 불가.'

규칙 때문에 못 한다.

내가 홍은명에게 이 규칙을 근거로 공격했는데,

이 규칙 자체가 문제라면?

1초. 개입할지 말지.

제갈린이 지나간다.

발걸음이 빨라졌다.

하지만 표정이 무거웠다.

원칙으로 이겼다고 생각했는데,

원칙이 지키지 못하는 게 있다는 걸

보고 있으면서,

원칙대로 해야 하는 거야?

은명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규칙 뒤에 숨어서

못 본 척하는 게 정의냐?'

제갈린이 멈췄다.

뒤를 돌아봤다.

편입생이 혼자 일어나고 있었다.

무릎의 먼지를 털며.

아무도 손을 내밀지 않았다.

제갈린의 손이 떨렸다.

주머니에 넣었다. 떨림을 숨기려는 것처럼.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같은 밤. 3학년 기숙사. 빅토르의 방.

체스판.

촛불이 와인잔에 반사되어 흔들렸다.

빅토르가 와인잔을 돌리며 미소를 지었다.

적갈색 눈동자에 촛불이 비쳤다.

"제갈린."

잔을 기울이며.

"좋은 칼이야.

내가 갈지 않아도 스스로 날을 세우니까."

와인을 마셨다.

입술에서 잔을 뗀 뒤.

"홍은명과 제갈린이 싸울수록

활빈당과 체제파의 간극은 넓어져."

미소.

"그리고 간극은 내 놀이터야."

빅토르의 눈이 좁아졌다.

"다만."

잔을 내려놓았다. 소리 없이.

"홍은명이 예상보다 빨리

체계를 잡기 시작했군."

체스판 위에서 흰색 나이트를 집었다.

손가락 사이에서 돌렸다.

"변수는 여전히 변수야."

나이트를 체스판 위에 놓았다.

새로운 위치에.

디지털 공간. 화면이 빛났다.

부드럽지만 어딘가 공허한 음성.

"교내 균열 지수."

화면에 수치가 올라왔다.

"현재: 55%.

제갈린-홍은명 대립으로 3%p 추가 상승."

화면이 전환됐다.

제갈린의 심의 발언 로그와

복도에서의 행동 패턴이 나란히 표시되어 있었다.

"제갈린의 내면 균열이 흥미로워요.

원칙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어요."

미소를 담은 음성.

"이런 데이터는 처음이에요."

화면이 전환됐다.

"빅토르의 이간. 홍은명의 저항. 제갈린의 균열."

차트가 올라왔다.

'교내 균열 목표: 65%.

예상 도달: 12월 초 유지.

세 변수 동시 가동 시 2주 단축 가능.'

"침투 최적 시점이 앞당겨질 수도 있어요."

화면 하단에 새 항목이 깜빡였다.

"기대할게요, 학생 여러분."

화면이 꺼졌다.

세 장소. 같은 밤.

활빈당 아지트.

은명이 태블릿에 적었다.

'활빈당 개편안 — 버전 2.0.

완벽하지 않아도 돌아서지 않는다.'

태블릿을 닫았다.

창밖을 봤다.

11월의 밤하늘. 별이 드물었다.

홍길동의 이름은 결과가 아니라 태도다.

제갈린의 방.

병법서를 덮었다.

창밖을 봤다.

전략이 없는 힘은 폭력이고,

힘이 없는 전략은 망상이다.

하지만 전략이 지키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복도에서 혼자 일어나던 편입생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아무도 손을 내밀지 않았던 그 장면.

공명 어르신. 대답해주세요.

빅토르의 방.

체스 말을 만지며.

"균열은 더 깊어질 거야."

미소.

"다음 수는."

세 사람이 각자의 밤을 보내는 동안.

디지털 화면 위 균열 지수가

0.1%씩 올라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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