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개의 이름
입학식의 박수 소리가
아직 귀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B반 체술 훈련장에
들어서는 순간,
공기의 결이 바뀌었다.
매트 위에 선 2학년은 느긋했고,
맞은편 1학년은 어깨가 굳어 있었다.
긴장과 여유가
정확히 반으로 갈린 풍경.
남궁현이 중앙에 섰다.
팔짱도 끼지 않았고,
목소리도 높이지 않았다.
그런데 한마디면 충분했다.
"2학년은 선배로서
1학년에게 기본을 보여라.
실력도 태도도 둘 다다."
짧은 지시가 떨어지자
줄이 다시 곧아졌다.
태산이 매트 중앙으로
한 걸음 나왔다.
가볍게 목을 돌리고,
왼발을 반 박자 앞에 둔다.
시범이라는 말보다
몸이 먼저 준비된 자세.
그때 1학년 줄에서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왔다.
홍천무.
걸음이 짧고 정확했다.
서두르지 않았고,
망설이지도 않았다.
"전태산 선배.
한 말씀 드려도 될까요."
태산이 웃었다.
"오, 이름 알고 오네.
홍씨세가 후배 맞지?"
"맞습니다."
홍천무의 시선이
태산 눈을 정면으로 받았다.
예의는 갖췄지만,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눈.
태산은 속으로
짧게 혀를 찼다.
……이건 존경이 아니다.
확인하러 왔지.
남들 귀엔 인사처럼 들리는 문장들이,
태산 귀에는 도전장처럼 박혔다.
홍천무가 한 호흡 멈췄다.
매트 위 소음이 아주 얇아졌다.
"선배의 금강불괴,
대단한 체질인 건 압니다."
태산이 어깨를 으쓱했다.
"알면 됐지.
그래서?"
홍천무가 고개를 아주 조금 들었다.
그리고 또렷하게 말했다.
"금강불괴 따위 없어도
홍씨세가의 무예는 완전합니다."
따위.
두 글자가
매트 위를 미끄러져 지나갔다.
누군가 숨을 삼켰다.
1학년 줄 끝에서
손가락이 움찔하는 게 보였다.
"방금 뭐라 했어?"
"선배 앞에서
따위라고 했는데..."
"저 신입,
첫날부터 저걸 던지네."
리오가 관중석 겸 대기선에서
입을 벌렸다.
"야... 저거는
진짜 불 붙이는 단어 아니냐?"
올가가 리오 팔을 잡아당겼다.
"조용히.
지금은 태산 반응 봐야 해."
태산은 웃고 있었다.
입꼬리가 내려가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더 올라갔다.
겉으로는 웃음.
속으로는 작은 가시.
따위라.
……재밌네.
"좋다.
재밌는 놈이 들어왔네."
태산 목소리는 밝았다.
그래서 더 위험했다.
화를 억누른 소리가 아니라,
진짜로 흥미를 느낀 소리였기 때문이다.
홍천무는 곧바로 허리를 숙였다.
"무례하려던 건 아닙니다.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무례한지 아닌지는
나중에 보자.
일단 말은 세게 했으니,
주먹도 세게 나와야겠지?"
홍천무 입가가 미세하게 당겼다.
웃음인지 긴장인지
경계선에 걸친 표정.
그때 남궁현이
두 사람 사이로 한 발 들어왔다.
"홍천무.
첫날부터 열정적이군."
남궁현 시선이
1학년 줄 전체를 훑었다.
"좋다.
말로 던진 건
말로 회수하지 마라.
증명은 주먹으로 한다."
"예, 사부님."
홍천무가 즉시 대답했다.
톤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그 일정함이
더 단단하게 들렸다.
훈련장 오른편에서
무사 이브라힘이
가만히 그 장면을 보고 있었다.
거대한 체구가
벽처럼 서 있었는데,
눈빛은 놀랍게 차분했다.
무사 속에서 문장이 흘렀다.
……홍천무,
칼날 같은 타입이군.
……그리고 전태산 선배.
저 웃음은 비웃음이 아니다.
저건 받아들이는 웃음이다.
남궁현 손짓이 떨어졌다.
"소개는 여기까지.
각 조는 기본 자세 점검.
2학년은 신입 자세를 잡아줘."
라인이 다시 움직였다.
소음이 복원됐지만,
조금 전 두 글자는
아직 매트에 남아 있었다.
따위.
태산은 조별 점검을 하면서도
그 단어를 지우지 못했다.
남궁현이 손짓했다.
"전태산.
기본 전달경로 시범."
태산이 중앙으로 다시 나왔다.
왼발을 반 칸 내밀고,
골반을 닫고,
어깨를 마지막에 푼다.
과장 없는 직권.
퍽.
샌드백이 뒤로 밀리지 않고
제자리에서 깊게 떨렸다.
소리는 짧았는데
잔향이 길게 남았다.
남궁현이 1학년 쪽을 봤다.
"방금 본 건 힘자랑이 아니다.
연결이다.
발에서 주먹까지
끊기지 않으면 힘이 산다."
홍천무가 손을 들었다.
"같은 항목,
저도 해도 되겠습니까."
"나와."
홍천무가 같은 위치에 섰다.
자세는 유사했는데
결이 달랐다.
태산의 직권이 무겁게 밀어붙인다면,
홍천무의 직권은 얇고 정밀했다.
퍽.
이번엔 샌드백이
밀리기보다 비틀렸다.
접점 하나만 파고드는 궤적.
1학년 줄에서
낮은 감탄이 터졌다.
"와...
소리는 작은데 더 아프겠다."
"둘 다 홍씨 무예라는데
완전 다른 느낌이네."
리오가 태산 팔꿈치를 쿡 찔렀다.
"형, 저거 봤지?
진짜 칼끝 같다."
"봤지.
그래서 재밌는 거야."
남궁현이 둘을 번갈아 봤다.
"좋다.
차이는 선명하다.
그러니까 더 비교하지 말고,
더 정확해져라."
짧은 훈련이었는데
훈련장 전체 긴장이 한 단계 올라갔다.
도발이 말에서 끝나지 않고
동작으로 이어진 순간이었다.
홍천무 옆을 지나칠 때,
태산이 낮게 말했다.
"야, 후배.
말 세게 하는 건 좋은데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
"그래서 여기 왔습니다."
"좋네.
그럼 나도 기대할게."
짧은 대화가 끝났다.
둘 다 미소였고,
둘 다 물러서지 않았다.
오전 훈련이 끝나자
땀 냄새와 소독약 냄새가
훈련장 문틈으로 함께 흘러나왔다.
태산은 수건으로 목을 닦으며
복도로 나섰다.
리오가 달려와 옆에 붙었다.
"형, 괜찮아?
아까 그 말..."
"괜찮지.
재밌잖아."
"형이 재밌다고 하면
대개 큰일 전조인데."
"정확한 분석 고맙다."
태산이 웃었다.
리오는 따라 웃었지만,
올가는 태산 눈을 오래 보았다.
올가가 작은 목소리로
카이에게 말했다.
"저 웃음,
조금 날카롭다."
카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건드린 거 맞아.
근데 저 형은
건드릴수록 더 웃어."
오전의 열기는
복도 끝에서 천천히 식었다.
대신 오후의 소란이
다른 층에서 올라오기 시작했다.
A반 도술 실습실.
원형으로 깔린 진법진 위에
신입과 선배가 섞여 섰다.
B반이 철 냄새라면,
여긴 잉크와 전류 냄새였다.
운소하가 태블릿을 접고
2학년 쪽을 향해 턱을 들었다.
"1학년 도술 계열 학생들.
선배들한테 배울 게 많다.
특히... 홍은명."
시선이 한꺼번에
은명에게 꽂혔다.
은명이 짧게 눈을 감았다 떴다.
"굳이 제가요?"
"네가 아니면 누가.
질문은 수업 끝나고 받아."
운소하 말이 끝나기 무섭게,
1학년 줄 가운데에서
빛나는 탄환 하나가 발사됐다.
"은명 선배!!!"
전서린이었다.
정확히 세 걸음.
멈추지 않았으면 부딪칠 거리에서
급정지.
"전서린이에요!
전씨세가 방계!
선배님 소문 엄청 들었어요!
전씨 도술 독학으로 익혔다면서요?!
진짜 대단해요!!!"
은명이 반 발 물러났다.
정말 반 발 정확히.
"...고마운데,
조금 가까워."
"어? 죄송해요!
아, 근데 진짜 만나고 싶었어요!!!"
사과했는데 거리 변화는 거의 없었다.
에너지 게이지가 120%로 고정된 사람.
은명 머릿속에
건조한 독백이 떴다.
……뭐지 이 후배.
……밝은 수준을 넘어섰는데.
……가까워. 진짜 가까워.
주변이 웅성거렸다.
"와, 선배한테
저렇게 돌진한다고?"
"은명이 뒤로 물러난 거
처음 봤어."
"저 1학년,
무섭다기보다 뜨겁다."
그때 옆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전서린.
첫날부터 선배한테 실례야."
엘레나 카지미르였다.
표정은 미소인데
눈동자는 계산 중인 사람의 속도.
전서린이 즉시 돌아섰다.
"실례 아니에요!
존경이에요!!!"
"존경에도 간격은 있어.
일단 한 걸음만."
전서린이 정말 한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다시 은명을 봤다.
"한 걸음 물러났어요!
이제 질문해도 돼요?!"
은명이 이마를 짚었다.
태산이 있었으면 분명 웃었을 장면인데,
여긴 은명 혼자였다.
엘레나가 은명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A반 엘레나 카지미르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선배."
"그래, 반가워."
"방금 상황도
데이터로 보면 흥미롭네요.
전서린은 돌진형,
선배는 후퇴형 대응.
거리 조정이 바로 일어났어요."
은명 눈이 좁아졌다.
"첫인상 분석 빠르네."
"첫날 데이터가
제일 덜 가공돼 있거든요."
웃는데 속이 안 보였다.
전서린이 폭죽이면,
엘레나는 암막 커튼이었다.
그때 실습실 문 앞에서
드론 프로펠러 소리가
아주 작게 떨렸다.
제갈린.
언제부터 서 있었는지 모를 위치.
미간이 미세하게,
정말 미세하게 찌푸려져 있었다.
제갈린 속에서
익숙한 자기번역이 돌아갔다.
……왜 저렇게 시끄럽지.
업무 효율이 떨어진다.
……그래, 이건 업무 판단이다.
은명이 문 쪽을 봤다.
"제갈린,
무슨 일 있어?"
제갈린 표정이
순간적으로 정리됐다.
드론 화면을 닫고
파일 하나를 내밀었다.
"1학년 배치 데이터.
확인해."
"고마워."
짧은 인수인계.
그 사이 전서린 시선이
제갈린에게 꽂혔다.
말은 없었다.
근데 눈이 가늘어졌다.
본능적인 경계였다.
제갈린도 그 시선을 느꼈다.
아무 반응 없이 돌아섰지만,
걸음 첫 박자가
아주 미세하게 빨라졌다.
운소하가 손뼉을 쳤다.
"좋아, 소개 끝.
1학년은 기본 진식 세팅,
2학년은 파트너 붙어서 보정."
실습이 시작되자
전서린은 진짜로 진지해졌다.
질문을 쏟아내던 목소리는 그대로였지만,
손끝은 정확했다.
"선배, 여기 위상축
이렇게 접으면 맞아요?!"
"잠깐, 그 각도면
과부하 와.
반 칸만 줄여."
"아! 진짜네!
감사합니다!!!"
밝은 에너지 아래에
날카로운 흡수력이 있었다.
은명은 그걸 보고
속으로 체크를 하나 더 했다.
관리하면 크게 오른다.
안 잡으면 언젠가 터진다.
운소하가 전서린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전서린.
장점은 반응 속도다.
단점도 반응 속도고."
"네?
아, 너무 빨라서요?"
"그래.
보기 전에 손이 먼저 나간다."
전서린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처음으로 텐션이
반 박자 내려갔다.
"그럼 어떻게 고쳐요?"
운소하가 은명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숨 세 번.
보고, 계산하고, 그다음 실행.
저 선배 루틴."
전서린이 고개를 돌려
은명을 봤다.
이번엔 달려들지 않았다.
제자리에서 손가락을 펴
하나 둘 셋을 세었다.
"숨 세 번.
해볼게요!"
은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각도부터 보자."
전서린이 다시 도식을 펼쳤다.
이번엔 진식이 흔들리지 않았다.
직선으로 치솟던 파장이
중간에서 한 번 꺾이며
정상 범위 안으로 들어왔다.
엘레나가 그 로그를 보며
짧게 중얼거렸다.
"교정 가능한 폭발력.
가장 까다롭고,
가장 빠르게 큰다."
은명은 엘레나를 슬쩍 봤다.
칭찬인데도 온도가 낮다.
감정이 아니라 관측값처럼 말한다.
전서린이 곧장 반응했다.
"칭찬 맞죠?!"
"맞아.
데이터 기준으로는."
"데이터 기준이면
더 좋죠!!!"
제갈린 드론이
상단에서 그 대화를 기록했다.
전서린 시선이 잠깐 드론으로 갔다가
다시 제갈린 얼굴로 내려왔다.
아주 짧게 눈매가 좁아졌다.
제갈린은 그 시선을 받고도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대신 파일 정렬 속도가
미세하게 빨라졌다.
엘레나는 말수는 적었지만
실습 로그를 계속 쌓았다.
무사는 반대편 라인에서
묵묵하게 진법을 반복했다.
첫날인데도 각자 결이 선명했다.
오후 수업이 끝났을 때,
은명 어깨는 묵직했고
머리는 더 바빠졌다.
복도로 나오자
해가 이미 기울고 있었다.
낮의 소란이 창문 유리에 붙어
천천히 식고 있었다.
밤.
기숙사 옥상.
태산이 난간에 기대 서 있었다.
낮의 웃음은 내려놓은 얼굴.
바람이 셔츠 소매를 밀어 올렸다.
손을 내려다봤다.
주먹을 쥐었다 펴고,
다시 쥐었다 펴본다.
금강불괴 따위.
낮에 웃으며 넘겼던 말이
밤에는 자꾸 돌아왔다.
따위라.
……이 주먹이 단단한 건
금강불괴 덕이 맞다.
버티는 것도,
밀어붙이는 것도,
끝에서 견디는 것도.
그럼 그걸 빼면?
남는 게 뭐지.
나는 뭐가 남지.
태산이 천천히 숨을 뱉었다.
난간 밖 도시 불빛이
멀리서 흔들렸다.
하산의 목소리가
기억 속에서 올라왔다.
부서져도 다시 서는 전사가 돼라.
태산이 눈을 감았다 뜨며
낮게 중얼거렸다.
"선배,
부서지기 전에
진짜부터 알아야 할 것 같아요."
"체질 말고,
기술로 서는 주먹.
그걸 찾아야겠어."
태산은 난간에서 몸을 떼고
그 자리에서 짧게 자세를 잡았다.
아주 작은 동작으로
직권 궤적을 그려 본다.
힘을 싣지 않고
연결만 확인하는 연습.
발을 반 칸 밀고,
골반을 잠그고,
어깨를 늦게 푼다.
금강불괴를 의식적으로 빼고
순수 동작만 남기려는 시도.
하지만 궤적이 매끄럽지 않았다.
어딘가에서 힘이 샜다.
몸이 익숙한 길을 찾다가
자꾸 체질 쪽으로 기대려 했다.
태산이 숨을 길게 뱉었다.
……쉽겠냐.
십수 년을 같이 산 몸인데.
그래도 해야지.
한 번 더.
발.
골반.
허리.
어깨.
주먹.
이번엔 조금 나았다.
아주 조금.
그 아주 조금이
오늘 밤 태산을 붙잡았다.
그때 옥상 난간 아래에서
어디선가 라면 냄새가 올라왔다.
기숙사 공용 취사실에서
누군가 물을 올린 모양이었다.
태산은 코끝으로 그 냄새를 맡고
피식 웃었다.
이상하게도
라면 냄새는 늘 현실적이었다.
거창한 고민을
밥 냄새로 끌어내린다.
옥상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태산은 거의 반사처럼 웃었다.
아까 낮에 쓰던 표정을
다시 얼굴 위에 걸쳤다.
은명이 올라왔다.
손에는 편의점 봉투가 들려 있었다.
"또 여기야?"
"밤바람 좋잖아.
가슴이 뻥 뚫려서."
은명이 태산 얼굴을
2초쯤 봤다.
아주 익숙한 표정인데,
오늘은 결이 조금 달랐다.
옛날에도 그랬다.
태산은 고민이 깊을수록
더 웃는다.
은명은 묻지 않았다.
묻는 것보다 정확한 방식이
둘 사이엔 따로 있었다.
봉투를 들어 보였다.
"...라면 끓일까?"
태산 눈이 아주 조금 풀렸다.
"좋지.
그 말은 거절 못 하지."
옥상 한쪽 구석,
휴대용 버너에 물을 올렸다.
물이 끓는 동안
둘은 별말 없이 난간에 섰다.
말이 없어도 어색하지 않았다.
침묵이 끊김이 아니라
휴식인 사이.
은명이 젓가락을 건넸다.
"오늘 신입들 어땠어?"
"맵더라.
첫맛부터."
"홍천무 얘기네."
"응.
그리고 네 쪽은
폭죽이 붙었더라."
은명이 피식 웃었다.
"전서린.
에너지가 규격 외야."
"너한테 딱이네.
널 지치게 할 사람 필요했잖아."
"넌?
널 자극할 사람 왔잖아."
태산이 라면 김 너머로 웃었다.
이번엔 낮보다 조용한 웃음이었다.
"그래서 좋다.
도망갈 이유가 없잖아."
"처음부터 없었어."
라면 김이 밤바람에 흩어졌다.
뜨거운 국물 냄새가
잠깐 옥상을 채웠다.
둘은 나란히 앉아
한참 말없이 먹었다.
젓가락 부딪히는 소리만
작게 오갔다.
은명은 옆얼굴만 봐도
태산 상태를 읽었다.
오늘은 묻지 않는다.
라면이면 충분하다.
태산도 알았다.
은명이 안 묻는 이유를.
그래서 더 편했다.
봉투를 정리하고
둘이 다시 난간으로 가 섰을 때,
기숙사 맞은편 동 하나에
늦은 불빛이 켜져 있었다.
창문 너머 그림자가
반복 동작을 이어갔다.
홍천무.
활빈팔식 기본형.
같은 궤적을
끊임없이 접고 펴고,
다시 접고 폈다.
태산은 그 불빛을 보며
아주 천천히 웃었다.
"역시 그렇지.
낮에 말 던진 놈이
밤에 손을 멈출 리 없지."
은명도 그 창을 봤다.
"질문을 던진 사람은
보통 자기 답부터 만들더라."
"그럼 우리도 해야지.
답 만들기."
은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번 학년도."
말은 짧게 끝났지만
둘 다 난간에서 바로 내려가지 않았다.
창문 불빛 하나를
오래 바라봤다.
홍천무 그림자가
같은 궤적을 반복했다.
보폭도 각도도 거의 일정했다.
벽시계처럼 흔들림이 없었다.
태산이 혀끝으로
짧게 소리를 냈다.
"저 정도면
오늘 잠은 포기했네."
"자기 질문이 생기면
대부분 그렇게 하더라."
"너도 그렇지?"
"응.
질문이 남아 있으면
침대가 불편해."
태산이 작게 웃었다.
"그래서 우리 둘 다
잠이 모자랐구나."
은명도 웃었다.
아주 얇은 웃음이었는데
온도는 따뜻했다.
잠깐 침묵.
바람이 지나갔다.
태산 셔츠 소매가
팔꿈치 쪽에서 한 번 접혔다.
은명이 그 소매를 보다가
태산 얼굴을 다시 봤다.
웃고 있지만
오늘의 웃음은 평소보다 얇다.
가벼운 척하는 표정.
옛날부터 익숙한 신호였다.
태산은 고민이 있으면
더 환하게 웃는다.
그리고 더 먼저 농담을 던진다.
은명은 그 신호를 읽고도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지금 필요한 건 해설이 아니라
옆자리였다.
라면 봉투에서 남은 국물 스프를 꺼내
봉지째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내일 아침 쓰레기 버릴 때
같이 버리려는 습관.
사소한 정리 동작이
둘 사이 공기를 더 편하게 만들었다.
태산이 그걸 보고
낮게 말했다.
"너 그거 알지.
네가 안 물어보는 거,
나한텐 꽤 고맙다는 거."
은명이 시선을 돌리지 않고 답했다.
"묻고 싶을 땐 묻지.
오늘은 아니야."
"왜?"
"네가 말하고 싶어지면
먼저 말할 거라서."
태산이 웃었다.
이번엔 가면이 얇아졌다.
웃음 아래의 피로가
조금 비쳤다가 사라졌다.
"역시 파트너네."
"이제 알았어?"
둘이 동시에 피식 웃었다.
맞은편 창의 그림자가
속도를 한 번 올렸다.
홍천무의 동작이
기본형에서 파생형으로 넘어가며
궤적이 절반 좁아졌다.
은명이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봐.
지금 각도 줄였다.
무리 줄이면서 정밀도 올리는 방식."
태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도 봤어.
저거 혼자 찾은 거면
진짜 빠른 놈이다."
"그리고 너도
아까 옥상에서 그거 했지?"
태산이 잠깐 멈췄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들켰네."
"숨소리가 달랐어.
네가 기술 연습할 때 나는 소리."
태산이 난간을 톡 두드렸다.
"좋다.
저쪽도 답 만들고,
우리도 답 만든다.
공평하네."
은명이 마지막으로
홍천무 불빛을 봤다.
그리고 시선을 태산에게 돌렸다.
"공평하진 않아.
우린 둘이고,
저쪽은 아직 혼자야."
태산 입꼬리가 다시 올라갔다.
이번엔 단순한 장난이 아니었다.
함께 간다는 확신이 실린 웃음.
밤바람이 한 번 크게 불었다.
라면 김의 남은 온기와
기숙사 불빛의 차가운 색이
같은 하늘 아래에서 섞였다.