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반의 세계
B반 교실은 전쟁터였다. 진짜 전쟁터.
아침 8시.
쁘아카오가 교실 문을 발로 차고 들어왔다.
"전태산!"
교실 전체가 진동했다.
앞줄에 있던 학생 하나가 연필을 떨어뜨렸다.
또 다른 학생은 태블릿 화면을 급히 내렸다.
조용히 아침 자습을 하던 분위기가
문짝 소리 한 번에 산산이 깨졌다.
B반에선 늘 그랬다.
평온은 잠깐이고, 소란이 기본값이었다.
"어제도 졌잖아.
오늘은 내가 이긴다, 형제!"
전태산은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태블릿이 켜져 있었다.
화면에는 학급 게시판의 도술 기초 요약본이 열려 있었다.
A반 공통태그로 등록된 글이
학년 통합 게시판 연동으로 B반에도 노출된 게시물이었다.
부적의 기동 원리, 결계의 기본 구조, 코드의 입출력 개념.
전문 용어 대신 일상적인 비유로 풀어놓은 글.
깃발전에서 결계에 갇혔던 순간이 자꾸 떠올랐다.
그래서 눈이 먼저 그 글로 갔다.
글을 읽는 속도는 느렸지만 이번엔 중간에 덮지 않았다.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넘기고,
아는 비유가 나오면 다시 올라가 읽었다.
태산에게 공부는 늘 기세로 밀어붙이는 영역이 아니었다.
하지만 맞고 넘어지는 건 익숙했다.
모르면 다시 읽는 것도 비슷한 종류의 버티기라고 생각하면
조금은 할 만했다.
전태산이 고개를 들며 중얼거렸다.
"……의외로 읽을 만한데?"
쁘아카오가 태산의 태블릿을 가리켰다.
"그거 뭐야? 아침부터 공부해?"
"빈속이 더 빨라!"
전태산이 피식 웃으며 태블릿을 덮었다.
"그건 네 사정이고."
교실 구석.
아서 펜드래곤 2세가 조용히 검 손잡이를 닦고 있었다.
플라즈마 대검의 비활성 모드.
검날은 꺼져 있지만,
손잡이를 닦는 동작에는
기사가 갑옷을 입는 것 같은 정돈된 리듬이 있었다.
마르쿠스가 그 옆에서 장갑 끈을 조이면서 작게 혀를 찼다.
"아침부터 또 닦냐."
아서가 시선도 주지 않고 답했다.
"검은 마음을 비춘다.
흐트러지면 먼저 보이는 법이다."
B반에서 저런 말을 진지하게 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래서 오히려 아무도 놀라지 않는 척했다.
마르쿠스가 전태산에게 다가왔다.
"어제 깃발전 영상 봤어.
결계 갇혔을 때 겁 안 났어?"
전태산이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겁? 좀 갑갑했지."
잠깐 생각하더니.
"근데 뭐, 빼줄 놈이 있으니까."
B반 체술 훈련장.
남궁현이 팔짱을 끼고 훈련장 중앙에 서 있었다.
"오늘은 1:1 스파링.
3분 라운드. 항복 또는 장외 시 종료."
아침 햇빛이 훈련장 철골 사이로 들어와
바닥에 긴 사각형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학생들의 호흡이 하얗게 보일 정도로 공기는 차가웠는데,
긴장 탓인지 등줄기에는 벌써 땀이 차기 시작했다.
대진표가 홀로그램으로 떠올랐다.
전태산 vs 아서 펜드래곤 2세.
뒤쪽에서 수군거림이 번졌다.
"체술로 아서한테 붙는다고?"
"맨손이면 아서가 압도적이지 않아?"
쁘아카오가 벌떡 일어났다.
"와! 나도 붙고 싶었는데!"
뒤쪽에서 누군가 속삭였다.
"초반에 저 카드부터 까?
오늘 교관 기분 안 좋은가 본데."
다른 학생이 어깨를 으쓱했다.
"기분 문제 아니야. 아마 의도겠지.
전태산이 어디까지 버티는지 보려는."
남궁현이 쏘아봤다.
"다음에 기회 준다. 앉아."
쁘아카오가 아쉬운 표정으로 주저앉았다.
아서가 일어섰다.
검 손잡이를 허리춤에 걸고 훈련장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검을 풀었다.
"무기 없이 붙자."
전태산이 눈을 깜빡였다.
"검 안 써?"
"기사의 예의다. 상대가 맨손이면 나도 맨손으로."
전태산은 대꾸 대신 한 번 어깨를 굴렸다.
망설임이 없는 척했지만 눈은 아서의 발끝을 먼저 봤다.
상체보다 발이 먼저 움직이는 상대라는 걸
어제 영상으로 이미 봤기 때문이다.
남궁현이 손을 들었다.
"시작."
라운드 1.
아서가 먼저 움직였다.
잽. 가벼운 왼손이 전태산의 시야를 흔들었다.
전태산이 반응하기 전에 크로스가 날아왔다.
턱. 전태산의 고개가 돌아갔다.
더킹. 아서의 상체가 낮아지며 전태산의 반격을 피하고,
카운터. 복부에 정확한 한 방.
전태산이 뒤로 밀려났다.
1다운.
전태산이 이를 악물고 일어섰다.
돌진. 주먹을 내질렀지만,
아서는 이미 반 발짝 물러나 있었다.
허공을 친 주먹.
아서의 잽이 다시 날아왔다.
같은 패턴. 잽, 크로스, 더킹, 카운터.
교과서를 보는 것 같았다.
정확히 말하면 교과서를 실전 속도로 재생한 느낌이었다.
아서의 동작엔 낭비가 없었다.
세게 치는 게 아니라 필요한 각도로만 친다.
거리, 중심, 리듬.
셋이 하나라도 어긋나면 바로 다음 동작으로 넘어갔다.
2다운.
전태산이 또 일어섰다.
이번엔 더 빠르게 돌진했다.
결과는 같았다.
아서의 리듬은 한 박자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3다운.
남궁현이 팔을 들었다.
"라운드 1 종료. 아서 펜드래곤."
전태산이 숨을 몰아쉬며 무릎을 짚었다.
턱이 얼얼했고 복부가 늦게 아파왔다.
맞을 때는 몰랐는데 호흡을 고를수록 통증이 선명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 포기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은 없는데,
지금 멈추면 다음도 똑같이 맞는다는 건 너무 분명했다.
쁘아카오가 주먹을 쥐었다.
"저 리듬…… 틈이 없어."
훈련장 한쪽에서 누군가 중얼거렸다.
"3판 전부 같은 패턴이야.
전태산이 뭘 해도 안 통하네."
라운드 2.
전태산이 일어서면서 입술의 피를 훔쳤다.
이번엔 달리지 않았다.
멈췄다.
아서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전태산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면이 아니라 옆으로.
사각. 아서의 왼쪽 사각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아서가 몸을 틀었다. 적응은 빨랐다.
하지만 전태산은 이미 리듬을 바꾸고 있었다.
한 박자 느린 돌진.
아서의 카운터 타이밍을 의도적으로 어긋나게 만드는.
아서의 크로스가 왔다.
전태산이 맞았다.
어깨로 받았다.
은빛 광택이 피부를 스쳤다.
어깨가 울렸지만 쓰러지진 않았다.
그 상태에서 전태산의 주먹이 올라왔다.
불규칙한 타이밍의 어퍼.
턱.
퍽.
아서의 고개가 처음으로 올라갔다.
훈련장이 조용해졌다.
잠깐이었지만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다.
'맞출 수 있네.'
완승 분위기였던 판이 그 한 방으로 모양이 바뀌었다.
결과는 안 바뀌어도 흐름은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현장에서 확인한 순간이었다.
아서가 멈췄다. 턱을 만졌다.
타격의 무게가 예상 이상이었다는 표정.
아서의 눈빛에 처음으로 계산 외의 감정이 스쳤다.
놀람이라기보다 '리듬을 읽었다'는 인지.
한 번 맞고 나서야 상대가 단순한 완력형이 아니라는 걸
확인한 얼굴이었다.
"……좋은 한 방이었다."
남궁현이 호루라기를 불었다.
"라운드 2 종료. 아서 펜드래곤."
승패는 명확했다. 아서의 2라운드 판정승.
하지만 훈련장의 시선은
전태산의 마지막 한 방에 머물러 있었다.
쁘아카오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졌는데 표정이 살아 있는 사람을 그는 좋아했다.
반대로 몇몇 학생은 조용히 단말기에 메모를 남겼다.
전태산. 리듬 적응 속도 빠름.
무식하게만 싸우는 타입 아님.
평판은 이렇게 조용히 갱신되는 법이었다.
스파링이 끝나고 남궁현이 전태산 앞에 섰다.
"전태산."
전태산이 바닥에 누운 채 올려다봤다.
"네 문제는 기본기야."
전태산이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또 그 소리."
남궁현의 표정이 움직이지 않았다.
"재능은 있어. 주먹의 무게도, 맞으면서 전진하는 근성도.
하지만 뼈대가 없다."
남궁현이 손가락으로 훈련장 기둥을 가리켰다.
"집을 짓는데 기둥 없이 지붕만 올린 격이야.
그 지붕은 언젠가 무너진다."
전태산이 천장을 보며 말했다.
"기둥이요? 저는 그냥 뛰어넘는 게 편한데."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을 만나면 그때 후회한다."
전태산이 입술을 한번 씹었다.
"……벽이면 부수면 되잖아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서의 리듬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태산은 입 안쪽을 혀로 굴렸다. 피 맛이 났다.
평소라면 그 맛이 오히려 들뜨게 만들었는데 오늘은 달랐다.
분한데, 분한 방향이 달랐다.
상대를 못 때린 게 아니라
자기 빈칸이 너무 또렷하게 보인 게 더 거슬렸다.
남궁현이 돌아서며 말했다.
"기본기 보충 훈련. 내일부터 운동장 네 바퀴."
"체술 기본기와 도술 호흡 기초.
둘 다 병행한다.
양쪽 뼈대가 서야 다음 단계로 갈 수 있어."
"네 바퀴요?!"
"안 하면 여덟 바퀴."
아서가 검을 다시 허리에 걸며 전태산을 내려다봤다.
"기술 없이 싸우는 건 용기가 아니라 오만이야."
전태산이 올려다봤다.
"하지만."
아서가 턱을 한 번 쓸었다.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그 한 방의 무게는 인정한다."
돌아서는 아서의 뒷모습. 절도 있는 걸음.
마르쿠스가 아서 옆으로 붙어 작게 속도를 맞췄다.
"컨디션 어땠어?"
아서가 짧게 답했다.
"좋다. 다만 저 학생은 다음엔 더 어렵겠지."
태산은 그 대화를 끝까지 듣지 못했지만
분위기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방금 한 방은 운이 아니라 표시였다.
다음에 다시 붙으면 지금과 같은 판은 나오지 않을 거라는.
전태산은 천장을 보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기둥. 뼈대. 기본기.
홍무영.
홍씨세가에서 맞아도 안 부러지는 몸,
밀려도 안 넘어지는 중심을 가르쳐줬던 스승.
그걸 버티는 법은 배웠다.
하지만 1:1 정석의 리듬과 간격은 비어 있었다.
전태산이 바닥에서 반쯤 일어나 자기 주먹을 내려다봤다.
처음 들어보는 단어는 아닌데, 처음으로 몸에 와닿는 무게.
홍무영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떠올랐다.
힘은 재능이 아니라 습관이고, 습관은 반복으로만 만든다고.
그땐 잔소리처럼 들렸는데
오늘은 문장 하나하나가 뼈에 박히는 느낌이었다.
훈련이 끝나자 전태산이 훈련장 출구로 향했다.
쁘아카오가 앞을 막아섰다.
"방금 아서한테 진 거 봤어."
"알아. 내가 졌으니까."
"뭔가 빠진 느낌이지? 나한테서 받아가!"
전태산이 한숨을 쉬었다.
"수업 끝났어."
"무에타이는 수업이 아니야. 생활이야."
쁘아카오의 오른발이 바닥을 찼다.
스텝.
전태산이 반사적으로 몸을 틀었다.
꺾어치기 무릎차기.
쁘아카오의 오른 무릎이 대각선으로 올라왔다.
전태산이 팔꿈치로 막았다.
충격이 팔을 타고 어깨까지 울렸다.
전태산이 바깥으로 돌리며 쁘아카오의 중심을 흔들었다.
쁘아카오가 비틀거렸지만 바로 스텝을 밟으며 복귀.
둘째 교환. 전태산의 직선 주먹. 쁘아카오의 팔꿈치 블록.
셋째 교환. 동시 타격.
전태산의 주먹이 쁘아카오의 명치를 스치고,
쁘아카오의 정강이가 전태산의 허벅지를 찼다.
둘 다 뒤로 물러났다. 땀범벅.
두 사람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승부를 내는 스파링이 아니라
서로의 리듬을 확인하는 교환이었다.
한 번 부딪칠 때마다
태산은 '힘만으론 안 된다'를 확인했고,
쁘아카오는 '그래도 힘이 무기다'를 확인했다.
서로 다른 결론이 같은 충돌에서 나왔다.
쁘아카오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강한 놈이랑 싸우는 게 최고의 훈련이야.
그게 아버지의 유훈이거든."
전태산이 허벅지를 문지르며 말했다.
"네 아버지도 매일 맞았어?"
쁘아카오가 씩 웃었다.
"매일 때렸지."
잠깐의 침묵.
"내일 또 하자!"
전태산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미친 놈."
쁘아카오가 주먹을 내밀었다.
전태산이 잠깐 보더니 주먹을 맞부딪혔다.
주먹이 닿는 소리가 짧게 울렸다.
승부 선언도, 화해 선언도 아닌
그냥 다음을 약속하는 소리.
B반식 인사는 대부분 말보다 충돌에 가까웠다.
전태산이 훈련장을 나왔다.
복도를 걷는 동안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쥐었다 폈다.
아서의 잽. 크로스. 카운터.
교과서 같은 리듬. 틈이 없었다.
유일하게 뚫린 한 방은 기술이 아니라 타이밍의 사고였다.
기둥. 남궁현의 말이 귓가에 남았다.
기둥 없이 지붕만 올린 집.
전태산이 걸음을 멈추고 자기 주먹을 내려다봤다.
무거운 주먹. 하지만 기둥이 없는 주먹.
전태산의 손이 천천히 벌어졌다.
처음으로 기본기라는 단어가
귀가 아닌 가슴에 들어왔다.
그날 밤, 전태산은 알람을 새벽 5시로 맞췄다.
창문 유리에 비친 자기 얼굴이 낯설게 느껴졌다.
늘 웃고 덤비던 표정 대신 생각이 먼저 올라온 얼굴.
태산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싫지도 않았다.
강해지는 방식이 하나만 있는 건 아니라는 걸
이제야 조금 믿게 됐으니까.
태블릿 메모장을 열어 한 줄을 적었다.
'운동장 네 바퀴.
내일부터가 아니라 지금부터.
끝나면 도술 호흡 기초 복습.'
화면을 닫으려다
아침에 읽었던 요약본이 아직 탭에 남아 있었다.
전태산은 잠깐 그걸 보다가 태블릿을 베개 옆에 놓았다.
내일은 뛰고, 읽고, 때릴 거다.
순서는 모르겠지만 전부 할 거다.
불을 끄고 누웠는데도 몸이 바로 잠들지 않았다.
아서의 잽 각도, 남궁현의 기둥 비유,
게시판 글의 마지막 문장이 교대로 떠올랐다.
복잡한 생각을 멈추는 대신
태산은 호흡부터 세기 시작했다.
짧게 들이쉬고, 조금 더 길게 내쉬고.
몇 번 반복하자 가슴 안쪽의 뜀박질이 조금 느려졌다.
새벽 알람이 울리면 진짜 시작이다.
전태산은 처음으로 내일을 기다리며 눈을 감았다.
창밖에서 기숙사 순찰 드론 소리가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규칙적인 소음이 이상하게 심장 박자와 겹쳤다.
태산은 한 번 더 숨을 들이켰다.
길게, 천천히.
아까 읽은 문장을 떠올리며.
'막히면 힘을 더 주지 말고
호흡 간격부터 줄여라.'
문장을 되뇌자 머릿속이 조금 정리됐다.
내일 아침 네 바퀴. 그리고 다시 시작.
이번엔 어제의 태산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나아진 태산으로.
승부는 늘 오늘 끝나지만 실력은 오늘로 끝나지 않는다.
태산은 그 사실을 붙잡은 채 천천히 눈을 감았다.
새벽의 첫 알람은 변명 없이 울릴 것이다.
태산은 도망치지 않기로 했다.
이번엔 진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