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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반의 세계 일러스트

A반의 세계

학년 공지.

도술 기초 하위권 보강자료 배포.

공통 게시판 상단에 대상자 명단이 붙었다.

빨간 폰트. 굵은 글씨.

눈에 띄라고 올린 게 아니라,

눈에 띄게 만들어 놓은 배치.

공개 망신과 한 끗 차이.

전태산.

홍은명의 손가락이 태블릿 화면 위에서 멈췄다.

화면 밝기가 얼굴 아래쪽을 파랗게 물들이고 있었다.

은명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지만,

이어폰을 낀 왼손이 아주 살짝 움찔했다.

0.3초.

화면을 스와이프해 교실 화면으로 넘겼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하지만 스와이프 속도가 평소보다 빨랐다.

은명 스스로도 그것을 알아차렸을까.

아마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모른 척했을 것이다.

입학 2주 차.

A반 교실은 조용한 전쟁터였다.

누구도 크게 떠들지 않지만,

모든 자리에서 경쟁의 냄새가 난다.

커피와 잉크 냄새 사이에 기파가 미세하게 감돌았다.

드론 두 대를 띄워놓고 데이터를 정렬하는 제갈린.

손가락이 허공에서 진법 기호를 그릴 때마다

드론의 렌즈가 미세하게 회전한다.

데이터가 정렬될 때마다 드론이 한 번 깜빡였다.

마치 고개를 끄덕이는 것처럼.

교과서에 인도 고대 문자로 주석을 달고 있는 아르준 싱.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가 일정하다.

한 글자도 놓치지 않겠다는 리듬.

주석의 색깔이 세 가지였다.

검은색은 이해, 파란색은 의문, 빨간색은 반론.

지금 아르준의 펜은 파란색이었다.

이어폰을 낀 채 부적 구조를 스케치하는 위노나.

연필 끝에서 나오는 선이 지도처럼 뻗어나간다.

선의 굵기가 일정하지 않았다.

에너지 흐름의 강약을 손의 힘으로 구현하는 방식.

아카데미에서 가르치지 않는 기법이었다.

토템 드론이 어깨 위에서 빙글빙글 떠 있었다.

은명은 맨 뒷자리.

태블릿 하나. 이어폰 한쪽.

등을 의자에 깊이 기대고 다리를 꼰 채로 앉아 있었다.

교실의 경쟁에는 관심이 없다는 자세.

하지만 그 태블릿 안에

학급 전체의 데이터가 정리되어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방금까지 열어본 건 학년 공통 게시판 공지였다.

개인 점수 상세는 비공개지만,

보강 대상자 명단과 과목별 권장자료 배포 공지는

학년 전체에 열려 있다.

학사 시스템의 허점이 아니라 설계 의도였다.

낙오자를 숨기지 않고 경쟁판 한가운데 올려두는 방식.

누군가에겐 자극이고, 누군가에겐 낙인이다.

은명은 그 설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시 아무 표정 없는 얼굴로 돌아갔다.

태블릿 화면을 가볍게 톡톡 두드린다.

습관이었다. 무언가를 계산할 때,

혹은 무언가를 참을 때 나오는 손끝 리듬.

톡. 톡톡. 톡.

아르준이 뒤를 돌아봤다.

"홍은명."

은명의 시선이 올라왔다.

느리게. 급하지 않다는 뜻이었다.

"어제 깃발전 리플레이 봤어."

"……"

"결계 해제 방식이 흥미로웠는데.

출력 역전을 구현할 때,

중앙 인자 접근 경로를 어떻게 계산한 거야?

정석 교재엔 없는 루트잖아."

아르준의 눈이 반짝였다.

학자의 호기심이었다.

도전이나 경쟁의 눈빛이 아니라,

순수하게 이해하고 싶다는 빛.

은명이 짧게 대답했다.

"교재에 없으면 만들면 되지."

아르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펜을 손가락 사이에서 한 바퀴 돌렸다.

파란색 잉크가 손끝에 약간 묻었다.

"네 대답은 늘 명확하네.

좋아. 언제 시간 되면 더 자세히 물어봐도 돼?"

"시간은 있으면 내는 거지."

"그것도 명확하네."

아르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앉았다.

파란색 펜 뚜껑을 다시 열면서,

이미 다음 주석 작업에 집중하는 눈이었다.

교실 앞쪽.

제갈린의 드론 하나가 미세하게 각도를 틀었다.

은명 쪽을 향한 렌즈.

0.5초.

다시 원위치.

드론의 로그에 '비정규 도술 패턴 감지'라는 태그가 하나 추가됐다.

제갈린의 입가에는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드론은 주인이 명령하지 않은 행동을 하지 않는다.

아르준과의 대화가 끊긴 지 채 10분도 되지 않았을 무렵,

도술 기초 실습 시간이 시작됐다.

실습실 문을 열자

부적 잉크 특유의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신선한 잉크와 태운 부적 잔해가 뒤섞인 냄새.

처음 맡는 학생은 기침을 하지만, 2주 차면 익숙해질 때였다.

천장의 결계등이 희미한 청백색 빛을 흘리고 있었다.

실습실 안의 기파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는

맥진 장비이기도 했다.

운소하가 느릿하게 교탁에 기대 입을 열었다.

외투가 한쪽 어깨에서 흘러내려 있었다.

고쳐 입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오늘은 기초 부적 작성과 기동이에요.

각자 방식대로 해봐."

실습대 위에 부적용 용지와 스마트 잉크가 놓여 있다.

잉크병 표면에 미세한 기파가 감돌았다.

품질이 좋은 잉크일수록 떨림이 고른 법이었다.

이 잉크는 은은하게 일정한 맥박을 치고 있었다.

운소하가 손가락을 튕겼다.

실습실 중앙에 반투명 결계막이 떠올랐다.

공기가 미세하게 갈라지는 소리.

실습실 안의 먼지가 결계 표면에서 후류를 타고 밀려났다.

결계 표면에서 빛이 파문처럼 퍼져나갔다가 잔잔해졌다.

"시범 결계.

이걸 뚫거나, 분석하거나, 활용하거나.

뭘 해도 돼."

앞줄에서 누군가 침을 삼켰다.

운소하 수준의 결계를 학생에게 던지다니.

제갈린이 가장 먼저 움직였다.

드론 두 대가 떠올랐다.

손가락이 공중에서 진법 기호를 그려냈다.

기호가 완성될 때마다 드론이 한 번씩 깜빡인다.

마치 체스 기사가 말을 놓는 것처럼

정확하고 절제된 움직임이었다.

결계 구조 스캔. 취약점 분석. 정석 루트 침투.

30초.

제갈린의 부적이 결계를 관통했다.

깔끔하게. 잔여 에너지 0.

교과서에 실을 수 있을 만큼의 정밀함이었다.

관통된 결계가 원래 형태로 즉시 복원되었을 정도로,

결계 자체에 대한 손상도 최소화한 것이다.

완벽한 정석.

운소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린. 교과서에 실어도 되겠다."

앞줄에서 누군가 숨을 들이켰다.

뒤쪽에서는 작은 감탄이 억지로 삼켜졌다.

박수라도 치고 싶은 장면인데,

A반에서는 그런 반응조차 평가 대상이 될 수 있었다.

"30초 만에? 운소하 선생님 결계를?"

옆자리 학생이 고개를 저었다.

"제갈린은 원래 저래. 놀랄 것도 없어."

제갈린은 드론을 회수하며 고개만 가볍게 끄덕였다.

칭찬에 대한 반응이라기보다는,

예정된 결과를 확인한 것에 가까운 동작이었다.

아르준은 부적의 수학 구조를 분석하며 응용하고 있었다.

논리적이고 신중한 방식.

결과를 예측하고 나서 움직이는,

인도 고대 수학자의 후예다운 접근.

시간은 더 걸렸지만, 그 과정 자체가 하나의 증명이었다.

은명은 다르게 움직였다.

태블릿을 펼쳤다. 스마트 잉크로 부적 코드를 작성한다.

손끝이 화면 위를 스치는 소리만 난다.

주변의 시선은 이미 제갈린의 성공에 쏠려 있었고,

뒷자리의 은명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디지털 코드로 변환된 기동식. 전자부적.

정통 부적 작성법과는 완전히 다른 접근이다.

잉크가 아닌 코드, 종이가 아닌 화면, 집중이 아닌 연산.

전씨세가에서 배운 도술의 기초 위에

은명이 독자적으로 쌓아 올린 방식이었다.

결계 코드 구조를 스캔.

정석 루트는 버렸다.

대신, 구조적 취약점. 백도어.

운소하의 결계에도 이음새는 있다.

아무리 정교한 결계라도

에너지 순환이 겹치는 교차점은 존재한다.

열쇠구멍 같은 것이었다.

제갈린이 열쇠를 만들어 열었다면,

은명은 열쇠구멍 자체를 뜯어내려 했다.

은명의 전자부적이 그 이음새를 노렸다.

역접근 코드 작성. 실행.

결계가 떨렸다.

그리고 뚫렸다.

은명의 전자부적이 결계를 관통한 순간.

퍼억.

에너지가 역류했다.

실습실 전등 세 개가 연쇄적으로 터졌다.

유리 파편이 실습대 위에 흩어졌다.

파편이 부적 용지 위에 떨어지며

잉크 냄새와 함께 탄 냄새가 피어올랐다.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의자가 뒤로 밀리는 소리가 여러 개 겹쳤다.

제갈린의 드론 두 대가 자동 방어 태세를 취했다.

드론 표면에 방어 진법이 푸르게 빛난다.

주인의 명령 없이도 작동하는 응급 프로토콜이었다.

아르준이 반사적으로 펜을 놓고 뒤를 돌아봤다.

위노나는 이어폰을 빼며 은명 쪽을 봤다.

토템 드론이 주인의 긴장을 감지했는지 회전 속도를 높였다.

은명은 태블릿을 들고 유리 파편을 피한 채 서 있었다.

태블릿 화면에 빨간 경고창이 깜빡이고 있다.

출력 초과. 역류 감지. 경고. 경고.

출력 제어. 실패.

결계는 뚫었지만, 관통 후 에너지를 회수하지 못했다.

벽을 뚫을 수 있지만,

뚫린 구멍으로 쏟아져 나오는 잔해를 막을 방법이 없는 것과 같았다.

공격은 됐다. 수습이 안 됐다.

운소하가 깨진 전등을 올려다봤다.

유리 조각이 머리카락 위에 떨어져 있었다.

귀찮다는 듯 손으로 털어냈다.

화나지 않은 표정이었다. 오히려 조금 흥미롭다는 눈.

"뚫린 건 맞는데, 뒷정리가 좀 그렇네."

제갈린이 입을 열었다.

드론이 결계 잔해 데이터를 수집하고 있었다.

로그가 실시간으로 갱신되는 중이었다.

관통 각도, 역류 패턴, 에너지 잔류량.

은명의 전자부적을 해부하듯 기록하고 있었다.

"비정규 도술이 표준 결계 체계를 오염시킬 수 있습니다.

실습실 안전 프로토콜 위반 아닙니까?"

은명이 유리 파편을 발로 밀어내며 말했다.

파편이 실습대 다리에 부딪혀 가벼운 소리를 냈다.

"뚫린 건 맞잖아."

"뚫리는 것과 제어하는 것은 별개입니다."

제갈린의 시선이 차가웠다.

감정이 아닌 판단의 시선이었다.

은명의 코드를 읽듯 사람을 분석하려는 눈.

"체계 없는 천재는 위험합니다."

은명의 눈이 가늘어졌다.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도발인지 여유인지 구분이 안 되는 각도.

"체계에 갇힌 수재는 벽 앞에서 멈추고."

실습실 공기가 미세하게 얼어붙었다.

학생들의 시선이 두 사람 사이를 오갔다.

아르준의 펜이 멈춰 있었다.

위노나가 이어폰을 한쪽 빼고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운소하가 두 사람 사이로 걸어왔다.

슬리퍼 끌리는 소리가 팽팽한 공기를 깼다.

"둘 다 맞아."

깨진 전등을 가리키며.

"제갈린 말이 맞아. 출력 제어는 필수야.

안 그러면 동료가 다쳐."

은명을 보며.

"근데 홍은명.

네가 뚫은 것도 사실이야.

내 결계를 정면이 아닌 루트로 뚫은 건

이 반에서 네가 유일해."

운소하가 씩 웃었다.

"다음 시간에는 출력 제어도 해보자.

안 그러면 전등값, 네가 내야 돼."

학생들 사이에서 작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긴장이 풀리는 소리였다.

학생들이 흩어지는 사이,

운소하가 은명 옆을 지나며 낮게 말했다.

아무도 듣지 못할 정도의 목소리.

입술만 움직이는 것에 가까웠다.

"전씨 도술은 심법부터 시작하거든.

출력을 잡는 건 코드가 아니라 호흡이야."

은명의 손이 멈췄다.

태블릿을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관절이 하얗게 변한다.

전해풍.

전씨세가에서 자랄 때 도술을 가르쳐줬던 스승.

마당 한쪽에 앉아 부적 종이를 접으며 이야기하던 노인.

잉크 냄새가 항상 손끝에 배어 있던 사람.

웃을 때마다 주름이 깊어지던 얼굴.

은명은 전해풍의 얼굴보다 손을 더 잘 기억한다.

마디가 굵고, 잉크에 물든 손톱.

그 손이 부적 위를 지날 때 공기가 떨리던 감각.

전해풍의 수업은 항상 마당에서 시작했다.

실내가 아닌 야외.

바람이 부적의 기운을 흩트리기 때문에,

야외에서 부적을 제대로 쓸 수 있으면

어디서든 쓸 수 있다는 것이 전해풍의 철학이었다.

은명은 그 철학을 기억하면서도

실내의 태블릿 위에서 코드를 짰다.

바람 대신 에어컨이 불었다.

전해풍이 본다면 한숨을 쉬겠지.

도술의 기초는 배웠지만, 심법까지는 닿지 못한 수업.

심법은 기를 다루는 호흡법이었다.

코드로 대체할 수 없는 영역.

은명은 그것을 알면서도 코드를 택했다.

심법을 배우려면 전씨세가에 더 오래 있어야 했다.

은명은 전씨세가를 떠나야 했다.

이유는 복잡했고, 결과는 단순했다.

은명은 떠났고, 심법은 남겨졌다.

전해풍이 말했었다.

'심법은 시간이 걸린다. 너는 아직 기초가 먼저야.'

그때 은명은 기초를 마치면

심법을 배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초가 끝나기 전에 전씨세가를 나왔다.

미완의 교육. 미완의 도술.

그 기초 위에 은명은 코드를 올렸다.

전씨 도술의 정통이 아닌 자기만의 변칙.

기존의 도술이 서예라면, 은명의 방식은 타이핑이었다.

같은 글자를 쓰지만 도구와 감각이 전혀 다르다.

전해풍은 호흡으로 기를 잡았다.

은명은 코드로 기를 흉내 냈다.

그 차이가 오늘 터진 전등 세 개였다.

뚫는 건 됐다. 잡는 건 아직이었다.

운소하가 전씨 도술을 언급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전씨세가와 어떤 연이 있는 걸까.

은명은 그 질문을 태블릿 메모장 구석에 적어두었다.

나중에 확인할 것.

은명의 시선이 잠깐 운소하의 등을 따라갔다.

흘러내린 외투, 느릿한 걸음.

전해풍과 닮은 것은 하나도 없는데,

전씨 도술을 아는 사람 특유의 여유가 있었다.

태블릿을 내려다봤다.

경고창의 빨간 불빛이 깜빡이다 꺼진다.

마치 화난 심장이 진정되듯이.

제갈린은 드론을 회수하며 은명을 한 번 더 봤다.

관찰하는 시선. 적의가 아니었다. 분류였다.

위험한가, 유용한가, 둘 다인가.

제갈린의 세계에서 모든 대상은 세 범주 중 하나에 들어간다.

드론 로그에 태그가 하나 더 추가됐다.

'비정규 출력 패턴. 반복 관찰 필요.'

은명은 알아챘지만 모른 척했다.

분류당하는 건 익숙했다. 전씨세가에서도 그랬으니까.

수업이 끝나고 실습실의 잉크 냄새를 등 뒤로 두고 나왔다.

은명이 태블릿을 접고 복도를 걸었다.

창밖으로 오후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와

먼지가 빛 속에서 천천히 떠다녔다.

햇살이 복도 바닥에 긴 그림자를 그렸고,

은명의 그림자가 그 위를 걸어갔다.

A반 게시판 앞.

새 글이 하나 올라와 있었다.

제목. 도술 기초 수업 요약 — 비전공자용.

작성자. 익명.

내용은 오늘 수업 핵심을

비도술 전공자도 이해할 수 있게 풀어쓴 요약이었다.

부적 기동 원리, 결계 기본 구조, 코드 입출력 개념.

전문 용어 대신 일상적 비유로 풀어낸 문장.

'결계는 자물쇠고, 부적은 열쇠다.

열쇠 모양을 바꾸면 다른 자물쇠도 열 수 있다.'

어려운 개념을 쉽게 풀어놓되,

핵심을 빼먹지 않은 글이었다.

불친절하지만, 필요한 데만 정확히 친절한 문장.

아르준이 게시판 앞에 멈춰 섰다.

"이거 누가 올린 거야? 설명이 꽤 친절한데."

은명은 대답하지 않고 지나갔다.

발걸음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아르준이 스크롤을 내리다 하단 시스템 문구를 읽었다.

'학년 통합 게시판 연동.

공통태그 등록 글은 반별 게시판에 동시 노출됩니다.'

"아, 그래서 B반에도 같이 뜨는구나."

아르준은 알지 못했다.

그 요약본이 미묘하게

보강 대상자들이 바로 따라올 수 있는 난이도로

맞춰져 있다는 걸.

몇 번의 관찰과 데이터 분석으로 조율한 초안이라는 걸.

보강 대상자 명단의 최하위 점수에서 출발하여,

한 단계씩 올라갈 수 있도록 설계한 구조라는 걸.

코너를 돌기 직전, 제갈린이 은명을 불렀다.

"홍은명."

은명이 고개만 돌렸다.

몸은 돌리지 않았다. 가겠다는 뜻이었다.

"네가 쓴 거지?"

"증거 있어?"

제갈린은 짧게 말했다.

"없어. 근데 문장 배열이 너 같아."

"나 같은 사람 많겠지."

"아니. 불친절한데, 필요한 데만 정확히 친절한 문장.

흔치 않아."

잠깐 정적.

복도를 지나가는 학생들의 발소리만 멀리서 들렸다.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계단 쪽에서 올라왔다.

제갈린이 덧붙였다.

"B반 전태산.

보강 대상자 명단 보고 난이도 조절한 초안이지?"

은명이 피식 웃었다.

작은 웃음이었다.

부정도 긍정도 아닌, 드문 감정의 누출.

"관찰력 좋네.

근데 확신은 금물이지, 부회장님."

제갈린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그것이 제갈린의 가장 큰 감정 표현이었다.

"조심해, 홍은명. 선의도 기록으로 남아."

은명은 돌아서며 답했다.

"알아. 그래서 틀리면 고치려고

1차본으로 올린 거야."

말은 담담했지만 은명의 걸음이 평소보다 반 박자 빨랐다.

들킨 게 싫어서가 아니라,

들킬 만한 짓을 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한 탓이었다.

복도 끝에서 은명의 등이 사라졌다.

제갈린이 게시판을 한 번 더 봤다.

드론이 게시글의 메타데이터를 자동으로 저장하고 있었다.

작성 시간, IP 경로, 접속 기기 유형.

증거가 없다고 했지만,

제갈린의 드론은 이미 증거를 모으는 중이었다.

제갈린이 드론의 로그를 닫으며 중얼거렸다.

"변수는 기록해야 한다."

목소리에 감정은 없었다.

하지만 로그를 닫는 손가락이 평소보다 느렸다.

그 시각, B반 교실.

전태산이 통합 게시판 글을 읽고 있었다.

화면을 가까이 당기고,

조금 떨어뜨리고, 다시 당겼다.

글씨가 작아서가 아니었다.

내용이 처음으로 이해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첫 줄을 읽고, 두 번째 줄에서 멈췄다.

"이거……"

옆자리 학생이 물었다.

"왜? 또 어려워?"

태산이 고개를 저었다. 천천히. 확신을 가지고.

"아니. 이번엔, 된다."

옆자리 학생이 의아한 눈으로 태산의 화면을 힐끗 봤다.

같은 글인데 뭐가 다른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의 시선이 게시글 마지막 문장에 고정됐다.

'막히면 힘을 더 주지 말고

호흡 간격부터 줄여라.'

전태산은 숨을 들이켰다.

자기도 모르게 호흡이 느려졌다.

가슴 속에서 뭔가가 정돈되는 느낌이었다.

이상했다. 글자를 읽었을 뿐인데 몸이 반응했다.

오른손 주먹이 먼저 풀렸다.

늘 힘으로 밀어붙이던 어깨가 조금 내려앉았다.

힘을 빼는 게 약해지는 게 아니라는 걸

몸이 먼저 알아차린 순간이었다.

화면 상단 알림.

'도술 기초 중간평가 D-5'

태산은 잠깐 망설이다가

내일 아침 자율훈련 신청 버튼을 눌렀다.

누가 썼는지 모른다.

왜 이렇게 잘 맞는 설명인지도 몰랐다.

그래도 이번에는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손바닥에 묻은 분필 가루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태산은 알지 못했다.

이 게시글의 조회 기록이,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의 드론 로그에 저장되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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